276화. 합류 ― 지독하군 (2)
자신의 얼굴을 본 거냐 물어 오는 매유검의 질문에 천무진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에게 연민이 들었다.
혹시 벌어질지도 모르는 일에 대비하여 평생을 천지광의 그림자로 살아야만 했던 운명. 물론 그렇다고 하여 그가 저지른 악행을 그냥 눈감아 줄 생각은 없었지만…….
고개를 끄덕이는 천무진의 모습에 여전히 피투성이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매유검이 되물었다.
“……봤다고?”
“그래, 왜 그렇게 장포로 얼굴을 가리고 다니나 했더니 이거 때문이었나.”
“큭, 큭큭큭!”
천무진의 말에 매유검은 허리를 굽히고 웃음을 터트렸다. 광기에 젖은 듯한 그 모습에서는 여러 가지 감정이 묻어 나왔다.
그러던 그가 이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은 치운 채로 매유검이 천무진을 똑바로 마주했다.
자세히 매유검을 보게 된 천무진은 다시 한번 놀람을 금하기 어려웠다.
정말 자신이 아는 천지광과 너무도 흡사한 외모다.
그를 아는 자신조차도 몰랐다면 속았을 정도이거늘, 다른 사람이라면 충분히 동일인이라 여길 게 분명했다.
자신의 얼굴을 드러낸 매유검이 천무진을 향해 입을 열었다.
“보여? 이 얼굴이? 이 모든 게 바로 너 때문이다 천무진!”
매유검은 천무진을 향해 원망 어린 시선을 쏘아 보냈다. 그는 항상 생각했다.
자신이 이렇게 된 건 천무진 때문이라고.
지금 천무진이 서 있는 자리, 저곳이 자신의 자리여야만 했다. 그는 천룡성의 후계자가 되어 밝은 미래를 보장받고 살아가는 천무진을 언제나 증오해 왔다.
자신에게 원망을 쏟아 내는 매유검을 향해 천무진이 입을 열었다.
“아니, 틀렸어. 그건 내 탓이 아니야. 물론 네 탓도 아니지.”
이 끔찍한 일들의 발단.
그건…….
“우리의 잘못은 힘이 없었던 것뿐이지. 이 모든 일의 원흉은 천지광, 바로 그다.”
어찌 보면 두 사람 모두는 피해자였다.
어린 나이에 끌려가 혹독한 삶을 살아야만 했으니까.
천무진의 말은 끝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그 이후 네가 살아온 삶까지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건 아니지.”
자신이 최후의 일인이 되기 위해 천무진을 속였고, 그를 절벽 아래로 떨어트린 매유검이다.
게다가 그 이후에도 매유검은 십천야에 속한 채로 수많은 악행을 저질러 왔다.
그 대가를 치러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스윽.
피투성이의 매유검을 마주한 상태에서 천무진이 천인혼을 들어 올렸다.
순간 천무진은 자신의 눈앞에 있는 매유검의 모습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천지광의 얼굴을 하고 있는 지금이 아닌 아주 옛날 함께 울고 웃었던 어린 시절의 그의 모습으로.
잠시 그런 매유검을 바라보던 천무진이 이내 입을 열었다.
“이만 끝내자. 우리의 지독한 악연을.”
천인혼을 겨눈 천무진을 향해 매유검 또한 자신의 검을 앞으로 내뻗었다.
백아린과의 싸움으로 이미 진을 다 뺀 상태에서 감당해 내기에 천무진은 너무도 강한 상대였다.
잠시 그리 생각하던 매유검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멀쩡했다고 한들 과연 이길 수 있었을까?
아니, 단 몇 번이지만 검을 섞어 보며 느꼈다.
천무진은 자신이 감당해 낼 수 있는 실력자가 아니었다. 자신이 예상했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해져 있었는데…….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는 순간 매유검이 움찔했다.
하나 떠오른 생각이 있었으니까.
매유검이 입을 열었다.
“너 설마…… 천룡의 힘을 완성시킨 거냐?”
천무진의 상황에 대해 자세히는 모르는 매유검이다. 천룡혼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고, 천지광의 진짜 목적도 모른다.
다만 최근 천무진이 천룡성의 마지막 힘을 얻기 위해 폐관에 가까운 수련을 하고 있었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생각보다 훨씬 강해진 채로 나타난 천무진을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든 것이다.
혹시 천룡의 힘을 완성시킨 게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 말이다.
매유검의 질문에 천무진이 답했다.
“맞아.”
“하, 하하하! 운도 더럽게 없군. 하필이면 천룡의 힘을 가진 너와 처음으로 싸우게 된 게 나라니.”
피에 젖은 이빨을 드러내며 웃던 매유검의 표정이 이내 싸늘하게 변했다.
상대가 자신보다 강하다 한들 그게 무슨 상관인가.
‘내가…… 이길 것이다!’
천무진을 죽이고 그가 가진 모든 걸 자신이 가지고야 말 것이다. 그러기 위해 여태까지 이 지옥 같은 삶을 버티며 살아오지 않았던가.
검을 앞으로 뻗은 매유검의 눈빛이 서늘하게 빛났다.
서로를 향해 검을 내뻗은 채 두 사람은 옆으로 조금씩 걸음을 옮겼다.
둘 사이의 공간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언제라도 주변의 모든 것이 찢겨 나갈 것만 같은 일촉즉발의 상태.
먼저 반응을 보인 건 매유검이었다.
부와와와왁!
허공을 찢어발길 듯한 강기가 그의 검에 맺혔다. 동시에 천인혼에도 강기가 피어오르며 언제든 대응할 준비를 끝마쳤다.
자신이 뿜어낸 것임에도 커다란 강기에 짓눌리듯 떨면서도 매유검이 입을 열었다.
“천무진! 네가 지닌 그 모든 걸 내가 가질 것이다!”
주변이 흔들릴 정도의 강기를 뿜어내며 소리치는 그를 향해 천무진이 답했다.
“그럴 일은 없을 거다. 난 질 생각이 없거든.”
자신만만한 그 대답을 듣는 순간 매유검이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순간 주변의 모든 것들이 갈라져 나갔다.
동시에 천무진 또한 자신을 향해 모든 걸 걸고 달려드는 매유검에게 몸을 날렸다.
슈아아아악!
서로를 향해 몸을 날린 두 사람.
상대방을 향해 달려 나가는 천무진과 매유검의 주변이 박살이 나며 커다란 굉음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콰콰콰콰콰쾅!
커다란 강기가 순간적으로 충돌하며 서로의 몸이 겹쳤다가 이내 각자 반대편으로 착지했다.
일순 두 사람의 시간이 멈춘 듯 천천히 흘러갔다.
그리고…….
푸웃!
서로 위치를 바꾼 듯 서 있던 상태에서 갑자기 매유검의 가슴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동시에 쓰러지려는 몸을 그가 서둘러 손에 들린 검을 땅에 박아 넣으며 버텼다.
가슴 깊게 파인 검상.
치명상이었다.
그에 비해 몸을 돌린 천무진의 상태는 깨끗했다.
힘겹게 검으로 몸을 지탱하고 비틀거리던 매유검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압도적인 차이.
천룡의 모든 힘을 얻은 지금의 천무진과 매유검에게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존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유검은 아직까지도 눈에 독기를 품고 있었다.
“나, 나는……지지…… 않는다…….”
천무진이 지닌 그 모든 걸 빼앗아 자신이 가지고 싶었다.
그리고 그 열망은 지금 이 순간도 변하지 않았다.
파앙.
땅에 박힌 검을 빼낸 채 몇 걸음 비틀거리며 걸어가던 매유검이었다. 하지만 이내 그의 시야가 점점 뿌옇게 변하기 시작하더니…….
쿠웅.
몇 걸음 걷지 못하고 그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전생에서는 천무진을 죽였고, 이번 생에서도 어린 시절부터 긴 악연을 이어 오던 매유검이 그렇게 숨을 거둔 것이다.
바닥에 쓰러진 채로 죽음을 맞이한 매유검을 잠시 내려다보던 천무진이 이내 몸을 돌렸다.
뒤편에서는 아직까지 백아린이 수많은 적들과 싸우고 있었다.
천인혼을 고쳐 잡은 천무진이 남아 있는 적들을 향해 달려갔다.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 * *
천무진이 개입한 이후 싸움은 빠르게 정리가 되었다. 애초에 백아린 혼자서도 휩쓸고 있었던 상태에서 천무진이 힘을 보태자 승부는 너무도 쉽게 결정 났다.
쓰러트린 엄청난 숫자의 무인들을 바라보며 백아린은 숨을 내쉬었다.
실로 엄청난 싸움이었다.
그 순간 옆으로 다가온 천무진이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아?”
“그럼요. 아주 멀쩡해요.”
백아린이 웃으며 씩씩하게 대답했지만, 그 말이 곧이곧대로 들리진 않았다. 천무진이 오기 전부터 시작된 긴 싸움으로 인해 적잖은 부상을 입은 상태였으니까.
적들을 모두 쓰러트린 걸 확인한 그녀가 옆에 박아 두었던 대검을 뽑아 등에 걸었다.
백아린이 말했다.
“움직이죠. 부총관도 위험할 거예요.”
자신은 천무진이 도와주러 와서 이런 식으로 위험에서 빠져나왔지만, 한천은 아니다. 그랬기에 그를 위해 서둘러야 한다 말하고 있었는데…….
천무진이 품에서 금창약을 꺼내며 입을 열었다.
“상처부터 치료하지.”
“말했잖아요. 지금 그럴 시간이…….”
“걱정할 필요 없어. 그쪽에도 도와줄 다른 사람이 갔을 테니까.”
천무진의 말에 백아린이 당황하며 물었다.
“다른 사람이요? 누가요?”
“이런 상황에서 내가 믿고 맡길 만한 사람이 누가 있겠어.”
천무진의 그 한마디에 백아린의 머릿속에는 한 명의 사내가 떠올랐다.
그녀가 놀란 듯 입을 열었다.
“단엽이요?”
“맞아, 그 녀석. 당신을 구하기 위해 움직이기 전에 단엽이 도착했다는 적화신루 쪽의 연락을 확인했거든. 그래서 곧장 적화신루를 통해 한천이 위험하니 그쪽을 부탁한다고 해 놨어.”
천무진의 말에 백아린의 굳었던 표정이 슬슬 풀렸다. 물론 정확한 상황이야 눈으로 확인해야 알겠지만 그래도 단엽이 도우러 움직였다면 한천 또한 자신처럼 위기에서 벗어났을 확률이 높았다.
천무진 덕분에 한시름 덜긴 했지만…….
백아린이 그래도 신경이 쓰이는지 입을 열었다.
“그래도 우선은 제 상처보다 부총관의 안위부터 확인하고 싶어요. 혹시 모르니 우선…….”
막 말을 이어 가는 백아린을 바라보던 천무진이 갑자기 그녀의 뒤편을 힐끔 확인했다. 그러고는 이내 다친 백아린의 팔목을 슬며시 잡으며 입을 열었다.
“당신이 움직일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그쪽에서 먼저 온 모양이니까.”
천무진의 말에 백아린이 화들짝 놀라며 뒤편으로 시선을 돌렸고, 그곳에는 두 명의 사내가 다가오고 있었다.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한 단엽, 그리고…… 부상이 가득한 한천까지.
두 사람의 모습을 확인한 백아린이 눈을 크게 치켜떴다.
무사한 한천의 모습을 보자 백아린은 당장이라도 눈물이 떨어져 내릴 것만 같았다.
백아린을 구하기 위해 아픈 몸에도 서둘러 달려왔던 한천은 그녀가 무사하고, 그 옆에 천무진까지 있는 걸 확인하는 순간 딱딱했던 표정이 환하게 변했다.
“대장!”
자신을 부르는 한천을 향해 백아린이 막 달려가려고 하며 입을 열 때였다.
“부총관 몸은…….”
“천무진!”
채 말을 뱉기도 전에 단엽이 갑자기 버럭 소리를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천무진이나 백아린 모두가 왜 그러나 하는 듯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서 있는 그때였다.
번개처럼 달려온 단엽이 허공으로 붕 뜨더니 곧장 천무진의 복부를 향해 주먹을 내리꽂았다.
콰아앙!
단순한 주먹질이었거늘 마치 쇳덩어리끼리 부닥치는 듯한 충돌음이 터져 나왔다. 전혀 방비하지 않고 있었던 탓에 천무진은 팔꿈치로 날아드는 공격을 가까스로 막아 냈다.
갑작스러운 단엽의 행동에 백아린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어 보일 때였다.
주먹을 회수한 단엽이 소리쳤다.
“멍청한 자식! 다 들었다. 한심하게 조종이나 당하고 있다면서? 내 주인이라던 자가 고작 그따위 놈이었냐? 어서 덤벼, 내가 신나게 두들겨 패서 그 썩어 빠진 상태를 고쳐 줄 테니까!”
말과 함께 손을 까닥거리는 단엽의 모습에 백아린이 짧은 한숨과 함께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천무진을 매섭게 노려보던 단엽이 옆에 위치한 백아린을 슬쩍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말리지 마. 이건 내가 정한 거니까.”
“아니야.”
“엉?”
“그런 상태 아니라고.”
“그게 무슨…….”
바로 그때였다.
“어이, 단엽.”
움찔.
자신을 부르는 천무진의 목소리에 단엽은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천무진은 단엽의 공격을 막아 낸 팔꿈치가 아직도 얼얼한지 팔을 가볍게 이리저리 비틀며 다가오고 있었다. 거기다 옆에 있는 백아린은 이마를 짚은 채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 묘한 분위기.
그제야 단엽은 지금 상황을 눈치챌 수 있었다.
단엽이 어색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하, 하하하. 다 나았으면 나았다고 말하지 그랬어. 괜히 오해했잖아.”
말을 할 틈도 주지 않고 주먹부터 휘둘렀던 당사자가 하는 변명치고는 설득력이 없었지만…….
천무진이 주먹을 꽉 움켜쥔 채로 입을 열었다.
“……복귀 인사가 꽤나 거창하네.”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과 함께 다가오는 천무진의 모습에 단엽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었다.
“시, 실수였다니까?”
점점 더 거리를 좁혀 오는 천무진을 향해 단엽이 손사래를 쳐 댔다.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을 백아린과 한천은 못 말리겠다는 눈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그렇게 길다면 긴 몇 달의 시간이 지나…… 네 사람이 다시금 한자리에 모였다.
화려한 단엽의 인사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