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각자의 움직임 ― 눈치하고는 (1)
적화신루의 일을 매듭지은 세 사람은 곧장 거처로 잡고 있는 마교를 향해 움직였다. 대홍련의 련주를 만나기 위해 떠난 단엽을 제외한 셋은 며칠을 부지런히 달린 후에야 마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처음 움직일 때만 해도 짧게 며칠 정도만 자리를 비울 예정이었지만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벌어지며 여정이 꽤나 길어졌고, 그로 인해 귀환은 거의 한 달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긴 여정을 끝마치고 마교로 돌아왔지만, 그렇다고 해서 쉬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새로 알게 된 사실들을 정리해야 했고, 거기다가 조사를 맡겨 놓았던 것들의 결과도 확인해야 했다. 그것들을 처리하기 위해 일행들은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의선과 마의가 머무르고 있는 거처를 향해 움직였다.
천무진이 잠시 쉬는 사이 적화신루 쪽의 정보를 확인하기 위해 움직였던 백아린은 대충 상황을 매듭짓고 다시 이동에 합류했다.
나란히 걸어가던 도중 천무진이 물었다.
"일은 대충 마무리된 건가?"
"네, 아직 총관들을 새로 뽑지는 못했지만 우선 정보망은 차질 없이 움직일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 놨어요."
총관들 중 둘이나 사라진 적화신루다.
당연히 곳곳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고, 그걸 임시로 자리에 앉힌 이들이 처리하기로 결정을 내린 것이다.
한동안 이런 식으로 빈자리를 채우다 조만간 있을 회의를 통해 정식으로 새로운 총관 둘을 선임할 계획이었다.
천무진이 말했다.
"그나저나 비어 버린 자리 중 하나가 이총관인데 당신이 앉지그래."
"별로요."
"왜?"
"지금보다 더 주목받을 거 아니에요."
웃으며 말하는 백아린의 말에 천무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뜩이나 주목을 끄는 그녀다.
이총관의 자리에까지 오르면 지금보다 더욱 많은 이들의 시선이 몰릴 수밖에 없을 게다.
그녀를 바라보며 천무진이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허기야 당신한테 자리가 무슨 의미가 있겠어."
백아린이 적화신루 루주라는 사실을 알기에 던진 한마디에 그녀는 그저 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리고 뒤편에서 빠르게 쫓아오던 한천은 말없이 그런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천무진에게 백아린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 사실을 한천 또한 알고 있었다.
둘 사이가 무척이나 가까워졌다는 건 알았지만…….
‘그래도 루주라는 걸 밝히실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적화신루 루주라는 신분을 그토록 꽁꽁 감춰 오던 백아린이 아니었던가. 그랬던 그녀가 걸릴 위험이 있었던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상대에게 정체를 밝혔다.
그 사실에 대해 재차 생각하고 있는 그때였다.
"부총관, 뭘 그리 멍하니 있어?"
백아린의 말에 한천이 퍼뜩 정신을 차릴 때였다. 옆에 있는 천무진이 장난스럽게 말을 받았다.
"단엽이 없으니 부총관도 영 심심한 모양이군."
"아, 그런 거였어요? 허기야 단엽이 가고 난 다음부터 줄곧 기운이 없던데."
백아린이 맞장구치며 웃고 있자 한천 또한 평소의 유쾌한 얼굴로 받아쳤다.
"무슨 소립니까. 이렇게 쉬지도 못하고 소처럼 일하고 있는 바람에 힘들어 죽으려는 건데요? 하여튼 일벌레 같은 두 분 사이에 껴서 제가 뭔 고생인지 원. 단엽 이 자식도 문젭니다. 하필이면 이럴 때 튀어 가지고 저 혼자 다 떠안게 하고 말입니다."
"하여튼 죽는소리는. 오늘까지만 일하고 내일은 쉬게 해 준다고 했잖아."
"……그 말이 몇 번째인지 아십니까?"
백아린의 말에 한천이 기가 막힌다는 듯 물었다.
평소 한 것들이 있어서인지 백아린이 어색하게 웃다가 이내 옆에 있는 천무진의 옷깃을 잡아끌었다.
"빨리 가죠."
"그러지."
말과 함께 다시금 앞장서서 걸어 나가는 두 사람의 모습에 한천은 뒤에서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허어, 이렇게 지독한 사람들을 보았나."
투덜거리는 한천의 시선이 천천히 백아린에게로 향했다. 나란히 걸어가며 서로를 바라보면서 웃고 있는 두 사람.
백아린의 미소 짓고 있는 얼굴을 바라보던 한천은 이내 자신도 모르게 마찬가지로 입가에 함박웃음을 머금었다.
그가 길게 기지개를 켰다.
그러고는 괜스레 걸음을 늦추며 앞장서서 걸어가는 두 사람을 향해 소리쳤다.
"하암, 피곤하니 조금 천천히 걸어가겠습니다. 두 분이 먼저 가시죠."
그런 그를 향해 고개를 휙 돌린 백아린이 말했다.
"농땡이 필 생각하지 말라고."
말을 끝내고 다시금 걸음을 옮기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한천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여튼 눈치하고는."
그렇게 세 사람이 도착한 의선과 마의가 머물고 있는 거처. 그런데 오늘 그곳엔 마의가 없었다.
뭔가를 연구하고 있던 의선이 찾아온 세 사람을 맞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의선의 인사에 천무진 또한 담담하게 답했다.
뭔가 큰 것을 알아낸 것이 있다면 어떻게든 적화신루를 통해 연락을 넣었을 거라는 건 알고 있다. 그러니 뭔가 크게 알아낸 건 없겠지만, 그래도 꽤나 긴 시간을 떨어져 있었던 탓에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천무진이 물었다.
"해독약의 진행 상황은 어떻습니까?"
큰 기대 없이 던진 질문.
그런데…….
"해독은 아직입니다. 다만…… 긍정적인 결과가 나오고 있다는 말씀 정도는 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그게 정말입니까?"
"예, 아직 확신을 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지만 분명 성과가 있습니다. 어쩌면 조만간 좋은 소식을 전해 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가능성이 있는 듯한 의선의 말에 천무진의 표정이 한결 풀어졌다.
의선에게 의뢰한 몇 가지 사안들.
개중에 가장 큰 건 역시나 흑주염을 해독할 수 있는 약이었다. 그 해약이 완성된다면 마교 교주의 상태를 회복시킬 가능성 또한 존재했다.
천무진이 잘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실로 좋은 소식입니다. 그리고 이번 여정을 통해 제가 몇 가지 더 알아낸 것들이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물어 오는 의선을 향해 천무진은 이번 여정에서 겪었던 일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명확하게 상황을 말해 주기 어려웠기에 흑주염으로 보이는 가루에 당했는데, 평소와는 다르게 그 기운에 자신의 정신이 흐려졌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갔다.
그리고 일전에 이야기해 준 적 있었던 자모충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강조해 이야기했다.
"아무래도 자모충이 가지는 의미가 생각보다 큰 것 같습니다. 그것에 대해서도 조금 더 자세히 알아봐 주셨으면 합니다."
"예, 어차피 자모충에 대해서도 조사를 하고 있었던 터라 어렵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럼 부탁드리죠."
얼추 새로운 부탁까지 끝나 갈 무렵 천무진이 퍼뜩 생각난 것에 대해 의선에게 물었다.
"아, 그런데 혹시 자모충이 사람을 잡아먹기도 합니까?"
"네? 그게 무슨……."
"자모충이 몸 안에 있는 걸로 추측되는 자를 만났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가 갑자기 시신으로 발견됐습니다. 아주 끔찍한 상태로 죽어 있더군요. 장기는 조각조각 나 있었고……."
천무진은 당시 자신이 봤던 적련화의 상태에 대해 설명해 줬다. 그 끔찍했던 장면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지독했었다.
옆에서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한천 또한 놀란 눈빛이었다.
그곳에서 잡은 인물이 죽었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토록 끔찍한 최후를 맞이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모든 이야기가 끝이 나고, 의선은 손으로 턱을 괸 채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잠시 상념에 빠져 있던 의선이 이내 말했다.
"그 말은 곧 몸 안에서 자모충이 그 숙주가 되는 자를 잡아먹었다는 소리로군요."
"적어도 전 그렇게 파악하고 있습니다."
"아시겠지만 자모충에 대한 지식이 제겐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모충이 있는 남만 외지 지역에 따로 알아봐 달라고 의뢰를 넣어 놓은 상황이라 정확한 건 그들에게서 연락을 받아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다만 제가 아는 선에서 자모충에게 그런 특성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의선께서는 자모충의 소행이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렇게 확신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아닐 가능성 또한 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혹시나 자모충이 몸 안에서부터 장기를 파먹으며 그자를 죽인 것이 맞다면…… 아마 보통 자모충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의선의 말을 마저 들으며 천무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대로 아직까지는 다 의심일 뿐, 확신을 할 만한 증거는 없었다.
대충 대화를 매듭짓자 천무진이 의선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럼 소식이 들어오는 대로 연락 주시죠. 저도 뭔가 있으면 또 찾아뵙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포권을 취해 보였다.
그리고 이내 몸을 돌리고 나가는 이들 사이에서 한천이 슬쩍 의선과 시선을 마주쳤다.
모종의 거래를 했던 두 사람이다.
의선은 그날 이후부터 계속해서 한천에 대해 궁금해했다. 그 때문에 나름 손을 써서 그에 대해 알아보고 있었지만…… 한천은 그 어떠한 것도 알아낼 수 없는 사내였다.
한천이 자신을 바라보는 의선을 향해 씩 웃어 보였다.
* * *
해가 서산으로 뉘엿뉘엿 사라져 가는 저녁 시간.
중원 한 곳에 위치한 아름다운 마을 하나가 붉은 석양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시장통. 그리고 그 시장의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길목에 위치한 노점상에 한 명의 노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노점에서 시킨 꼬치를 손에 든 채로 허기를 달래고 있었다.
꼬치와 함께 시킨 싸구려 화주 한 잔을 마시고 있는 노인의 얼굴은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다. 미소를 머금은 채로 싸구려 화주를 기울이고 있는 모습.
하지만 노인에게서 풍기는 분위기 자체가 기품이 있어서인지 그 값싼 화주조차도 무척이나 귀한 술인 듯한 느낌을 주었다.
노인의 정체는 바로 천운백.
천룡성의 진짜 주인이자 천무진의 스승인 그였다. 그가 어딘가에 있는 마을에 모습을 드러낸 채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혼자서 손에 든 꼬치를 먹고 술을 마시며 시간을 보내고 있던 그때였다.
털썩.
뒤편으로 다가온 누군가가 거의 등을 맞대다시피 하고 뒷자리에 착석했다.
죽립을 쓰고 있어 얼굴을 확인할 수 없는 상대.
그런 그를 향해 천운백이 말을 걸었다.
"왔는가."
여전히 죽립을 깊게 눌러쓴 채로 그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찾느라 죽는 줄 알았습니다."
"내가 이 마을에 있겠다 말하지 않았던가."
"마을에 계신다고만 했지 어디에 계신지는 말씀 안 해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얼마나 돌아다니시는지 찾느라 꽤나 애먹었습니다."
"허허, 그랬나?"
너털웃음과 함께 손에 들린 화주를 입가에 가져다 대던 천운백이 퍼뜩 생각난 듯 고개를 슬며시 어깨 너머로 돌리며 물었다.
"한잔하겠나?"
"그럴 여유가 없어서요. 곧바로 보고만 드리고 가려고 합니다."
"그런가? 아쉽군그래. 술 한잔할 여유도 없으니 원."
"그렇게 만든 분이 누군지는 아십니까?"
"아마……나겠지?"
"아시니 다행입니다."
천운백이 상대에게 권하려던 술잔을 자신의 입에 가져다 대는 바로 그때였다. 모습을 드러낸 정체불명의 인물이 곧바로 이곳에 온 이유를 밝혔다.
"십천야가 천 공자를 손에 넣는 것에 실패했습니다."
움찔.
천 공자가 누구를 뜻하는지 천운백은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제자인 천무진이다. 그리고 천운백은 십천야의 존재도, 또 그들이 천무진에게 뭔가를 하려고 한다는 것조차도 알고 있었다.
잠시 멈칫했던 천운백이 이내 술잔을 입에서 떼며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모든 것이 빠르게 움직이는군."
"계획이 어그러졌으니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선택은 결국 ‘그것’이 아닐까요?"
"아마도."
말과 함께 천운백은 손에 들린 꼬치를 입에 넣고 우적거렸다.
말없이 손에 들린 꼬치를 먹고 있는 천운백을 향해 죽립의 상대가 물었다.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흐음, 글쎄."
천운백이 천천히 하늘을 올려다봤다.
붉게 물들어 가는 하늘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하늘을 올려다보던 천운백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슬슬…… 녀석을 만나러 가야겠구나."
뜻 모를 의미심장한 한마디와 함께 천운백이 손에 들린 화주를 들이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