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믿음 ― 믿어 (2)
천무진이 한참 적화신루의 일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그때.
십천야의 본거지는 날아든 하나의 연락으로 인해 들끓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지금쯤 그들의 손에 들어왔어야 하는 건 천무진을 잡았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돌아온 건 적련화의 실종 소식이었다.
이 믿을 수 없는 사실을 전달받은 십천야의 수장인 그의 심기는 무척이나 불편했다.
현재 그의 거처에 함께 자리하고 있는 건 두 명이었다.
적련화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가지고 온 매유검과, 최근 이곳 거점에서 지내며 자잘한 일들을 매듭짓고 있던 주란이었다.
휘장 속의 어르신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방금 전 들은 소식에 대해 되물었다.
"……적련화가 잡혀갔다고?"
"예, 어르신."
대답을 하는 매유검의 목소리가 떨려 왔다.
긴 장포를 눌러 쓴 그는 이번 적련화의 일에 무척이나 분노한 상태였다. 오랜 시간 지옥과도 같은 곳에 있다 적련화와 함께 막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매유검이다.
이번에 적련화가 천무진을 데리고 온 이후부터 그를 조종해 십천야 내에서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는 계획을 세웠던 그다.
헌데 그 계획이 완전히 박살이 나 버렸다.
어디 그뿐이랴.
적련화까지 사라져 버렸으니 그 복수심 또한 클 수밖에 없었다.
매유검의 대답을 끝으로 내부는 고요했다.
세 명이 자리하고 있었지만,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주란은 낮게 가라앉은 이 분위기에 숨조차 쉬기 어려웠다.
‘하필이면 소식이 들어올 때 이 자리에 있다가…….’
스스로를 탓하고 있는 그때 휘장 안쪽에서 나지막한 소리가 들려왔다.
"후우."
깊게 내쉬는 한숨 소리.
하지만 그것은 지금 그의 심정을 설명해 주는 것과도 같았다.
한숨이 내뱉어지고 다시금 조용해진 그곳에 갑자기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멀리에서부터 한 명의 사내가 서둘러 달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십천야의 한 명인 반조였다.
그가 들어오자마자 빠르게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예를 갖췄다.
"어르신을 뵙습니다."
반조의 인사에도 휘장 안쪽의 인물은 일언반구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침묵만으로 일관하던 그가 침묵을 깨며 질문을 던졌다.
"이해가 가지 않는군. 어떻게 실패할 수가 있는 거지? 천무진에게 우리가 준비한 패가 통하지 않은 건가?"
어르신의 질문에 매유검이 답했다.
"아닙니다. 천무진을 손에 넣었다는 보고도 전달받았고, 또 마지막까지 함께 움직였던 생존자의 보고를 들어 보면 배에 태워서 출항까지 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도대체 왜!"
더는 참지 못하겠는지 최대한 화를 꾹꾹 내리누르던 그가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오래전부터 준비해 온 계획이었다.
천무진을 조종하기 위해 십수 년이 넘게 적련화를 키워 왔고, 모든 준비가 끝이 났다. 거기다가 매유검의 말이 맞다면 계획대로 천무진을 손에 넣는 것까지 성공했었단다.
그런데 대체 왜 천무진과 관련된 것이 아닌 적련화의 실종 소식이 돌아오게 되었단 말인가.
잔뜩 화가 난 그를 향해 매유검이 답했다.
"생존자의 보고에 따르면 천무진을 태우고 출항을 한 배가 막 항구를 벗어날 무렵 대검을 든 여인 하나가 나타나 모든 걸 망쳐 놨다고 합니다. 그 여자가 그곳에 있던 아군들을 모조리 쓸어 버렸다더군요."
대검을 든 여인이라는 말에 무릎을 꿇고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반조와 주란은 동시에 움찔했다.
굳이 조사를 하지 않아도 이야기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이미 짐작이 가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건 어르신 또한 마찬가지였다.
"……또 적화신루의 그 계집이로군."
매번 상황을 번거롭게 만들어 온 것이 사실이지만 이번 일은 생각보다 훨씬 더 큰 타격이었다.
천무진을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하는 상황에서 이를 막아 버린 탓이다.
그때 부복하고 있던 반조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이미 적련화는 죽었겠군요."
"시간이 이리 지났으니 그리되었겠지."
어르신이 착잡한 목소리로 답했다.
죽음 소식이 들어온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마치 적련화가 죽은 걸 알고 있다는 듯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사실이었다.
이들은 이미 적련화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싸움에 패했고, 끌려갔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생존 여부를 확인한 것이나 진배없었다.
그 이유는 바로 적련화의 몸 안에 살고 있는 하나의 벌레 때문이다.
천무진의 예상대로 적련화의 몸 안에는 하나의 벌레가 살고 있었다.
바로 자모충.
물론 그 벌레는 평범한 자모충이 아니었다.
그 특별한 자모충은 주기적으로 약을 복용하지 않으면 결국 몸 안의 장기부터 파먹기 시작한다. 약을 복용해야 할 시간이 한참은 지났으니…… 굳이 시신을 보지 않아도 이미 죽고도 남았다는 사실을 알 수밖에 없었다.
적련화의 죽음.
그것은 오랫동안 준비해 온 계획이 어그러졌음을 말하고 있었다.
깊어지는 고민, 그리고 길어지는 침묵.
이 각이 훌쩍 넘는 시간이 흘렀거늘 어르신은 아무런 말도 없었고, 나머지 세 사람은 계속해서 무릎을 꿇은 채로 명령을 기다려야만 했다.
결국 대답을 기다리던 반조가 조심스레 물었다.
"천무진에 대해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자모충과 섭혼술을 이용해 천무진을 손에 넣으려 했던 계획이 실패했다.
또 다시금 비슷한 수를 쓸 수는 있었지만, 문제는 지금으로선 적련화처럼 능수능란하게 천무진을 조종할 수 있는 인물이 없다는 거다.
애초에 적련화는 십수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천무진 하나를 조종하는 데 목적을 두고 키워진 자였다.
그만한 노력이 필요한 일이거늘 쉽게 다른 이로 대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천무진을 두 손 놓고 보고 있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지금 그가 벌이고 있는 일들이 점점 십천야의 목을 옥죄어 오고 있었으니까. 더욱 깊게 파고들기 전에 어떻게든 자신들도 움직여야만 했다.
어떻게 할 거냐는 반조의 질문에 잠시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할 정도로 어르신이라는 존재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결정을 내려 버리면 그로 인해 모든 것들이 변하게 될 테니까.
결국 입을 연 그가 어렵사리 답했다.
"……생각을 할 시간이 필요하다."
바로 이 자리에서 답을 내릴 정도로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휘장 속에서 몸을 일으킨 그가 가볍게 손을 저으며 말을 이었다.
"혼자 있어야겠구나. 모두 나가 보거라."
어르신의 명령에 세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시에 포권을 취한 그들은 곧바로 몸을 돌려 어르신의 거처를 빠져나왔다. 그렇게 일정 거리를 벗어났을 무렵 침묵하고 있던 주란이 짧게 숨을 토해 냈다.
"하, 부담스러워 죽는 줄 알았네."
안에서 눈치를 보는 내내 혹여나 불똥이 튈까 염려했던 주란이다.
백아린이 활약을 할 때마다 주란은 계속 어르신의 눈치를 살펴야만 했다. 그녀를 죽이는 임무를 받았던 것이 주란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때는 백아린의 실력을 제대로 알지 못했고, 그로 인해 어쩔 수 없는 실패를 하게 됐다. 허나 그렇다고 한들 눈치가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주란은 이미 천무진의 손에 죽은 귀문곡을 이끌었던 상무기를 떠올렸다.
‘망할 새끼, 다 그놈의 엉터리 정보 때문이야.’
백아린이 그렇게 강할 줄 알았더라면 최소한 반조라도 데리고 함께 움직였을 게다. 그렇게 됐다면 지금 입었을 이 모든 피해들은 없었을 테고, 자신 또한 이렇게 주눅 들 이유가 없었다.
죽은 상무기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 차 있던 그때였다.
쾅!
앞장서서 걸어가던 매유검이 갑작스럽게 옆에 장식되어 있던 커다란 바위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순간 커다란 소리와 함께 수십 개의 균열이 생겨났고, 이윽고 슬며시 밀려오는 바람과 함께 바위는 천천히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예상치 못한 매유검의 행동에 상념에 잠겨 있던 주란은 깜짝 놀랐고, 이내 짜증 난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이씨, 왜 지랄이야. 사람 놀라게."
"……지랄?"
말과 함께 매유검이 슬쩍 몸을 돌렸다. 긴 장포 속에서 빛나는 그의 눈동자를 보는 순간 주란은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같은 십천야라고 해도 매유검과 적련화는 주란에게 무척이나 껄끄러운 상대들이었다.
속내를 알 수 없는 이들.
허나 주란은 곧바로 당황한 표정을 감추며 당당하게 말했다.
"왜? 내가 못할 말 했어? 너만 짜증 나는 상황이 아니잖아?"
주란의 말에 매유검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그가 주란을 향해 성큼 걸음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십천야라고 해서 너와 내가 같은 급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말과 함께 들어 올린 그의 손바닥 위로 나선 모양의 검환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부부우우웅!
낮은 울림, 허나 주변의 모든 것들이 빠르게 빨려 들어갔다. 주란은 움찔하면서도 이를 악물었다.
가뜩이나 요즘 들어 십천야 내에서 자신의 위치가 낮아지고 있다 느끼던 터다.
그런데 이렇게 대놓고 걸어오는 싸움마저도 피한다면 얼마나 우습게 보이겠는가.
자신의 상대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주란이 막 검을 뽑아 들려고 할 때였다.
스윽.
두 사람 사이로 반조가 걸어 들어왔다.
반조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두 사람 다 그만하지."
반조의 등장에 애써 검에 손을 가져다 댔던 주란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말해 싸우고 싶지 않았으니까.
자신의 실력으로 매유검을 이긴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허나 반조가 이렇게 나서 준 덕분에 최소한의 자존심은 지키고 싸움을 멈추게 되었으니, 주란의 입장에서는 최고의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주란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과 달리 매유검은 표정을 구겼다.
"또 사람 짜증 나게 하는군, 반조."
"다른 곳도 아닌 이곳 어르신의 거처 앞에서 싸울 생각이냐? 뭐, 정 그러겠다면 말리지는 않겠는데 그 뒷감당은 할 수 있겠어?"
여유 가득한 반조의 말에 매유검은 움찔했다.
그러고는 이내 뿌드득 이를 갈며 들어 올렸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매유검이 반조의 등 뒤에 자리하고 있는 주란을 향해 짧게 말했다.
"운 좋은 줄 알아라, 주란."
"우, 웃기……."
뭔가 말대답을 하려는 찰나 반조가 등 뒤로 가볍게 손을 움직이며 그런 주란의 행동을 저지시켰다. 그 손짓에 담긴 의미를 알기에 그녀는 힘겹게 내뱉던 말을 참아 냈다.
두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려던 싸움을 멈추게 한 반조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했다.
"대체 언제까지 그렇게 주변에 시비를 걸고 다닐 거야? 우린 같은 편이라고."
"우리? 푸하하하!"
우리라는 말에 매유검이 갑자기 배를 움켜쥔 채로 웃음을 터트렸다.
못 참겠다는 듯 계속 웃고 있는 그를 바라보는 반조와 주란의 표정이 점점 굳어 갔다. 그리고 이내 웃음을 멈춘 매유검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난 한 번도 우리가 같은 편이라고 생각한 적 없었는데."
말을 마친 매유검이 반조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지척까지 다가선 그가 반조와 시선을 맞춘 채로 다시금 입을 열었다.
"나와 적련화는 너희 같은 놈들과는 달랐어. 온실 속에서 자란 너희 화초 놈들이 뭘 안다고 우리라는 둥, 같은 편이라는 둥 지껄이는 것이냐. 너희는 너희, 그리고 우리는…… 우리다."
"……또 그 소리냐?"
매유검은 적련화를 제외한 다른 십천야와는 거의 담을 쌓고 지냈다. 자신들은 나머지 십천야들과 다르다는 생각이 강하게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반조와 시선을 맞춘 채로 매유검이 말했다.
"사실 난 왜 어르신께서 우리를 십천야라 부르시는지 모르겠다. 솔직히 말해 말이 십천야지 그중에 쓸 만한 놈은 절반도 안 되잖아?"
"어르신의 뜻이다. 네가 왈가왈부할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
퉁명스레 답하는 반조를 향해 매유검이 입을 열었다.
"사실 천무진 그놈한테 조금은 고마워하고 있어. 십천야의 이름을 부끄럽게 만드는 쓸모없는 몇 놈을 치워 줬으니 말이야."
"……어이."
"그래서 난 천무진이 조금 더 힘내 줬으면 좋겠는데. 십천야 중에 아직 쓸모없는 놈들이 몇 남아 있어서."
"매유검!"
멈추라는 듯한 반응에도 매유검이 말을 이어 나가자 반조가 결국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그런 그를 향해 매유검이 어쩔 거냐는 듯 마주한 채로 살기를 쏘아 보냈다.
장포 사이에서 빛나는 살기 가득한 눈빛.
그 눈빛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뒤편에 있는 주란은 오금이 저렸거늘, 막상 그걸 정면으로 맞서고 있는 반조는 전혀 흔들림이 없어 보였다.
그렇게 서로를 노려보던 상황에서 먼저 살기를 거둔 건 매유검이었다.
그가 몸을 돌리며 말했다.
"운 좋은 줄 알라고. 그 쓸모 있는 몇 안 되는 놈들 중 하나가 너이기에 봐주는 거니까."
말을 끝낸 매유검은 그대로 자신이 갈 길을 향해 걸어 나갔다.
그렇게 걸음을 옮긴 매유검이 둘의 시야에서 사라졌을 무렵.
그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고 있던 주란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미친 자식. 언젠가 사고 한 번 칠 거 같은데."
그런 그녀의 말에 반조가 걱정스레 입을 열었다.
"……그러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