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같은 목적지 ― 맘에 안 든다니까 (1)
천무진은 자신의 거처에서 혼자 생각에 잠겨 있었다. 오늘 백아린과의 대화를 통해 알게 된 새로운 사실에 대해서도 제법 생각을 가졌지만, 무엇보다 지금 중요한 건 앞으로의 방향이었다.
전생의 기억을 토대로 의심할 수 있는 네 가지의 방향.
그중에 무엇을 택해야 할지 고민해 결정을 내리는 게 지금은 가장 급선무였다.
기억하는 네 가지 중 무엇을 건드려 봐야 하는지 고민이 깊어지는 그때 갑작스러운 발걸음 소리가 상념에 빠져 있던 천무진을 현실로 돌아오게끔 만들었다.
그가 고개를 돌려 시선을 문으로 옮겼을 때였다.
벌컥.
거칠게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낸 건 바로 단엽이었다.
천무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술 마시러 갔다더니 갑자기 무슨 일이야?"
"주인, 급하게 할 이야기가 하나 있는데."
"뭔데?"
"잠시 자리 좀 비워야 할 것 같아서. 오래는 아니고 길면 한 달 정도?"
"갑자기 왜?"
"별건 아니고 개인적인 용무가 좀 있어서 섬서성에 다녀오려고."
말을 내뱉은 단엽은 자신도 모르게 상처가 있는 오른쪽 턱 부분을 손등으로 스윽 문질렀다.
눈동자에서부터 느껴지는 진득한 살기를 눈치챈 천무진이 물었다.
"무슨 일인데?"
"죽여야 할 놈이 하나 있거든."
아무렇지 않게 말을 내뱉었지만 단엽의 말투는 결코 가벼워 보이지 않았다.
천무진이 뭔가 말을 이으려고 하는 그때 단엽의 뒤편으로 다른 인기척과 함께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천이었다.
그가 헐레벌떡 다가와서는 말했다.
"그새를 못 참고 혼자 왔네."
"내 수하들은?"
"그 객잔에서 잠시 대기하라고 했지. 갑자기 말도 없이 달려 나가면 어떻게 해."
투덜거리는 한천의 모습을 보며 천무진은 둘 사이의 말투가 편하게 반말로 바뀌었다는 걸 곧바로 알아차렸다.
그리고 한천이 뭔가를 더 알고 있다는 것도.
단엽이 곧바로 말했다.
"우선 먼저 말해야 할 것 같아서 왔고, 마을에 부하들을 대기시켜 놔서 다시 좀 다녀올게. 자세한 이야기는 그때 하자고, 주인."
자기가 할 말만 마친 단엽은 곧바로 쌩하니 모습을 감춰 버렸다.
그런 단엽의 모습에 천무진이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저렇게 정신없는 걸 보아하니 보통 일은 아닌가 보군."
"그러게 말입니다. 수하들을 그냥 내팽개치고 가더라고요. 얼마나 당황스럽던지 원."
혀를 내두르는 한천을 향해 천무진이 물었다.
"무슨 일 때문에 저러는지 알아? 죽여야 할 상대가 있다던데."
"아……."
천무진의 질문에 잠시 멈칫했지만 한천은 이내 단엽이 감추지 않을 거라는 걸 알기에 솔직히 말했다.
"객잔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갑자기 대홍련의 무인 두 명이 오더라고요. 그러고는 얼굴에 상처를 낸 자를 찾았다고 하더군요."
"그래? 그럼 죽여야 한다는 그자가 얼굴에 상처를 낸 인물을 말하는 모양이군."
"그런 것 같긴 한데…… 보통 원한이 아닌 듯싶던데요. 화가 잔뜩 난 것이 사고를 치는 게 아닐까 걱정이 좀 됩니다."
섬뜩한 표정을 지어 보이던 단엽의 얼굴을 떠올리며 한천이 말했다.
사고를 치는 게 아닐지 걱정된다는 한천의 말에 천무진은 팔짱을 낀 채로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물론 사고를 치는 것도 걱정이지만 그보다 크게 신경 쓰이는 건 아무래도 최근 백아린에게 있었던 일 때문이다.
자신이 찾는 그들이 대놓고 백아린을 노렸던 사건.
그리고 일전에는 단엽을 노리기도 했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 혼자 멀리 떨어진 어딘가로 보내는 것이 그리 탐탁지 않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만약 이 사실을 안다면 십천야라 불리는 그들이 또 다시금 움직일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어서다.
천무진이 입을 열었다.
"섬서성으로 가야 한다고 했던가?"
"네, 그렇게 들었습니다."
"흠……."
말끝을 흐리며 천무진은 정해야 할 목적지인 네 곳을 떠올렸다.
어디가 가장 나을지 확신할 수 없는 상태.
그 와중에 단엽에게 일이 생겼고 그는 섬서성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섬서성에는…… 천무진이 선택을 내리지 못해 고민하고 있는 네 가지 중 하나인 검산파가 자리하고 있다.
순간 네 곳 중 어디를 선택해야 하나 고민하던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천무진이 팔짱을 풀며 피식 웃었다.
그중에 어디로 가야 할지를 막 정했기 때문이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다소 어이가 없긴 했지만……
"뭐, 종종 이런 것도 나쁘진 않겠지."
뜻 모를 말을 내뱉는 천무진을 한천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 * *
단엽은 아침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길면 한 달 정도가 될 수 있는 여정, 간단한 생필품 정도를 챙겨 봇짐에 싼 그가 자신의 방을 박차고 나섰다.
그렇게 방을 나선 그의 눈에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는 세 사람의 모습이 들어왔다.
천무진과 백아린, 한천이 단엽의 방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막 바깥으로 나선 단엽은 그 세 사람을 보고는 쑥스럽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거참, 뭘 이렇게 기다리고 있기까지 했대.’
한동안 자리를 비울 자신을 배웅 나온 것이라 여긴 그가 괜스레 툴툴거렸다.
"남사스럽게 인사는 무슨. 금방 돌아올 테니까 그동안 잘들 지내고 있으라고."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단엽을 보며 표정을 찡그린 백아린이 입을 열었다.
"뭔 소리야. 무슨 인사?"
"내가 섬서성으로 간다고 지금 이렇게들 모여 있는 거 아냐. 애도 아니고 굳이 이렇게까지 안 해 줘도 된다 이거지. 그 마음들이야 알겠는데……."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까지 말을 하는 단엽을 바라보는 세 사람의 얼굴엔 기가 막힌다는 표정이 피어올라 있었다.
단엽이 뭣도 모르고 말을 이어 가려던 그 찰나 천무진이 말했다.
"배웅 나온 게 아니라, 우리도 같이 가는 거야."
"엥? 그게 뭔 소리야?"
단엽이 되물었다.
이번 일정은 천무진과는 전혀 무관하게 개인적인 용무를 보기 위해 정해졌다. 그런데 이 일정에 세 사람이 함께한다고 하니 당연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를 향해 천무진이 말했다.
"말 그대로야. 우리도 같이 움직일 계획이야."
"왜? 나 때문에?"
"안 그래도 섬서성에 가야 할 일이 있었거든. 뭐 목적지 여러 곳들 중에서 고민하다가 네가 섬서로 간다고 하니 겸사겸사 그쪽으로 선택을 했지."
담담하게 말하는 천무진의 옆에서 백아린이 기가 찬다는 듯이 끼어들었다.
"그러게요. 설마 이런 식으로 다음 행선지를 정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지만요."
허나 백아린 또한 다른 곳으로 가자는 뜻을 피력할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그 네 곳 중에 어디로 가는 것이 가장 좋을지 판단할 수가 없었으니까.
그리고 천무진의 의중대로 십천야에게 단엽이 홀로 노출되는 것도 그리 좋지 않았다.
그런 여러 가지 정황상 지금 천무진의 선택은 가장 옳다고 볼 수 있었다.
말을 마친 백아린은 곧장 몸을 돌려 뒤편에 준비되어 있는 마차를 향해 다가갔고, 그녀의 옆에는 어느덧 천무진이 따라붙어 있었다.
순식간에 자신에게서 관심을 끊고 멀어지는 두 사람을 바라보던 단엽이 헛웃음을 흘렸다.
"허어, 이거야 원."
자신을 위해 모인 이들을 보며 눈곱만큼이라도 감동했던 것이 억울할 지경이었다.
기가 차다는 듯 서 있는 그를 향해 한천이 말했다.
"뭐해? 빨리 가자고. 늦으면 두고 갈지도 모르니까."
"뭐? 날 두고 간다고?"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는 듯 따져 물었지만, 한천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곧바로 마차를 향해 움직였다.
모두가 사라진 곳에 혼자 남은 단엽이 투덜거렸다.
"쳇, 하여튼 다 맘에 안 든다니까."
말을 그리 하면서도 단엽은 터덜터덜 마차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네 사람이 탄 마차는 빠르게 성도를 벗어나 곧장 섬서성이 있는 북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자리한 단엽이 입을 열었다.
"주인 일정은 어떻게 되는 거야?"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그리 길게 끌 생각은 없어."
"그럼 나랑 비슷하겠네. 근데 주인은 어디로 가는데?"
같은 섬서성이 목적지이긴 하지만 중원은 넓다.
섬서성의 크기 또한 보통이 아니었기에 목적지가 떨어져 있다면 금방 헤어져서 움직여야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천무진이 답했다.
"검산파에 갈 생각이야."
"거기는 왜?"
"확인할 게 하나 있어서. 그러는 네 목적지는 어딘데."
"나야……."
말을 하던 단엽은 잠시 말꼬리를 흐렸다.
섬서성이란 목적지가 있긴 했지만 아직 정확한 지점이 나온 건 아니었다. 자신이 만나려고 하는 그자가 어디로 향하게 될지는 계속 지켜봐야 했으니까.
그나마 다행인 건 우선적으로 일차 목적지가 화산(華山)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화산은 검산파가 있는 여산(驪山)과 완전히 같은 방향에 위치한 곳이었다.
그 말은 곧 섬서성에 들어서고도 꽤나 오랜 시간을 동행하게 될 거라는 의미였다.
잠시 고민하던 단엽이 이내 말했다.
"아직까지 정확한 건 아닌데 화산이 아닐까 싶어."
"설마 그 죽여야 할 상대가 화산파는 아니지? 제발 그 말만은 참아 줘라."
일차 목적지가 화산이라는 말에 한천이 식겁해서 말했다. 화산파의 인물을 죽인다면 그건 간단히 끝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한천을 향해 단엽이 답했다.
"걱정 말라고. 화산파 인물은 아니니까."
"휴, 그건 듣던 중……."
"뭐 화산파와 싸워야 할 수는 있지만 말이야. 어때? 재밌겠지?"
듣던 중 다행이라고 말을 내뱉으려던 한천의 목소리는 이어지는 단엽의 말에 거짓말처럼 사그라졌다.
참으로 심각한 문제를 재미있지 않겠냐며 들뜬 얼굴로 말하는 단엽을 향해 한천이 혀를 내둘렀다.
단엽과 한천이 대화를 주고받는 걸 가만히 바라보던 백아린이 뭔가를 깨달은 듯 말했다.
"그런데 부총관이 갑자기 말을 놨네?"
"아, 어제부터 그러기로 했습니다, 대장."
"웬일이래."
평상시 한천의 성격을 알기에 백아린은 의외라는 듯이 그를 바라봤다.
같은 적화신루의 동료들에게는 말을 놨지만, 그 외의 의뢰자나 여타 인물들에게는 깍듯하게 존대를 하는 한천이다.
그런 그가 대홍련의 부련주에게 말을 놓은 모습이 무척이나 낯설었다.
그 순간 단엽이 옆에 있는 한천의 어깨에 손을 두르며 말했다.
"어제 술을 마시면서 직설적으로 말했지. 말 놓으라고. 그러니까 이 녀석도 흔쾌히 그러겠다고 하던데?"
"흔쾌히까지는 아니고."
씩 웃으며 마주하는 한천을 보며 백아린이 갑자기 장난스럽게 입을 열었다.
"잘됐네. 그럼 친해진 기념으로 화산파에도 같이 가는 건 어때?"
백아린의 그 말에 한천이 서둘러 단엽의 손을 떼어 내고는 서둘러 말했다.
"어휴, 대장 그 무슨 끔찍한 소리십니까. 사실 보시는 것만큼 친하진 않습니다."
"그래? 옆에 사람은 그렇게 생각 안 하는 거 같은데?"
"킥킥."
백아린과 한천의 모습에 단엽이 웃음을 흘렸다.
이내 단엽이 두 사람의 농담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러고는 화산파에 꼭 같이 가자며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한천이 그런 단엽의 제안에 학을 떼고 싫어하며 소란을 떨던 그때였다.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는 천무진을 향해 백아린이 말을 걸었다.
"아 참, 시키신 대로 무림맹에는 저희가 움직이는 것에 대해 아직 연락을 넣지 않았어요. 계획대로라면 한 열흘 정도 후에나 그쪽 귀에 들어갈 거예요."
천무진은 일부러 자신들이 검산파가 있는 섬서성으로 간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무림맹의 맹주 추자후나 총군사인 위지겸과 주기적인 연락을 취하며 여러 가지 일들을 해 오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처럼 정한 건 역시나 무림맹 내부에 있을 간자를 대비하기 위함이다.
최대한 믿을 만한 이들을 통해 일을 진행한다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전하다 확신할 순 없었다.
그랬기에 자신들의 움직임에 대해 적들이 알아차린다고 해도 최대한 늦게 파악할 수 있도록 일부러 그 두 사람에게도 연락을 취하지 않고 움직인 것이다.
백아린의 말에 천무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갑작스레 정해진 일정인데 고생했어."
"고생은요, 무슨.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닌데요."
말을 마친 백아린은 잠시 창 바깥을 응시했다.
빠르게 바뀌어 가는 주변 풍경들.
그녀가 입을 열었다.
"검산파에서 뭔가를 찾을 수 있을까요?"
"장담하긴 어렵지. 증거가 있어서 움직이는 건 아니니까."
"그렇긴 하죠. 그래도……."
말을 하던 백아린이 고개를 돌려 천무진을 바라봤다. 그런 그녀의 시선을 천무진 또한 마주했을 때였다.
백아린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뭐라도 찾아내자고요. 반드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