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홍화루 ― 지금 당장 (2)
성도의 한편에 위치하고 있는 다리 아래는 거지들의 거처였다.
마을과는 다소 떨어져 있는 조용한 곳으로 그곳에는 이십여 명에 달하는 거지들이 지내고 있었다.
평범해 보이는 거지 패.
하지만 이곳의 왕초 담구(譚九)는 개방의 방도였다.
사십 대 중반의 다소 후덕한 인상의 사내로 무공은 그리 빼어나지 않았다.
아직 해가 뜨기까지 한참은 남은 새벽. 당연히 그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드르렁.
코를 골면서까지 숙면에 빠져 있던 담구는 누군가의 손길에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쯤 잠이 덜 깬 얼굴로 자신을 깨운 상대를 확인한 담구가 확 표정을 구겼다.
열다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년으로 이곳 패거리의 막내였다. 담구가 불만스레 소리쳤다.
"이놈아! 왜 벌써 깨우고 지랄이야. 해가 중천에 떠 줬을 때야 일어나 주는 게 거지들의 기본인 거 모르냐?"
버럭 소리를 내지르는 담구의 모습에 소년이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왕초가 깨워 달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잠도 못 자고 기다렸다가 깨워 준 건데 왜 그럽니까."
"내가 이런 시간에 왜 깨워 달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며 소리를 내지르려던 담구가 뭔가를 떠올렸는지 슬그머니 입을 닫았다. 그러고는 자신을 향한 거지 소년의 시선에 어색한 듯 헛기침을 토해 댔다.
"흠흠, 내가 그랬지 참."
며칠은 감지 않아 새 둥지처럼 엉망인 머리를 벅벅 긁으며 담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그머니 나가려는 그때까지 소년이 자신을 계속 바라보고 있자 담구는 괜히 소리쳤다.
"잠결에 헛갈릴 수도 있지! 어서 잠이나 쳐 자!"
버럭 소리를 내지른 담구는 재빨리 자신의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는 아직도 잠이 덜 깼는지 길게 하품을 하며 중얼거렸다.
"망할, 왜 이런 시간에 보자고 해서 사람 힘들게 하고 난리야."
배를 벅벅 긁으며 투덜거리던 담구는 그리 멀지 않은 약속 장소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한참은 자고 있어야 할 시간에 그가 이렇게 움직이고 있는 건 급히 온 하나의 연락 때문이었다.
개방 방주 장량에게 서찰을 건네야 했고, 그 연결책의 역할을 맡은 것이 바로 이 담구였다. 그랬기에 이런 이른 시간에 억지로 잠에서 깨어 움직여야만 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그렇게 약 반각가량을 갔을 무렵 점점 목적지가 눈에 들어왔고, 그곳에는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는 한 명의 여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백아린이었다.
투덜거리며 이곳까지 왔던 담구는 상대를 보자마자 절로 잠이 확 달아나 버렸다.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저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무림맹에서 정체를 드러낸 이후부터 백아린에 대한 소문이 어느 정도 퍼지고 있었는데, 그중에 가장 화젯거리는 역시나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였다.
보고도 믿기 어려울 정도의 미모라는 말은 들었지만, 실제로 보니 상상 그 이상이었다.
담구는 헛기침을 하며 조심스레 다가갔다.
거리를 좁힌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흠흠, 적화신루 사총관이시오?"
"네, 생각보다 좀 늦으셨네요."
"아, 그것이 좀 바쁜 일이……."
"여기요."
백아린이 품에 지니고 있던 서찰을 꺼내어 내밀었다. 담구가 얼결에 서찰을 받아 들자 그녀가 말을 이었다.
"루주님께서 방주님께 보내시는 서찰이에요. 곧바로 전해 주세요. 그리고 조만간 약속 잡고 서로 조율하면 될 것 같다고도 말씀드리고요."
"알겠소, 그리하겠소이다."
"혹시 시간이 좀 걸리나요?"
장량은 현재 평소처럼 모습을 감췄고, 그와 연락을 취하기 위해서 개방을 통해 서찰을 보내는 상황이었다.
백아린의 질문에 담구가 잠시 생각하다가 이내 짧게 고개를 저었다.
"당장엔 나도 알 수가 없소이다. 그렇지만 아마도 사천에 계시긴 할 터이니 곧 연락을 드릴 수 있을 것이오."
"알겠어요. 그러면 연락 기다리죠."
말을 마친 백아린은 곧장 몸을 돌렸다.
어차피 오늘 이곳에서 그녀가 할 일은 서찰을 전하는 것이 전부이기도 했고, 거처에서 나머지 일행들이 같이 식사를 하기 위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대화가 끝나기 무섭게 성큼 걸어가는 백아린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담구가 아쉽다는 듯 막 몸을 돌렸을 때였다.
"……어?"
시야에 순간 비치고 사라진 무언가.
그것은 바로…… 비수였다.
그리고 그걸 깨닫는 순간 담구는 직감했다.
자신의 목숨이 곧 사라질 것이라는 걸. 그리고 날아든 비수가 정확하게 그의 명치에 닿는 그 순간 담구는 눈을 질끈 감았다.
피하기에는 너무 늦었고, 설령 미리 알았다 해도 피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그런데…….
‘……어라?’
분명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이 밀려들어야 했거늘 이상하게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그가 슬그머니 감았던 눈을 떴을 때였다.
비수가 날아들었던 명치.
그곳에는 여전히 비수가 자리하고 있었다.
다만 문제는 그 비수가 멈추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비수의 손잡이 부분을 누군가가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 넣은 채로 강하게 움켜쥐고 있었다.
놀란 담구가 고개를 들어 그 손가락의 주인을 확인했다. 날아드는 비수를 잡아채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이는 바로 백아린이었다.
자신의 갈 길을 가기 위해 움직이던 그녀가 날아드는 비수의 움직임을 빠르게 눈치채고 곧바로 죽을 뻔한 담구의 목숨을 구해 낸 것이다.
놀란 그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고, 고맙소."
"인사는 됐고, 혹시 저 사람들 알아요?"
백아린의 질문에 그제야 담구는 고개를 치켜들어 비수가 날아온 방향을 확인했다.
그곳에는 하나같이 아리따운 옷차림을 한 여인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옷자락을 펄럭이며 다가오는 그들은 하나같이 젊었고, 아름다웠다. 허나 그만큼 그녀들에게서는 무척이나 위험한 분위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쉽사리 보기 힘든 광경에 잠시 놀랐던 담구가 황급히 정신을 차리며 말했다.
"내가 저런 여인들을 어찌 알겠소."
"……모르는 사람들이라 이거군요."
"그, 그렇소이다."
"됐어요, 그럼. 잠깐 뒤로 물러나 있어요."
말과 함께 백아린은 손에 쥐고 있던 비수를 옆으로 툭 내던졌다.
정체 모를 여인들의 등장.
분명 그 여인들은 처음에 담구를 공격했다.
허나 백아린은 직감할 수 있었다. 저들의 표적이 담구가 아닌 자신이라는 것을. 담구를 죽이기 위해 움직이기에는 그 실력들이 너무도 뛰어났으니까.
앞으로 성큼 나선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그쪽들 표적이 저인 거 같은데…… 맞죠?"
스르릉.
대답 대신 각자의 무기를 꺼내어 들며 거리를 좁혀 오는 여인들을 보며 백아린은 천천히 손을 어깨 위로 올렸다.
그녀의 손이 등 뒤에 자리하고 있는 대검의 손잡이에 닿았다.
손잡이를 움켜쥔 채로 백아린이 작게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대답을 할 생각이 없는 거 같네."
다가오는 적들의 숫자는 얼추 십여 명.
허나 백아린의 걸음걸이에 망설임은 없었다. 그녀가 앞으로 발을 내디디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야 뭐…… 박살을 내 주지."
말과 함께 내디딘 발이 강하게 땅을 밟았다. 동시에 그녀의 몸이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슈웃!
동시에 백아린의 대검이 맹렬하게 회전하며 움직였다.
허공으로 날아오른 그녀를 향해 정체불명의 여인들이 암기를 쏟아 냈다.
순식간에 수십여 개의 암기들이 백아린을 뒤덮었다.
위험천만해 보이는 공격.
그렇지만 백아린은 침착하게 대검을 휘두르며 날아드는 암기의 일부를 그대로 받아쳐 버렸다.
카앙!
옆으로 밀려 나가는 많은 수의 암기들, 그리고 어렵게 대검의 공간을 뚫고 안으로 들어가는 것들도 있었지만 그것 또한 백아린에게까지 닿지는 못했다.
대검을 쥐지 않은 반대편 손이 재빠르게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파라라락.
손바닥이 신묘한 변화를 보이며 그대로 암기를 받아쳤다. 그리고 그것들은 오히려 암기를 던진 대상들을 향해 고스란히 되돌아갔다.
퓩퓩.
이곳에 나타난 여인들 또한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기에 그 공격을 가볍게 피해 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애초부터 백아린이 노렸던 건 방금 전 공격의 성공이 아니었다.
빠르게 떨어져 내리는 그녀의 몸.
착지와 동시에 백아린의 손에 들린 대검이 커다란 원을 그리며 주변을 휩쓸었다.
콰콰콰콰쾅!
우드드득.
비틀리는 소리와 함께 주변에 있던 여인들이 사방으로 밀려 나갔다. 동시에 피어오르기 시작한 흙먼지, 그 속에서 백아린의 대검이 절묘하게 한 명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파팡팡!
가까스로 검을 들어 막아 내긴 했지만, 아쉽게도 상대가 좋지 못했다.
무지막지한 대검이 단번에 검을 박살 내며 당사자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퍽!
그대로 날아가다시피 한 여인이 바닥에 처박혔다.
백아린은 가볍게 몸을 돌리며 곧바로 검기를 쏟아 냈다.
다가오려던 여인들이 재차 뒤로 물러났다.
순간적으로 잡은 승기, 백아린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그녀의 대검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파파파팍!
땅이 갈라지며 사방에 있던 이들이 그녀의 공격을 막아 내기 급급하며 균형을 잃었다. 그 순간 재차 펼쳐진 백아린의 공격이 빈틈을 파고들었다.
쒜엑!
펑!
한쪽에 위치하고 있던 두 명의 여인이 폭발에 휘말리며 나가떨어졌다.
허나 백아린의 대검은 자비가 없었다.
곧바로 주변으로 휘몰아치기 시작하는 공격을 여인들은 가까스로 막아 내기에 바빴다.
순식간에 거리를 벌린 여인들의 표정이 아까와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아무런 감정도 없어 보이던 눈빛은 어느샌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싸아아아.
대치하는 이들 사이에 흐르는 시원한 바람.
그리고 그 상태로 백아린이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숨어 있을 거지?"
뜻을 알 수 없는 그 한마디와 함께 그녀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아무도 없고, 커다란 돌과 나무들이 빽빽하게 자리하고 있는 장소였다.
인기척조차 전혀 느껴지지 않는 그 공터를 바라보며 백아린이 재차 목소리에 힘을 줘서 말했다.
"거기 숨어 있는 스물한 명. 나오지 그만?"
허공에 대고 재차 말을 하는 그 순간이었다.
어둠 속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재미있네."
중얼거림과 함께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얇은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그녀는 바로 주란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뒤편으로 몸을 감추고 싸움에 개입하지 않고 있던 나머지 스무 명에 달하는 여인들 또한 나타났다.
백아린을 죽이기 위해 대동하고 온 화접들이었다.
사실 주란은 오늘 자신이 나설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애초부터 화접 서너 명이면 충분히 정리될 거라 여겼던 상대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많은 인원들을 투입했다.
실패를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만큼 그녀는 완벽주의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접 나서게 되는 경우의 수는 정말이지 단 한 번도 머리에 그려 본 적조차 없었다.
그런데…… 고작 몇 번의 움직임만으로 그 같은 생각을 머리에서 지워 버린 그녀였다.
믿을 수 없는 움직임, 어디 그뿐이랴.
숨어 있는 자신들을 눈치챘다.
더 믿을 수 없는 건 백아린이 정확하게 스물한 명이라는 숫자를 내뱉었다는 거다.
그리고 그 스물한 명이라는 숫자 속에는…… 자신도 있었다.
‘저런 자가 육급이라고?’
간신히 절정의 반열에 든 정도로 분류되었던 인물이다. 그런데 그 정도 수준밖에 안 되는 자가 자신이 이끌고 온 화접들을 저리 쉽게 쓰러트린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화접 개개인의 실력을 등급으로 나누자면 오급에서 육급 수준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올 수 있는 답은 하나였다.
자신들의 정보가 틀렸다.
백아린의 무공 수위는 육급 정도가 아니었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지금 화접들을 밀어붙이는 실력을 보고 나올 수 있는 실질적인 진짜 등급.
최소 사급.
그 말은 곧 무림을 대표하는 고수들이라 칭하는 우내이십일성의 반열에 든 인물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우내이십일성 수준이라고? 고작 이런 젊고 어린 여자애가?’
육급과 사급은 달라도 많이 달랐다.
육급 정도 되는 자를 처리하는 건 간단했지만 사급이라면 이야기가 완전히 다르다.
사급부터는 쉽사리 건드리기 힘든 수준의 무인이라는 소리였으니까.
"하아."
주란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답답하다는 듯 속으로 중얼거렸다.
‘우리 쪽 정보 단체 놈들…… 다 모가지를 쳐 버리든 해야지.’
이런 말도 안 되는 정보를 준 그들에 대해 화가 치밀었지만 지금으로선 그 뒤처리를 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 귀찮은 일을 자신이 해야 한다는 것이 못내 못마땅했지만…….
‘사급이라.’
얼굴 가리개 너머 그녀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분명 위험한 등급의 적, 하지만 주란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자신은 그 이상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