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시작 ― 이봐요
천무진은 책상 앞에서 한참을 떠나지 못했다.
우습게도 손에 들린 이 작은 붓의 무게가 천근이 넘는 쇳덩어리보다 무겁게 느껴졌다.
그만큼 심적으로 복잡하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결국 종이에 어떤 것 하나 적지도, 그리지도 못한 천무진이 천천히 붓을 내려놓았다.
굳은 안색의 그가 중얼거렸다.
"믿을 수가 없군."
어떻게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지 못할 수 있단 말인가. 마치 검은 안개가 낀 것처럼 그녀의 얼굴이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기억나는 것이 그저 목소리뿐이라니.
목소리 하나만으로 이 넓은 중원에서 사람을 찾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세상 모든 여인들을 찾아다니며 직접 목소리를 듣지 않고서야 해결할 방도가 없으니까.
천무진은 눈을 감은 채로 단서가 될 만한 모든 것들을 기억해 내려 애썼다.
그녀와 나누었던 대화들에서 그녀에 대한 단서를 찾기 위해 고민해 봤지만…… 우습게도 정말 그녀에 대해 자신이 아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나마 억지로 찾아내 보고자 한다면 첫 부탁에서 부모의 원수라고 말했던 양휴라는 자와의 연관성인데 사실 그 또한 가짜일 공산이 컸다.
처음부터 모든 것이 계획되어져 있던 만남이었으니까.
과거로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에 대해 알아낼 아무런 단서가 없다는 사실에 천무진은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짧은 시간도 아닌 십수 년이다.
그만큼 긴 시간을 함께했음에도 아는 것 하나 없었던 그 현실을 당시엔 의심조차 하지 못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천무진의 상태가 어땠는지를 충분히 말해 주는 듯싶었다.
백지에서부터 시작해야만 하는 상황이 닥쳐왔음에 막막함이 밀려들었다.
그때 비어 있는 종이를 한참이나 내려다보고 있던 천무진이 갑자기 고개를 치켜들었다.
온통 정신을 다른 데 팔고 있던 와중에도 누군가가 다가오는 기척을 느낀 것이다. 열려 있는 문 쪽을 응시하고 있던 그의 시선에 생각지도 못한 얼굴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상대는 평범한 인상의 노인이었다.
키는 그리 크지 않은 보통 정도. 나이는 육십 줄을 훌쩍 넘어 보였고, 부드러워 보이는 얼굴에 서글서글한 눈매가 인상적이었다.
그 노인을 확인하는 순간 천무진은 놀란 듯 눈을 부릅떴다.
친숙한 얼굴.
다시는 보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그 얼굴을 보게 되자 말로 표현하기 힘든 복잡한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남윤(楠潤)이라는 이름을 지닌 노인으로 수십 년이 넘게 이곳 장원의 잡일을 도맡아 하는 가솔이었다.
기억의 한 편을 장식하고 있던 그를 마주하자 천무진의 목소리는 떨려 왔다.
"……영감."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공손하게 남윤이 답했다.
"작은 주인님. 일어나셨습니까?"
그리웠던 얼굴, 그리고 그리웠던 목소리. 남윤을 마주하게 되자 덩달아 천무진의 머리를 가득 채우는 한 사람의 모습이 있었다.
사부였다.
"영감, 사부는 어디 계시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던 자리를 단숨에 박차고 일어나며 천무진이 물었다.
그녀에게 조종당하기 시작한 이후 사부는 두 번 자신을 찾아왔었다.
반 년 정도 되었을 무렵, 그리고 그로부터 조금 더 시간이 흐른 후에 한 번 더.
그게 마지막이었다.
사부는 그날 이후 자신을 찾지 않았고, 시간이 조금 더 흐른 후에야 그분의 최후에 대해 귀동냥으로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그때의 자신은 슬픔이나 기쁨 따위의 감정적 동요를 보이지 않던 시기였다. 감정마저도 이미 자신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흘 밤낮을 울었다.
모든 걸 잃었던 자신에게 세상을 선물해 주려 했던 유일한 사람이었기에.
다급히 사부의 안부를 물어 오는 천무진의 모습에 남윤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허허, 이 늙은이가 치매에 걸렸나 확인이라도 하시는 겁니까? 나흘 전에 운행(雲行)을 떠나신 걸 그새 잊었을까 봐요?"
남윤의 입에서 운행이라는 말이 나오자 천무진은 잊고 있었던 사부의 취미를 떠올렸다.
구름처럼 다닌다는 말뜻처럼 사부는 많으면 일 년에 몇 차례, 적게는 몇 년에 한 번씩 훌쩍 길을 떠나곤 했다.
기약도 없이 떠다니다 돌아오는 그 여정을 천무진과 남윤은 운행이라 칭했다.
길면 일 년도 넘게 떠나 있곤 하던 사부였고, 이야기를 듣고 기억해 보니 이 무렵에도 한 번 길게 떠났던 적이 있는데 그것이 이번이었던 것도 같았다.
운행을 떠난 지 나흘밖에 안 됐다면 만나려면 꽤나 긴 시간이 남았다는 소리다. 그렇지만 천무진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사부가 살아 있으니까.
지금으로선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말없이 앉아 있는 천무진을 조심스레 곁눈질하던 남윤이 걱정이 됐는지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 있으십니까, 작은 주인님? 표정이 안 좋으신데요."
"난……."
무슨 일이 있냐는 질문에 자신의 사정에 대해 말하려던 천무진은 멈칫했다.
죽었다가 과거로 돌아왔다는 말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직접 겪은 자신 또한 믿기지 않는데 다른 이에게 이 같은 이야기를 납득시킬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아마 잠이 덜 깼냐는 말이나 듣기 십상일 게다.
어차피 지금 당장 자신의 말을 납득시킬 방법도 없고, 그래야 할 이유도 없었기에 천무진은 둘러대듯 상황을 넘겼다.
"별거 아냐. 그냥…… 악몽을 꿨어. 아주 긴 악몽을."
"허허, 이젠 이 늙은이가 같이 자 드리기엔 너무 커 버리셨는데 어쩌지요?"
장난스러운 남윤의 말에 천무진은 기가 막힌다는 듯 피식 웃음을 흘렸다.
"실없게 농담은."
자신도 모르게 짧은 웃음을 흘린 천무진은 이내 깜짝 놀란 듯 자신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몇 년 만에 지어 보이는 웃음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천무진이 이같이 작은 일에도 놀랐다는 사실을 알 길이 없는 남윤으로선 자연스레 말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아 참, 식사 준비가 다 되어서 말씀드리러 온 건데 이러다 다 식겠습니다. 어서 오시지요."
"……알겠어, 영감. 금방 가지."
말을 끝내고 남윤이 식당으로 떠나자 홀로 남게 된 천무진은 거울 앞으로 다가가 섰다.
거울에 비치는 자신을 바라보던 천무진은 긴 숨을 내쉬고는 이내 조금씩 입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힘겹게 올린 입꼬리가 슬며시 떨려 왔다.
어색했다.
거울 속 자신이 짓고 있는 억지웃음은 분명 어색했다.
그렇지만…… 웃고 있다.
어색하지만 웃고 있는 것이다.
웃을 수 있고, 울 수도 있으며, 화를 낼 수도 있었다. 사람이라면 아무렇지 않게 해내는 그 모든 것들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천무진은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살아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어색해 보이지만 스스로의 의지로 웃고 있는 자신의 얼굴이 썩 마음에 들었다.
그랬기에 또 생각이 난다.
이 모든 것들을 잃게 될 자신의 모습이.
초조함과 함께 스스로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한심하군.’
오로지 목소리 하나만으로 사람을 찾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저 이렇게 두 손 놓고 다시금 그날이 오기를 기다려야만 하는 것인가?
물론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 해도 죽기 전의 삶보다는 훨씬 더 많은 대비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죽기 전의 경험과 지식들이 있으니 더 빠르게 강해질 것은 자명한 사실. 거기다 아주 조금이라고는 하지만 미래에 벌어질 일을 알고 있는 것 또한 분명 도움이 될 게다.
하지만 과연 그걸로 될까?
천하제일인이 된 이후에도 그녀의 섭혼술로 추정되는 사술에 휘둘렸던 자신이다.
지금부터 남아 있는 이 시간 동안 노력한다 한들 얼마나 강해질 수 있을까?
그저 막연하게 스스로를 갈고 닦기만 해서는 앞으로의 삶이 달라질 확률은 거의 없어 보였다.
그랬기에 찾아야 했다.
강해지는 것 외에도 이 상황을 더욱더 자신 쪽으로 유리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유일한 단서인 그녀. 그렇지만 그녀를 찾을 방도가 없다는 사실이 머리를 복잡하게 만든다.
어떻게든 찾아야 한다.
단서는 아무런 것도 없지만 어떻게든 그녀를 찾아야 하는데…….
그때였다.
‘……잠깐?’
놓치고 있던 뭔가가 번개처럼 머리를 때렸다.
"젠장, 왜 이걸 생각 못 했지?"
스스로에게 되물었지만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너무나 고통스러웠던 과거, 그런 상황이 다시 올지도 모른다는 상황에서 주어진 단서는 그녀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건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지금 주어진 단서는 그녀뿐이었으니까.
허나 그녀를 찾기 위해 필요한 것이 비단 인상착의뿐이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녀에 대해 아는 건 목소리를 제외하곤 아무런 것도 없지만, 하나 분명히 기억하는 것들이 있지 않은가.
그녀가 해 왔던 그 많은 부탁들.
그 모든 것들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을 터다.
자신을 조종했고, 그로 인해 뭔가 얻을 것이 있었다면 그 부탁들은 분명 의미가 있다는 소리다.
그녀라는 사람에게만 집중했기에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들.
물론 많은 시간이 들지도 모른다.
또 한참 후의 일이라 지금 당장엔 연결 고리들이 맞아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녀가 부탁했던 그 많은 일들 속에 숨겨진 연관성을 찾는다는 건 그만큼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만약에라도 자신이 해 주었던 그 모든 일들이 향하는 하나의 방향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녀, 아니 어쩌면 그 뒤에 있을 그 누군가를 찾는다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 아닐지 모른다.
그것이 아무리 가능성이 희박할지라도 아무런 단서조차 없는 지금 유일하게 파고들어 볼 만한 자그마한 틈이었다.
그리고 무릇 견고한 뭔가가 무너질 때는 그토록 자그마한 균열에서부터 시작하는 법이다.
그들이 움직이기 전에 먼저 선수를 치기 위해서는 서둘러야만 했다.
정보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믿음직한 정보 단체다.
실력이 있으면서도 이 모든 일들을 비밀스레 처리해 줄 신용이 있는 자들.
중원에 알려진 정보 단체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적이 누군지 알지 못하는 지금 의뢰를 할 상대를 고르는 건 신중해야 할 일이었다.
허나 천무진은 고민하지 않았다.
이미 의뢰를 할 상대를 정했기 때문이다.
생각을 정리하기 무섭게 곧바로 방을 박차고 나간 천무진은 장원의 한 곳을 향해 나아갔다.
이내 그가 도착한 곳은 자그마한 창고였다.
끼이익.
창고의 문을 열어젖힌 천무진은 곧바로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오랜 시간 드나들지 않아 먼지가 가득한 이곳은 특별할 것 하나 없어 보였다.
오래된 낡은 집기들만이 너저분하게 놓여 있는 창고의 내부.
걸음을 옮기기 무섭게 피어오르는 먼지에 천무진은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손을 휘휘 저었다.
"지독하군."
천무진의 손이 벽을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기억의 끝자락에 남아 있는 뭔가를 찾기 위해서였다.
손을 움직이며 그가 중얼거렸다.
"이쯤이었던 것 같은데……."
틱.
중얼거림이 끝나 가는 것과 거의 동시에 손가락 끝에 뭔가가 걸렸다.
갓난아이의 새끼손톱보다 더 자그마한 것이 살짝 튀어나와 있었다.
손으로 만지고도 놓칠 정도로 자그마한 흔적.
그리고 이것이 천무진이 찾고 있던 것이었다.
천무진은 그 자그맣게 튀어나온 뭔가를 사선으로 움직였다. 그러자 창고 구석의 바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크르릉.
먼지가 보다 심하게 피어올랐기에 천무진은 소매로 가볍게 입가를 가렸다.
그러고는 이내 모습을 드러낸 지하 공간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지하로 이어져 있는 긴 계단을 따라 천무진은 걸었다.
어두워야 할 지하의 비밀 공간이었지만, 내부는 마치 대낮처럼 밝았다.
양쪽에 줄지어 걸려 있는 값비싼 야명주들 덕분이다.
자체적으로 빛을 쏟아 내는 야명주는 하나만으로도 고가에 거래가 되는데, 그런 귀한 것들이 마치 백사장에 굴러다니는 조개껍데기처럼 발에 치일 정도로 많았다.
야명주뿐만이 아니었다.
걸어가는 길목 옆에 만들어진 장소들에는 한눈에 봐도 귀해 보이는 물건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천무진은 그런 것들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계속해서 나아갔다.
그렇게 걸음을 옮기던 천무진이 멈추어 선 곳.
그건 다름 아닌 낡은 사당 앞이었다.
지하도 내부에 있는 사당에는 수많은 위패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수십 개가 넘는 위패들이 줄지어져 서 있는 곳으로 다가간 천무진은 가볍게 향 하나를 들어 올렸다.
퉁.
손가락을 퉁기자 가볍게 피어오른 불씨가 향에 옮겨 붙었다.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한 연기를 바라보며 천무진은 앞에 놓여 있는 향로에 향을 꽂았다.
이곳은 대대로 천무진이 속한 문파 인물들의 위패를 모셔 놓은 사당이었다.
포권으로 마지막 예를 취한 천무진은 이내 향로의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커다란 항아리 하나가 나무 뚜껑에 덮여 있었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검은 빛의 항아리의 뚜껑을 천무진이 옆으로 돌렸다.
그러자 항아리에 꽉 맞춰져 있던 뚜껑이 소리를 내며 들어 올려졌다.
그렇게 드러난 항아리의 내부.
그 안에는 비취색 옥으로 된 구슬들이 가득했다.
천무진은 항아리에 잔뜩 들어가 있는 옥구슬을 하나 꺼내어 들었다.
옥구슬에는 천(天)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천무진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건가?"
이야기만 들었을 뿐이지 직접 본 건 그 또한 이번이 처음이었다.
사부가 자리를 비운 상황이라 직접 물어볼 수는 없었지만 이것이 자신이 찾는 물건이 맞는지 확인할 간단한 방법이 있었다.
천무진이 손바닥 위에 있는 옥구슬에 내력을 흘려보냈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바로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옥구슬의 비취색이 점점 옅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피처럼 붉은 색으로 변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천무진은 신기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손에 쥐고 있던 옥구슬을 살폈다.
지금은 구할 수도 없는 특별한 옥으로 제작된 이 구슬들은 내공을 불어넣는 순간 색이 변하는 특성을 지녔다.
그리고 한번 붉게 변하면 다시는 비취색으로 돌아오지 않는 물건이었다.
이토록 신묘한 반응을 보이는 걸 보니 이것이 천루옥(天淚玉)이 확실했다.
천무진은 망설임 없이 항아리 안에 들어 있는 여러 개의 천루옥 중에 하나를 더 꺼내어 들었다.
아직 사용하지 않아 밝은 비취색을 쏟아 내는 천루옥을 바라보며 그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찾았다."
* * *
천무진은 고아였다.
이상하게 어릴 때의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그나마 뚜렷한 기억은 사부의 넓은 등에 업혀 이곳으로 들어오던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천무진의 나이는 채 열 살이 되지 않았는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피투성이가 되어 길바닥에 버려져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그 충격으로 천무진은 그 전의 일들에 대한 기억을 거의 하지 못하는 듯싶었다.
피투성이의 그를 발견한 것이 바로 사부였다.
흠칫 두들겨 맞아 오늘내일할 정도로 큰 부상을 입은 어린아이를 사부는 차마 모른 척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그에게 업혀 오게 된 이 장원이 천무진의 집이 될 거라곤 당시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얼마나 심하게 두들겨 맞았는지 정신을 차리는 데에만 보름이 걸렸다 했다.
그리고 걷기까지는 무려 두 달이 넘는 시간이 더 소요됐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천무진을 두고 사부는 깊은 고민을 했다.
조그맸던 그 아이를 옆에 두고 싶었던 탓이다.
그런 의미로 천무진은 운이 좋았다.
마침 사부는 문파의 대를 이을 제자를 찾는 중이었고, 천무진은 여러 가지 분야에서 적임자였다.
뛰어난 근골과 적당한 나이.
거기다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상처 받은 맹수처럼 사납게 빛나는 눈빛이 사부는 마음에 들었다고 했다.
며칠의 고민 끝에 사부는 천무진을 자신의 제자, 즉 단 한 명에게만 무공을 전수하는 일인전승(一人傳承)의 문파인 천룡성(天龍城)의 후계자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어렸던 그에게 천무진이라는 이름도 내려 줬다.
고작 스승과 제자 단둘로만 이루어진 문파.
그런 이들에게 성(城)이라는 글자가 붙은 문파의 이름은 과분하다 못해 오만하다고 여겨질 법도 했다.
하물며 하늘의 용인 천룡이라니.
허나 천룡성의 정체를 아는 이들이라면 그 누구도 이 이름이 과하다는 말을 입에 올릴 수 없을 것이다.
천룡성은 무림의 전설이었다.
그들은 어디에나 있고, 또 어디에도 없다.
실체조차 확실하지 않은 그들은 세상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사라져 있다가도, 무림을 뒤흔드는 커다란 사건이 생길 때마다 귀신처럼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그리고 그들은 언제나 혼란스러운 강호를 지켜 내고는 다시금 연기처럼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이들이기라도 한 것처럼.
당연히 그런 천룡성에게 은혜를 입은 이들은 구름처럼 많았고, 세월이 쌓이고 쌓여 무림의 커다란 문파들은 그들과 일종의 맹약을 맺게 된다.
천도(天道)의 맹약(盟約).
수백 년 전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그 맹약의 내용은 간단했다.
천룡성의 부탁이라면 돕는다.
허나 여기엔 큰 문제가 하나 있었다.
천룡성 자체가 비밀에 싸인 신비의 문파였고, 그 때문에 그들의 부탁인지 확인할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문제는 금방 해결됐다.
바로 이제는 세상에서 찾을 수 없는 천루옥이 있었기 때문이다.
진짜 천룡성의 부탁인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건네받은 옥구슬에 내공을 사용해야 했고, 그렇게 되면 색이 바라는 특이한 성질을 지닌 물건, 즉 천루옥이 증표가 되었다.
단 한 번만 사용 가능한 옥이었기에 다른 이가 나쁜 생각을 지니고 거짓 부탁을 한다는 것 또한 불가능했다.
색이 변해 버린 천루옥은 이미 그 가치를 잃은 물건이 되어 버리니까.
그리고 그 천루옥이 지금 의뢰를 위해 천무진의 손을 떠난 상황이었다.
의뢰는 자신이 직접 움직이지 않고, 이곳 장원의 유일한 가솔인 남윤을 통해 서찰과 함께 천루옥을 전달하는 것으로 뜻을 전했다.
과거로 돌아온 천무진은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천룡성의 장원 바깥으로 나서지 않았다.
돌아온 지 거의 이십 일 가까운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장원 바깥으로 한 걸음도 내딛지 않은 건 시간이 필요해서였다.
본래 자신의 모습을 찾기 위한 시간이 말이다.
과거로 온 덕분에 몸은 멀쩡하게 돌아와 있었지만 긴 시간 동안 쌓여 온 정신적인 문제들은 아직 남아 있었기에 이것들을 조금씩 안정시키는 것 또한 중요했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스스로의 상태도 점검했다.
천하제일인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천무진이니 지금의 상태가 만족스러울 리가 없었다.
허나 이미 한번 내디뎠던 길이다.
처음 가는 것보다 훨씬 빨라질 건 자명한 사실, 필요한 건 시간과 그에 맞는 노력뿐이다.
예전 그때의 무공 실력을 따라잡으려면 상당히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그나마 다행인 건 조급하고 두려움 가득했던 마음이 조금씩 안정기에 들어서고 있다는 점이었다.
가부좌를 튼 채로 심법을 운용하고 있던 천무진이 천천히 눈을 떴다.
복잡했던 머리가 한결 나아진 상황.
천무진은 힐끔 방에 있는 창을 통해 바깥을 살폈다. 해가 중천에 뜬 걸 보아하니 얼추 점심 식사를 할 시간이 된 듯싶었다.
천무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시간이 된 것이다.
그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자그마한 전낭 하나만을 챙긴 채 어딘가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가 도착한 곳에는 남윤이 자리하고 있었다.
식사 준비를 하던 그가 갑작스레 찾아온 천무진을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물었다.
"이리 급히 어쩐 일이십니까?"
한동안 방 바깥으로도 나오지 않던 천무진을 걱정하던 차다.
그러던 그가 이렇게 직접 찾아오자 남윤은 뭔가 할 말이 있어서라는 걸 금세 알아차렸다.
천무진이 말했다.
"영감, 나 잠깐 나갔다가 올게."
"식사는 어쩌시고요?"
"나가서 해결해야 할 것 같아. 한 오십 일 정도 걸릴 거야. 좀 멀리 다녀와야 해서."
"오십 일이나요?"
생각보다 긴 시간에 놀란 듯 되묻는 남윤을 향해 천무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곧바로 말을 이었다.
"아, 혹시나 그사이에 사부님한테 연락이 닿을 기회가 있으면 내가 찾는다고 좀 전해 줘, 영감."
"그리하지요."
운행을 떠나면 연락이 닿는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에 이야기를 전해 달라 부탁을 남긴 것이다.
천무진이 이토록 사부에게 급히 연락을 취하려는 건 그녀가 자신을 노렸던 이유가 혹여 천룡성의 후계자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가정 때문이었다.
천룡성과 관계된 일이라면 사부가 자신보다 많은 걸 알고 있을 테니 그것에 대해 물어보려 하는 것이다.
허나 먼저 연락을 할 수 없는 지금으로선 천무진 스스로가 할 수 있는 일부터 해야만 했다.
발걸음을 돌리고 나아가는 그의 뒤편에서 남윤이 인사를 건넸다.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작은 주인님."
고개를 돌려 짧은 눈인사를 건넨 천무진은 곧바로 장원의 입구를 향해 나아갔다.
장원의 입구는 주방과 그리 멀지 않았기에, 금세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입구에서는 커다란 문이 천무진을 반겼다.
주로 신비의 문파라 하면 깊은 산속, 녹림이 우거지고 사람의 인적이 없어 찾기 힘든 비밀스러운 장소 따위를 생각하기 쉽겠지만…….
천무진이 천천히 문에 손을 가져다 댔다.
끼이이익.
문이 열리며 드러난 장원 바깥의 세상.
문이 열리는 순간 드러난 것들은 수려한 자연 경관이 아닌 근처를 오고 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우습게도 이곳 천룡성의 장원은 도심에 자리하고 있었다.
오히려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해야 할까?
세상 그 누가 전설처럼 내려오는 문파인 천룡성이 이곳 사천성의 성도와 그리 멀지 않은 자양(資陽)이라는 커다란 마을에 대놓고 떡하니 자리하고 있을 거라 생각하겠는가.
"후우."
열린 문 앞에 선 채로 천무진은 길게 심호흡을 했다.
이 한 걸음, 자신의 의지로 다시금 세상을 향해 내딛는 이 한 걸음이 결코 가볍지 않았다.
십몇 년 만에 스스로의 의지로 내딛는 걸음이었으니까.
이곳을 나서는 그 순간부터 자신은 다시금 위험에 노출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하염없이 장원 안에서 숨죽인 채로 그녀가 찾아올 그날을 두려워만 하며 살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때와 같은 삶을 살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의지로 살아가기 위해선 이 한 걸음이 필요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였다.
그랬기에 천무진은 용기를 냈다.
스윽.
슬며시 들어 올린 천무진의 한쪽 발이 문지방을 넘어섰다.
그리고 이내 그 발이 문지방의 건너편 땅을 딛는 순간 천무진은 자신의 세상이 크게 요동쳤다고 느꼈다.
내디딘 한 걸음.
천무진은 이내 아직 나오지 못했던 반대편 발을 움직였다. 그렇게 두 발 모두 장원 바깥으로 나온 상황에서 천무진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날씨는 좋고, 바람은 선선하다.
기분이 절로 좋아질 수밖에 없는 그런 날.
……여행을 떠나기 아주 좋은 날이었다.
* * *
사천성의 중앙 부분에 위치한 서창(西昌)이라는 마을은 큰 번화가였다.
관도와 맞닿아 있는 덕분에 교통도 편리하고, 성도와도 멀지 않은 지리적 이점도 지닌 마을이었다.
천무진은 이곳에서 만남을 잡았고, 그 때문에 서창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같은 사천이기는 하지만 성도를 중심으로 천룡성의 장원이 있는 자양과는 반대쪽에 위치한 이곳을 굳이 약속 장소로 잡은 건 자신들의 거점과 그래도 어느 정도 떨어진 곳에서 만나는 것이 낫다 판단했기 때문이다.
서창에 도착한 천무진이 들어선 곳, 그곳은 다름 아닌 명도객잔이라는 장소였다.
명도객잔은 예로부터 서창의 명소 중 하나였다.
이곳에만 있는 특산주인 명신주(銘身酒)는 사천에서도 알아주는 술이다.
거기에 삼 층으로 된 객잔은 꽤나 커서 하루 종일 많은 이들이 오고 가는 장소이기도 했다.
그리고 천무진은 오늘 이 객잔에서 의뢰를 한 정보 단체 쪽 사람과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복식이 그리 화려하진 않았지만 한눈에 봐도 귀티가 흐르는 천무진에게 어린 점소이가 빠르게 달려왔다.
"어서 옵쇼!"
인사를 하는 점소이를 두고 객잔 내부에 있는 이들을 스윽 둘러보던 천무진이 입을 열었다.
"삼 층에 방 하나 내줘."
말과 함께 손에 자그마한 은자를 건네자 어린 점소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거면 그가 며칠 동안 받는 급여보다도 훨씬 더 많은 금액이었으니까.
뺏길세라 황급히 품 안에 은자를 챙긴 어린 점소이가 싱글벙글한 얼굴로 말을 받았다.
"어휴, 딱 한 개 남았었는데 운이 좋으십니다, 대협. 그럼 모시지요."
신나는 걸음걸이로 앞장서서 걷는 점소이의 뒤를 천무진은 따라 걸었다.
삼 층으로 올라선 천무진은 이내 안쪽에 위치한 방 한 곳으로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문을 연 어린 점소이가 자신 있게 말했다.
"여깁니다. 저희 객잔에서도 경관이 끝내주는 방이지요."
"그래, 고맙다."
말을 마친 천무진이 창가와 가까운 자리에 가서 앉자 점소이가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 그럼 주문은……."
"조금 있다가 하지. 올 사람이 있어서. 아, 명신주는 하나 가져다주면 좋겠군."
"바로 대령하죠."
재빠르게 방을 빠져나갔던 어린 점소이는 곧 명신주를 들고 나타났다. 그리고 반대편 손에는 간단한 요깃거리가 될 만한 안주가 담긴 접시가 들려져 있었다.
천무진이 입을 열기도 전에 점소이 소년은 술병을 쥔 손을 들어 올려 입에 검지를 세운 채로 재빠르게 말했다.
"쉿, 제가 하나 몰래 챙겨 왔습니다."
은자의 보답이라는 듯이 웃어 보인 그 아이는 탁자 위에 명신주와 안주가 담긴 접시를 내려놓고는 재빠르게 사라졌다.
닫힌 문을 잠시 바라보던 천무진은 명신주가 든 술병을 쥐며 중얼거렸다.
"……저 녀석은 여전하군."
어린 점소이에겐 천무진이 초면이었겠지만, 사실 둘은 본 적이 있었다.
천무진이 회귀하기 전의 삶에서 있었던 인연이다.
그녀에게 조종당하기 전에 이곳 명도객잔에 몇 차례 온 적이 있었다.
당시에도 천무진은 저 어린 점소이에게 은자를 챙겨 줬었고, 그 이후에 자신이 찾아올 때마다 이렇게 몰래 안주를 가져다주곤 했었다.
사실 그리 깊은 인연은 아니었기에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외향이 어렴풋이밖에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막상 마주하게 되니 단번에 알아 볼 수 있었다.
명신주를 채워 넣은 잔을 천무진은 천천히 입가에 가져다 댔다.
화주를 연상케 하는 쓰디쓴 맛이 목구멍을 타고 흘러내렸다.
오랜만에 느끼는 지독히도 쓴 맛에 미간은 찌푸려졌지만, 기분은 썩 괜찮았다.
화주에선 느끼기 힘든 넘길 때의 그 부드러움이 쓴 맛과 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명신주를 두어 잔 마시자 객잔 방 내부엔 은은한 향이 퍼졌다. 명신주 특유의 향이었다.
술로 입을 축인 천무진은 바로 옆에 위치한 창가에 몸을 기댔다.
바깥을 오고 가는 많은 이들이 내려다보이는 장소.
상점들과 노점들이 즐비한 길목에 위치한 객잔이었기에 시끌벅적한 소리가 밀려왔다.
천무진은 그런 시끄러운 소리를 음악 삼아 조용히 술잔을 기울였다.
그렇게 명신주 한 병을 대충 다 비워 갈 무렵.
웅성웅성.
바깥에는 시선도 주지 않고 앉아 있던 천무진이 갑자기 움찔했다.
뭔가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탓이다.
시끄러운 건 여전했지만 뭔가 분위기가 미묘하게 달라졌다. 웅성거림이 조금 잦아든 듯한 느낌이 밀려들었다.
천무진의 시선이 자연스레 아래쪽 사람들이 오고 가는 길목으로 향했다.
그리고 이내 웅성거림에 변화가 생기게 만든 뭔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 사람이 있다.
아무리 많은 군중들 사이에 함께 뒤섞여 있어도 시선을 잡아끄는 사람.
지금 이곳 서창의 번화가에 색다른 바람을 불어넣은 그 사람 또한 그런 사람이었다.
하얀 백의에 길게 푼 머리는 바람에 나풀거린다.
가벼운 경장 차림에, 여인이라면 당연히 있을 법한 장신구 하나 보이지 않는다.
특별히 꾸몄다기보다는 자연스러움이 물씬 풍기는 여인. 그런데 신기하게도 누구보다도 빛났고, 시선을 휘어잡는 묘한 매력이 흘러넘쳤다.
이목구비는 또렷했고, 피부는 백옥처럼 하얬다.
커다란 눈망울과 가냘파 보이기까지 하는 체형은 보호 본능마저 자극한다.
허나 무엇보다 눈을 끄는 것은 그런 가냘파 보이는 체형과 너무도 대비되는 한 자루의 대검(大劍)이었다.
등 뒤에 걸려 있는 검은, 여인치고 큰 키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머리 위로 서너 살 정도 되는 아이 하나가 서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크기만 보고 짐작해 봤을 때 무게가 족히 백 근(60킬로그램)은 되어 보였다.
여인에게 어울리지 않는 무기, 하물며 저토록 얇은 팔로 저런 커다란 검을 들 수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게 만든다.
한참 사람 많을 시간의 번화가를 걷는 그녀에게 많은 이들의 시선이 틀어박힌다.
너무도 아름답고, 또 특이했으니까.
허나 그런 주변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여인은 걷고 있을 뿐이었다.
거침없이 나아가던 여인이 명도객잔의 지척에 이르는 순간 발을 멈췄다.
그녀가 갑자기 고개를 휙 하니 치켜들었다.
그러고는 여인이 입을 열었다.
"어이, 이봐요."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검을 메고 다니던 여인에게 잠시 시선을 주긴 했지만 이내 관심을 끊고 다시금 술잔을 홀짝이던 천무진이다.
위쪽을 향해 소리쳤던 여인이 목소리를 조금 더 높였다.
"안 들려요?"
재차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제야 그가 아래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천무진과 여인의 시선이 마주쳤다.
초면의 상대를 가만히 응시하던 천무진은 스스로를 가리키며 되물었다.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