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서(序)
사랑이라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부모님의 원수를 갚아 주세요."
그녀와의 첫 만남, 그리고 첫 부탁.
이유는 모르겠다.
왜 생면부지의 사람인 내게 그런 부탁을 했는지, 또 그런 말도 안 되는 부탁을 왜 내가 들어주었는지도.
난 반반한 얼굴에 혹할 정도로 여색을 밝히는 사내도, 또 누군가의 부탁을 순순히 받아들일 정도로 선한 성격도 아니었으니까.
양휴(楊休), 섬서성에서 칼밥을 먹는 자들치고 모르는 이가 없는 제법 이름난 고수.
난 그를 찾아갔고, 그와 싸웠다.
첫 살인이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내 이름이 처음으로 무림에서 회자되기 시작했다.
그녀와의 두 번째 만남.
이번에도 그녀는 내게 부탁을 했다.
"가문의 권세로 힘없는 이들을 약탈하고 있어요. 그들을 벌해 주세요."
섬서성에 위치한 양가장(楊家莊)이라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가문.
나는 그곳에 있는 서른 명에 달하는 무인들을 모조리 죽였다.
그날의 사건으로 나는 섬서 지역에서 꽤나 알려진 무인의 반열에 올랐다.
세 번째 부탁.
"수라천도(修羅天刀)와 그 무리를 죽여 주세요. 그들은 악인이에요."
수라천도 곽우민.
그는 알려진 것보다 훨씬 뛰어난 고수였다.
그들의 거점에서 곽우민과 그 수하들의 가슴에 검을 박아 넣은 그날 이후 세상 사람들은 나를 섬서 지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무인이라 칭하기 시작했다.
그날 이후 그녀는 언제나 내 주변을 맴돌았다.
그리고 필요할 때마다 찾아와 내게 부탁을 했다. 이어져 가는 그녀의 부탁을 들어줄 때마다 난 점점 더 위험한 일들을 해야만 했고, 그만큼 무림에 알려져 가고 있었다.
이젠 몇 번째 부탁인지 헤아릴 수도 없어질 무렵 그녀는 다시금 나에게 말했다.
"검산파(劍山派)에 있다는 보석이 가지고 싶어요. 제게 어울리겠죠?"
말도 안 되는 부탁이라는 걸 알았다.
상대인 검산파가 구파일방조차 함부로 대하기 껄끄러울 정도의 힘을 지닌 거대한 문파인 것도 문제였지만 고작 보석을 가지고 싶다는 이유로 그들과 싸워 달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여겼지만 이번에도 나는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그녀의 목소리가 거역할 수 없는 마력을 지니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단신으로 검산파를 찾아간 나는 그들과 혈전을 벌였다.
그리고 이번에도 나는…… 이겼다.
그렇지만 승리의 대가는 참혹했다.
천 명에 가까운 무인들과 홀로 맞선 탓에 반 년 가까이를 누워 있어야 했을 만큼 중대한 부상을 입었다.
허나 검산파와의 싸움으로 인해 내 이름은 섬서를 넘어 중원 전체를 호령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사람들은 날 섬서제일검이라 칭하고 있었다.
몸이 채 완전히 회복되지도 않았을 때 날아든 그녀의 새로운 부탁.
"반년 이내에 흑마신(黑魔神)을 죽여 줘요."
나는 말했다.
반년 이내에 그를 죽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사파 최고 고수 중 하나로 알려진 흑마신이라고 해도 그는 나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다만 문제는 그가 특별한 일이 없이는 자신의 거점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말은 곧 흑마신을 죽이기 위해서는 그의 거점으로 직접 들어가야 한다는 말인데 그게 문제였다.
사해도(四海島)라는 이름을 가진 그의 거점은 커다란 섬이었다.
들어가기도, 나오기도 쉽지 않은 곳이었기에 사해도에 발을 딛는 그 순간 그곳에 있는 모두를 죽여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말은 곧 사파 중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흑마신의 세력을 홀로 상대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흑마신이 섬에서 나온 이후에 죽이는 게 어떠냐는 나의 제안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서책 한 권을 꺼내어 내게 건넸다.
자령신공(紫靈神功).
중원에서 사라진 것으로 알려진 전설의 신공 중 하나. 신공이라는 이름은 붙었지만 실상은 반쪽짜리라 마공이라 봐야 옳은 심법이었다.
대체 어떻게 실전되었다고 알려진 전설의 신공이 그녀의 손에 있는 것일까?
하지만 그런 궁금증은 어느새 먼지처럼 사라지고 나는 자령신공에 손을 대고 있었다.
손을 대선 안 될 마공에 손을 댄 결과는 참혹했다.
부작용으로 인해 하루에 수십 번은 배를 찢는 고통이 찾아들었고, 얼굴은 녹아내려 징그럽게 변해 있었다.
자령신공을 익힘으로 인해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많은 걸 잃었다.
그렇지만 그 대가로 나는 죽지 않고 사해도에 숨어 있는 흑마신과 수하들의 목을 취할 수 있었다.
사파 최고수 중 일인인 흑마신을 죽인 나는 어느새 천하에서 가장 강한 무인들을 일컫는 우내이십일성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세상의 모든 무인들이 날 두려워하기 시작한 그 무렵.
마공으로 인해 점점 망가져 가던 나에게 그녀는 다시금 새로운 부탁을 했다.
"꽃 한 송이만 꺾어다 주세요. 지나가다 그 꽃에 대해 설핏 이야기를 들었는데 너무 예쁠 것 같아요."
무인에게 꽃 한 송이 꺾는 것이 뭐 그리 대수겠는가.
다만 그녀가 바라는 그 꽃이 새외 최고의 세력인 북해빙궁의 상징적인 성물인 만년설화(萬年雪花)라는 것이 문제였을 뿐.
이번에도 나는 말했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그러자 그녀 또한 다시금 나에게 서책 한 권을 들이밀었다.
잔마폭멸류(殘魔爆滅流)라는 이름의 검공이었고, 이 또한 자령신공과 마찬가지로 중원에서 오래전에 사라진 전설의 무공 중 하나였다.
이번에도 난 궁금했다.
부모의 원수조차 갚을 힘이 없었던 그녀가 대체 어떻게 이런 전설의 무공들을 내게 구해다 줄 수 있는지.
허나 난 이번에도 묻지 않았다.
아니…… 묻지 못했던 것일까?
난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잔마폭멸류는 훌륭한 무공이었다.
다만 문제는 잔마폭멸류를 익히기 위해 필요한 기본 전제 조건을 내가 충족시키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 대가는 이미 내 몸을 잠식하고 있던 자령신공과 뒤엉켜 최악으로 돌아왔다.
망가져 있었던 내 얼굴은 더욱 심하게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고, 손가락은 딱딱하고 새카맣게 변해 버렸다.
무공을 쓸 때마다 몸 안에 있는 모든 장기들이 조각조각 나는 느낌을 뭐라 표현할 수 있을까?
지옥을 수백 번은 오가는 고통 속에서도 나는 하루하루를 버텼고, 그 시간만큼 강해져만 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잔마폭멸류의 경지가 일정 수준 이상 오른 이후 나는 북해빙궁의 성물인 만년설화를 꺾어다 그녀에게 바쳤다.
북해빙궁을 뒤집어엎었던 그날의 사건으로 인해 세상은 날 천하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무인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높아져 가는 위명만큼 많은 걸 잃고 하루하루를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나에게 그녀는 웃는 얼굴로 부탁을 건넸다.
"제 쪽을 보며 웃었는데 기분이 나빠요. 절 비웃은 거겠죠?"
부모의 원수를 갚아 달라던 것에서 시작되었던 그녀의 부탁이 이제는 자신 쪽을 바라보며 웃는 이를 죽여 달라는 한없이 낮은 것으로 변해 있었다.
다만 그 상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이번에 그녀가 죽여 달라 부탁한 상대는 마교의 소교주였으니까.
단순히 무공으로만 본다면 소교주가 내 적수가 될 리 없었다. 문제는 그를 건드린다는 건 곧 마교에 전면전을 선포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거기에 다른 곳도 아닌 마교 내에서 소교주를 호위하고 있을 수십의 절정고수들을 제거하고 일을 끝낸다는 것 또한 제아무리 나라고 한들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다.
성공하지 못할 거라 말하는 나를 향해 내민 그녀의 손에는 한 자루의 검이 들려져 있었다.
무엇보다 눈을 끄는 것은 검의 손잡이였다.
검은 빛이 감도는 손잡이에는 악귀의 형상이 새겨져 있었고,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나는 한눈에 이 검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중원에 남아 있다는 일곱 개의 신병이기인 칠신기(七神器). 이 검은 그 칠신기의 하나인 천인혼(千人魂)이 분명했다.
천 명의 혼을 담아 만들었다는 전설에 어울리는 으슬으슬한 분위기에 나는 압도당하고 있었다.
주인을 스스로 선택한다는 말까지 있는 무기인 만큼 보통 사람은 천인혼을 쥐는 것만으로도 넘쳐흐르는 기운을 견뎌 내지 못하고 불구가 되어 버린다.
그런 위험한 무기를 나는 마치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망설임 없이 쥐었고, 큰 고통이 따르긴 했지만 결국 손아귀에 있는 천인혼과 하나가 될 수 있었다.
웅웅 울리는 천인혼을 쥐고 서 있는 내게 그녀가 말했다.
천인혼이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고.
그리고 그녀의 말은 맞았다.
천인혼을 손에 넣고 더욱 강해진 나는 단신으로 마교로 들어갔다.
그렇게 나는 무림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을 벌이고야 말았다.
마교의 소교주는 내 손에 죽었고, 그를 호위하는 사십팔 명의 호위전 무사들 또한 모두 베었다.
어디 그뿐이랴.
나오는 길목을 막아섰던 마교를 대표하는 정예 부대 세 개를 단신으로 쓸어버림으로써, 수백 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단 한 번의 침략조차 당하지 않은 걸 자랑하던 그들의 역사에 다시없을 오점을 남겼다.
마교를 뒤집어 버린 나를 사람들은 천하제일인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모두가 우러러본다는 천하제일인이 되었지만 그 누구도 날 존경하지 않았다. 오히려 날 증오하며 손가락질했다.
나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사람을 죽이는 살인귀와도 같았으니까.
그리고 그 무렵 나의 형상은 괴물이라는 말 말고는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끔찍했다.
거북이의 등껍질처럼 손과 얼굴은 딱딱해졌고, 전신의 피부는 마치 메마른 논바닥을 연상케 할 정도로 쩍쩍 갈라져 있었다.
비가 오던 늦은 밤.
연무장에 홀로 있던 내게 그녀가 나타났다.
"먹어요. 당신을 위해 가져왔어요."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제외하고는 매번 받기만 했을 뿐, 나에게 무엇 하나 주지 않았던 그녀가 내게 내민 첫 선물이었다.
직감했다.
이건 위험하다고.
내 정신은 외치고 있었지만 분하게도 몸은 언제나처럼 그녀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정체불명의 단환을 받아 입 안에 넣었고, 그것은 순식간에 입 안에서 녹아 사라졌다.
그녀가 건넨 단환을 먹은 대가는 그리 오래지 않아 찾아왔다.
밀려드는 오한, 덩달아 평상시 찾아들던 고통이 몇 곱절은 되어 전신을 뒤덮었다.
입에선 피가 터져 나왔고, 눈앞은 뿌옇게 변해 갔다.
부들부들 떨며 피를 토하고 있는 나에게 슬며시 다가온 그녀가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댄 채로 속삭였다.
"당신 얼굴이 너무 징그러워요. 더는 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요. 그러니까 이러는 거예요. 이해하죠?"
그녀와 나의 거리는 지척.
아주 손쉽게 목을 비틀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음에도 불구하고, 내 손은 그녀의 목을 향해 매우 느릿한 속도로 다가가고 있었다.
내 의지를 몸이 억지로 짓누르고 있는 것처럼.
손가락 끝이 가까스로 그녀의 목젖에 닿은 그 순간 그녀가 들어섰던 문으로 일련의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대략 스무 명 정도의 무인들이었는데 그들의 뒤편으로 검은 피풍의(避風衣)를 머리까지 뒤집어쓴 수장으로 짐작되는 자가 나타났다.
그녀는 뒤편으로 물러섰고, 동시에 스무 명에 달하는 그들의 공격이 쏟아졌다.
나는 독에 중독당해 제 힘을 쓰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들과 맞서야만 했다.
그들은 생전 처음 보는 이들이었다.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전혀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로 구성된 무리는 하나하나의 실력이 천하에서 적수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빼어났다.
개중에 긴 피풍의를 뒤집어쓰고 있는 자의 무공은 특히 두드러졌는데 본래의 실력을 쓰지 못하는 지금 상태로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고수였다.
본래 힘의 반절 정도밖에 쓰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적의 절반 이상을 죽였다.
그렇지만 그것이 나의 한계였다.
피풍의를 뒤집어쓴 자의 손에서 날아든 장력이 내 가슴에 적중했고, 동시에 날아든 검이 내 다리를 잘라 버렸다.
나는 더는 버틸 수가 없어 무너져 내렸다.
바닥에 나뒹구는 나를 향해 검은 피풍의의 사내가 성큼 다가왔다.
이미 연무장은 박살이 난 지 오래인지라 쏟아지는 비를 정면으로 맞으며 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한없이 초라할 것이 분명한 나를 그자는 내려다보고 있었다.
긴 장포로 얼굴을 가리고 있고, 시야가 점점 뿌옇게 변하고 있는 탓에 얼굴은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슬쩍 드러난 입꼬리에선 명백한 비웃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이렇게 만든 게 우리라지만 정말 역겹게도 생겼군."
흉물스럽게 망가진 내 얼굴을 바라보며 말하는 그의 말에 나는 일순 의문이 들었다.
우리? 우리라고?
허나 내 의문은 길어질 수 없었다.
그가 이해가 안 간다는 목소리로 말을 잇고 있었다.
"고작 이런 놈이 뭐가 무섭다고 어르신은 이렇게 긴 시간 동안……."
말을 마친 그는 손에 들린 검을 치켜들었다.
죽음을 목전에 둔 그 순간 날 내려다보며 싸늘하게 웃는 그의 마지막 말이 내 귓가에 박혔다.
……병신 같은 새끼.
* * *
벌떡.
소스라치게 놀란 사내가 침상에서 황급히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긴 경련과 함께 몸에선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깨질 것 같이 아픈 머리를 손으로 감싸 안고 있던 그는 뭔가 이상한 점을 느꼈다.
손에 닿는 감촉이었다.
까끌까끌하고 뭉개진 얼굴이 만져져야 하거늘 손에선 이질적인 느낌이 들고 있었다.
놀란 사내가 황급히 침상 옆에 위치하고 있는 거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이내 자신의 얼굴을 확인한 그의 눈동자가 커졌다.
거울 속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무척이나 뛰어난 외모의 사내였다.
놀라 경직된 얼굴과는 달리 눈동자에서는 생기가 흘러넘쳤고, 사내다우면서도 깔끔하게 떨어지는 턱 선은 그의 외모를 더더욱 빛나게 만들었다.
부드러움 속에 왠지 모를 날카로움이 느껴지는 그런 인상의 사내.
거울에 비치는 건 너무도 당연하게 자기 자신이었다.
허나 그 당연한 사실에 사내는 놀라고 있었다.
"얼굴이……."
더듬더듬.
믿을 수 없었다.
녹아 문드러졌던 얼굴이 언제 그랬냐는 듯 새하얀 빛을 토해 내고 있었으니까.
그뿐만이 아니었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감촉, 그리고 거울을 통해 보이는 앳되어 보이는 외모까지.
이십대 초반의 자신, 젊었을 때의 천무진(天霧鎭)이 거울에 비치고 있었다.
"젊어졌어?"
망가졌던 얼굴이 회복된 것만으로도 모자라 젊어지기까지 한 상황에, 천무진이라는 이름의 사내는 지금 일어난 이 모든 일들에 대해 놀람을 금하기 어려웠다.
회복된 자신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던 그는 곧 거울에 비치는 주변의 것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익숙한 주변 모습에 천무진은 황급히 고개를 돌려 방 내부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는 그 모든 것들이 낯익다.
방의 구조에서부터 시작해서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가구들과 장식들까지도.
이곳은 다름 아닌 자신이 그녀와 만나기 전의 젊은 시절 머물렀던 거처였다.
젊어진 얼굴과 과거 머물렀던 거처까지.
그간 겪어 왔던 모든 것이 꿈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이내 천무진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그 긴 시간 동안 느껴 왔던 고통들은 한낱 꿈이라는 말로 넘어가기엔 너무도 지독했다.
오히려 지금이 꿈이라면 모를까 그녀와 만났던 시간들이 모두 거짓일 리가 없다.
믿을 수 없는 현실에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곧바로 문 쪽으로 달려갔다.
벌컥!
힘차게 문을 열어젖히는 순간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에 순간 너무도 눈이 부셨다.
천무진은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선 채로 손을 들어 올려 쏟아지는 햇살을 막았다.
눈부신 햇살이,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이 그에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지금 너는 살아 있다고. 이것은 꿈이 아니라고 말이다.
이 모든 감각들이 몸으로 스며드는 순간 그는 확신할 수 있었다.
‘살아 있다. 나는 지금…… 살아 있다.’
기분이 묘했다.
마치 수십 년 만에 햇살을 맞이한 것처럼 벅찬 감정이 치밀어 올랐으니까.
정면에서 쏟아지는 햇살에 점점 익숙해지기 시작했는지 찌푸리고 있던 표정을 풀던 천무진은 이내 자신이 자리하고 있는 장원을 살폈다.
어릴 때부터 살았던 추억의 장원.
자신이 떠나고 몇 년 후에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변했다는 말을 전해 들었던 터다.
그랬던 이곳이 자신의 기억과 하나도 다를 게 없는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는 걸 보는 순간 그는 확신할 수 있었다.
돌아온 건 자신의 몸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시간이…… 과거로 돌아와 있었다. 그녀와의 모든 일이 시작되기 전으로.
죽지 않은 것으로도 모자라 시간까지 돌아왔다는 걸 알아차린 천무진은 머리가 복잡했다.
모든 것이 상식적이지 못했으니까.
과거로 돌아왔다? 대체 왜? 그리고 어떻게?
고민했지만 답이 나올 리 만무했다.
하지만 이것은 현실이었고, 지금 그에겐 왜 이렇게 됐느냐는 답이 없는 고민을 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바로 죽기 전 자신의 모습에 대한 의문이었다.
왜였을까?
대체 왜 그녀의 말에 자신은 이유도 없이 따르고만 있었던 걸까?
길거리에 다니는 모르는 사람을 붙잡고 묻는다면 열에 아홉 이상은 분명 이리 말할 것이다.
그녀를 사랑하니까 그런 거 아니냐고.
그랬기에 스스로에게 다시 묻는다.
사랑? 정말 사랑 때문이었을까?
분명 그녀의 모든 명령에 따랐지만…… 글쎄.
단 한 번도 그녀가 보고 싶었던 적도, 그녀 때문에 마음 아팠던 적도 없었는데 이게 정말 사랑이었을까?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왜 자신은 마치 뭔가에 홀린 것처럼 그녀의 모든 말을 따르고만 있었던 것일까.
문제는 그 당시 자기 자신 역시 이상하다 여기면서도 왜 그러고 있는지에 대해 깊은 고민조차 하기 힘들었다는 거다.
의문은 가지면서도 생각을 이어 가지 못했던 그때와 지금은 엄연히 달랐다.
그 당시엔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의문이 머리를 가득 채워 왔다.
그건 다름 아닌 섭혼술(攝魂術)이었다.
‘설마 섭혼술에 당했던 건가?’
영혼을 조종하는 술법인 섭혼술이 아니라면 설명되지 않는 일들뿐이다.
하지만 단순히 그리 결론 내릴 수 없는 이유는 다름 아닌 자신의 무공 실력 때문이다.
섭혼술이라는 건 일정 수준 이상의 무인에게는 쉽사리 통하지 않는다.
강호에 알려져 있는 섭혼술 정도로 그렇게 긴 시간 동안, 하물며 천하제일인이 되었을 때까지 조종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런데 그녀는 그 불가능한 일을 해냈다.
아무런 힘도 없는 여인처럼 보였지만 그녀는 자신에게 사라진 전설의 무공들은 물론이거니와, 천인혼이라는 칠신기의 하나를 쥐여 주기까지 했다.
보통 여인이 그 모든 것들을 준비했을 리 없다. 그 말은 곧 천무진이 모르는 모종의 무엇인가가 그녀에게 있었다는 소리다.
처음부터 계획된 만남.
그리고 그 계획되어진 장기판 위에서 그는 하나의 말처럼 그녀의 의지대로 움직여 왔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의문은 또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대체 왜 자신이었던 걸까?
훗날 천하제일인이 되긴 했지만 그녀를 만났던 당시엔 그보다 강한 이가 꽤나 많았다.
그런 이들이 아닌 자신을 노렸던 이유를 아직도 모르겠다.
혹시 처음부터 자신의 정체를 알고 접근했던 것은 아닐까?
허나 분명한 건 굳이 그런 번거로운 일을 한 이유가 있을 거라는 것이다.
긴 시간을 들이면서까지 다른 이도 아닌 자신을 이용해야만 했던 이유가.
만약 지금 자신의 생각이 모두 맞는다면?
그리고 그 빌어먹을 운명이라는 놈이 다시금 반복되는 것이라면…… 이번에도 그녀는 자신을 찾아올 것이다.
자신을 조종하기 위해서.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 끔찍한 인형과도 같았던 삶 또한 반복되고야 말 게다.
천무진은 말없이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새하얀 손바닥 위로 비참하게 죽어야만 했던 예전의 기억이 겹쳐 오고 있었다.
붉은 피가 넘실거리던 손바닥.
지독한 피 냄새가 아직도 코로 밀려든다는 착각이 들 정도다.
이 손으로 얼마나 많은 이들을 죽였던가.
무인뿐만이 아니었다.
힘없는 여자와 노인, 그리고 심지어 어린아이조차도 그녀의 부탁이라면 가리지 않고 죽였다.
일말의 죄책감조차 느끼지 못하던 의지도 없는 살인 병기.
그저 그녀만의 꼭두각시로 살아왔고, 후회조차 할 수 없었던 그 잔인한 시간들이 떠오르자 숨이 막혀 옴과 동시에 구역질이 치밀었다.
벽에 손을 짚어 몸을 지탱한 채로 천무진은 헛구역질을 해 대기 시작했다.
"우욱, 욱!"
간신히 속이 조금 진정되자 천무진은 손으로 거칠게 입 부분을 움켜잡았다.
방금 전까지 헛구역질을 해 대던 그였지만 눈동자에서는 섬뜩한 빛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그 모든 걸 되돌릴 기회.
자신이 자신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그때와 같은 삶을 다시금 살아 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
으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꽉 깨문 천무진이 강하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번엔…… 당하지 않는다.’
이번엔 자신이 먼저 그녀를 찾는다.
그녀가 자신을 찾아내기 전에.
자신이 먼저 그녀를 찾아야겠다는 결단을 내린 천무진은 곧바로 생각을 이어 나갔다.
이 넓은 중원에서 전혀 알려지지 않은 한 사람을 찾는다는 건 혼자만의 힘으론 불가능하기도 했고, 그만큼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녀의 신상 정보가 필요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그녀에 대한 모든 것을 정리한다.
그리고 중원에 있는 정보 단체들을 통해 그녀를 찾아야 했다.
열려 있는 문을 통해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간 천무진은 곧바로 자신의 책상으로 달려갔다.
마음이 급했는지 옆에 놓여 있는 휴대용 먹물을 벼루에 채워 넣은 그는 곧바로 붓을 손에 쥐었다.
붓을 쥔 손이 종이 위로 향하는 그 찰나였다.
그녀의 얼굴과 특징을 그리려고 하던 천무진은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붓을 든 손이 미약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흰 종이에 점 하나조차 찍을 수 없었으니까.
슬며시 열린 천무진의 입가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대체……."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도, 이름조차도.
짧은 순간 보았던 자신을 죽이기 위해 달려든 무리의 얼굴조차 기억이 나거늘 십 년을 넘게 보아 왔던 그녀의 얼굴이 온통 어둠에 휩싸여 있다.
기억나는 건 오직 하나.
―부탁이 있어요.
언제나 부탁을 해 오던 그녀의 목소리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