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강상 혈투 (2)
바로 이때, 키 작고 통통한 자의 입이 벌어지며 고막이 찢어질 듯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돛을 내려라!"
갑판 위의 선원들은 겁에 질려 선장을 바라보았다. 목소리만 들어도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자임을 느낀 것이다.
주성진은 육숭을 바라보았다.
"일단 제가 나서보겠습니다."
"그렇게 해보시오. 선장에게는 내가 저들의 정체를 말하리다."
주성진은 소리친 자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댁들은 누구길래 배를 막고 있는 것이오?"
"그러는 네놈은 누구냐?"
"나야 이 배의 손님이지, 누구겠소이까? 그리고 내가 먼저 물었소?"
문용강은 주성진의 이모조모를 살폈다.
"웃기는 놈이군. 그렇게 빨리 죽고 싶더냐?"
"죽긴 내가 왜 죽소?"
주성진은 지긋이 상대를 바라보다가, 문득 그 옆의 자줏빛을 옷을 입은 여인과 눈길을 마주쳤다. 이목구비가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순간 그녀의 눈 속으로 이채가 스친다.
"오라버니 잠깐만요!"
여인은 문용강을 제치고 전면에 나섰다. 그녀의 붉은 입술이 벌어지며 옥 같은 치아가 살짝 드러난다.
"호호, 내 먹잇감이네."
십여 장의 거리를 격하고도 그녀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그녀가 목소리에 내공을 실은 거였다.
'웃기는군.'
주성진은 그녀의 말을 바로 알아들었다. 전생의 삶이 없다면 단순히 대결 상대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주성진은 산전수전 다 겪은 몸이다.
"내가 그리 좋소?"
"네가 좋은 게 아니라 네 몸뚱이가 마음에 든다. 난 천월랑이야. 반드시 기억하라고."
"나는 당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데, 어떡하오?"
그녀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흥, 두고 보자."
그녀가 다시 뒤로 물러나자 문용강이 다시 전면에 나섰다.
"아주 간덩이가 큰 놈이군, 넌 이제 살아도 산 목숨이 아닐 것이야. 하하."
"살아도 산 목숨이 아니라니, 내가 노예라도 된다는 거요?"
"그래, 요놈아. 곧 살려달라고 애원할 테니까."
주성진은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저들이 저리 큰소리를 치는 것을 보니 뭔가가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느낌이 안 좋아, 하여튼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구나.'
해적선에선 세 사람이 저들끼리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작전 변경하자, 순순히 항복할 것 같진 않아."
"그래요. 오라버니, 뭐 그래도 내 마음에 드는 저자는 바로 죽진 않을 거예요. 물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제가 잡아야겠어요."
"그건 네 마음대로 하고 빨리 일을 진행하자."
그리고 얼마 후, 문용강의 입술이 벌어지며 섬뜩한 명령이 떨어졌다.
"모조리 수장시키도록!"
그러자 그의 명명에 갑판에 서 있던 자들이 일제히 활을 치켜든다. 양쪽의 해적선도 그의 명령에 일제히 호응하고 있었다.
주성진은 그들의 활을 유심히 살폈다. 일반 활과 전혀 다른 형태다.
'저건, 서역에서 쓰는 활이 아닌가. 십자궁이라고 했던가…….'
십자궁은 활을 나무 막대 위에 올려 몇 가지 장치를 통해 보통의 활보다 긴 사정거리와 강한 관통력을 가지도록 개량한 무기였다. 다만 보통의 활보다는 장전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려 연사력은 떨어졌다.
주성진의 눈썹이 역으로 휘어졌다. 저들이 장전한 화살에 수상함을 발견한 것이다.
'저건 뭐지…….'
화살 끝에 살촉 대신 매달린 길이 한 뼘가량의 갈색 원통을 본 것이다.
"주 상단주, 저건 고약한 무기요!"
육숭이 소리쳤다.
"뭐라고요?"
"폭시 또는 화시라고 불리는 무기요. 다시 말해 화약이 장전되었단 말이오."
주성진의 눈이 동그래졌다.
"화약이라고요?"
"지금 그걸 따질 때가 아니오. 어서 피해야 하오!"
육숭의 다급한 음성에 주성진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무공을 지닌 자신들이야 몸을 날려 강물에 뛰어들면 그만일지도 모른다. 물론 수영을 잘 한다는 전제 하에.
하지만 여객선에는 많은 승객이 객실에 있었다. 그들은 지금 갑판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알지 못하다가 급작스레 봉변을 당할 수 있었다.
'이런 제길, 나 혼자로는 역부족일 것 같은데…….'
주성진은 급히 고개를 돌려 일행들을 바라보았다.
"승객들을 부탁합니다. 하다못해 나뭇가지라도 잡고 있으면 강물에서 익사하지는 않을 겁니다."
"안되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오. 그러지 말고 승객들을 대피시키면서 우리도 탈출 합시다."
"저라도 막아야 그나마 피해를 줄일 수 있을 겁니다. 그럼……."
주성진이 힘껏 갑판을 박차며 날아올랐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쏴라!"
문용강의 지시와 동시에 매서운 파공성이 합주하듯 울려 퍼진다.
쐐액……!
순식간에 화살들이 허공을 자욱하게 메워버렸다.
그냥 화살이라면 검으로 막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충격에 폭발하도록 만든 폭시를 가까이에서 요격할 수는 없었다. 폭발하기라도 한다면 본인은 물론 여객선도 피해를 보기 때문이었다.
주성진은 자신의 기를 발산해 주변의 공간을 장악해볼까 생각해 봤다. 이는 초고수만이 생각해 낼 수 있는 발상이었다.
'음, 가공할 속도로 날아오는 폭시들을 제어하려면 내력 소모가 막대할 거야. 방어만 하다간 결국 필패라고.'
주성진은 뇌리에 떠오른 생각을 곧장 지워버렸다.
이기어검도 생각해 봤지만, 그 또한 공력 소모가 심하긴 마찬가지였다.
'최후의 수로 남겨놔야겠어.'
적들을 단숨에 제압해야 하는데 거리는 멀었고, 더군다나 그들은 분산되어 있었다.
주성진이 생각해 낸 방법은 바로 최대한 검기를 길게 뽑는 것이었다.
가능한 여객선에서 멀리 떨어져서.
공중에 날아오른 주성진이 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휘익!
길게 뻗어 나간 검기에 화살들이 우후죽순 잘려나가고 물에 떨어지며 폭발하기 시작했다.
꽈아앙……!
섬광과 폭음이 동시다발로 터져 나왔다.
허공을 향해 솟구치는 굵은 물기둥을 보면 누구나 폭시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휴, 일단은 성공이다. 저들이 다시 화살을 장전하려면 시간이 좀 필요하니까.'
주성진이 잠시 시간을 번 사이 일행들은 여객선의 선원들과 합심하여 승객들을 탈출시키기 네 여념이 없었다.
폭발음에 아비규환이 따로 없다. 승객 대다수는 놀라 갑판 위로 올라온 상태였다.
"까아악!"
"살려주세요!"
승객 중 자맥질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갑판에서 뜯어낸 나무판자를 앉고 물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대다수는 두려움에 떨고만 있을 뿐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육숭은 소리쳤다.
"가만있으면 죽습니다. 그나마 물에 뛰어드는 게 최선입니다."
그래도 대부분 요지부동이다. 시간이 없었다.
"실례하오."
육숭은 승객들을 부드럽게 당겨 배 밖으로 내던지기 시작했다.
"당황하지 마시오. 그대들을 구조할 사람들이 있으니……."
그들은 임호풍, 천상일 그리고 선원들 일부였다. 미리 비상용 나룻배로 타고 여객선을 떠난 그들은 물에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을 건져 올릴 준비를 마쳤다.
그렇다고 모두를 구할 수는 없다. 그저 최선을 다할 뿐이다.
마지막으로 구명선이 꽉 차면 그들은 배를 버리고 양보할 생각이었다.
잠시 후 또다시 한 무더기의 화살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이번엔 날아오는 방향이 제각각이었다.
적들은 주성진의 존재를 의식했고 작전을 바꾼 거였다.
최대한 막는다고 했지만 이미 몇 대의 화살은 주성진을 지나쳐 여객선에 떨어지고 말았다.
꽝! 꽝!
"아아악!"
배의 나뭇조각들이 사방으로 비산한다.
보지 않아도 많은 수의 승객들이 죽거나 다쳤을 것 같았다.
주성진은 이를 악물었다.
'음, 안 되겠다. 놈들의 배를 줄이는 수밖에 없을 듯하구나.'
주성진은 이기어검을 쓰기로 결심했다. 공력 소모가 극심해 보류하고 있었지만, 방법은 그것 밖에 없었다.
'양옆의 적선 두 척을 절단 내고 정면의 적선은 빠르게 돌파한다.'
주성진은 연속 두 번 이기어검을 펼치려 했다. 사실 그게 한계이기도 했다.
주성진의 검이 스르륵 손을 떠나고 있었다.
쇄애액!
그리곤 화살보다 빠르게 허공을 유영하기 시작한다.
적선에서 화살을 재고 있던 인영 하나가 눈이 부신 듯 눈을 깜빡였다.
'뭐지, 저 빛줄기는…….'
그가 오인하고 있는 빛줄기는 다름 아닌 주성진의 검이었다.
'어어, 내게로 온다!'
스걱!
그게 그의 마지막 내뱉는 말이었다. 주성진의 검이 그의 목을 스쳐 지나가 적선을 가로로 완전히 두 동강 내고 말았다.
꽈지직!
잘린 틈으로 물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살아남은 자들이 허둥대기 시작했다.
우왕좌왕 난리가 아니다. 그들은 배가 한순간에 갈라질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주성진은 여세를 몰라 계속 검을 조정하기 시작했다. 반대편으로.
꽈지직!
물보라가 거세게 튀어 오르며 또다시 배가 갈라지고 있었다.
한편 힘이 다한 주성진은 하염없이 추락하고 있었다. 간신히 검을 회수하긴 했지만, 공력이 바닥을 드러낸 거였다.
그대로 낙하한다면 반파된 여객선의 갑판 위일 거였다.
주성진은 눈을 아래로 깔며 여객선을 바라보았다.
'음, 화탄 세례에 가라앉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군. 그래도 곧 침몰하겠지. 철갑으로 만든 배라고 한들 견딜 수 없을 것이야. 하물며 목선이야 오죽할까…….'
갑판 위에 주성진의 발이 닿을 무렵, 주성진의 귀가 빳빳이 곤두섰다.
쐑!
'이크, 화살이다!'
폭시는 배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제길, 피하자!'
주성진은 갑판에서 몸을 뒹굴었다.
꽝!
폭시는 배의 정면 아래부위를 강타하며 터졌다. 배의 나뭇조각이 튕겨서 사방으로 흩날리고 거대한 물기둥이 솟아올랐다.
뜨거움이 먼저였는지 물벼락이 먼저였는지 구분할 수 없다.
머리가 윙윙거릴 정도의 충격파가 주성진의 몸을 후려쳤다.
신형이 흐트러지고 몸을 가누길 힘들었다.
얼마나 뒹굴었는지도 몰랐던 그가 이물질에 가로막혀 겨우 몸을 멈추었다.
"헉!"
그건 비참하게 죽은 사람이었다.
주성진은 얼굴을 찡그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주변에 배의 잔해와 뒤엉켜 수많은 시신이 널브러져 있었다.
미처 몸을 피하지 못한 승객들이었다.
'음, 목불인견이 따로 없군.'
으드득!
주성진은 자신도 모르게 턱 근육이 한껏 땅겨지는 것을 느낀다.
'가만두지 않겠다.'
빠르게 몸을 살피니 소진됐던 내력이 조금씩 돌아오고 있었다.
주성진은 허리의 탄력을 이용해 벌떡 일어나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리곤 검을 치켜들고 도약했다.
'가자. 적선으로!'
주성진의 신형이 빠르게 앞으로 향했다.
하나 그래도 단 한 번의 도약으로는 거리상 버겁다.
주성진의 신형이 다시 아래로 내려가더니 둥둥 떠다니는 나무 조각을 발판 삼아 또다시 힘껏 뛰어 올랐다.
적선에서 화살을 장전하던 자들의 얼굴이 샛노래졌다.
그 순간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뭐해 자식들아! 갈고리를 던지라고!"
"아, 네!"
한꺼번에 다섯 개의 갈고리가 주성진에게 쏘아져 온다.
갈고리는 수적이나 해적이 가장 신경을 많이 써서 연마하는 무공 중 하나였다.
포획하려는 배에 올라타기 위해서는 갈고리를 다루는 기술이 능수능란해야 했다.
주성진의 눈이 희번덕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