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9화 무림 풍운
그 순간 당천기가 그의 머리를 쥐어박는다.
"녀석아, 민감한 질문은 무림 법도에 어긋나는 법이야."
"아, 네……."
그가 구박을 받자 주성진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말이죠, 저에 대해 딱 두 가지만 말씀드릴게요. 저는 기연을 얻었습니다. 내공과 무공에 있어서 말이죠, 이젠 충분하십니까?"
"……."
당학수는 말은 못 하고 내심 주성진이 너무 부러웠다.
나름 그도 명문 세가에 태어나 복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주성진을 보니 이건 비교 자체가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하. 기연이라, 난 어느 천년에…….'
이때, 내내 주성진의 눈치를 빼꼼히 살피던 이곽춘이 주성진의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자 빠르게 입을 놀렸다.
"음음, 우리 거래 하나 합시다. 만일 비검술로 산짐승을 잡는다면 그 대가로 그대의 사업에 도움이 되는 정보를 알려 주겠소."
그는 당천기와 달리 지금껏 계속 주성진의 비검술과 음한지력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는 개방의 인물답게 확인해야 할 게 있으면 반드시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유형인데 대놓고 말은 못 하고 그간 속앓이를 하고 있었던 거였다.
"그러니까 공개적으로 시전해 달라는 말씀이군요?"
그가 얼른 고개를 끄떡인다.
"맞소이다, 하면 보상으로 내가 녹림의 동태를 알려주겠소. 그 안에는 중원에 산재한 산채들의 위치와 두목의 이름과 무공 그리고 산적들의 수가 망라되어 있소이다. 정확히는 6개월 전 것이라 최신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정도의 정보만 알고 있어도 산적 놈들에게 물건을 뺏기는 일은 현저히 줄어들게요."
들어보니 대단한 정보다. 하지만 주성진으로서는 이런 정보를 초면에 쉽게 이야기한다는 것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음, 아마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정보일 것이야, 아마 녹림에서도 기밀이 유출된 것을 알고 대책을 세웠겠지. 뭐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흐름이나 추세는 알 수 있으니까.'
"그렇게 하시지요, 그러면 장소를 옮겨야겠네요. 아, 참. 어떻게 소식을 빨리 들으실 수 있었나요? 여기가 성도에 가까운 곳이라 해도 성도는 아닌데 말이죠."
주성진은 때마침 당천기와 이곽춘이 나타난 것을 지적한 거였다.
그러자 당천기가 주성진을 바라보았다.
"저 친구, 이곽춘이 온다기에 내가 성도 외곽으로 마중 나왔소이다. 그래서 빨리 소식을 접하게 된 거요."
"아하……."
"사실 저 친구와 나는 오랜만에 만나면 으레 회포를 푸는데 여기 술값이 성도보단 많이 저렴하다오. 주머니가 가벼운 나로서는 회포를 풀기에는 여기만 한 데가 없었소이다. 그리고 알다시피 개방도들이 절대 돈 내는 일은 없으니까, 게걸스럽게 많이 먹기도 하고……."
주성진은 그의 말을 들으며 빙그레 웃었다,
'이번에 내가 내는 것으로 할까, 이런 것도 상술이니까.'
"아. 그렇군요, 그리고요, 제가 여러분을 대접하도록 하겠습니다. 뭐 저 때문에 벌어진 일은 아니지만 여기 객잔의 매상도 올려주고, 겸사겸사… 거기에 더해 파손된 물품들도 제가 변상해야겠지요."
당천기는 당가 출신이 저지른 일이라 당가에서 모든 걸 변상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뜻밖에 횡액을 당한 사람까지 포함해서…….
당천기는 일단 주성진의 뜻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절대 주성진의 공을 잊은 건 아니었다.
'가주께 보고해서 그에게 적절한 사례를 해야겠어. 따지고 보면 그가 우리 가문을 배신한 자를 처단하지 않았다면 이번 회갑연이 난장판이 되었을 것이야. 당가의 위신이 추락하는 건 차지하고 많은 이들이 죽임을 당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야.'
그는 당가의 앞마당에서 참변이 일어났다고 상상해보았다. 생각만 해도 모골이 송연해진다.
'어구야.'
그는 대형 사고를 미연에 방지한 주성진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 ? ? * ? ? *
시간이 흘러 저녁이 되었고 낮에 큰 난리를 겪었던 식당은 다시 활기를 되찾고 있었다.
와글와글…….
주성진은 당천기와 이곽춘과 같은 탁자에 앉아 술과 음식을 들고 있었다.
낮에 일행들과 산에 오른 주성진은 비도술로 산토끼를 잡아 모두를 놀라게 했다.
그리고 죽은 산토끼의 내부가 냉기로 뒤덮여 있다는 사실도 다시금 확인했다.
"자, 건배합시다."
당천기의 제창에 모두 잔을 부닥친다.
"건배……."
"건배……."
분위기는 점점 무르익어 갔다.
주성진이 술을 마시고 고기 한 점을 집으려는 순간 이곽춘이 말을 걸어왔다.
"이거 정작 주 상단주가 성도에 왜 오게 되었는지를 물어보지 않았구려, 허허."
"아, 제가 비단 장사를 좀 해보려고요. 그래서 성도에 가는 중입니다. 아시다시피 사천의 특제비단은 촉금이라하여 나라 안팎으로 유명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고급 비단을 사러 왔다는 말이오?"
주성진은 고개를 끄떡였다.
"그렇습니다. 대량으로 비단을 사서 중원 전역과 외국에 유통할 생각입니다."
"하하, 그렇소이까, 대단하오이다. 음 사실 내가 개방 출신만 아니라면 비단옷을 입어 보는 건데… 차마 그럴 수는 없고."
그의 푸념 아닌 푸념에 주성진이 빙그레 웃었다.
"방규에 비단을 입으면 안 되나 봅니다, 하하."
그가 곧바로 손을 내젓는다.
"아니요, 방규에 그런 건 없소. 아 그리고 다들 우리를 오해하는데 몸을 씻거나 깨끗한 옷을 입지 말라는 방규도 없소이다. 다만 우리는 전통에 입각해서 각자 거지의 본분을 지키고 있다오. 상식적으로 남에게 불쌍하게 보여야 작은 떡 조각이라도 얻어먹지 않겠소이까."
"……."
"한데 말이오, 이런 생활도 버릇이 되면 또 그만큼 편한 게 없소이다."
"……."
"또한, 잠자리도 따뜻한 날에는 하늘을 이불 삼아 땅을 베개 삼아 자면 그만이고, 주인 없는 개는 잡아다 보신탕을 해 먹으면 그야말로 몸보신에 최고이지… 하하."
이곽춘이 입맛을 다시는 걸 보며 주성진은 빙그레 웃는다.
"아, 그런가요. 뭐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각자의 마음이 즐겁다면 즐거운 게지요. 그런데 장로님, 요즘 무림은 어떤가요? 제가 보기엔 썩 좋아 보이진 않던데요."
"음, 그대에게 들은 것도 있고, 우리가 파악한 것도 있고, 하여튼 좀 시끄러워질 것 같소이다. 난, 이 일련의 일들에 음모를 꾸미는 검은 배후가 있다고 생각하오. 혈교나 강시의 재출현도 그렇고 산적, 수적들이 한꺼번에 날뛰는 것도 그렇고, 동시다발적으로……."
그러자 당천기가 이의를 제기한다.
"너무 앞서가는 거 아냐? 그들 뒤에 배후가 있다고?"
"글쎄 두고 보라고. 내 예감이 벗어난 경우는 별로 없으니까. 점쟁이도 나를 보고 탄복한다니까. 그 참 좋은 일도 아닌데 내가 좀 흥분했네, 그려."
주성진이 손을 흔들었다.
"아니죠, 뭐든 미리미리 대비하는 게 좋지요. 그래야 화가 복이 될 테니까요."
그러자 당천기가 답답한지 술을 벌컥 마시고는 푸념한다.
"하여튼 잠잠하다 싶으면 무림이 다시 들끓고, 이거야 원! 돌겠네."
그러자 이곽춘이 웃으며 당천기를 바라보았다.
"이봐, 집에만 있으면 갑갑하잖아, 이런 일이 벌어져야 중원을 제집 마당처럼 돌아다니지, 안 그래?"
"음, 뭐… 한데 넌 배후가 어디라 생각하냐?"
"내가 신도 아니고 그걸 어떻게 알아……. 다만 혐의를 둘 곳은 과거 총무련 결성을 반대한 세력이 아닐까 싶은데."
주성진은 귀를 쫑긋거렸다.
그 순간 당천기의 말이 그의 귓전을 스쳐 지나간다.
"만일 그렇다면 마교가 제일 의심스러운데……."
"그야 모르지. 총무련 출현을 반대한 세력이 비단 마교에만 있었던 건 아니니까. 정파, 사파에도 극렬히 반대한 세력이 있음을 너도 잘 알잖아. 좀 과장되지만, 그들이 모여서 작당하는 것일 수도 있어, 과거의 영광을 그리워하며……."
주성진은 순간 고개를 갸웃거렸다.
'과거의 영광? 무슨 뜻이지? 과거에 잘나갔던 세력을 말하는 건가…….'
주성진이 의뭉스러운 표정을 짓자 눈치 빠른 이곽춘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게, 그대는 어려서 내막을 잘 모르겠군. 내 말은 총무련 태동 이전에 집권했던 세력과 그들의 수장을 의심한다는 뜻이라오. 가령 마교에서는 마교 제일 가문이었던 흑룡가, 사파에서는 사도련, 그리고 정파에서는 무림맹이겠지."
주성진은 고개를 끄떡였다.
'음, 그럴 수 있겠군. 무림이 혼란해진다면 과거의 질서를 그리워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날 것이고, 그러면 그들에겐 재등장할 둘도 없는 기회가 되겠지. 그렇다는 건 과거의 집권세력들이 그것을 노리고 지금의 혼란을 부추기고 있다는 것인데, 이거 좋지 않군.'
"음, 장로님의 생각이 틀리기를 바라지만 제 생각에도 흐름이 그쪽인 것 같습니다. 휴……."
"왜 그러시오? 장사에 지장이 있어서 그런 것이오?"
"네, 그렇습니다. 무림이 별개의 세계라고 하지만 혼란이 극에 달하면 일반인들에게도 자연스럽게 피해가 가겠지요, 황제도 골치 아파할 것이고."
이곽춘이 빙그레 웃는다.
"역발상은 어떻소, 나라 전체가 혼란에 빠지면 십중팔구 상계도 혼란에 빠질 것이요. 난 개인적으로 그때가 기회가 아닐까 싶은데… 그대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기존 상가들의 아성을 허물기는 쉽지 않을 거요. 한데 상계가 혼란에 빠진다면 파고들 틈이 보이지 않겠소."
"……."
"그리고 그때를 비집고 들어가는 것이오. 이는 무릇 상계뿐만 아니라 무림에도 통용되는 이야기요. 지금의 거대 문파가 지고 새로운 세력이 등장할지도 모르지, 개개인으로 본다면 새로운 영웅이 탄생하는 것이고. 뭐 혹 아오, 그대가 주인공이 될지, 아니면 말고, 하하……."
"……."
"아, 그렇다고 내가 그런 혼란을 바란다고 생각지는 마시오. 역사적으로 그렇다는 게지."
주성진은 그의 말에 공감했다.
'그의 말이 틀린 게 하나도 없어. 이거 장사면 장사! 무공이면 무공! 어느 하나 빠지지 않고 열심히 노력해야겠어.'
"장로님, 저는 사실 무림에는 별다른 뜻이 없습니다. 그저 묵묵히 제 사업을 키울 뿐이지요."
"뭐, 그대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허허. 하지만 세상사는 본인의 의지대로 가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오. 어쩌면 운명일 수도……. 내 이야기를 잠깐 하겠소. 내가 지금이야 개방에서 장로 노릇을 하고 있지만, 만일 어릴 때 사부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난 어떻게 되었겠소?"
성진은 눈을 깜빡거렸다.
'뭐야 운명의 전환인가. 내가 환생한 것처럼…….'
"난 저잣거리에서 제법 잘 나가는 소매치기였소. 어느 날 술에 취한 관리를 소매치기하다 돌아가신 사부님께 덜미를 잡혔소이다. 사부는 내가 손이 빠른 것을 눈여겨봤다면서 개방도가 되라고 하셨소. 정확히 말하면 반쯤은 협박이었지."
"……."
"나로서는 달리 대안이 없었소. 거지가 되긴 싫었지만……. 결국 그 사건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소. 저잣거리나 전전하던 나에게 복이 넝쿨째 들어온 것이지."
주성진의 그의 과거 이야기가 흥미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