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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를 읽는 한의사-103화 (103/150)

환자를 읽는 한의사 103화

윤 사장은 아침부터 과일 시장에서 상품성이 좋은 가격대 높은 과일을 직접 선별하여 양손 가득 들고는 명의 한의원을 찾아왔다.

“원장님, 그동안 저희 상인회 소속 상인들 때문에 마음고생은 하신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상인회를 대표해서 사과드리겠습니다.”

과일가게 윤 사장은 해인동 시장 골목과 명의 한의원 사이를 메우고 있던 현수막을 모두 철거한 이후 직접 명의 한의원으로 찾아와 사과의 인사를 건넸다.

그렇지 않아도 바깥에서 시끌시끌한 인부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는데, 윤 사장의 지휘하에 현수막을 철거한 모양이었다.

이제 말끔해진 골목을 보고 주민들뿐 아니라 환자들도 한의원의 이미지까지 생채기를 냈던 것들이 사라져 잘되었다며 기뻐할 정도였다.

“아닙니다. 상인회장님은 전혀 모르고 있으셨던 일인데요.”

자신이 나서서 벌였던 일도 아닌데 직접 와서 사과를 하니 재마는 손사래를 칠 뿐이었다.

안 사장이 박상철의 명함을 주면서 약간의 오해가 있던 퍼즐들이 모두 맞춰진 상태의 재마였다.

“안 사장과 이야기는 나눈 후 현수막은 이로써 모두 철거되었고요. 앞으로는 관련자 색출을 할 예정입니다.”

결코 이번 일을 가만히 두고 넘어갈 수 없다는 듯, 안 사장은 앞으로 자신이 할 일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아닙니다. 상인분들도 목소리를 내실 권리가 있는걸요. 그리고 현수막 관련해서는 제가 처리할 일도 있으니 상인회장님께서는 더 신경 안 써주셔도 됩니다.”

재마는 현수막을 건 사람이 안 사장이 아니라 정한한방병원의 박상철이라는 것을 안 이상, 자신이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저희가 너무 송구스러워서…… 앞으로 시청과 문화재 지정 문제에 대해 상인회와 대화의 자리도 적극 참여하며 문화재 지정이 하루 속히 될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연신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이는 윤 사장의 모습에 재마는 윤 사장과 똑같이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상인분들께 전혀 신경 쓰지 마시고 한의원에 진료받으러 오시라고 말씀 좀 전해주세요.”

현수막이 내걸리고, 명의 한의원과 시장 상인들 사이의 사이가 나빠진 것 아니냐는 괜한 오해로 현수막과 관련 없는 상인들도 한의원에 발길을 끊은 상태였다.

재마가 골목에서 마주할 때 치료하러 나오시라 몇 번을 말했지만, 미안하고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알겠다고 대답을 할 뿐이었다.

“네. 앞으로도 명의 한의원 이용에는 차질 없게 제가 상인회 상인들에게 문자 한 번 싹 돌리겠습니다.”

그 정도는 자신에게 맡기라는 듯, 윤 사장은 허허 웃음을 지었다.

윤 사장이 양손 가득 가지고 온 과일을 받아 든 미정과 정 실장은 두 사람의 모습을 숨죽여 지켜보고 있었다.

윤 사장이 종종 한의원에 과일을 들고 오기는 했지만, 오늘은 좀 더 크기가 좋고 상품성이 있는 과일들이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정 실장은 괜히 윤 사장이 마음을 쓰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울 뿐이었다.

“실장님, 이제 상인분들이 좀 조용해질까요?”

“쉿, 현수막도 상인분들이 단 건 아니라고 하니까 지켜봐야겠지? 그래도 너무 나쁜 분들은 아니니까.”

“에이. 그래도 시장 골목 가득 현수막이 달릴 때 아무 말도 안 했던 분들이잖아요.”

“그건 원장님이 해결하신다니까 지켜보자고.”

지금까지 상인들의 생존권을 가지고 위협한다는 현수막 때문에 애꿎은 명의 한의원이 오해를 받았다는 생각에 미정이 입술을 씰룩이자, 정 실장은 앞으로 재마가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자는 듯 미정을 다독였다.

이제 현수막에 대한 질문은 받지 않아도 될 테니, 정 실장도 한시름 놓겠다는 표정이었다.

* * *

고래고래 소리를 지를 기세로 대표실을 장악하고 있었던 박상철은 동생인 상도의 한마디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대표실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정한한방병원의 대표를 맡고 있는 동생이기에, 자신이 그곳에서 더 나섰다가는 어떤 처분이 떨어질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김 기자님.”

형인 박상철 이사를 밖으로 내보내고 성은과 둘만 대표실에 남게 되자 상도는 성은을 불렀다.

이제 둘만이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자는 뜻이었다.

“서울 강남에 이 정도 건물을 통째로 병원으로 사용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아십니까?”

“네. 대단하시죠. 강남뿐인가요. 대표님이 대표로 계시는 한방병원이 전국 방방곡곡 자리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건물이 대표님 명의의 건물이고요.”

성은은 이미 그 정도는 조사했다는 듯 대답했다.

“대표님의 사업수완뿐 아니라 건물 쇼핑에도 능력이 출중하시다는 건 뭐,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요?”

몸집이 큰 한방병원인 만큼 대부분의 병원들이 전철역과 초근접한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곳은 지역에서 땅값이 비싸기로 유명한 노른자 땅들이었고, 그 가치 또한 매매 시기부터 현시점까지 하루가 다르게 오르고 있었다.

성은은 자신에게 이런 이야기를 꺼낸 이유가 혹시 정재계에서도 자신을 밀어주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국에 수많은 한의원들, 그리고 한의사들이 소속되어 있는 한의사 협회에서도 정한한방병원 대표인 박상도라면 꼼짝을 못 하는 데에는 이런 이유도 있을 것이었다.

“역시 김 기자, 똑똑하군요. 한마디를 하면 답변이 툭툭 나오는 걸 보니. 제가 이제야 알아봤어요. 미안해요.”

상도는 자신이 이제야 김성은의 본모습을 알아봤다는 듯 미안하다며 헛웃음을 지었다.

지난번 유국장과 함께 자신을 찾아왔을 때는 그저 패기가 넘쳐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도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었지만, 이제 보니 그 이상이었다.

박상도의 한마디에 자신의 밑에 있는 기자를 단번에 내보낼 정도인 유 국장과는 달라도 확실히 달랐다.

“김 기자가 어디까지 알아보고 날 찾아왔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한방병원 이야기를 꺼낸 건 이 정도의 병원을 경영하려면 병원 내부에서 사소하게 결정하는 것에 대한 결정권은 내게 없다는 뜻입니다.”

상도는 깔끔하게 자신에 대해 정리를 하고 싶은지, 직접 자신의 입으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홍보팀의 팀장을 제 조카로 올린 이유가 뭘까요? 지금까지 외부 홍보 건은 대부분 형님이 맡아서 잘해주셨으니 그 뒤를 이어 조카가 하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믿고 맡겼을 뿐이죠.”

“박상철 이사님이 잘해오셨다고요?”

“김 기자는 지금 정한한방병원의 이미지가 와닿지 않습니까? 협회에서 일을 해서 충분히 알 것이라 생각하는데.”

상도는 피식 웃었다.

똑똑한 김성은이 자신의 말을 잘 알아들었으면 한다는 뜻이었다.

“일을 잘해온 게 아니라 포장을 잘해온 게 아닐까요? 부정부패는 꽁꽁 감출 수 있게 포장을 잘한 일을 말씀일까요?”

“병원이 이 정도 크려면 사업수완만 좋아야 할까요? 환자들의 평가가 그 이상입니다. 한국에서 한의원의 이미지가 어떻습니까? 정한한방병원의 이미지가 새롭게 한의원의 이미지를 만들고 있습니다.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김 기자는?”

성은에게 따지는 듯한 박상도의 물음에 성은은 선뜻 대답하기 힘들었다.

이 부분은 이재마와도 정한한방병원에 대한 많은 자료들을 앞에 두고 고민했던 이야기였다.

정한한방병원의 이미지가 모두 거짓이라는 것이 폭로된다면 지금까지 쌓아온 한의학에 대한 이미지가 다시 흔들릴 수 있었다.

그것은 정한한방병원의 문제뿐 아니라, 한국의 한의학의 문제이기도 했다.

“똑똑한 사람이니까 잘 생각해 봐요.”

성은은 자신은 할 말을 다했다는 듯 이야기를 하는 상도의 말에 두 주먹이 부들부들 떨릴 뿐이었다.

* * *

정한한방병원의 대표실에서 박상도와의 만남을 마치고 난 성은은 곧장 명의 한의원으로 달려왔다.

이 사실을 재마와 공유하고 앞으로 어떻게 할지 결정을 해야 했다.

이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패를 꺼내 보였으니, 앞으로 지금보다는 다르게 자신들이 저질러 온 일들을 은폐하려 시도할 것이었다.

“예상했던 것처럼 쉽지는 않을 것 같아요. 한의학 이미지가 어떻게 될 것 같냐고 협박을 하더라고요.”

칼만 들지 않았지, 자신에게 충분히 위협이 될만한 이야기를 한 상도와의 만남을 성은은 재마에게 전달했다.

이미 재마와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나눴던 성은이라 당황스럽지는 않았지만, 마주한 상태에서 직접 협박적인 이야기를 들을 것이라는 건 생각하지 못하고 찾아갔던 정한한방병원이었다.

“거기에다 박상철 이사와 박연아가 저지른 일에 대해서는 철저히 꼬리 자르기 들어갈 것 같고요.”

“꼬리 자르기를 해도 아마 기업 이미지라는 것이 있어서 쉽지는 않을 겁니다.”

아마 정한한방병원의 이미지에 손상이 간다면 핏줄이라고 넘어가지는 않을 박상도였지만 그 대미지는 충분히 남을 것이었다.

“일단 우리 쪽에 가지고 있는 패를 조금 보였으니 앞으로 우리에게도 시간이 얼마 없어요.”

성은은 오늘 정한한방병원에 다녀온 것은 앞으로 박상도가 어떻게 움직일지 움직임을 지켜보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협박을 받았으니 한시가 촉박했다.

“원장님의 긍정적인 대답만 나온다면, 적어도 지난번 너튜브 건에 대한 영상은 저희 채널에 올릴 수 있어요.”

아직까지 재마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은 상태라 지순정 어르신의 아들들의 영상을 게재할 수 없는 성은이었다.

아쉽기는 했지만, 그 일이 수면에 떠오르면 정한한방병원뿐 아니라 명의 한의원 또한 세간의 관심이 쏠릴 것이라 기다려 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성은과 재마도 정한한방병원이 움직이기 전에 한시라도 빨리 움직여야 했다.

“영상이 게재되면 박상도 대표가 저를 협박해 온 것처럼 한의사 협회 측에서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원장님, 원장님이 결정해 주시지 않으면 언제까지 정한한방병원에 한의사 협회가 끌려다닐 수밖에 없어요. 뒤에서 떳떳하지 못한 일로 병원의 크기만 부풀리는 정한한방병원이 정말 한국 한의학의 이미지가 되게 만들 수는 없잖아요.”

성은은 재마의 결정이 정한한방병원, 그리고 한의학의 잘못된 이미지를 바로 잡는 도화선이 될 것이라는 듯 강하게 어필했다.

“결정해 주세요. 원장님.”

재마의 결정만 떨어지면 된다는 듯, 성은은 재마를 다그쳤다.

그때, 재마의 머릿속이 상쾌해지면서 오래간만에 미션 메시지가 떠올랐다.

-대한민국 한의학을 위해 결심을 내리시오.

지금까지 환자들과 명의 한의원을 위한 미션이 떠오던 재마였지만, 이제는 자신의 결정이 명의 한의원을 벗어나 한국의 한의학이 달린 기분이었다.

“김 기자님, 준비하신 자료로 영상 준비해 주시죠. 저희가 도울 수 있는 건 돕겠습니다.”

재마는 결정을 내렸다는 듯, 성은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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