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자를 읽는 한의사-49화 (49/150)

환자를 읽는 한의사 49화

-나 진짜 명의 한의원에 진료 받으러 왔어. 주말이라 그런지 사람이 더 많네. 주말에는 진료 예약도 못 받는대.

-대박. 이효주. 네가 대박이다. 진짜.

-어때. 한방병원 다니면 다 그 병원에서 치료 받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여기서 들킬 일이 뭐 있다고. 쉬쉬해야 하는 거 아니야?

진료 대기를 기다리며 효주는 물리치료사 동기들 단톡방에 자신이 오늘 명의 한의원에 진료를 받으러 왔다는 이야기를 했다.

요즘 동기들뿐 아니라 치료를 받으러 오는 환자들도 명의 한의원에 대한 이야기를 왕왕해서 궁금하던 차에 자신이 직접 진료를 받으러 온 것이었다.

명의 한의원은 너튜브에서 볼 때보다 더 아담한 병원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대기실에는 환자들이 넘쳐났고, 진료시간이 짧은 토요일에는 진료 예약도 잡지 못한다는 공지가 쓰여 있었다.

‘원장님도 한 분인가 보네.’

효주가 다니고 있는 정한 한방병원은 강남에 위치한 8층짜리 대형 건물을 통째로 쓰고 있었다.

외래 진료를 보는 원장이 10명, 그 외 침술을 하는 의사들 15명 등 명의 한의원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규모였다.

그런 한방병원에서 물리치료사로 일하고 있는 효주에게는 한없이 작아 보이는 한의원이었지만, 명의 한의원만의 매력이 돋보였다.

환자가 한의원 앞마당을 가득 메우고 있었지만 직원들은 미소를 잃지 않고, 한 명 한 명 눈을 마주쳐가며 대화를 했다.

첫 진료인 효주도 진료 대기를 위해 초진에 필요한 정보를 적어 낼 때, 처음 오셨냐는 간호사의 눈인사에 저도 모르게 미소를 방긋 지었다.

8층까지 한방병원으로 이용하고 있지만 명의 한의원 그 이상 대기 환자를 가지고 있는 정한 한방병원에서는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곳은 마치 환자를 일로만 대할 뿐이었다.

“쌍화차인데, 한 잔 드시겠어요?”

“네?”

효주가 앉아서 명의 한의원 분위기를 파악하는 동안 그녀 앞에 다가온 정 실장이 쌍화차를 건넸다.

“서비스에요. 대기 시간이 길어지니까.”

“감사합니다.”

정한 한방병원에서는 접수까지 한 시간이 걸려도 찾아볼 수 없는 서비스였다.

종이컵이었지만, 따뜻한 쌍화차의 향이 솔솔 올라왔다.

“음…….”

효주가 쌍화차의 맛을 음미하며 눈을 감았다, 떴다.

그때, 효주의 눈에 낯선 비주얼이 들어왔다.

검은 챙 모자와 선글라스, 마스크까지 써서 누구인지 정확히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사람들을 의식해 눈치를 살피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한의원에 오는 데 아주 꽁꽁 싸매었네. 연예인인가?’

연예인들이 사생활 때문에 모자와 선글라스, 마스크가 필수라더니 연예인인가, 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박연아 님, 들어오세요.”

진료실에서 직원이 박연아의 이름을 부르자, 눈치를 살피던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진료실로 향해 들어갔다.

‘박연아?’

효주는 낯설지 않은 이름에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내 고개를 내저으며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 * *

“원장님, 박연아 환자 들어오셨습니다.”

“네.”

재마는 박연아라는 환자가 진료 대기를 하고 있다는 것에 흠칫 놀랐지만, 이내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와 2년간 연애를 했던 연아가 이곳에 찾아올 리가 없지 않은가.

재마가 신규 환자인 박연아의 차트를 건네받는 사이, 검은 모자에 선글라스까지 쓴 환자가 진료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를 호명한 간호사가 나간 뒤에야 연아는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벗었다.

“오래간만이야, 오빠.”

연아가 아닐 것이라 예상했던 재마의 생각이 무색하게 재마 앞에 앉은 환자는 바로 그 ‘박연아’였다.

“여기는 무슨 일이야?”

재마는 혹여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지는 않을까 걱정했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렇지는 않았다.

“무슨 일이기는, 조금 전 간호사 이야기 못 들었어? 환자로 왔어.”

“네가 무슨 진료를 받으러 여기를 와. 정한 한방병원으로 가면 되지.”

정한 한방병원 대표 원장의 조카인 박연아가 굳이 강남에서도 30분 거리에 있는 해인동의 작은 한의원까지 찾아온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는 듯, 재마는 차트를 손에서 내려놓았다.

“내가 못 올 곳이라도 왔어?”

“그럼 이곳이 네가 찾아올 만한 데야?”

재마의 이야기에 연아는 선글라스를 눈 아래로 내리더니 이곳저곳 둘러보았다.

“응. 그러게. 오빠 말이 맞네. 이런 데 내가 찾아올 리가 없지. 그렇지? 오래되고, 깔끔하지도 못하고. 대체 이런 데는 어떻게 찾아서 인수한 거야?”

“박연아.”

재마와 연애를 할 때나, 지금이나 달라질 것 없는 연아의 막말에 재마는 양 주먹을 불끈 쥐었다.

“돈이 없어서 그냥 오래된 건물에서 진료하는 거야? 환자는 그래도 좀 되는 것 같은데……. 거기에다 이제 곧 개발된다며? 오빠 눈 좀 높여서 새 자리 알아봐야겠다. 여기는 영.”

연아는 영 가망이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 진료 보러 온 건 아닐 테고, 밖에 대기 환자 많아. 오늘 진료시간도 짧아서 대기도 못 하고 돌아가는 환자들도 많아. 너랑 이렇게 대화할 시간 없으니까. 그만 가라.”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해? 오래간만에 만났는데 반갑지도 않아?”

연아의 입에서 반갑지도 않냐는 말이 나오자 재마는 피식 헛웃음이 나왔다.

“우리가 반가울 사이인가?”

“오빠는 안 반가울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나쁘게 헤어진 것도 아니잖아? 오빠가 좀 유명해지고 싶어서 안간힘을 쓰길래 내가 여기까지 찾아와 줬는데.”

연아는 명의 한의원을 인수하고 너튜브를 시작한 재마가 사람들에게 유명세를 타고 싶어서 시작했다는 듯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러게. 나랑 잘 사귀다가 말 잘들 었으면 정한 한방병원에서 한자리할 거 아니야. 왜 밑바닥부터 시작하느라 고생을 해? 듣자 하니, 지방 요양병원에 봉사하는 브이로그까지 찍는다며? 애쓰네. 애써.”

재마는 제 맘대로 해석을 하고 있는 연아의 말에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그렇게 고생하지 말고. 내가 정한 한방병원 자리 알아봐 줘?”

“뭐?”

“이 케케묵은 오래된 집에서 진료 보느니, 그게 낫지 않아? 오빠 졸업 성적 정도면 정한 한방병원에 다시 한번…….”

“박연아.”

재마는 말도 되지 않는 말을 늘어놓는 연아의 이름을 화를 꾹꾹 누르며 한 글자 한 글자 내뱉었다.

“내가 나갈까. 네가 나갈래?”

연아와 더 이상 할 말이 없다고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제 멋대로인 그녀를 피할 생각인 재마였다.

“오래간만에 만나서 참, 까탈스럽게도 구네. 다음에 또 보면 이렇게 날카롭게 굴지 말고. 잘 생각해 봐.”

연아는 선글라스를 벗어 손을 흔들듯 흔들며, 진료실을 빠져나갔다.

“하…….”

재마는 전 연인인 박연아가 명의 한의원에 찾아올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고,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도대체 왜…….”

진료도 받지 않고, 처방이 내려지지도 않았는데 진료실로 들어갔던 환자가 밖으로 나온 모습에 의아한 정 실장이 진료실 안으로 들어왔다.

진료실 안에는 머리를 감싼 채 책상에 고개를 파묻은 재마가 있었다.

“원…… 장님? 괜찮으세요?”

“아. 정 실장님, 괜찮습니다. 딱 3분만, 3분만 쉬고 환자 받겠습니다.”

“아, 네.”

환자가 아무리 밀려들어도 진료를 해내던 재마가 괴로워하는 모습이 낯선 정 실장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1시간 후, 오랜 대기를 하고, 진료를 마친 효주가 명의 한의원을 빠져나왔다.

-역시. 입소문이 날 만해.

-왜? 거기 물리치료 맛집이야?

-아니, 일단 원장님이 한 분이 진료랑 처치까지 다 하셔. 그래서 대기는 긴데 후회는 없다.

-오?

효주가 명의 한의원 진료 후기를 기다리던 동기들은 그녀의 반응에 호응했다.

효주는 돌덩이 같던 어깨가 단 한 번의 침술로 풀릴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는 듯 재차 어깨를 풀었다.

“진짜 신기하네. 어깨가 날아갈 것 같아.”

“저기요?”

날아갈 것 같은 어깨를 신기해하는 효주 앞, 아까 대기실에서 마주쳤던 여자가 나타났다. 효주는 얼굴을 꽁꽁 가렸던 여자와 마주쳤다.

“네? 저요?”

“여기 제가 부를 만한 사람이 그쪽밖에 없는 것 같은데.”

연아는 효주 앞에서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벗었다.

연아의 얼굴을 본 효주는 그 자리에 서서 굳을 수밖에 없었다.

“어?”

“나 알죠?”

물리치료사인 효주가 연아와 직접적으로 만나 일을 할 일은 없었지만, 그녀가 대표원장의 조카라는 것은 잘 알았다.

최근에 입사한 최중기 한의사의 약혼녀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네? 네.”

효주는 동기들이 말했던 것처럼 명의 한의원에서 정한 한방병원 임직원을 만났다는 사실에 앞이 캄캄했다.

더구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박연아라는 사실에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몰랐다.

“이름이?”

“이효주입니다. 물리치료사예요.”

효주의 이름을 묻는 박연아에게 효주는 자신을 소개했다.

“이효주 씨는 정한 한방병원에서는 그 돌덩이 같다는 어깨가 치료가 안 돼서 여기까지 왔나 보네.”

“네?”

지난번 화장실에서 동기들이 했던 이야기가 떠오른 효주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연아는 아무래도 자신이 오늘 이곳에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말을 했다.

“그러니까. 회사에서는 입을 조심했어야지.”

“죄송합니다.”

“뭐, 죄송할 것까지는 아니고. 치료를 어디서 받는가는 자신이 결정할 일이니까.”

“아, 네. 그…… 그렇죠.”

효주는 연아의 눈치를 봐가며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애썼다.

“이효주 씨.”

“네?”

“그럼 정한 한방병원 말고, 명의 한의원에서 일을 해보는 건 어때?”

“네?”

효주는 생각지도 못한 연아의 제안에 눈이 동그랗게 떠질 수밖에 없었다.

“내가 말을 어렵게 했나?”

“아니, 제가 왜, 명의 한의원에서…….”

연아는 자신의 가방 안에 있었던 종이를 꺼냈다.

명의 한의원의 물리치료사를 모집한다는 공고였다.

효주는 연아에게 종이를 건네받고 얼굴이 잿빛으로 변했다.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맞을지, 답이 나오지 않았다.

“뭘 어렵게 생각해. 정한 한방병원이랑 여기랑 다를 게 뭐라고. 똑같이 환자 받고, 일하는 건 같을 텐데. 복지…… 가 좀 다르려나?

연아는 자신의 뒤에 있는 명의 한의원에 복지라고 해봤자 얼마 되겠냐는 듯, 혀끝을 내찼다.

“이효주 씨가 내가 원하는 대로 잘만 해주면 정한 한방병원 복귀는 책임져 줄게.”

“…….”

효주는 연아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너튜브에서 이제 유명세를 타고 있는 명의 한의원에 스파이로 들어가라는 뜻이었다.

이곳에서 연아를 만나 버렸으니, 제 뜻대로 하라는 이야기였다.

“만약에 제가 싫다고 하면요?”

“싫다고?”

싫다는 말에 연아가 헛웃음을 흘렸다.

“정한 한방병원에는 이효주 씨 말고도 물리치료사는 많아. 그리고 그 자리 하나 메꿀 사람도 많고. 정한 한방병원에서 잘려서 어쩔 수 없이 이런 구멍가게 같은 병원에서 일하는 것보다. 내 제안이 낫지 않겠어?”

연아는 선택은 효주에게 있다는 듯 이야기를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