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다시 만난 하이오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하이오지가 조노량의 등을 떠밀던 병사의 멱살을 틀어쥐고 와서는 매서운 얼굴로 치안대장을 노려봤다.
“대장, 병사들 훈련을 어떻게 시켰기에 내 친구이자 군단장님의 오른팔인 노리앙을 문전박대해? 죽고 싶나?”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그렇게 묻자 치안대장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하이오지의 감정이 전해져 왔다. 그 감정에 절로 소름이 돋았다. 도대체 이자가 누구기에 하이오지가 이렇게 격동한단 말인가?
치안대장은 하이오지의 본색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뜬금없고, 얼토당토않은 추궁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져서 기분을 거스를 상황이 아님을 직감했다. 본능적으로 생존을 위한 행동을 개시했다.
무려 시의 치안을 총괄하는 직책에 있는 자가 거지나 다를 바 없는 사내를 향해 허리를 구십 도로 꺾었다. 그랬다가 다시 허리를 펴고 당황한 병사의 머리를 가차 없이 내리눌러 처박은 다음, 다시 허리를 굽혔다.
“귀한 분을 몰라보고 수하가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당장에 이 경비 놈의 쓸모없는 눈을 도려내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교묘하게 경비병에게 모든 책임을 덮어씌운 것이다.
치안대장은 품을 더듬어 단검을 꺼내며 숙여진 병사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이 경비병의 눈을 도려낼 용의가 있었다.
사색이 된 경비병이 주저앉아서 벌벌 떨었다.
“소, 소인이 뉘신지도 모르고,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경비병은 태도를 백팔십도 바꿔서 조노량의 바짓가랑이를 움켜쥐고 애걸하기 시작했다. 조금 전 고압적인 자세로 조노량의 등을 떠밀던 그 경비병이 맞나 싶었다.
조노량은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몰랐지만 눈물 콧물 쏟고 있는 경비병을 보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성문을 담당한 병사야 자기 일을 한 것 아니겠소? 지시받은 대로 했을 뿐, 무슨 잘못이 있겠소?”
그 말에 뭔가를 떠올린 치안대장의 얼굴이 다시 하얗게 질렸다.
“아니, 아니요. 내가 지시한 것이 아니라 시장님이 각별히 보안에 신경을 쓰라고 지시를 하셔서…….”
말과 함께 힐끗 하이오지의 눈치를 살폈다.
치안대장의 말에 하이오지도 문뜩 깨달은 바가 있었는지 급히 손을 내저으며 변명을 했다.
“아니, 아니, 노리앙, 내가 그렇게 요청을 한 것이 아니고, 커트리안 님이 특별히 지시를 하셔서…….”
영문은 모르겠지만 거슬러 올라가다 보니 결국 커트리안에게까지 귀결되는 것이 아닌가?
“됐다. 그만 들어가지. 병사님, 들어가 봐도 괜찮겠소?”
조노량의 말에 납작 엎드린 경비병에 앞서 치안대장이 먼저 반응했다. 민첩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러문입쇼. 얼마든지 들어가십시오. 제가 직접 호위하겠습니다.”
치안대장의 말에 하이오지의 눈에 노골적인 비웃음이 어렸다.
지 따위가 노리앙을 호위하겠다고? 지나가던 오크가 웃겠다.
성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하이오지는 치안대장을 쫓아 버렸다.
하이오지는 소매로 눈물을 쓱 훔치고는, 조노량의 옆에 착 달라붙어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미주알고주알 낱낱이 읊어 댔다.
“아, 그래서 아도니아 놈들을 싹 쓸어버리고 크로아지크로 갔단 말이지! 거기서 누굴 만났는지 알아? 바로 아드리안이야! 그 아드리안 말이야! 노리앙도 알지? 엄청나게 강한 놈이더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어. 그래서 말야…….”
어찌나 조잘대는지 머리가 다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한참을 걸어 도착한 곳은 번화가에 위치한 최고급 술집이었다. 술과 여자를 모두 충족시킬 수 있는 그런 집이다.
둘이 문 앞에 도착하자 술집 주인이 맨발로 뛰어나와 하이오지를 맞았다.
“이런 누추한 곳까지 왕림해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한때는 하이오지가 쳐다보지도 못할 대단한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하이오지의 말 한마디에 가게 문을 닫을 수도, 열 수도 있는 처지가 되었다.
“잘 지내셨지요, 레띠에르?”
“물론입니다. 덕분에 아주 좋습니다.”
손을 앞으로 모아 쥔 모습이 여차하면 비벼댈 태세다.
“이 집에서 제일 큰 방으로 준비해 줘요. 시중들 애들도 최상급으로!”
“여부가 있겠습니까? 이리로 오시지요.”
레띠에르는 둘을 안쪽 깊숙이 있는 방으로 인도했다. 시의 최고급 관리가 오거나 이 지역을 통째로 관리하는 구스타프나 와야 열어 주는 특급 룸이다.
방문을 열자 최고급 샹들리에가 영롱한 빛을 뿌리며 둘을 맞이했다. 오십 명도 너끈히 들어갈 정도로 커다란 방이었지만 테이블은 하나였다. 그 테이블은 정교하게 세공된 원목이었고, 그 위에는 최고급 대리석이 얹혀 있었다.
짙은 갈색의 원목과 백색 대리석을 사용해 마감한 벽에는 그림들이 줄지어 걸려 있었고, 입구 쪽에는 둥그런 무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한쪽으로 커다란 대리석 욕조가 놓여 있었고, 그 옆에는 용변을 해결할 수 있는 낮은 통도 하나 준비되어 있었다.
테이블을 중심으로 삼방에는 소파가 놓여 있었는데, 생각 없이 앉던 조노량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소파에 푹 파묻혀 버린 것이다.
그야말로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는 방이었다. 온갖 얼룩에다가 뿌연 흙먼지를 뒤집어쓴 낡은 가죽옷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방이었다. 이 정도로 화려한 방은 대명 제국의 황제도 가지고 있지 못할 것 같았다.
조노량이 이런 감탄을 하고 있을 때, 주인 레띠에르는 의문이 가득 담긴 눈으로 거지나 다름없는 사내를 곁눈질했다.
레띠에르에게 있어서 하이오지는 시장보다 더 어려운 상대였다. 시장이야 세금이나 꼬박 내고 정중히 대해 주면 그만이지만, 하이오지는 그의 목숨 줄을 쥐고 있는 구스타프를 제멋대로 주무르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보잘것없어 보이는 사내를 향해 연신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레띠에르는 평생을 술장사만 해 왔다. 접대를 하는 사람이 누구고 받는 사람이 누군지, 누가 메인이고 누가 서브인지, 손님들 간의 역관계가 어떻게 되는지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는 고수다.
처음 하이오지가 저 사내를 데리고 들어왔을 때는 수하를 다독이기 위해 데려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게 아니란 걸 알았다. 하이오지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절대 수하를 대하는 윗사람의 태도가 아니었다. 아니, 반대라고 해도 가히 틀리지 않아 보였다. 레띠에르의 의문이 깊어졌다. 도대체 누군데 천하의 하이오지가 저런 태도를 보인단 말인가?
잔뜩 어색해져 있는 조노량과 달리 하이오지는 거침없이 주문을 했다. 주문을 마친 하이오지는 그 넓은 자리를 다 놔두고 조노량 옆에 찰싹 달라붙어 앉았다.
“얘기 좀 해 보라구. 어떻게 탈출했어?”
“놓아주더군.”
“그 흄이?”
마계의 문에서 벗어나게 된 과정을 대충대충 생략해 가며 들려주는 사이에 술과 안주, 그리고 십여 명의 미희가 줄지어 들어섰다.
그 광경에 조노량의 눈이 다시 한 번 휘둥그레졌다.
팔도 닿지 않을 위치에까지 형형색색의 음식이 놓였으며, 척 보기에도 최고급으로 보이는 술들이 줄지어 날라져 왔다. 여인들의 복장은 옷을 입은 건지 벗은 건지 구별도 하기 어려웠다. 중원인인 조노량으로선 기겁할 복장이었다. 그런 여인들이 한꺼번에 인사를 하고 줄지어 섰다.
하나같이 화려한 미모를 뽐냈지만 그중 하나가 유독 튀었다. 조노량은 얼굴을 붉히면서도 그 여인에게 시선이 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샤와 닮은 탓이다.
조노량의 시선을 느끼자마자 여인은 알아서 조노량의 곁으로 와 앉았다. 마치 오랜 연인에게 오는 것처럼 스스럼이 없었다.
여인이 살포시 미소 지으며 다가오자 조노량은 아련한 그리움을 느꼈다.
잠시 후 자리가 정리되었다. 또 한 명의 여인이 조노량의 왼편에 와서 앉았고, 하이오지 곁에도 두 명의 여인이 자리를 잡았다. 노예 몇 명이 악기를 들고 무대 뒤에 자리를 잡자 나머지 여인들이 무대 위에 올라섰다.
“이야기는 나중에 더 하고, 오늘은 진하게 한잔 마셔 보자고! 노리앙, 오늘 내가 최고의 밤을 만들어 줄게!”
하이오지다운 호의였다.
하이오지가 신호를 하자 악사들이 연주를 시작했고, 무대 위에서 대기하던 미희들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낯선 음악에 맞춰 가슴과 엉덩이를 산들산들 흔들고, 또 서로 쓰다듬으며 색기 넘치는 표정을 연출했다. 동작 하나하나가 낯이 뜨거워질 만큼 자극적이었다. 이곳에서는 물론 중원에서도 접해 보지 못한 야릇한 춤이었다.
그 모습에 넋을 놓고 있자 샤를 닮은 여인이 팔짱을 껴 왔다. 뭉클한 젖무덤이 느껴지자 몸이 절로 부르르 떨렸다. 반대편에 앉은 여인이 넋을 놓은 조노량을 보며 까르르 웃었다. 화려한 이목구비를 가진 여인이었다. 꾸밈없는 모습이 무척 아름다워 보였다.
조노량의 얼굴이 붉어지자 여인은 절구통처럼 생긴 청동 잔에 호박색 술을 반쯤 채워 권했다. 생긋거리는 모습이 귀여웠다.
조노량의 몸에서 풍기는 퀴퀴한 냄새가 싫을 법도 한데, 여인들은 인상조차 찌푸리지 않았다.
“자, 한 잔 들자구! 노리앙을 다시 봤으니 내 평생소원 중 하나를 이뤘어. 살아와 줘서 정말 고마워!”
하이오지는 잔에 담긴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조노량은 그런 하이오지의 모습을 바라보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진심이 느껴진 탓이다. 조노량도 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짜릿하면서도 부드럽게 넘어갔다. 잡향이 섞이지 않은 담백한 술이었다. 다시 잔이 채워지고, 이름 모를 안주가 알아서 입으로 들어왔다.
입안 가득 저린 과일 향이 진하게 남았다.
“신수가 훤해졌구나, 하이오지.”
기분이 유쾌해진 조노량이 말했다.
“그래 보여? 무려 군단장 호위기사거든. 헤헤.”
하이오지는 허리에 손을 얹으며 과장된 몸짓을 해 보였다. 그 모습에 조노량은 또 한 번 미소를 지었다. 거리낌 없이 구는 건 여전했다.
“그런데 다시 보니 몸은 말랐어도 피부는 좋아진 것 같은데? 아까 보니 키도 좀 큰 것 같고? 아직 성장긴가?”
하이오지는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조노량의 얼굴을 만졌다.
피식 웃으며 손바닥으로 하이오지의 얼굴을 밀어냈다.
“쓸데없는 소리…….”
그 와중에도 음란한 춤은 계속 이어졌고, 조노량의 얼굴도 점차 붉어졌다. 대낮에 시작된 술자리는 저녁까지 이어졌다. 술에 취한 하이오지가 여인의 가슴을 잡고 울음을 터트렸고, 조노량은 여인들의 손에 이끌려 뜨거운 물에 목욕을 했다. 조노량에 이어 술에 취한 하이오지도 첨벙거리며 목욕을 즐겼고, 다시 술을 마셨다.
과도한 수분 섭취로 인해 여인들은 목욕통 옆에 마련된 통에 거리낌 없이 생리 현상을 해결했다. 그 모습이 묘하게 선정적이어서 조노량은 혼미한 와중에도 아랫도리로 피가 몰렸다.
하이오지는 지치지도 않고 신파와 시시껄렁한 농담을 번갈아 가며 토해 놓았다. 기분이 좋아진 조노량도 하이오지의 주정에 맞장구를 치며 웃었다. 가슴 한편이 한없이 따뜻해졌다.
조노량은 설핏 잠에서 깨어 주변을 둘러봤다. 낯선 방이었다. 정신없이 들이붓던 기억은 있는데… 머리가 어찔했다. 주정을 밀어내지 않은 탓이다. 중간에 기억이 끊겼는데 그게 언제였는지도 가늠이 되지 않았다. 조노량이 깨어나자 옆에서 자고 있던 샤가 부스스 일어나더니 시원한 과일물을 따라 주었다. 반가운 마음에 일어서다가 샤가 아님을 자각했다. 이해할 수 없는 실망감이 밀려들었다.
무의식중에 과일즙을 받아 마시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넓고 푹신한 침대에 자신과 두 명의 여인이 벌거벗고 누워 있었다. 기억이 났다. 어젯밤 함께 즐겼던 여인들이다.
조노량은 여인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분명 샤를 닮긴 했으나 같지는 않았다. 아니, 달랐다.
샤의 가슴이 좀 더 작고, 오뚝했다. 샤의 허리가 좀 더 얇고, 샤의 배꼽이 좀 더 갸름했으며, 샤의 음모가 더 옅었고, 샤의 다리가 더 날씬했다.
웃고 있었으나 샤처럼 따뜻하지 않았고, 정성을 보이고 있으나 진실하지 않았다. 그리고 눈이 담고 있는 깊이가 달랐다.
저도 모르게 샤에 대한 생각을 이어 가다 문득 어젯밤 이 여인을 안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다른 여인이 있었음에도 이 여인만 몇 번이고 안았다. 샤를 부르며 울었던 기억도 났다. 술에 취해 울었던 것이 아니었다. 분명 샤가 아님을 알고 있었지만 샤라고 믿고 싶었던 것 같다. 이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현실을 애써 부정하려 했던 것이다.
머릿속에서 샤에 대한 생각이 끊이지 않았다. 조노량은 불현듯 깨달았다.
사실은, 사실은 샤를, 그 끔찍한 흄을 좋아했던 것 같다. 그래서 더 많이 마셨고, 술이 깨지 않기를 바랐던 것 같다.
저도 모르게 샤와 이 여인을 비교했고, 샤가 아님을 깨닫고 상실감을 느꼈다. 함께했던 일 년 반 동안 정이라도 들었던 걸까? 아니면 자신으로 말미암아 소멸했기 때문에 연민을 느끼게 됐던 걸까? 아니다. 그 정도로 말하기에는 마지막 순간, 그 미어지던 감정을 설명할 길이 없다.
하기의 말이 떠올랐다.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렇게 되길 빌었다. 지금의 감정이 진정이라면 그 저주받은 땅이라도 다시 밟을 용의가 있었다.
불가능한 일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위안이 되었다.
조노량은 거칠게 고개를 흔들며 애써 샤에 대한 생각을 털어 버렸다.
의도했는지 아닌지는 몰랐지만 알몸의 여인들이 자극적인 자세로 시중을 들었다. 살짝 가려진 음부를 보자 욕정이 솟았다.
머리를 흔들고 일어나 방 안에 마련된 나무 욕통으로 들어갔다. 원래는 따뜻했을 물이 밤새 차갑게 식어 있었다. 차가운 느낌이 오히려 좋았다.
여인들이 호들갑을 떨며 방문을 열고 더운물을 주문했지만 조노량이 거절했다. 오히려 물이 좀 더 찼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두 여인이 욕통의 좌우에 나눠 앉아 목욕 시중을 들었다. 나쁘지 않았다. 어젯밤에 이어 두 번째 목욕이다. 오래 묶었던 때가 말끔히 씻겨 나갔다.
여인들의 손에 이끌려 침상으로 돌아왔다. 여인들은 주둥이가 넓은 주전자에서 향유를 따라 조노량의 몸에 골고루 발랐다. 이 또한 나쁘지 않았다. 향유를 바르는 섬세한 손길은 중요 부위도 놓치지 않았다. 불끈 일어섰다. 여인이 입이 닿았다. 손끝보다 섬세한 입술이 느껴졌고, 그보다 더 부드러운 혀가 감겨 왔다. 오래 굶어 왔던 몸이, 환골탈태로 더욱 왕성해진 몸이 빠르게 반응했다. 허한 마음과 달리 몸은 금세 달아올랐다.
다시 샤의 얼굴이 떠올랐다. 조노량은 여인의 머리를 부드럽게 밀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