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생기-110화 (110/142)

110. 돈이 없다

마을에서 난리가 났다. 사냥을 나갔다가 돌아온 폴이 오우거의 가죽을 짊어지고 돌아온 것이다. 무려 오우거였다. 만약 저 오우거가 이 마을에 나타났다면 그날로 마을은 사라졌을 터였다.

그런 몬스터의 가죽을 들고 돌아왔으니 난리가 나지 않으면 비정상이다. 모든 주민이 나와 오우거 가죽을 구경했다. 오우거를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만큼 흔치 않은 몬스터였다.

폴은 촌장과 자경대장에게 오우거를 잡게 된 과정을 침을 튀겨 가며 설명했고, 조노량은 그날로 귀빈 대접을 받게 되었다. 일부 청년들은 남겨 두고 온 순록을 가지러 떠났다.

오우거의 가죽은 질기면서도 부드러워 제법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는 물건이다. 이 가죽만 팔아도 마을 전체의 일 년 수입보다도 많은 돈을 받을 수 있었다. 오우거의 가죽을 가져갈 의사가 없다는 조노량의 말에 촌장이 반색했다. 그래도 양심이 있는 촌장인지라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마을의 돈을 싹싹 긁어모았다. 그렇게 모인 돈이 이십오 실버 칠십 쿠퍼였다. 촌장은 그 돈을 몽땅 조노량에게 전달하며 다시 한 번 감사를 표했다.

조노량은 그 마을에 이틀간 더 머물며 극진한 대접을 받은 후에야 길을 나설 수 있었다. 폴은 산 너머까지 조노량을 배웅하며 서운함을 드러냈다.

“성님, 며칠만 더 묵고 가시우다.”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어 어쩔 수 없구나. 나중에 시간이 나면 한번 들르마.”

어느새 둘은 편한 관계가 되어 이별을 아쉬워했다. 조노량은 떠나며 혹시라도 자신을 찾을 일이 있으면 켈커티스의 더글라스 가문을 찾으라 일렀다.

이 세계에 온 이후로 이렇게 편했던 날들은 없었다. 정도 많고 순박한 사람들이었다. 대접도 융숭했다.

길을 나서는 조노량의 입가에 푸근한 미소가 그려졌다. 조노량이 꿈꾸는 삶은 바로 이런 삶이었다. 얼마나 평화로운가?

조노량의 현재 위치는 중립 폴리스인 로두카의 북쪽 육십 킬로미터 지점의 산골마을이었다. 마계의 문에서 남쪽으로 수백 킬로미터가 떨어진 지점이다. 도시와 마을만 절묘하게 피해서 한참을 내려온 셈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조노량은 한동안 멍해졌다.

북부 대륙 중부 이남에 있는 켈커티스까지는 그래도 까마득한 거리였다. 경험 많은 촌장의 권유에 따라 우선 로두카에 들러 여행용품을 구매한 후 타라와 크리푸를 거쳐 켈커티스까지 내려가는 여정을 잡았다.

어찌어찌해서 로두카에 들어섰고, 시세를 몰라 잔뜩 바가지를 쓴 후에야 여행용품들을 구매할 수 있었다. 몇 개의 마을을 거쳐 타라 시에 들어설 쯤에는 완전히 빈털터리가 되었다. 성문에서 갖은 수모를 당한 후에야 입성을 허락받았고, 켈커티스까지 갈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일거리를 찾아 헤매는 신세가 되었다.

일신에 엄청난 무위를 지니고 있으면 무엇하는가? 약장수처럼 길거리에서 무공을 팔 수도 없었고, 달리 무공을 드러낼 주변머리도 없었다. 물론 신원을 보증할 신분패도 없었다.

이 세계에 떨어진 지도 무려 구 년이나 지났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포로수용소와 마계의 문에서 보냈기에 이 세계는 처음이나 다름없었다.

시장통을 기웃거리고, 공방도 전전했지만 이곳 사람들은 타지인에게 그리 호락호락하게 일거리를 주지 않았다. 한참을 돌아다닌 끝에 겨우 얻은 일은 창고의 물건을 나르는 일이었다.

일꾼들 틈에 끼어 조노량이 날라야 하는 물건은 커다란 나무상자였는데,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오부지게 무거웠다. 내공을 두고 근력만 사용할 이유가 없었기에 약간의 내공을 끌어 올렸다.

무림 역사상 삼 갑자에 이르는 내공을 쌓은 고수는 그리 흔치 않다. 그런 가공할 내공을 조노량은 나무상자를 나르는 데 사용했다.

조노량은 적당히 한다고 했지만 내공을 사용하고 나자 그 어떤 일꾼보다 월등한 짐꾼이 되었다.

석판에 물목을 기록하고 있던 서기가 그런 조노량의 모습을 주목했다. 덩치도 작은 친구가 두 몫은 하고 있었다. 실로 타고난 짐꾼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일을 마친 후 서기는 셈을 치러주면서 조노량에게 급료를 더 쳐줄 테니 내일도 나와 달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조노량이 하루 종일 쫄쫄 굶어 가면서 막일을 한 대가로 받은 급료는 7쿠퍼였다.

조노량은 2쿠퍼를 주고 시장통 가판대에서 스파게티라는 느끼한 국수를 사 먹었다. 오늘의 첫 식사였다.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다고 자존심상 도둑질이나 강도짓을 할 수는 없었고, 무공을 이용할 만한 일거리도 찾을 수가 없었다.

사실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런 일거리를 찾아낸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요기를 마친 조노량은 잠자리를 구하기 위해 다시 도시를 전전하기 시작했다. 여관 몇 군데를 들러 보았으나 숙박비를 치르고 나면 당장 내일 아침을 해결할 돈도 부족했다. 어쩔 수 없이 싸구려 숙소를 찾기 위해 뒷골목을 전전하다가 반색할 일이 생겼다. 노상강도를 만난 것이다.

오랜만에 조노량의 눈에 생기가 돌아오고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적당히 수고를 한 끝에 조노량이 손에 쥔 돈은 무려 칠십 쿠퍼였다. 하루 종일 나무상자를 나른 대가의 열 배다. 바람직한 일거리를 발견한 조노량은 숙소를 잡는 것을 포기하고 밤새 타라의 뒷골목을 배회했다.

조노량은 그로부터 나흘간 낮에는 눈에 잘 띄지 않는 양지바른 지붕 위에서 잠을 청했고, 밤에는 뒷골목을 순찰하며 도시정화 작업에 열중했다. 크리푸만큼은 못했지만 타라에도 밤일에 종사하는 분들이 제법 많았다. 하지만 갑자기 등장한 정의의 사도에게 시달리다가 영업을 접어야 했다. 그 어떤 분들도 조노량의 이목을 속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흘간 영업을 마친 조노량은 제법 쏠쏠한 벌이에 흡족해하면서 타라를 떠났다.

일을 하며 물가도 대충 파악했고, 손쉽게 돈을 버는 방법도 파악했다.

쉽게 여행하는 법을 깨우친 조노량은 다음 도시인 크리푸로 향했다. 작은 마을보다는 아무래도 큰 도시가 영업하기 좋았기 때문이다.

타라에서 크리푸까지는 동남쪽으로 사흘 거리다. 경공을 발휘하면 하루에도 다다를 수 있었지만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가도에서 경공을 펼치기도 뭐해서 마차를 이용했다. 걷지 않아서 편하기는 했지만 속도는 형편없었다. 조금 빨리 걷거나 천천히 뛰는 정도의 속도였다.

넉넉히 벌어 놓은 덕분에 중간중간 맛있는 것도 사 먹어 가면서 여유 있는 여행을 즐겼다. 단지 옷차림이 다른 사람들과 많이 달라 주목을 받았는데, 돈도 생겼겠다, 크리푸에 도착하면 적당한 것으로 사 입을 작정이었다.

하지만 크리푸 시는 크로아지크와의 밀월 관계로 인해 출입 통제가 무척 강화된 상태였다.

조노량은 차례를 기다려 털보 경비병 앞에 섰다.

“어이, 신분패?”

“없소.”

“보아 하니 부랑자 같은데, 신분패가 없으면 들어갈 수 없다.”

“크리푸는 자유도시로 알고 있소만?”

“전에는 그랬지만 지금은 아니다. 다음!”

조노량은 한쪽으로 밀쳐진 채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뒷사람들은 별 탈 없이 성문을 통과해 들어갔다.

털보 경비병에게 몇 차례 더 따져 보았지만 아예 대꾸도 없이 등을 떠밀었다.

한 대 쥐어박고 들어갈까도 생각해 봤지만 들어가자마자 쫓기는 신세가 된다면 들어가지 않느니만 못했다. 괜히 번거롭게 구느니 조용히 성벽을 넘을 생각을 했다.

하이오지는 크리푸에서 여러모로 유명했다. 시장 등 핵심인사들 사이에서는 크로아지크의 대리인이자 통 큰 고객으로 유명했고, 어둠에 소속된 사람들 사이에서는 마쯔와 구스타프, 양대 세력을 모두 누른 실력자로 알려져 있었다.

아토스는 크리푸 시의 치안을 책임진 치안대장이다. 명색이 치안대장이다 보니 그런 하이오지의 양쪽 면을 모두 알고 있었다.

아토스에게 크리푸 시에서 가장 두려운 사람을 꼽으라면 아마도 서슴없이 하이오지를 꼽았을 것이다. 하이오지는 시정부의 비호를 받는, 어둠의 실력자였다. 그의 말 한마디면 당장 오늘 밤이라도 크리푸 시에서 활동하는 모든 암살자의 방문을 받아야 할 터였다.

마침 납품될 목재의 확인 차 성문 밖으로 나서는 하이오지 곁에 치안대장이 따라붙었다. 치안대장은 얼굴 가득 간사한 미소를 담고, 두 손은 얌전히 앞으로 모은 후 하이오지에게 이것저것 어젯밤 상황을 늘어놓고 있었다.

대담하게도 어젯밤 시청에 도둑이 들었는데 이상하게도 귀중품은 그대로 있었다더라, 별 쓸모도 없는 문서 몇 개가 사라졌다더라, 시청 경비대가 총출동했지만 도둑의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다더라, 능력 없이 경비대장이 자신에게 일을 떠미는 바람에 아주 곤란하게 되었다, 혹시 북부 도둑길드의 소행은 아닌지 확인해 주면 고맙겠다, 구스타프 측과도 접촉해 보았지만 서부 도둑길드와 남부 도둑길드도 관련이 없다고 하더라, 가능하면 그쪽도 한 번 더 확인해 봐 달라는 둥 귀찮은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고 있었다.

치안대장의 말에 하이오지는 속으로 코웃음을 치고 있었다. 자신도 도둑길드 출신이었지만 어떤 미친놈이 감히 시청을 털겠는가? 귀중품도 아니고 문서 몇 개만 사라졌다면 뻔했다. 차기 시장을 노리는 두 계파 간의 약점 잡기일 것이다.

그래도 치안대장이라는 자리에 앉아 있으니 이쪽 방향으로도 조사를 해야 했겠지. 하지만 받아 처먹은 것이 있으니 구스타프나 마쯔를 강하게 압박하지도 못하는 입장일 터였다.

능력이 안 되면 자리에서 물러나든지, 스스로 해야 할 일을 왜 자신에게 미룬단 말인가?

그렇다고 곧이곧대로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는 없는 일. 범인을 색출해 치도곤을 내려야 한다는 둥, 지금 일을 마치는 대로 시로를 만나 보겠다는 둥, 그럴듯한 대답으로 치안대장의 일에 협조해 줄 뜻을 밝혔다. 당연히 건성이었다. 남의 일에 진지해질 하이오지가 아니었다. 그러던 차에 성문 앞에서 병사들에게 등을 떠밀리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의 복장이 왠지 익숙했다. 자세히 살펴보니 마계의 문에서 대충 지어 입었던 가죽옷과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그때 마침 고개를 돌린 사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하이오지는 마물에게 쫓길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사내를 향해 달렸다. 옆에 붙어서 주절거리고 있는 치안대장이 영문도 모르고 하이오지를 따라 뛰었다.

“노리앙!”

미친 듯이 달려간 하이오지는 조노량의 등을 떠밀던 병사를 튕겨 내며 조노량을 거세게 껴안았다.

“어헝, 노리앙…….”

하이오지는 말도 잇지 못하고 눈물만 뿌려 댔다.

생각지도 못했던 장소에서 하이오지를 만나자 조노량도 반가운 마음에 함께 부둥켜안고 재회를 기뻐했다.

“어떻게 된 거야? 언제 나왔어? 다친 데는 없는 거지?”

하이오지는 조노량의 어깨를 잡고 얼굴을 들여다보고, 몸을 더듬고, 다시 껴안으며 기쁨을 주체하지 못했다.

과한 애정 공세에 머쓱해진 조노량이 하이오지를 밀어냈다.

“난 괜찮아. 아무 문제없다. 이제 그만하지.”

“뭘 그만해, 그만하긴! 어디 얼굴 좀 다시 보자! 어이구, 얼굴 상한 것 좀 보게? 반쪽이 됐잖아? 몸은 왜 이리 마른 거야?”

하이오지가 비루한 몰골의 사내를 붙잡고 눈물 콧물을 짜고 있자 치안대장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지켜보고만 있었다.

“이봐, 하이오지. 난 괜찮다니까.”

한참 뒤에야 진정한 하이오지가 조노량에게 물었다.

“왜 여기서 이러고 있었던 거야? 안 들어오고?”

“병사들이 못 들어가게 하는군. 어쩔 수 없이 그냥 지나치려던 참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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