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마왕의 소멸
하기는 공격을 중단하고 조노량의 공격을 지원했다. 자신이 뚫어 놓은 터널로 아스르부테가 권능을 발현하면 그 즉시 터널을 차단하고 그 충격을 자신이 흡수했다. 조노량이 자리를 옮길 때마다 한발 먼저 공간을 열어 발길을 원활히 해 줬다.
연기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거인의 육신도 갈가리 찢어 놓는 연기다. 행여나 조노량의 육체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최대한 주의를 기울였다. 그럼에도 조노량의 갑옷은 모래로 갈아 놓은 듯 미세한 상흔이 쌓여 갔다. 비록 자신의 육체지만 파괴적이고 칼날 같은 기운을 품고 있다. 본질 자체를 바꿀 수는 없는 일, 갈수록 빨라지는 조노량의 움직임을 쫓아 길을 내주기에도 바빴다.
아스르부테는 광폭하게 기운을 쏟아 냈다. 이대로 공격을 허용해서는 아무리 강건한 육체라도 버텨 낼 수가 없음을 알았다. 아스르부테의 공격과 하기의 방어가 합을 이뤘다. 그 틈으로 조노량의 암경이 끊임없이 아스르부테를 타격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조노량의 공격이 잠잠해졌다. 권능을 마구 쏟아 내던 아스르부테도 끊어진 공격을 느끼고 잠시 숨을 골랐다. 하지만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다시 뚫릴 터널에 주의했다.
조노량은 이 싸움이 다가 아님을 직감했다. 어둠의 장막을 넘어 외부에서는 끊임없이 흄들의 비명 소리와 불꽃 거인의 포효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만으로도 불꽃 거인이 득세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박쥐날개를 가진 사내의 개입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자신은 한 줌 잿더미가 되었을 것이다. 아스르부테와의 싸움을 마냥 끌어서는 곤란했다. 조노량은 은밀히 아스르부테를 향해 접근했다. 검은 연기에 휩싸여 소리 없이 아스르부테의 등으로 다가들었다.
하기는 조노량의 행동을 짐작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강력한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음을 직감했다. 때문에 그 움직임에 보조를 맞췄다. 검은 연기가 한 치의 틈도 없이 아스르부테가 펼쳐 놓은 베리어를 감쌌다.
아스르부테 역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눈치챈 듯 다가드는 연기를 향해 발악적으로 권능을 뿌려댔다. 중차대한 위기 앞에서 아스르부테의 권능이 증폭되었다. 하기의 연기를 뚫고 외부까지 뻗어 나갔다. 그 무엇으로도 뚫을 수 없을 것 같은 엄밀한 연기의 막이 소멸하며 숭숭 구멍이 뚫렸다. 외부에서 보기에는 아스르부테가 하기를 압도하는 모습이었다. 실제로도 하기는 영체에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그럼에도 하기는 비명을 참아 내며 버텨 냈다.
조노량은 아스르부테가 뿌려대는 권능을 감각적으로 피해 내며 조금씩 아스르부테의 등 뒤로 다가섰다. 종내 팔만 뻗으면 아스르부테의 본체에 닿을 만큼이나 가까이 다가설 수 있었다. 조노량과 아스르부테의 사이에는 짙어 보이지만 아주 얇아진 연기의 막과 아스르부테가 펼쳐 놓은 베리어만 존재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아스르부테는 조노량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 얇은 연기의 막만으로도 아스르부테의 이목은 완전히 차단되었다.
조노량의 왼손이 슬그머니 연기를 뚫고 뻗어 나갔다. 조노량의 기운이 닿는 것만으로 베리어가 찢겨져 나갔고, 동시에 아스르부테의 등에 가 닿았다.
아스르부테도 베리어가 찢기는 순간 눈치챘지만 이미 늦었다. 주먹을 내지른 것도, 검으로 가른 것도 아니다. 그저 손이 거죽에 닿는 별것 아닌 행위, 하지만 그 결과는 강대한 마왕인 아스르부테도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
조노량은 제우스에게 했던 것처럼 아스르부테의 육체에 직접 진기를 흘려보냈다. 내가 고수들이 그렇듯, 자신의 기를 상대의 혈도로 흘려 넣었다. 제우스에게와는 달리 파괴적인 기운이 아스르부테의 거죽을 뚫고 노도처럼 침투해 들어갔다.
그 촌음의 순간, 아스르부테의 육체가 격하게 반응했다. 내기를 조절해 상대의 혈로를 헤집어 놓을 필요도 없었다. 조노량의 내기가 아스르부테의 육체로 흘러 들어가자마자 아스르부테의 신체 내부에서는 거센 반응이 시작되었다. 마기를 품은 세포 하나하나가 조노량의 기와 융합했다가 폭발적으로 분열하며 주변의 세포로 그 기운을 전이시켰다. 그리고 외부로 분출되었다.
검은 연기가 말끔히 걷히며 창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동시에 하기의 비명 소리가 계곡 전체로 메아리쳤다. 말끔히 걷힌 연기 밖으로 조노량의 육체가 드러났다. 드러난 조노량의 육체는 허공으로 튕겨져 나가고 있었다. 그렇게 날아 이십여 미터 밖의 바위틈에 거칠게 처박혔다.
아스르부테의 모습은 처참했다. 육체 곳곳이 부풀어 올랐다가 끝내 외부로 터져 나왔다. 그 거대한 육신에 잔금이 가며 쩍쩍 갈라져 나갔다. 견고하게 밀집되어 있는 마기가 결속력을 잃고 갈라진 틈을 비집고 나왔다.
조노량은 땅을 느끼자마자 본능적으로 검막을 형성하며 몸을 튕겨 바위를 타넘었다. 남은 진기를 모두 두 발에 집중하여 극한의 경공을 펼쳐 물러났다.
수많은 시간 동안 아스르부테의 육신에 갇혀 있던 마기가 드디어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조노량이 미처 폭발의 범위를 벗어나기도 전에 폭발의 힘이 조노량을 덮쳤다. 가로막고 있던 바위가 터져 나가고 조노량은 다시 한 번 낙엽처럼 날렸다. 하기가 내려앉으며 폭발로부터 조노량을 보호했다.
하기는 급속히 몸집을 불려 대기 중으로 흩어지려 하는 아스르부테의 마기를 가뒀다.
아스르부테가 남긴 강대한 마기의 덩어리가 검은 연기 속으로 녹아들어 갔다. 그것만으로도 하기가 오백 년간 쌓아 온 마기에 필적할 만한 양이다. 하기로서도 단시간 내에 흡수할 수 있는 양이 아니었다. 연기 사이사이로 마기가 녹아들어 갔다.
그걸로 족했다. 시간은 걸리겠지만 결국 자신의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하기가 모르는 부분이 있었다. 아스르부테로부터 방출된 마기 중 이미 절반 이상이 조노량에게 흡수되어 버렸다. 워낙에 방대한 마기였기에 이를 인식하지도 못했다.
하기는 만족했다. 본류의 땅에서 태어나 호흡하며 자신이 상상도 못할 엄청난 마정을 품었던 아스르부테였다. 그의 마기는 지금까지 먹었던 그 어떤 마기보다도 순수했다. 일부 흡수한 것만으로도 모든 손해가 만회되었다. 검은 연기 속에서 소리 없는 포효가 터져 나왔다.
하기의 완벽한 회복을 눈치챈 퓨콤뜨리아리트와 토리도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려 사라져 버렸다. 하기의 적대적인 시선이 둘을 훑은 순간 더 이상 이 자리에 남아 있을 의지가 꺾여 버렸다. 둘의 기운이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도 하기는 미소를 머금었다.
진정 소멸되어야 할 존재가 하나 더 남아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의 권속들의 안위도 돌봐야 했다.
극도의 희열과 환희로 진동하던 연기가 우코르바흐를 주목했다. 사대 흄 중 벌써 둘이 소멸했다. 나머지 둘도 흐려져 있다. 그대로 둔다면 둘의 소멸도 자명했다. 하기는 결코 권속의 소멸을 원치 않았다. 그럼에도 벌써 둘을 잃었고, 다시 둘을 잃을지도 몰랐다.
검은 연기 사이로 우코르바흐의 불꽃이 이글거린다. 흄들의 영체는 빛조차 투과시키지 않아야 정상이다. 그렇기에 짙은 어둠이어야 할 공간에서 우코르바흐의 불꽃이 비쳐 나온다는 것은 영체의 손실이 선을 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기의 연기 속에서 낮은 음파가 웅웅거리며 번져 나왔다. 살아남은 두 마리의 흄이 우코르바흐를 포기하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흄들이 물러난 공간에 우코르바흐의 불꽃만이 열기를 더했다. 거죽을 타고 흐르던 염화가 더욱 기승을 부리며 타올랐다. 우코르바흐는 도주하는 흄들을 쫓는 대신 낮게 웃었다.
드디어 이 땅에 온 목적을 달성할 시점이었다. 저 따위 하급 마물들을 상대하는 것보다 더한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우코르바흐의 염화가 초록빛으로 바뀌어 갔다.
이글거리는 초록빛 불꽃이 하기를 향해 공명했다. 하기도 우코르바흐를 향해 낮은 으르렁거림을 토해 놓았다. 서로가 서로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고 기세를 견주었다.
오랜 시간 기다려 온 순간이다. 우코르바흐는 희열에 떨었다. 아스르부테의 소멸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상위의 마왕이라고 깝죽대지만 기실 잔재주를 부리는 어릿광대일 뿐이다. 진정한 싸움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자다.
우코르바흐가 오랫동안 쫓아왔던 이 땅의 지배자, 하기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에 겪어 보았던 어설픈 흄들과는 차원이 다른 강대함을 느꼈다. 하나의 영지를 다스리는 자로서 부족함이 없다.
또한 아스르부테를 멸함으로써 스스로 강대함을 증명했다. 기대가 되었다. 과연 그는 어떤 힘을 보여 줄 것인가? 나에게 어떤 쾌락을 줄 것인가? 서로를 겨누고 있는 이 순간, 우코르바흐는 전희를 만끽했다.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다가올 쾌감에 반응했다. 피부를 타고 흐르는 염화가 기대감으로 이글거렸다.
하기 또한 그 어느 때보다 격앙되어 있었다.
생전 처음 맛본 강대한 마기로 인해 가슴이 부풀어 터질 지경이다. 말단 세포 하나하나가 부르르 떨릴 정도로 흥분했다. 이제껏 느껴 보지 못했던 충만함이 영체를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대기 중으로 흘릴 지경이다.
힘이 넘치면 발산하고 싶은 법! 하기는 득달같이 우코르바흐에게 달려들었다. 자신의 품에 그를 가두고 회전하기 시작했다. 산더미처럼 부풀었던 연기가 밀집되며 작은 토네이도를 이뤘다. 태풍의 눈에 해당하는 지점, 토네이도의 중심에 서 있는 우코르바흐의 살갗에 날카로운 예기가 겹겹이 스쳐갔다.
토네이도는 빠른 회전으로 안쪽의 대기를 빨아들인다. 회전 속도에 따라 진공이 발생할 수도 있다. 따라서 태풍의 중심은 고요해야 마땅했다. 그럼에도 강대한 기세가 우코르바흐의 육체에 상처를 입히고 있는 것이다.
우코르바흐의 육체를 타고 흐르는 염화에 순간적으로 무수한 금이 그어졌다가 다시 메워졌다. 염화는 물론 안쪽 피부까지 갈라진다. 하지만 우코르바흐는 오히려 시원함을 느꼈다. 하기의 기세가 피부를 가를 때마다 쾌감이 솟구쳐 오른다. 우코르바흐는 고통조차 쾌락으로 느낄 만큼 싸움에 미친 존재다.
하기의 기세에 우코르바흐도 흥분의 도를 더해 갔다.
그리고 결국 태풍의 눈이 한순간 메워졌다. 밀도 높게 압축된 하기의 연기가 공간을 채웠다.
불꽃과 연기가 맞닿고 마기와 마기가 엉켜 들었다. 물리적인 힘들이 정면으로 충돌했다. 육체의 손상을 돌보지 않고 서로가 서로에게 무작정 상처를 입히기 시작했다. 싸움에 미친 우코르바흐는 물론 하기조차 오래전 잊었던 첫 싸움의 희열을 되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허리를 뒤틀며 가공할 속도로 회전하는 흑색의 토네이도가 보이는 전부였다.
그 회전의 범위에 들지도 않은 나무들이 뿌리째 뽑혀 나가고 거대한 바위가 들썩이다가 튕겨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