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도플갱어 티프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들이 숨어 있던 자리, 산마루턱에 여섯 사람이 나란히 서 있다. 이들의 시선은 하나같이 분전 중인 검투반원들에게 향해 있었다.
“꽤나 고생하고 있습니다?”
루드이며 동시에 토리도인 나의 주인이 말했다.
“지켜볼 뿐, 관여하지 않겠네.”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존재, 젊은 마법사가 말했다.
“그 천박한 존재는 어찌한답니까?”
“하기 말인가? 당분간은 내 생각에 따를 걸세.”
“후훗, 저들에게는 그나마 다행이군요. 제 제안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내 주인인 토리도는 젊은 마법사에게 하나의 제안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가디언 둘과 나, 인형 하나는 조용히 지켜보고 있을 따름이다.
그나저나 저 가디언, 헤트르 폰티나라고 했던가? 가디언인 주제에 뿜어내는 기세가 만만치 않다. 거의 주인과 맞먹지 않는가?
나의 이름은 티프. 하지만 본명은 아니다.
본명은 우무스 포트토르. 그러나 이 이름도 내 이름은 아니다. 나와 같은 존재, 공존할 수 없는 존재, 본체의 이름이다.
그렇다. 나 티프는 도플갱어! 그림자에서 태어나 실체를 잡아먹어야 할 숙명을 타고난 자, 어둠의 권속(眷屬) 도플갱어다.
도플갱어는 실체가 아니다. 현세에도 속하지 않고, 마계에도 속하지 않고, 신의 피조물도 아닌 그저 존재하지 않는 그림자일 뿐이다.
도플갱어에게는 사명이 하나 있다. 자신의 존재를 걸고 반드시 완수해야 하는 사명! 바로 본체를 잡아먹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
그 자리를 차지했을 때 비로소 존재함을 가지게 된다. 실체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 전까지는 아무것도 아니다. 육체가 있다 한들 본체를 멸하고 그 자리를 차지하기 전에는 공기나 물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그러나 난 사명을 완수하지 못했다. 우무스 포트토르! 또 다른 나! 그림자의 권능으로도 나는 나를 잡아먹지 못했다.
빌어먹을 이크네우몬, 우무스의 호위다. 뛰어난 전사이자 현명한 보좌! 내가 생성되고 내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나에게 잉크를 뿌렸던 자다. 그로써 그는 우무스와 나를 구분 지었다. 외모는 물론 습관과 기억까지 우무스와 완전히 동일한 나를 잉크 몇 방울로 구분 지었다.
그래서 쫓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탈출에는 성공했다. 왜? 난 우무스이기 때문이다. 켈커티스의 방위를 책임지는 제1군단, 그 군단장인 나 우무스를 모르는 지휘관은 없다. 그렇기에 누구도 내 앞을 가로막지 못했다. 내 명 한 마디에 단신으로 나를 쫓던 이크네우몬이 가로막혔다. 그렇게 나는 유유히 켈커티스를 빠져나왔다.
하지만 진짜 우무스가 움직인 후 나의 얼굴은 의미가 없어졌다.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나의 도피는 치열했고, 처절했으며, 고통스러웠다. 나를 쫓기 위해 군단이 동원되었다. 하지만 난 음험한 모략가이자 교활한 지휘관인 우무스와 동일한 존재. 때문에 현명했다. 흔적을 흐리고, 존재를 지웠다.
그렇게 난 크리푸까지 살아서 도착할 수 있었다. 비열한 자의 도시 크리푸는 나 같은 존재들을 숨기기에 최적의 폴리스다. 하지만 안심할 수 없는 일. 나 현명한 우무스는 거기서 멈출 리가 없다. 다시 한 번 신분을 세탁했다. 크리푸이기에 가능했던 작업, 누군가를 죽이고 그의 신분을 얻어 그들의 군대에 자원했다. 그 누군가가 바로 티프다. 어리숙하고 약해 빠진 낙오자. 그의 이름을 얻고 그의 얼굴을 얻었다.
그들의 군대! 추적자들이 절대 생각할 수 없는 곳, 아예 그들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적당한 기회를 노려 중부 대륙으로 넘어간 후 힘을 키워서 돌아올 생각이었는데, 세 번째 전투에서 그만 포로가 되고 말았다. 설마 일개 병의 신분으로 그 혼전 중에 로크리안과 맞닥뜨리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아무리 어둠의 힘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숙성되지 않은 힘으로는 절대 상대할 수 없는 전사! 그렇게 부상을 입고 도착한 곳이 크로아지크다.
로크리안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나, 내 힘은 약하지 않다. 얼굴을 바꿨다고 하지만 검투반으로 갈 생각은 없었다. 왜? 탈출해야 하니까! 엄중한 감시가 따르는 검투반에서는 탈출을 꿈꿀 수 없다. 주목받아서도 안 된다. 그래서 난 일반반을 장악했다. 반장을 조종하고 기존의 부반장을 축출했다. 때를 노리던 내 눈에 더없이 훌륭한 조력자가 발견되었다.
바로 저기 서 있는 루드다. 지금은 감히 마주 바라볼 수도 없는 존재, 강대한 마왕 토리도의 현신이자, 내 섬김을 받는 자!
하지만 난 완전한 그의 권속이 될 수 없는 존재, 도플갱어다. 육체가 있다 하더라도 실체가 없는 존재였기에 그의 종은 될지언정 자식이 될 수는 없다.
뱀파이어의 일곱 왕 중 하나며, 베르타스 계파의 아버지인 토리도이지만 도플갱어까지 변이시킬 수는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좀비든 웨어울프든 그 어떤 감염도, 그 어떤 권능도 실체가 없는 나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난, 그림자에게서 난 존재. 세상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본체를 잡아먹기 전에는 난 어떠한 의미도 가질 수 없는 존재다.
루드라는 젊은 청년은 제법 오랜 시간 반항했지만 토리도의 의지를 이길 수는 없었다.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각성을 이룬 토리도의 의지가 루드의 기억을 잡아먹고 육체를 장악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인간의 수용소 따위가 위대한 토리도의 강림체를 잡아 둘 수 없는 일!
그를 섬기기로 맹세하고 당당히 크로아지크에서 걸어 나와 마계의 문까지 다다랐다.
루드의 육체는 토리도를 강림시킬 만큼 감응력이 좋았지만, 온전히 토리도의 힘을 끌어내기에는 모자란 육체기도 했다.
본체의 힘을 조금이라도 더 끌어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마기였고, 그 마기가 가장 충만한 곳이 바로 이곳 마계의 문이다.
그런데 저기 저 친구, 지금은 토리도의 권속이자 인형이 된 자, 허글러가 우리를 추격해 왔다. 중부 대륙에서 넘어온 방랑 기사라 했던가?
아도니아 제2목민관의 의뢰에 따라 그의 막내아들인 루드를 감시하고 지키던 자다.
홀로 크로아지크를 넘어 추격대를 뿌리치고 우리를 따라잡은 것만으로도 능히 그 실력을 인정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그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마왕이 유희체를 얻었다.
토리도, 인간의 어리석음이 탄생시킨 현세의 마왕이다. 부상당한 육체를 살리기 위해 영혼을 죽이다니, 어디 가당키나 한 말인가? 호위라는 자가 어찌 흑마법사의 욕심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주인의 아들을 바친단 말인가? 꼭두각시 인형이 되어도 마땅한 자다.
그 죄업은 그 자신 하나로 감당할 수 없는 무게를 지녔다. 그 죄업은 치프만 일족이 짊어져야 하고, 아도니아가 짊어져야 하고, 대륙이 나아가 모든 인류가 짊어져야 할 것이다.
토리도가 이 땅을 벗어나는 날, 인간들은 무서운 포식자를 만나게 될 것이다. 토리도의 권속인 흡혈종이 탄생할 것이며 자유와 방종, 타락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포식자에 대한 굴종을 배우게 될 것이다.
흠, 하지만 한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토리도는 이 땅, 마계의 문을 너무 몰랐다. 들어올 수는 있지만 나갈 수는 없는 땅, 그게 바로 이 땅의 다른 이름이다. 아무리 강대한 마왕도 이 땅을 벗어날 수 없었다. 토리도의 실수였고, 무지의 결과물이다.
아, 물론 나는 예외다. 왜? 실체가 없는 존재, 마계든 인간계든 신계든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마물을 막기 위한 베리어는 마물이 아닌 자에게는 반응하지 않는다. 더구나 실체가 없는 존재에게는 경계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 내가 여기에 있는 유일한 이유는 이 땅을 벗어나지 못하는 주인 때문이다.
이 땅에 첫걸음을 내디딘 후 나갈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순간 토리도는 발광했다. 하지만 난 아무렇지도 않게 드나들 수 있었다. 그럼에도 난 토리도를 따랐다. 그만이 나의 유일한 대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에게도 방법은 있다. 지금의 육체를 포기하고 그가 왔던 땅, 마계로 돌아가는 방법이다. 하지만 토리도가 택할 방법은 아니다. 자유를 위해, 유희를 위해 그 고생을 하면서 어렵게 넘어왔는데, 그걸 포기하고 다시 돌아간다?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그렇게 쉽게 포기할 것이었으면 애초에 오지도 않았으리라.
그렇기에 협상을 하려는 것이다.
저기 저 젊은 모습의 마법사,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되어 버린 마법사와 말이다. 마법사는 이제 얼마 남지도 않은 크로아지크 검투반원들을 감시하고 있다.
“좋은 조건이지 않습니까?”
토리도가 말했다.
“내가 왜 그 조건을 받아들여야 하지?”
마법사가 말했다.
“워리놈이 눈치챈다면 저 존재는 틀림없이 소멸합니다. 당신이 원하는 바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일러바치기라도 하겠다는 말인가?”
“못할 이유가 있습니까?”
“당장 그대를 소멸시키는 방법도 있네만?”
“후훗, 이 육체가 본체는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도 그렇구먼. 하지만 아쉬울 텐데?”
“당연히 아쉽지요. 그래서 이렇게 제안을 드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제안을 수락한다면 자네가 어떤 일을 할 수 있지?”
“아스르부테와 우코르바흐를 막아 드리지요.”
“풋, 그 소환체로? 가능하다고 보는가?”
“최선을 다하지요. 이 육체가 소멸한다면 자연히 당신이 수고할 일도 없어지니 손해가 아니지 않습니까?”
“소환체의 소멸까지 각오하겠다?”
“방법이 없으니까요. 어차피 돌아가야 한다면 모험이라도 한번 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대를 풀어 주면 많은 이들이 고통을 받을 걸세.”
“그다지 신경 쓰지도 않는 것 같습니다만?”
“클클, 잘도 아는구먼.”
“그럼 계약하시는 겁니까?”
“아니, 좀 더 생각해 봐야겠네. 나이가 먹다 보니 생각이 느려져서 말일세.”
“후훗, 나이가 드셨다고요? 쯧, 어린 친구가 나이 타령이라니 가소롭기 짝이 없군.”
“클클, 맞는 말이네. 자네에 비하면 한참 어린 것이 맞네만. 발전이 없는 마족과 인간이 같을 수는 없겠지.”
잠시 비웃음을 머금었던 토리도의 안색이 새삼 화사해졌다.
“하하하,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수명이 짧은 것 아니겠습니까? 수명만 늘여 놔도 아주 위험한 존재가 인간 아닙니까? 당신처럼 말입니다. 후후. 아무쪼록 늦지 않게 결정을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지금 저 친구 실력이 정 맞기 딱 좋지 않습니까?”
“그렇구먼. 빨리 결정하기로 함세.”
“이곳에서 저를 도울 수 있는 존재는 오직 당신 하나뿐인 거, 인정합니다. 그렇기에 돌려 말하지 않았습니다. 저를 봉인해 내보내 주신다고 약속하시면 소환체의 소멸을 각오하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부디 좋은 결정 부탁드립니다, 주운.”
결국 협상은 유보되었다. 하지만 결렬이 아니니 희망을 품어 볼 수 있지 않겠는가? 토리도의 기분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나 역시 희망을 품어 본다. 내 힘으로는 모자라니 그의 힘이 필요하다. 난 반드시 돌아가야 한다. 돌아가 우무스를 잡아먹고 실체를 얻어야 한다. 그것이 내 사명이고 내가 태어난 의의(意義)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토리도 역시 이곳을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좋은 주인을 섬기면 마땅히 종에게도 좋은 일이 생기는 것이 이치 아니겠는가?
땀깨나 흘리는 검투반원들을 지켜보던 토리도가 먼저 돌아섰다.
나 역시 주인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떼며 말했다.
“가자, 허글러!”
어리석은 인형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