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웨어울프
그렇게 며칠이 지난 후 산기슭에서 마인의 무리와 조우했다. 오십여 마리의 마물과 다섯 명의 마인이었다.
“뚫어!”
마인들이 다섯이나 포함된 무리였지만 커트리안은 거침없이 명했다. 명이 떨어지자 쥬시아누스를 필두로 기대원들도 거침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한때 공포의 대상이었던 마인들이지만, 누구 하나 개의치 않았다. 이미 여러 차례 상대해 본 터라 마인들의 능력과 기대원들의 능력을 능히 비교할 수 있었다. 지금의 전력이라면 마인 몇 마리 정도는 아무런 무리가 되지 않았다. 고골리를 제외하더라도 조노량이나 쥬시아누스 등 몇몇만 나서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을 정도였다.
쥬시아누스의 뒤를 이어 조노량도 뒤처지지 않고 뛰쳐나갔다.
마인 하나가 불덩이를 소환하더니 달려드는 조노량을 향해 쏘아 보냈다. 위력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불덩이를 소환하고 쏘아 보내는 전 과정이 눈에 보인다. 피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조노량은 달려 들어가는 기세를 죽이지 않고 몸을 낮게 가라앉혔다.
화끈한 열기가 등 위로 지나가는 느낌을 받자마자 몸을 솟구쳐 올린다. 순식간에 좁혀진 마인과의 거리는 불과 오 미터! 마인은 어느새 두 번째 불덩이를 소환해 놓고 있다. 이 정도 거리에서 쏘아진다면 피하기가 만만치 않다. 재차 도약을 한다 해도 불덩이가 쏘아지는 것이 먼저, 조노량은 우측으로 몸을 날리며 왼손바닥을 뻗었다.
푸웅!
실제 소리가 나지는 않지만 발출될 때 장심에서 느껴지는 소리다.
마인으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공격, 공간을 격한 암경에 마인은 가슴을 부여잡으며 모로 쓰러졌다. 소환되었던 불덩이는 흙바닥을 치고 허무하게 소멸되었다.
마저 거리를 좁힌 조노량이 아직까지 꿈틀거리는 마인의 목을 끊어 냈다. 내기의 소모가 조금 과다해서 그렇지, 암경은 뛰어난 기술이다. 장심을 뻗어 내는 동작만 아니라면 누구도 암경을 눈치챌 수 없다. 드러나는 시청각적인 효과가 전혀 없다.
그 사이 블링크를 하며 쥬시아누스를 괴롭히던 마인이 예니에프의 브로드소드에 등을 꿰뚫렸다.
난전이란 그런 것이다. 앞의 상대만 신경 쓰면 눈먼 검에도 목숨을 잃을 수 있다.
난전이 벌어지는 지역에 제우스의 홀리필드가 떨어져 내렸다. 반경 삼십 미터의 공간은 그렇게 좁은 공간이 아니다. 공간 안에 들어 있던 두 마리의 마인이 온몸을 비틀며 무너져 내렸다. 그대로 둬도 살아남지 못하겠지만 빠르게 목을 취했다. 거치적거리는 마물들의 숨통도 끊어 놓았다.
그 모습을 보던 마인 하나가 급히 전장을 이탈하려 했지만 어느새 길을 막은 예니에프에게 가로막혔다. 잠시 주춤하는 사이에 광기에 찬 기대원들이 달려들었고, 순식간에 목이 달아났다. 전장을 굽어보는 넓은 시야와 효율적으로 공간을 점유하는 움직임, 역시 예니에프다웠다.
불과 십여 분! 다섯의 마인으로는 크로아지크 기대의 발을 멈출 수 없다.
그때까지 홀리필드의 빛은 꺼지지 않고 이글거리고 있었다.
커트리안 옆에서 음침한 미소를 짓고 서 있던 고골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러워했다.
“마인들이 보이는 걸 보니 슬슬 전장에 가까워지는 것 같군. 이제부터는 조심해야 할 거다.”
“전장이라니요?”
“전에 이야기하지 않았나? 마물들 간에 전쟁이 벌어졌다고. 이제부터가 고비다.”
고골리의 말에 모두들 침중한 안색을 보였다. 마물들 간의 전쟁, 분명히 들었던 이야기다.
“돌아서 가는 길은 없소?”
커트리안이 묻자 고골리는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돌아가? 어디서 전투가 벌어지는지 알고? 한 달쯤 여정을 늦출 생각이라면 가능하지.”
가디언이 되었지만 천생 무골인 고골리는 무언가를 피해야 한다는 것 자체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그럴 수는 없다. 하루라도 일정을 당겨야 할 판에 한 달을 돌아간다니! 선택하라고 한 제안도 아니고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도 아니었다.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 커트리안은 차츠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차츠라, 쉴 만한 곳을 찾아라. 하루를 휴식하겠다.”
커트리안의 명이 떨어지자 차츠라가 지형을 가늠하더니 오른쪽으로 사라져 갔다. 숲과 구릉이 보이는 방향이었다. 하루를 온전히 쉬려면 안전한 장소가 필요할 것이다.
고골리의 말대로라면 앞으로의 여정은 지금까지처럼 순조롭지 못할 것이다. 이쯤에서 휴식을 취해 줘야 한다.
아무리 순조로운 여정이었다지만 마물들과 끊임없이 전투를 치르며 한 달을 넘게 달려왔다. 전투만큼이나 추위도 기대원들의 체력을 갉아먹었다. 지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결론적으로 일행은 쉴 수가 없었다.
어우우!
인접한 산에서 들리는 늑대의 울음소리!
“이런 곳에 늑대가 있나?”
A클래스 세타가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우우우!
어우!
어어우울!
먼젓번 울음소리에 화답이라도 하듯 사방에서 늑대의 울음소리가 메아리쳤다.
“예사롭지 않은데요?”
뭔가 불길한 기분을 느낀 예니에프가 주변을 경계하며 커트리안을 바라보았다.
“저곳! 절벽을 등지고 경계 태세를 갖춰라.”
기대는 짐들과 제우스를 가파른 절벽 안쪽에 배치하고 반원진을 형성하고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정찰을 나갔던 차츠라가 최고 속도로 본대로 복귀했다. 그 뒤로 예닐곱 마리의 늑대가 따라붙다가 포진하고 있던 본대를 보자 추격을 멈추고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다.
늑대들은 두 눈을 희번덕거리며 일행의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다. 그 숫자가 순식간에 백여 마리 이상으로 늘어나 버렸다.
한 마리 한 마리가 거의 말만 한 크기의 회색 늑대들이었다. 날렵한 허리와 억세고 두꺼운 어깨가 보통의 늑대는 아니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늑대들은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다가 슬그머니 옆으로 돌아서 일행을 관찰하기를 반복했다. 바로 치고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일행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감시만 하면서 뭔가를 기다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늑대들의 뒤로 시커먼 물체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헉! 웨어울프?”
“저렇게 큰데?”
“마계의 문에 작은 것도 있더냐? 웨어울프 맞아! 전에도 본 적이 있다.”
테오도르가 가죽 모자를 고쳐 쓰며 말했다. 중년의 사내, 경박해서 그렇지 경험이 많은 사내다.
그랬다. 뒤에 모습을 드러낸 늑대들은 엉거주춤하긴 했지만 직립한 상태였다. 대략 삼십여 마리?
“빌어먹을! 골치 아프게 되었군.”
“이제 슬슬 오겠는데요?”
“웨어울프에게 물리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절대 물리지 말고!”
예니에프가 오랜만에 등짐에 걸어 두었던 풍뎅이 방패를 꺼내 들었다.
그 모습을 본 다른 기대원들도 각자의 짐에서 풍뎅이의 등껍질로 만든 쉴드를 꺼내 단단히 움켜쥐었다.
“온다!”
그 순간 늑대들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일반 마물들과 달리 날렵한 움직임, 거기에 도약력과 덩치가 더해진 파워는 마물화된 기대원들에게도 버거웠다.
심지어는 놀라운 반사 신경으로 기대원들의 검을 피해 내거나 이빨로 물어 버리기까지 하니, 시간이 갈수록 기대원들이 구축한 반원진(半圓陣)이 조금씩 좁혀지기 시작했다.
조노량은 달려드는 늑대의 머리를 대각으로 갈라 버렸다. 아무리 반사 신경이 뛰어나더라도 조노량의 검까지 피해 내기는 힘들었다. 늑대는 단 한 번의 칼질에 절명해 버렸다.
‘아, 이게 아닌데?’
조노량은 살짝 당황했다. 절명했다 하더라도 쳐 낸 것은 아니었다. 늑대의 시체가 달려드는 속도 그대로 조노량을 덮쳐 온 것이다. 시체라 하더라도 속도와 무게가 변한 것은 아니다. 물론 피하거나 방향을 틀어서 던져 버리는 것은 문제도 아니다.
조노량은 삼류 시절부터 상대의 힘을 이용하는 기술은 단연 발군이었다. 앞으로 튕겨 내는 것은 몰라도 뒤로 던져 버리는 것은 넉 푼의 힘만으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그곳은 반원진의 안쪽. 그랬다가는 제우스나 다른 기대원이 조노량의 힘까지 더해진 늑대의 시체를 받아 내야 했다.
그 순간 조노량의 뒤에 있던 샤마노프의 촉수가 늑대의 어깨 부근을 휘둘러 쳐 내 버렸다. 인간의 근력을 뛰어넘는 촉수의 힘에 늑대의 거체가 하릴없이 날아가 버렸다.
“아무 걱정 말고 베어 버리십시오.”
조노량은 샤마노프의 힘에 혀를 내둘렀다.
아직도 늑대들은 많았다. 그들의 덩치로 인해 풍경이 가려질 지경이다.
다시 한 마리의 늑대가 조노량을 향해 도약해 들어왔다. 손가락만 한 송곳니가 빽빽이 드러난 주둥이부터 세로로 양단해 버렸다. 그리고 허리를 살짝 굽히고 머리 위로 지나가는 늑대의 배를 손등으로 툭 밀어 버렸다. 날아오는 힘에 더해진 작은 힘, 그걸로 족했다. 늑대의 시체가 오히려 위로 조금 더 떠올랐고, 샤마노프의 촉수는 여지없이 죽은 늑대의 거체를 살아 있는 늑대들의 머리 위로 날려 버렸다.
날아가는 시체의 속도로 보아 서너 마리는 밀어 버릴 줄 알았는데, 늑대들의 반사 신경도 만만치 않았다. 빽빽이 모여 있음에도 날아오는 늑대와 충돌하는 놈은 하나도 없었다. 슬쩍 비켜섰다가 죽은 늑대가 떨어지자 밟아서 멈춰 세웠다. 지금껏 봐 왔던 그 어떤 촉수 마물보다도 빠른 몸놀림이었다.
놀라고만 있을 수 없는 일. 늑대들은 한 치의 틈도 주지 않고 계속해서 아래위로 달려들었다. 오첩도를 뻗고 조금 밀린다 싶은 곳으로 파마장을 던져 넣었다. 내공의 소모가 좀 있더라도 검로에 간섭을 받을 만큼 반원이 좁아져서는 곤란했다. 조노량의 파마장을 맞은 늑대는 뒤의 늑대와 함께 엉켜서 나뒹굴었다. 거리를 두고 날아오는 시체야 피해 내지만, 코앞엣 놈이 튕겨지는 데야 아무리 빠른 반사 신경이라도 어쩔 수 없는 일!
조노량이 부지런히 파마장과 오첩도를 번갈아 날릴 때, 제우스의 홀리필드가 늑대의 무리 한가운데에 떨어져 내렸다.
늑대들 역시 마물이 아니랄까 봐 홀리필드의 영역에 들자마자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깨갱 소리를 토해 놓고 몸을 부들부들 떨며 너부러졌다.
연달아 두 번의 홀리필드가 떨어지자 기대원들에게도 약간의 여유가 생겼다.
“미친 강아지 새끼들, 꼴좋다!”
하지만 두 홀리필드 사이에는 여전히 공간이 남아 있었고, 민첩한 늑대들은 절묘하게 그 틈을 파고들었다.
그래봐야 아까보다는 훨씬 수월했다.
그때 뒤편에서 비교적 몸집이 작은 웨어울프 한 마리가 앞으로 나섰다. 그에 맞춰 다른 웨어울프들이 슬금슬금 위치를 이동했다. 마치 자리를 비켜 주는 듯한 모습이다.
아직 변이가 끝나지 않은 듯 인간의 특징을 그대로 보전하고 있는 웨어울프였다. 단단한 회색빛 피부에는 듬성듬성 털이 나 있었고, 얼굴은 늑대의 얼굴과 인간의 얼굴이 절반쯤 섞어 놓은 모습이었다. 그 얼굴은 현재도 변이가 진행 중인 것처럼 불분명한 형태로 일렁이고 있었다.
어깨와 하체, 오른쪽 앞발은 완전히 변이를 마친 듯 웨어울프의 그것과 같았지만 하복부는 인간의 피부를 유지하고 있었다. 왼손도 하박 부분 절반쯤은 인간의 팔을 유지하고 있었다. 더구나 왼손의 손톱이 수시로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것이 영 기괴했다.
하지만 뭔가 낯설지 않은 느낌이다.
앞으로 나선 기묘한 웨어울프가 희번덕거리는 눈빛으로 으르렁거리자 몇 마리의 웨어울프가 홀리필드를 피해 일행에게 쇄도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웨어울프들이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별 괴물이 다 있군. 자, 이제부터 진짜 싸움이다. 아까 말한 대로 절대 물리면 안 돼!”
예니에프가 브로드소드를 고쳐 쥐며 말했다.
총 다섯 마리의 웨어울프가 속도를 내고 있었다. 그 경로에 있던 일반 늑대들이 자리를 피해 분분히 물러났다.
☆ ☆ ☆
이쪽에서도 예니에프와 고골리, 조노량, 쥬시아누스와 스마르가 앞으로 나섰다. 자칫 물리기라도 하면 죽거나 혹은 웨어울프로 변이할 수밖에 없을 터. 차라리 독이라면 제우스가 치유할 수 있겠지만, 종족 자체가 변해 버리면 치유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
조노량은 자신에게 달려드는 웨어울프를 노려보고 있다가 거의 근접해서야 기습적으로 오첩도를 날렸다. 일반 늑대와 달리 직립을 하는 웨어울프다. 자연히 앞발의 움직임이 일반 늑대와는 달랐다. 그 짧은 순간에 날아오는 오첩도를 앞발로 쳐 흘려내려 들었다.
오첩도는 앞발로 후려쳐서 비끼고 단숨에 조노량의 목줄기를 물어뜯으려는 심산! 일반 늑대보다 반 배는 더 커다란 웨어울프에게 깔리면 그대로 끝이다.
하지만 웨어울프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조노량의 오첩도는 웨어울프가 생각한 것보다 빨랐고, 그 원의 궤적은 유연했다. 타원이 슬쩍 틀어지는 것만으로도 오첩도는 웨어울프의 손톱을 정면으로 맞이해 갔다. 그리고 오첩도의 예리한 검날[劍刃]이 손톱과 손톱 사이를 파고들었다.
스겅
손톱과 손톱 사이를 파고든 검날은 마치 빈 공간을 지나듯 저항 없이 늑대의 앞발을 세로로 갈라 버린 후 팔꿈치 언저리로 빠져나왔다.
투퉁!
세로로 쪼개진 단면에서 기포가 터지듯 미세한 폭발이 일어났지만, 이를 미처 느낄 새도 없이 아까 전 늑대를 던지듯 웨어울프의 거체를 뒤쪽으로 슬쩍 던져 놓았다.
운이 없는 웨어울프였다. 부상의 고통과 함께 꼴사납게 처박힌 장소가 하필 샤마노프의 앞이었다. 차려진 밥상을 놓칠 샤마노프가 아니었다.
샤마노프의 단창과 촉수가 동시에 날았다.
푹!
폭 폭 포포폭!
골곤의 뼈로 만든 단창과 촉수가 웨어울프의 두개골, 눈, 턱과 목을 동시에 꿰뚫었다. 아무리 웨어울프의 재생력이 뛰어나다고는 하지만 뇌가 파괴되면 그것도 소용없는 일.
웨어울프는 그 와중에도 몸을 일으키려는 모양새로 절명하고 말았다.
웨어울프의 죽음을 확인한 조노량이 전장을 훑었다. 단 한 번의 도약 만에 승부를 끝내 버린 바람에 고골리조차 아직 웨어울프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두어 번의 망치질 끝에 고골리를 상대하던 웨어울프도 곧 납작해져 버렸다. 나머지도 어렵지 않게 웨어울프를 처리해 냈다.
크르릉
분노가 묻어나는 낮은 울부짖음.
키 작은 웨어울프가 짧은 울음을 토해 내고는 직접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 울음에 호응이라도 하듯 나머지 웨어울프들이 한꺼번에 달리기 시작했다. 어찌나 빠른지 나와 있던 사람들은 진영 안으로 합류하지도 못했다.
각자 달려든 웨어울프를 상대해야 했기에 다른 곳을 신경 쓸 여가도 없었다. 일순간에 일대 혼전이 벌어졌다.
조노량도 세 마리의 웨어울프에 둘러싸여 정신없이 환영보를 밟으며 오첩도를 날리기 시작했다. 웨어울프들은 공격할 때마다 그림자처럼 빠져나가는 조노량의 몸놀림에 화가 났는지 목을 꺾으며 조노량의 그림자라도 물어뜯으려 했다. 하지만 이미 조노량의 신영은 그 자리에 없었다. 뒤를 쫓으며 미친 듯이 앞발을 휘둘렀다. 짐승의 머리로는 환영보의 변화를 알아챌 수 없는 일, 번번이 헛손질을 하고 빈 이빨만 부닥칠 따름이다.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자 진형을 유지하고 있던 기대원들이 빠르게 전장에 합류했다. 기대원들도 거의 마물급의 인물들, 상대가 웨어울프라고 하더라도 밀리는 전투력이 아니다. 접전이 펼쳐졌다. 하지만 우위를 점했다고 보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몇 배나 많은 마물들을 상대로도 밀리지 않던 모습과 비교하면 웨어울프들이 얼마나 강한지 짐작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조노량이 웨어울프 한 마리의 목을 절단했을 때 예니에프의 처절한 고함소리가 울려 퍼졌다.
“롤! 로올!”
너무나 의외의 이름에 조노량의 고개가 절로 돌아갔다.
그 자리에는 우두머리로 보이는 기괴한 모습의 작은 웨어울프가 늘 풋내기라고 놀림을 받던 질로의 목을 물어뜯는 모습이 보였고, 예니에프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처절하게 절규하고 있었다.
“로올! 세스카의 롤!”
그 순간 질로의 목을 반쯤 뜯어낸 웨어울프가 고개를 쳐들고 예니에프를 바라보았다.
“정신 차리란 말이야! 미친 노인네야!”
예니에프가 처절히 울부짖으며 달려들기 시작했다. 거의 광전사에 버금가는 모습으로 브로드소드를 내리치는 예니에프를 맞아 기괴한 모습의 웨어울프가 손톱을 뻗어 왔다.
캉! 카캉, 캉!
둘 사이에서 쇳소리와 흡사한 타격음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질로라고! 당신이 제일 귀여워했던 어린 질로라고!”
‘도대체 무슨 소린가?’
악에 받친 예니에프의 목소리가 전장을 쩌렁쩌렁 울려댔다. 예니에프의 브로드소드에서는 짙은 자색의 오오라가 뭉클거리며 범위를 넓혀 갔다.
“차라리 죽어 버리지!”
브로드소드가 날았다.
“어떻게 이런 모습으로 나타난 거야!”
웨어울프의 어깨 부근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어떻게 질로를 물어뜯을 수가 있어! 차라리 죽어!”
웨어울프의 오른 앞발이 예니에프의 가슴을 갈라놓았다.
조노량이 뛰었다.
브로드소드가 웨어울프의 옆구리를 반쯤 베어 냈다. 하지만 그 순간 웨어울프의 오른쪽 앞발이 예니에프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웨어울프의 두꺼운 손에 비하면 가냘파 보이는 예니에프의 목덜미, 힘만 주면 그대로 끊어져 버릴 상황. 사방에서 날뛰는 웨어울프들 때문에 조노량은 아직 현장에 도착하지 못했다. 안 돼! 조노량은 속으로 비명을 삼켰다.
“그르르릉.”
“그래, 죽자! 죽여! 로올!”
막 암경을 발출하려던 조노량의 눈에 예니에프의 목을 틀어쥔 웨어울프의 얼굴이 보였다.
“롤?”
그랬다. 웨어울프의 얼굴이 슬쩍 걷히는 순간, 롤의 얼굴이 표면에 떠올랐다. 처진 눈에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하관이 넓은 특색 있는 얼굴, 분명 롤의 얼굴이었다. 잠시 인간의 얼굴로 돌아오던 웨어울프의 얼굴이 일렁이더니 다시 웨어울프의 특색을 표면에 올렸다.
으득!
힘을 주던 웨어울프의 얼굴에 다시 롤의 얼굴이 겹쳐졌다.
툭
웨어울프가 손에서 힘을 풀자 예니에프가 떨어져 내렸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웨어울프의 목에서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르르…… 아아아악!”
늑대의 성대가 아닌 인간의 성대에서나 날 법한 소리. 롤의 얼굴을 보여 주었던 웨어울프가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기괴한 모습의 웨어울프가 전장을 벗어나며 한 번 더 울부짖었다.
아우울!
이번엔 늑대의 울음소리, 그 소리에 웨어울프들이 싸움을 멈추고 전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전장에 끼어들지 못하고 으르렁거리던 늑대들도 웨어울프들의 뒤를 따라 자취를 감추었다.
“로올…….”
쓰러져 있던 예니에프의 입에서 울음 섞인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분명 롤이었는가?”
쥬시아누스가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예니에프가 누운 채로 고개만 끄덕였다. 가볍게 한숨을 내쉰 쥬시아누스가 예니에프를 일으켜 세워 품에 안았다.
롤이 살아 있는 것은 큰 다행이었지만 더 이상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게다가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대원들을 습격하고, 심지어는 질로를 물어 죽이기까지 했으니, 이제 전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라는 걸 인정해야 했다. 휴식은 취소되었다. 언제 다시 웨어울프의 무리가 일행을 습격할지 알 수 없는 일이었기에 서둘러 장소를 옮겨야 했다.
그 후 기대의 분위기는 극단적으로 갈렸다. 일부는 극도로 우울해했고, 일부는 시니컬한 반응을 보일 뿐 크게 괘념치 않는 분위기였다.
“어차피 우리도 같은 신세 아니요?”
샤마노프가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반면 젊은 기대원들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상황이 힘들면 그만큼 더 기댈 곳을 찾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수용소에서도 그랬고, 마계의 문에서도 그랬다. 격의 없는 성격의 롤은 젊은 기대원들에게 아버지 같고 형 같은 존재였다. 그랬기에 더욱 롤에게 의지하는 마음이 컸었다. 벌써 반년이 지난 일이지만 젊은 기대원들의 가슴에는 아직까지 롤이 살아 있었다.
전투가 벌어지면 울분을 토해 놓듯 검을 휘둘렀다. 몸을 돌보지 않아 몇 번이나 주의를 받곤 했다.
며칠이 흘러서야 조금 분위기가 나아졌다. 한동안 말을 잊었던 예니에프도 체념한 듯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생존과 탈출이라는 명제 앞에 적응해 가는 것이다. 샤마노프의 말대로 선후만 다를 뿐, 그들의 신세도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과연 이 중 몇이나 살아서 마계의 문을 벗어날 수 있을까?
그러던 어느 날 척후에 나섰던 차츠라가 돌아와 대규모 마물의 존재를 알렸다.
“저 너머 벌판?”
고골리가 물었다.
“맞습니다.”
차츠라가 대답했다.
“좋지 않군. 플라누라 평원이라면 돌아갈 수도 없지.”
“플라누라 평원?”
“저기, 저쪽으로, 산을 넘어가면 과거 플라누라라고 불리던 평원이 나온다. 크로아지크 황야에 비견될 만큼 광대하지. 애초에 이쪽으로 길을 잡은 이유가 그나마 평원에서 가장 좁은 지역이기 때문이다.”
고골리가 심각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황야를 비껴서 가려면 두 달은 잡아야 하는데, 뚫는 수밖에 없어. 일단 상황을 살펴보지.”
고골리의 말대로 상황을 파악해야 했기에 커트리안을 비롯한 일부가 벌판이 내려다보이는 산마루까지 올랐다.
탁한 회색빛 대기 탓에 멀리까지 보이지는 않았지만, 벌판에는 제법 많은 수의 기형 마물들이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보이지 않는 황야. 이런 개활지에서는 척후고 뭐고 의미가 없었다.
돌아가지 않을 거라면 강행 돌파 말고는 달리 방도가 없다.
아직 이른 오후였지만 산기슭에 몸을 숨기고 하룻밤을 쉬었다. 최상의 몸 상태를 만들기 위해 충분히 먹고, 평소보다 오래 쉬었다. 제우스가 돌아다니며 기대원들의 자잘한 상처까지 돌봐 주었다.
다음 날 이른 식사를 마친 후 산기슭을 넘어갔다.
언덕 아래로 거대한 벌판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간혹 물결처럼 굴곡진 지형이 보이긴 했지만, 시야가 닫는 모든 곳이 평지였다. 몸을 숨길 곳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어제 확인해 본 바대로 곳곳에 기형 마물들이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서너 마리씩 모여 있었지만 전투가 개시되면 근처에 있는 마물들은 전부 모여든다고 봐야 했다.
“마계 광장과는 비교도 안 되는군. 저 넓은 곳을 언제 돌파하지?”
슬그머니 조노량 곁으로 온 크리들이 중얼거렸다. 크리들 역시 암담한 기분일 것이다.
“킬킬, 저기서 죽으면 풍장(風葬)이 되는 겁니까? 노리앙.”
샤마노프 역시 조노량 옆으로 와 되지도 않는 농을 건네 왔다. 풍장이 될 턱이 있나? 뼛조각 하나 남김없이 마물의 배 속으로 들어갈 텐데.
차츠라가 묘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제보다 숫자가 줄었소.”
“저게 줄은 거리고요?”
하이오지가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확실히 줄었다.”
쓸데없는 한담을 하는 사이 고골리와 뭔가 이야기를 주고받던 커트리안이 기대원들을 주목시켰다.
“죽음이 두렵나?”
웅성거리던 소음이 그치더니 여기저기서 대답이 터져 나왔다.
“두렵지 않습니다!”
“까짓 것, 여서 죽나 저서 죽나 죽는 건 매한가지요.”
“전사로 죽겠소!”
“명예로운 죽음을!”
의지를 불태우든 자포자기를 하든 기대원들은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잠시간 격한 감정의 파도가 기대원들을 휩쓸고 자나갔다.
커트리안이 손을 들어 다시 주의를 집중시킨 후 말했다.
“좋다. 헤르모스의 품에 안길 때까지 전사의 긍지를 잃지 마라. 진형은 전진하는 창!”
마계 광장을 벗어날 때 펼쳤던 진이 다시 펼쳐지게 되었다.
“선두는 고골리 님이 맡아 주시겠소?”
“껄껄, 그러지.”
“좌측 선은 쥬시아누스, 우측 선은 노리앙, 우측 후는 샤마노프, 좌측 후는 브리오티스! 스마르와 예니에프는 제우스 님을 보호하면서 힘을 비축하라. 개진!”
커트리안의 명이 떨어지자 전 기대원이 일사불란한 움직임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아고투스, 아르고스!”
“아고투스, 아르고스!”
기대는 커트리안의 선창에 화답하며 천천히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기대의 움직임을 포착한 마물들이 포효를 내지르며 몰려들었다.
“껄껄, 전진하는 창이라! 오랜만에 피가 끓는군. 자, 달려 보자! 동맹의 전사들아. 우하하하!”
고골리가 광소를 내지르며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