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본진을 찾아서(1)
하룻밤의 휴식을 취한 일행은 다음 날부터 바로 본진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정찰조가 살아남아 귀환할 것을 대비해, 누군가 모닥불 위에 타다 남은 나뭇가지를 흙바닥에 위에 꽂아 표시를 해 놓은 것이다. 본가지에서 갈라진 가지와 옹이가 마치 화살표 모양을 이루고 있었기에 방향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얼핏 보면 모닥불을 끄는 과정에서 생긴 자연스러운 형태로 생각될 수 있지만, 가지가 흙바닥에 박힌 정도가 인위적인 힘이 가해졌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다행히 일행에게는 차츠라라는 추적의 전문가가 포함되어 있었다.
계곡의 하류, 남서쪽 방향을 살핀 차츠라가 몇 가지 흔적을 추가로 발견하고는 표식에 확신을 갖고 추적을 시작했다.
워낙 대규모 인원이 이동한 터라 흔적을 쫓는 데는 그다지 어려움이 없었다. 다만 본진의 이동 속도가 상당히 빠르다는 것이 문제였다. 만 하루를 추적했지만 차츠라의 의견으로는 본진과의 거리가 점점 벌어지고 있다는 결론이었다.
차츠라는 말미에 거리가 벌어진 이유를 추정해 덧붙였다.
“은밀히 이동하기보다는 돌파를 선택한 모양이오.”
샤마노프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었다고 하더라도 그런 선택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정도 대규모 인원이라면 계속 숨어서 이동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또한 그 정도 전력이라면 소규모 마물 무리 정도는 그냥 뚫어 버리는 것이 더 효율적일 것이다.
침투 작전을 치를 때도 마찬가지다. 적당히 숨어 이동하다가 이동 루트를 가로막고 있는 소규모 적 부대와 조우하면 빠르게 섬멸하고 이동하는 것이 정석이다. 부대 단위의 전투를 많이 치러 본 커트리안이라면 당연한 선택일 것이다.
그런 선택이 일행으로서는 절망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단 세 명으로 이루어진, 그것도 크고 작은 부상과 누적된 피로를 해소하지도 못한 일행으로서는 본진과 동일한 선택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 마리 정도만 되어도 어떻게 해 볼 수 있겠지만 서너 마리만 모여 있어도 돌파를 생각할 수 없다. 단시간 내에 처치하지 않으면 역으로 쫓기는 신세가 될 수밖에 없었고, 이는 다른 마물들의 합류라는 최악의 결과로 귀결될 터임이 분명했다.
더구나 아직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상념에 빠져 있는 노리앙도 문제였다. 이동 시 조심성이 현격히 떨어졌다. 사실 속도 면에서 보자면 셋 중 가장 빠른 이가 노리앙이었다. 또한 마물의 기척을 알아채는 능력도 가장 탁월했다. 그런 사람이 며칠째 이러고 있으니 답답할 뿐이었다.
샤마노프는 유일한 말상대인 차츠라에게 우려 섞인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노리앙은 어느 순간부터 거의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다가 흔적을 놓치기라도 하면……?”
“그렇게 간단히 흔적을 놓치지는 않겠소만, 이 상태로 계속 간격이 벌어진다면 그때는 그렇게 되겠지.”
“음.”
차츠라의 대답에 샤마노프는 침음성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만약 본진과 합류하지 못한다면 마계의 문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은 제로였다. 지금까지 마계의 문에서 누군가 살아나왔다는 소문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마계의 문이 전 대륙적 절대 금지가 아닌가?
물론 본진과 합류한다 하더라도 살아서 이 금지를 빠져나간다는 보장은 없다. 그렇지만 달리 선택의 여지가 있었던가?
혼란스러웠다. 스스로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누군가가 필요했다.
흔들림 없는 의지를 가진 누군가가 있어, 자신에게 단호한 명령을 내려준다면 그 끝이 죽음일지라도 전사답게 의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욱 본진이 필요했다. 커트리안이 필요했다.
그와 함께 있을 때는 절망하지 않았다.
그와 함께 나간 전장에서는 죽음도 두렵지 않았다.
그의 신념은 강했고, 누구보다 단호했다.
실수를 하더라도 후회하는 법이 없었다. 지나간 상황을 놓고 고민하는 법도 없었다. 그는 언제나 ‘아르고스 아고투스’를 외치며 전진했다. 그리고 실수는 늘 만회되곤 했다.
그와 함께 전장에 나설 때, 샤마노프는 언제나 명예로운 죽음을 생각했다. 그럼에도 그럴 기회는 쉽게 주어지지 않았다.
그는 부하들에게 쉽게 죽을 기회를 주는 지휘관이 아니었다.
카울!
“빌어먹을! 노리앙!”
차츠라의 다급한 목소리에 샤마노프의 상념이 깨졌다.
조심한다고 조심했지만 나무 위에 은신해 있는 마물까지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샤마노프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마물이 기다란 팔을 휘저으며 하강하고 있었다. 마치 원숭이를 연상케 하는 외모지만 키가 사람의 세 배는 족히 될 정도로 길었다. 키보다 더 길어 보이는 팔다리 사이를 잇는, 박쥐의 날개를 연상시키는 가로막을 활짝 펴고 날아 내리고 있었다.
샤마노프와 마찬가지로 상념에 빠져 있던 노리앙도 상황이 파악된 모양이었다.
노리앙은 마물을 향해 단검을 쏘아 보냄과 동시에 몸을 뽑아 올렸다. 샤마노프는 그런 노리앙의 입가에 반가운 미소가 걸린 듯한 착각이 들었다.
샤마노프는 다급히 주변을 살폈지만 다른 마물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 잠깐 사이에 노리앙과 마물이 격돌했다.
노리앙 특유의 아지랑이 같은 오오라가 어린 기형검이 마물의 복부를 횡으로 가르고 있었다. 먼저 발출된 단검도 마물의 명치끝에 손잡이까지 깊숙이 박혀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복부를 빠져나온 기형검이 기다란 핏줄기를 흘리며 교차되는 순간, 샤마노프는 비명을 내지르고 말았다.
모였다가 흩어진 노리앙과 마물의 몸이 이미 몇 미터나 벌어진 상황이었는데, 마물이 뻗은 손이 조노량의 옆머리를 가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노량 역시 예측하지 못한 듯 검을 되돌리지 못하고 왼손으로 급히 옆머리를 방어했으나 그대로 가격당하며 거세게 튕겨져 버렸다. 위력도 위력이지만 손 자체가 조노량의 머리통보다 서너 배는 컸기 때문에 한 방에 머리통이 터져 버려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먼저 대지에 발을 디딘 마물이 공중에서 이십 미터 이상 밀려나며 나동그라지는 조노량의 하락 지점을 향해 쇄도하기 시작했다.
샤마노프와 차츠라가 급히 마물을 따라잡으려 했으나 기다란 다리로 두어 발자국 만에 성큼성큼 달려갔기에 도저히 막아낼 방도가 없었다.
샤마노프는 자기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 노리앙을 잃을 수는 없었다.
바닥에 충돌한 후, 두어 번 튕기고 두어 번 구르던 노리앙이 어렵사리 자세를 잡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땅에 닿아 있는 무릎도 채 펴기 전에 채찍 같은 마물의 오른손이 노리앙의 뒤통수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더 이상 망설일 틈이 없었다.
샤마노프의 단창이 최초로 투척용으로 사용되었다. 자칫, 하나 남은 무기조차 잃게 되면 샤마노프로서도 희망이 없었다. 단검 몇 개로는 마물들에게 대항할 수 없는 것이다.
‘제발, 뚫어라!’
간절히 바랐지만 샤마노프 자신도 확신할 수 없었다. 날아가는 단창에 오오라를 실을 수는 없는 법. 과연 마물의 가죽을 뚫어낼 수 있을지 자체가 의문인 것이다.
깡!
샤마노프의 단창이 마물의 등을 강타하고 튕겨져 나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샤마노프의 두 눈이 저절로 감겨 버렸다. 너무나 확연히 예상되는 결과를 마주볼 자신이 없는 것이다.
크아앙!
퍼석
나무 꺾이는 소리들과 소름 돋는 울부짖음 소리가 샤마노프의 귓전을 때렸다. 이어져 터져 나올 노리앙의 비명소리가 미리 들려오는 듯했다.
그러나 샤마노프의 귓가로 더 이상의 소음은 들려오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눈을 뜨던 샤마노프는 경악으로 입을 벌린 채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사람 몸통의 두 배도 넘는 마물의 허리가 그대로 동강나 널브러져 있었던 것이다. 그건 그렇다 치고 샤마노프가 경악한 이유는 노리앙의 검에 어린 오오라 때문이었다.
평소 아지랑이같이 잘 보이지도 않던 오오라가 선명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그렇다고 색상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투명한 것도 밀도가 높아지면 선명해진다고 해야 할까? 그의 오오라는 마치 춤추는 불꽃처럼, 용광로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터져 나오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더욱 놀라운 건 그런 오오라가 검의 길이만큼 확장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저런 것도 가능하단 말인가?
그 순간 노리앙의 검에 어렸던 오오라가 씻은 듯 사라졌다.
조노량이 천천히 굽혔던 무릎을 폈다. 뻗었던 검도 천천히 추슬렀다. 마물에게서 단검을 회수한 조노량이 마물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밑동부터 부러져 버린 나무와 그 위에 걸쳐져 있는 마물의 상반신을 바라보았다. 절단된 허리의 단면에서는 끊임없이 초록빛 액체가 뭉클거리며 흘러나왔다. 깔끔하게 잘려진 모습이다. 하지만 정작 조노량이 바라보는 것은 절단면이 아니라 마물의 왼쪽 손등이었다. 바로 조노량의 옆머리를 가격하던 부위였다.
조노량이 쓰러진 마물을 향해 돌아서 있었기 때문에 샤마노프는 이를 눈치챌 수 없었지만, 마물의 왼 손등은 참혹한 모습으로 터져 있었다. 정상적이었다면 마물의 손등이 아니라 자신의 손과 머리가 터져 나갔어야 했다. 절체절명의 순간 자신도 모르게 발휘된 발경. 트라쿠스성의 지하 감옥에서 귀신 소동을 일으키며 하이오지를 상대로 시험해 봤던 기술이다. 의식적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었지만 이 정도 위력은 아니었다.
이를 멍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조노량은 그대로 상념에 빠져들었다.
“허!”
조노량의 등을 바라보던 차츠라가 어이없음인지, 감탄인지 모를 묘한 소리를 토해 놓았다.
다시 일주일이 흘렀다. 수많은 우여곡절로 하루하루가 일 년같이 느껴지는 일주일이었다. 그럼에도 본진과의 거리는 좀처럼 좁혀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속도를 조금만 늦춰 줘도 좋으련만, 야속하기 그지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절망감만 깊어 갔다.
그나마 위안은 언제부턴가 더 이상 벌어지지는 않는다는 것. 차츠라의 추적 능력도 대단했지만, 조노량의 광기에 힘입은 바 컸다.
어느 순간부터 조노량의 태도가 돌변했다. 여전히 상념에 젖어 있었지만 외따로 떨어진 마물과 조우할 때면 여지없이 돌파를 선택했다. 심지어는 두 마리가 몰려 있는 경우도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마치 광전사가 된 롤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물론 각 마물들의 특성을 파악하지 못한 상태로 강행 돌파한다는 점에서 위험 부담이 높았지만, 어차피 모험이 필요한 시기였다. 본진과의 거리가 더 벌어지는 것보다는 낫다고 판단한 차츠라는 노리앙의 행동을 방관했다.
“뭔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긴 한데…….”
차츠라가 습관적으로 손차양을 만들며 태양의 위치를 가늠했다. 분명 같은 태양이건만, 이곳의 태양은 눈살을 찌푸리지 않아도 마주 바라볼 수 있다. 평소에 보았던 태양보다 두 배 정도 커 보이면서도 광량은 미약하기 짝이 없다. 마치 옅은 구름에 가려진 황혼녘의 느낌이랄까? 단지 노을처럼 붉지 않고 회색이라는 점이 달랐다.
“마물들의 시체가 많이 늘어난 느낌이 들지 않소?”
곳곳에 널린 마물들의 시체의 숫자가 평소보다 많아진 느낌이다.
“본진이 만든 작품 같지는 않군요.”
대부분 죽은 지 얼마 안 됐는지 거의 부패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이건 물어뜯긴 상처요. 사람의 짓이 아니지.”
조노량이 대답했다.
“어쨌거나 방향은 맞는 것 같으니 조금 더 속도를 내 봅시다.”
크헝!
가까운 곳에서 마물들의 울부짖음 소리가 들렸다. 적어도 십여 마리 이상으로 짐작되는 소리였다.
그 울부짖음 소리가 빠르게 일행들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혹시 들킨 건가요?”
“아니, 그렇지는 않소. 지금까지 지켜본 바에 따르면 마물들은 일부러 흔적을 쫓거나 하지는 않는 것 같았소. 우연히 방향이 일치한 것이겠지.”
“일단 피해야 할 것 같습니다. 뛰죠.”
샤마노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차츠라가 노리앙에게 수신호를 보낸 후 빠르게 앞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살짝 망설이는 듯한 느낌을 보였지만 노리앙도 차츠라를 따라 뛰기 시작했다. 노리앙의 모습을 확인한 샤마노프도 속도를 냈다. 셋의 신형은 밤 그림자 사이로 사라지는 고양이처럼 순식간에 회색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 ☆ ☆
쫓기듯 몸을 숨긴 일행들 곁으로 수십 마리의 마물들이 지나쳐 갔다. 그들이 향하는 지점은 능히 짐작이 되었다. 언덕 아래로 보이는 넓은 평원 지대. 그곳은 지금 한 편의 지옥도(地獄道)가 펼쳐지고 있었다. 추상적인 의미에서의 지옥도가 아니다. 말 그대로 지옥에서 막 뛰쳐나왔을 법한 마물들이 잔혹한 상잔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어느덧 상당한 시간을 마계의 문에서 보냈다. 마물들의 특성은 어느 정도 파악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고 있는 지옥도에는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형태의 마물들도 많았다. 그리고 일부 마물들의 위력은 감히 상상도 못할 정도로 엄청났다.
공간을 가득 점유하고 들리는 끔찍한 소리에 회색 대기마저 위축되는 느낌이다.
상당한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선명하게 다가오는 비명소리와 울부짖음 소리. 그리고 뼈가 깨지는 소리들이 귀를 먹먹하게 하고 있었다.
일행은 바위 아래로 몸을 숨기고 전장을 내려다보았다.
조금만 유심히 관찰해 보면 단순한 싸움이 아닌 전쟁을 치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혼전을 벌이고 있었지만 진영의 구분이 확연했다. 한쪽은 마계의 문에 들어오고 나서 흔히 보았던 기형의 마물들. 반대쪽 진영은 북부 대륙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오크, 트롤, 오우거 등의 몬스터와 스켈레톤, 좀비 등 언데드 계열의 마물이었다. 단, 지난번 보았던 오크처럼 대부분 검거나 회색빛을 띠고 있다는 점이 특이했다. 대륙에서 볼 수 있는 초록빛 피부의 오크나 오우거 등과는 확연히 구별되었다.
어림짐작으로 기형 마물 4백 대 일반 마물 1천 가량의 전투였다. 하지만 속속 합류하고 있는 마물들의 숫자도 만만치 않았다.
일행들은 그들의 전투를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평소 말이 없던 조노량조차 상당한 충격을 받은 듯 침중한 안색으로 전장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규모가 클 뿐이지, 마물들 간의 싸움은 그다지 놀라울 것도 없었다. 정작 일행들이 놀란 이유는 전투를 지배하고 있는 몇몇 마물들 때문이었다. 개체 수는 대략 열일곱? 아니 마리라고 표현하기 힘든 존재들이었다.
일행의 시선을 빼앗은 존재는 두 개의 검은 연기와 열다섯 명의 마인들이었다.
두 개의 검은 연기는 일반적으로 몬스터라고 불리는 마물들과 언데드 등이 중심이 된 진영에 속한 듯 보였고, 열다섯 명의 마인들은 마계의 문에 와서야 보았던 기형 마물들과 같은 편인 듯 보였다.
그들의 전투는 보는 것만으로 오싹하게 소름이 돋게 만들었다.
검은 연기는 흩어졌다, 뭉쳤다를 반복하며 순식간에 거대한 기형 마물의 몸을 갈가리 찢어발겼다.
“저것들은 대체 뭐지?”
잔뜩 움츠러든 샤마노프가 일행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버버 하는 사이에 검은 연기 하나가 십여 미터 떨어진 대형 마물에게 빨려들 듯 이동했다. 검은 연기가 이동했다 싶은 순간 이미 대형 마물은 검은 연기에 휩싸여 버렸다. 덩치에 걸맞지 않게 발버둥 치던 대형 마물이 검은 연기에 휩싸여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마물을 끌고 하늘로 치솟은 검은 연기가 회오리치듯 회전하는 순간, 초록빛 액체와 마물의 잔해가 산산이 조각나 사방으로 비산했다. 뼛조각 하나 온전히 남기지 못하고 산산이 갈려져 흩어진 마물. 샤마노프도 익히 알고 있는 마물이다. 전신에 고목의 옹이처럼 생긴 혹이 빼곡히 돋아 있는 파충류과 마물이다. 일행도 두어 번 상대해 본 마물로 오오라를 한껏 돋워도 쉽게 베지 못할 만큼 단단한 가죽을 자랑하는 마물이 아니던가?
일행 중 가장 강한 노리앙조차 저놈에게 목숨을 잃을 뻔했던 경험이 있었다.
그런 마물을 마치 푸딩 조각 뭉개듯 한순간에 갈아 버린 것이다.
늘 침착함을 잃지 않던 차츠라조차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몸을 떨었다. 저 괴물과 조우했더라면 일행은 이 자리에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만일, 저 괴물의 공격을 받는다면? 단 한순간도 방어해 낼 자신이 없었다. 연기를 어떻게 막아낸단 말인가?
어쩌면 지금까지 보았던 마계의 문은 전체 모습의 극히 일부분이었을지도 모른다.
살아서 마계의 문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꿈도 전장에 육편(肉片)을 흩뿌리고 있는 저 마물의 몸뚱이처럼 산산이 조각나고 있었다.
순식간에 마물 하나를 집어삼킨 검은 연기가 지상으로 가라앉았다. 회오리치듯 좌우로 흔들리던 연기가 새로운 목표를 잡고 꺼지듯 이동했다. 그리고 연기의 목표가 된 마물의 운명도 이전 마물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기형 마물의 진영에도 만만치 않은 존재들이 버티고 있었다.
거의 인간과 흡사하게 생긴 마인들! 마계대전 당시를 그린 노래 속에서 등장하던 바로 그 마인인 것이다.
워낙 뚜렷한 특징에 착각하려 해도 착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박쥐의 날개를 연상시키는 커다란 두 개의 귀는 거의 뒷머리를 가리듯 덮고 있었고, 피부는 온통 초록색 비늘로 덮여 있었다. 인간의 두 배는 될 듯한 손가락과 발가락의 길이, 그 사이를 이어 주고 있는 물갈퀴.
인간과 흡사한 체형을 가졌지만 그 전투력은 인간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야기 속에서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그 이하가 아니었다.
마인들이 손을 한 번 뻗을 때마다 오크 정도는 피하지도 못하고 한 번에 피떡이 되어 쓰러졌다.
그런 마인 중 하나가 마침 기형 마물을 끌고 하늘로 솟았다가 내려앉는 검은 연기를 향해 손을 뻗었다. 마인의 손에서 뻗어나간 시뻘건 불덩이가 검은 연기를 강타했다.
날카로운 마물들의 손톱이나 이빨 따위는 그대로 통과시켜 버렸던 검은 연기가 일 미터가량 주르륵 뒤로 밀려나다가 멈췄다.
분노한 듯 몸을 부풀리던 검은 연기가 급속히 수축했다가 흩어졌다. 그 순간 조노량의 눈빛이 빛났다. 수축하는 순간 검은 연기가 하나의 형태를 갖췄던 것이다.
워낙 순간적으로 흩어졌기에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했지만 조노량은 분명히 볼 수 있었다.
분명 인간의 모습이었다. 검은 광택을 가진 여성형 육체였다. 흩어져서 회오리치던 검은 연기가 마인을 향해 쇄도해 들어갔다.
마인은 연속적으로 불덩이를 토해 놓으며 마물들 사이로 요리조리 몸을 피해 내었다.
그런 움직임 속에서도 마인은 양손을 번갈아 뻗으며 검은 연기를 향해 불덩이를 토해 놓았다.
검은 연기는 전혀 피할 생각이 없는지 불덩이를 고스란히 맞아주며 마인을 향해 쇄도해 들어갔다. 거의 잡혔다 싶은 순간 마인은 싸움 중인 마물들 틈으로 몸을 묻어 버렸다. 그 탓에 애꿎은 마물들이 검은 연기에 휩쓸렸고, 휩쓸린 마물들은 잠깐 사이에 반쯤 갈린 고깃덩이로 변해 버렸다.
분노한 검은 연기가 몸을 부풀렸지만 난전 중인 전장에는 마인이 방패로 삼을 만한 마물들이 널려 있었다. 그런 와중에 다시 다섯 명의 마인이 검은 연기의 뒤쪽에 나타나며 전투에 가세했다.
새로운 마인들이 가세했음에도 전투는 여전히 검은 연기의 우세로 진행되고 있었다. 검은 연기는 마인들의 공격을 거의 무시하며 산지사방(散之四方)으로 휘돌아 목표를 향해 쇄도해 들어갔다. 목표가 된 마인은 그때마다 마물들 틈으로 숨었고, 나머지 마인들은 검은 연기를 향해 불덩이를 비롯한 다양한 공격을 퍼부었다. 그럼에도 결국 세 명의 마인들이 검은 연기에 희생되었다. 희생된 마인들은 갈가리 찢겨 형체조차 남기지 못했다.
한편 일반 마물들 간의 전투도 점점 더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두 진영은 철천지원수를 만난 듯 흉악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전투의 양상은 수적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기형 마물들이 우세했다. 일반 마물들이 상대하기엔 기형 마물들의 피부가 너무 단단했고 덩치도 큰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그나마 마물들보다 오히려 덩치가 큰 흑색 오우거들의 활약이 눈에 띄었으나, 전투의 양상을 바꾸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크고 힘이 강한 오우거들이 일대일로는 우세를 점한다 하더라도 기형 마물들이 둘만 붙으면 금방 고전을 면치 못했다. 반면 스켈레톤이나 좀비들은 전투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했다. 끈질긴 생명력이나 상대를 감염시키는 형태의 공격은 기형 마물들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데다, 그들이 가진 힘 자체가 기형 마물들의 상대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일반 마물들이 버티고 있는 이유는 회색 오크들의 활약 덕이었다. 수적으로 가장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회색 오크들은 마물 하나당 대여섯 마리씩 붙어 도끼를 휘둘러대고 있었다. 오크의 도끼가 마물의 피부를 가르지는 못했지만, 무식한 힘으로 마물의 거죽을 우그러트리거나 뭉개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기형 마물들의 강력한 공격에 수많은 오크가 죽어 나갔다. 그 틈을 새로운 오크가 끼어들며 마물의 팔다리를 하나씩 뜯어내었다.
그들의 전투는 한마디로 무식하고 처절하며 끔찍했다.
전투가 벌어진 지 두어 시간이 경과했을 쯤, 검은 연기 중 하나의 움직임이 확연히 둔해지고 있는 모습을 보였다. 초록 비늘의 마인 넷과 회색 피부의 마인 하나가 검은 연기를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었다. 검은 연기가 부풀어 오르고 축소되는 시간이 급격하게 잦아지기 시작했다. 숨을 헐떡이는 느낌이랄까? 무적으로 보이던 검은 연기도 그들 다섯의 차륜전(車輪戰)에는 이렇다 할 대응을 못하는 느낌이었다. 너무 많은 공격을 허용한 탓일까, 검은 연기의 짙은 어둠이 눈에 띄게 옅어졌다.
요리조리 피해 다니며 공격을 가하던 다섯 마인이 제자리에 멈춰 서서 검은 연기를 향해 양손을 뻗었다. 그들의 손에서 뻗어나간 뭉클한 기운이 이미 기력을 다한 검은 연기를 압축하듯 감싸 안았다.
그리고 끔찍한 비명소리가 대지를 강타했다.
꺄아아아아~~~~~~~
일행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귀를 틀어막고 바위틈으로 고개를 처박았다. 무기를 휘두르던 마물들도 태반이 바닥을 구르며 고통스러워했다.
다시는 듣고 싶지 않을 만큼 끔찍한 비명소리였다.
겨우 충격에서 벗어났을 때 일행들은 전투가 곧 끝날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한 마리 남은 검은 연기가 상대하던 마인들을 무시하고 전장을 이탈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은 전투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검은 연기가 사라지자 스켈레톤 병사들은 그대로 무너져 내렸고, 트롤이나 오크 등도 미련 없이 도주를 선택했다. 잔뜩 흥분해 날뛰던 일부 마물들과 의식 자체가 없어 보이는 좀비들도 기형 마물들과 마인들에 의해 빠르게 정리되어 나갔다.
전투가 종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끔찍한 상황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살아남은 기형 마물들이 전장을 돌아다니며 쓰러진 마물들에게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쓰러진 마물들이 일반 마물이든 기형 마물이든, 또 그것들이 아직 살아 있든 죽었든 관계치 않고 그 육신을 게걸스럽게 씹어 삼켰다.
산 채로 먹히고 있는 마물들의 처절한 울부짖음 소리가 회색 어둠 속에 메아리쳤다. 그 끔찍한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일행은 자기도 모르게 욕지기를 삼켜야 했다.
<5권에서 계속>
5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