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생기-33화 (33/142)

33. 정찰조

‘회색빛 어둠’이 ‘회색빛 밝음’으로 바뀌는 것을 보며 동이 텄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낮과 밤의 경계가 모호한 세계다. 마치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세상에 떨어진 느낌이다.

조노량을 비롯한 정찰조 세 명은 조심스럽게 동굴 입구를 나섰다. 경계를 서던 브리오티스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인사를 건넸다.

이곳 마계의 문을 정찰한다는 것은 극도로 위험한 임무다. 살아 돌아온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뽑힌 인물이 바로 조노량, 샤마노프, 차츠라였다.

차츠라는 다른 수용소에서 차출되어 온 검은 얼굴의 사십 대 사내였다. 전체적으로 말랐다는 느낌이 드는 사내로 두꺼운 얼굴가죽으로 인해 감정이 잘 드러나 보이지 않았다.

스마르와는 오래전부터 안면이 있었던지, 거리낌 없이 정찰조로 지명되었다. 게다가 출발하는 정찰조를 향해 임무를 지시하던 스마르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 “이들의 생명을 맡기겠다, 차츠라”였다.

조노량이나 샤마노프 모두 검투반에서 인정받는 실력자였다. 그럼에도 이들을 부탁할 정도라면 결코 범상한 사내는 아닌 것이다.

동굴을 나선 후 조심스럽게 회색 숲속을 살피던 차츠라가 왼손을 눈썹에 가져다 대고 손차양을 만들며 동굴 위쪽 바위 언덕을 가리켰다. 눈이 부신 것도 아닌데 손차양을 만드는 것을 보니 습관적인 행동인 듯싶다.

조노량은 차츠라가 가리키는 언덕을 바라보았다. 회색빛 대기 탓에 원근감이 모호했다.

의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동굴의 입구가 경사가 급한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어찌되었든 언덕을 넘어가야 시야가 트일 것이다. 차츠라는 익숙한 발걸음으로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일반인이라면 쉽게 오르기 힘든 급경사였지만 셋 모두 정찰조의 임무를 맡을 만큼 몸이 날랜 자들이다.

조노량은 가볍게 경공을 발휘하며 차츠라의 뒤를 바짝 쫓았다. 정상으로부터 한 길 정도 차이를 두고 차츠라가 주먹을 들어 보였다. 멈추라는 신호다. 굳이 신호가 아니더라도 공개된 장소로 진입하는 것이니 당연히 멈춰야 할 자리다. 차츠라는 언덕 너머로 살짝 고개를 내밀어 주위를 살폈다. 좌우를 먼저 살피고 전면을 주시하는 모습이 이런 일에 익숙한 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차츠라가 주위를 살피는 동안 조노량은 품에서 단검 하나를 꺼내 들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함이다. 샤마노프 역시 단창을 비껴 매며 단검을 하나 꺼내 들었다.

차츠라가 아래를 돌아보며 손가락으로 좌측을 향해 빠르게 움직여 보였다. 약속한 바는 없지만 그쪽 방향으로 빠르게 이동하라는 표시이리라. 차츠라가 몸을 움츠리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출발이다.

차츠라는 그야말로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언덕을 넘어 달려갔다. 마치 미끄러지는 듯한 움직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스락거리는 소리 하나 없다. 조노량과 샤마노프도 차츠라의 뒤를 따라 언덕을 넘어 달렸다.

조노량은 언덕을 넘는 순간 바로 차츠라가 지목한 목표 지점을 알 수 있었다. 좌측으로 삼십여 보 떨어진 거리에 균열이 심한 바위 몇 개와 제법 큰 침엽수림 군락이 보였기 때문이다.

조노량의 경공이 빛을 발했다. 차츠라에 비해 늦게 출발했음에도 바위에 도착한 시간은 거의 동일했다. 그보다 한 발 늦게 샤마노프가 바위 뒤로 몸을 날려 들어왔다.

차츠라의 시선이 이채를 발했다. 생각보다 빠른 조노량의 움직임에 놀란 모양이다. 사실 젊은 기대장이었던 샤마노프에 대해서는 켈커티스 때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포로가 된 이후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조노량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었다. 전날의 활약을 통해 대단한 전사라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정찰조로서의 능력은 알 수 없었기에 조금 불안해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이 정도 속도라면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지나온 길에 먼지 하나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가 속도뿐만 아니라 내디디는 발걸음 하나까지 주의할 줄 아는 자라는 것을 확인시켜 준 셈이다.

어느 정도 안심한 차츠라가 세심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특별한 움직임은 포착되지 않았다. 주위에 마물이 없거나 있더라도 들키지 않았다는 뜻이다.

조노량은 주위를 둘러보는 차츠라를 바라보았다. 역시 이런 일에 익숙한 자다. 우선 시선을 멀리해 동정을 살피고 다시 가까운 곳을 살폈다. 그리고 바닥까지 유심히 살피는 것이 뭔가를 읽어 내고 있는 모습이다.

중원에 있을 때 보무관 수련생들과 태산으로 사냥을 나갔던 적이 있었다. 안내를 맡은 늙수레한 사냥꾼이 짐승의 흔적을 발견하고 해준 말이 있었다.

“짐승이 머물렀던 자리에는 반드시 흔적이 남습죠. 심지어는 벌러지가 머물렀던 자리에도 흔적이 있습니다요. 크게는 분뇨나 발자국, 꺾인 나뭇가지, 누렇게 바랜 풀끝의 모냥 등이 될 수도 있습고요. 적게는 공기의 냄새나 돌맹구의 삐꾸름한 위치까지 뭔가 달라도 다르단 말입죠. 지절로 생길 수 없는 모양이라 이 말입니다요. 그걸 어디까지 읽느냐에 따라 지대로 된 사냥꾼인지 산놈팽이인지 판가름 나는 겁니다요. 자연은 입도 없는 것이 참 잔소리가 많습니다요.

자, 이걸 보십쇼. 여기, 여기 풀자락에 거뭇거뭇한 얼룩이 보이지 않습니까요? 이건 찌루미 똥인디요, 멧돼지 똥을 주로 먹고 사는 벌리집니다요. 멧돼지 털 속에 기생하는 놈인디, 돼지 새끼가 똥을 싸질러 놓으면 낼름 뛰어내려 파먹습니다요. 멧돼지요? 이미 저만치 도망갔지라! 허허.

그라믄 이놈이 어쩌는지 아십니까요? 그 자리에서 꼼짝도 않고 다시 멧돼지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린단 말입니다요. 멧돼지라는 놈이 사방팔방 헤집고 다니는 것맹키로 보여도 실은 정해진 길이 있습니다요. 이 길에서 기다리면 언젠가는 다시 만나게 되어 있지라. 사실 이 찌루미란 놈들이 진짜 사냥꾼일지도 모릅니다요. 끈기 있게 기다릴 줄 알고, 목표한 사냥감을 놓치는 법도 없응께 말입니다요.

자, 그럼 다시 읽어 봅시다요. 주변엔 멧돼지 똥도 없는디, 왜 이 찌루미 놈들이 머물며 풀배에다가 똥을 싸질러 놨을깝쇼? 찌루미 똥량을 봐서는 대략 댓 마리 이상 매달려 있었는디 말입죠. 답은 간단합니다요. 이놈들은 이미 멧돼지 등을 탄 겁니다요. 때깔로 봐서는 대략 보름쯤 지났는가베요. 글고 멧돼지 똥은 이미 다른 짐승들이 다 먹어뿐졌다, 이 말입니다요. 냄시를 맡아 보믄 알것지만, 조 뒤에 거뭇한 자국이 바로 멧돼지 똥이 있던 자국일 게고요.

숲에는 다른 짐승의 똥을 먹어 치우는 놈들이 의외로 많습죠. 그 말은 이 길이 멧돼지뿐만 아니라 다른 짐승들도 지법 다니는 길이라는 말이고, 그걸 증명하는 거이 조기 저 돌맹구입니다요.

그람 요 자리는 덫을 놓을 자리지, 매복 자리는 아니라는 말이지라. 짧아야 보름에 한 번 다니는 길에 배 깔고 누워서 찬이슬 맞을 일 있습니까요? 돌맹구요? 그건 말로 설명 드리기가 힘든디, 우선 저 돌맹구를 보믄…….”

바닥을 살피던 차츠라가 나지막이 입을 떼었다.

“저 아래 자갈을 보시오. 왠지 이상하지 않소?”

샤마노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냥 흔한 자갈 같습니다. 어떤 점이 이상하다는 말이죠?”

조노량이 살짝 입을 열었다.

“이상하군.”

그 말에 차츠라가 조노량을 돌아보았다.

“어떤 점이 이상한 것 같소?”

“우선 저 지점은 평지요.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어 자갈을 굴릴 만한 위치가 아니오. 그럼에도 저 자갈은 넓은 면으로 누워 있는 것이 아니라, 날카로운 부분으로 위태하게 서 있소. 옆의 돌에 아슬아슬하게 기대서 말이요. 큰 바람은 물론이고 작은 비라도 오면 바로 누워 버릴 것 같소만? 아직 눕지 않은 것으로 보아 최근에 생긴 모양 같소. 자연적으로 생기긴 힘든 모양인 걸로 봐서는, 뭔가에 채였을 것이오. 저대로 얼어붙어 있는 게 아니라면 말이오.”

차츠라는 의외라는 듯 조노량을 바라보았다.

“혹시 사냥꾼이었소?”

“무사였소. 단지 언젠가 한 번 들어본 이야기라……. 당신이 지적해 주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쳤을 거요.”

“어쨌든 대단한 안목이요. 맞소. 그리고…….”

차츠라는 아래로 내려가 그 자갈을 살짝 들어 보였다.

“얼어붙지도 않았소. 최근에 마물이 지나간 흔적이오.”

그 말에 샤마노프가 긴장감을 드러냈다.

“자리를 피해야 하지 않을까요?”

차츠라가 무덤덤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샤마노프, 정찰 목적이 무엇인지 알고 있소?”

“주변을 살피고, 먹을 것과 물을 찾는 거 아닙니까?”

“마계의 문에서 먹을 것이 뭐가 있겠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샤마노프의 인상이 구겨지기 시작했다.

차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여기에는 마물을 제외하곤 아무것도 없소.”

“그렇지만…….”

“기록에 보면 마계대전 당시에도 인간은 마물을 먹고 생존했소. 단, 아무거나 함부로 먹을 수 없으니 안전하다고 기록된 마물을 찾는 것이 우리 임무요.”

잔뜩 구겨진 샤마노프의 얼굴을 보며 조노량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이 겪어 본 마물들은 흉측하게 생긴 짐승일 뿐이었다. 결코 못 먹을 종류는 아니다.

조노량은 이 세계에 떨어진 이후 중원에서 보지 못했던 짐승들을 많이 보았다. 이곳 사람들이 흔히 타고 다니는 갈리온 역시 그렇지 않은가? 조노량으로서는 마물들 역시 크게 다르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어제 잡은 놈들 중에 하나를 들고 올 걸 그랬나 보오?”

“노리앙?”

그 말에 샤마노프는 경악을 했고, 차츠라는 침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최악의 경우는 그 놈들이라도 먹어 봐야겠지만 확인되지 않은 놈들을 잘못 먹었다간 숨을 단축시킬 거요.”

둘의 대화를 듣고 있는 샤마노프의 표정이 더욱 구겨졌다.

“이곳에서 마냥 기다릴 수 없으니 자리를 옮겨 봅시다.”

차츠라의 제안에 조노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행은 주변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침엽수림 안으로 이동해 들어갔다.

☆ ☆ ☆

조노량의 시선이 차츠라를 향했다.

바위 뒤에 몸을 숨기고 전면을 주시하고 있는 차츠라의 눈매가 날카롭다.

이제는 어째서 스마르가 정찰대의 생명을 그에게 부탁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타고난 사냥꾼이며 정찰병이다. 그가 가리키는 방향에서는 반드시 마물들이 나타났고, 그가 가고자 하는 길은 언제나 안전했다. 때로는 나무를 타 넘고, 때로는 덤불 사이에 웅크렸다. 마물들이 떼로 지나간 길도 그가 정한 시간만큼만 기다리면 안전한 통로가 되곤 했다.

하지만 정작 정찰대의 목적은 달성되지 않았다.

물과 식량을 확보하지 못한 것이다. 벌써 두어 시간이 흘렀건만 물은커녕 적당한 식량조차 구하지 못했다. 이곳의 식물들은 애초에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인지 혹은 계절 탓인지 전혀 먹을 만한 것을 매달고 있지 않았다.

식량을 삼을 만한 동물들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기에 결국 마물들을 사냥하는 방법 외에는 마땅한 대안이 없어 보였다.

마계의 숲답게 사방에 마물들이 널려 있었다. 특이한 점은, 마물의 종류를 구별할 수는 있었지만 같은 모양을 한 놈들이 드물다는 점이었다. 마계 광장에서 보았던 놈들조차 가만히 뜯어보면 동일하지 않았다. 생김새로 보아서는 비슷한 종류인 것 같은데, 팔이 하나 더 붙어 있는 놈, 눈이 한 개인 놈, 다리로 생각되는 기관을 팔에 달고 있는 놈 등 각각 천차만별이었다.

조노량은 끔찍한 마물들의 모습에 식욕이 달아남을 느꼈다. 특히 썩은 강시 비슷한 놈들은 추호도 식량으로 활용할 생각이 없었다. 그건 샤마노프는 물론 차츠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식인의 풍습이 있는 종족이라도 썩은 시체까지 탐하지는 않는다. 가능하면 조금이라도 정상적인 놈을 잡아야 한다.

식량도 문제지만 진짜 문제는 물이었다. 축축한 냉기로 가득 찬 숲이었지만 정작 물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었다.

“계곡의 상류로 올라가 보아야겠소.”

차츠라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계곡의 상류 방향으로 가려면 상당한 넓이의 개활지를 건너야 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마물들에게 노출될 가능성이 높다. 자칫 발각되어 싸움이라도 일어난다면 주변의 마물들이 모두 몰릴 것이다. 그것은 정찰대 셋으로 감당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차라리 숲 안쪽으로 더 들어가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샤마노프가 꺼림칙하다는 표정으로 차츠라를 바라보았다.

“숲에서 물을 발견한다는 건 불가능해 보이오. 물이 고일 만한 자리를 모두 살펴보았지만 발견할 수 없었소. 그것은 더 깊이 들어간다고 해도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되오. 유일하게 물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는 곳은 계곡 상류요. 만일 저 벌판만 통과할 수 있다면 돌아가는 건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요. 계곡 안쪽 루트를 이용할 수 있을 것 같소.”

“자칫 위쪽의 마물들에게 들킬 수도 있지 않습니까? 애초에 그래서 위로 올라온 것 아닙니까?”

“아까 지나오며 확인한 바에 의하면 계곡 서쪽 경계면으로 얕지 않은 골을 발견했소. 서쪽 언덕에서는 보이지 않지. 단 동쪽 방향은 확신하지 못하겠소. 어차피 100% 안전할 수는 없는 거요.”

굶주림은 견딜 수 있으나 갈증은 견딜 수 없는 법. 조노량은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샤마노프는 여전히 우려를 나타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이 마계의 문 안에서 모험 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으리라.

그나마 유일한 위안이라면 차츠라의 판단이 아직 틀린 적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일행은 조심스럽게 계곡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 순간 차츠라의 왼손이 급하게 올라갔다.

덤불 사이로 작은 움직임이 포착된 것이다. 몸을 낮추고 잠시 기다리자 덤불 속에서 작고 뚱뚱한 마물 하나가 기어 나왔다.

조노량은 숨을 죽이고 마물을 관찰했다. 꾸부정하게 구부린 키가 대략 오 척 정도로 작은 편이었다. 하지만 몸뚱이는 적어도 조노량 자신보다 세 배는 두꺼워 보였다. 애초에 뚱뚱하다고 느낀 이유가 그것이었다. 하지만 그 표현은 적합하지 않았다. 두껍기는 했지만 뚱뚱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몸 전체가 비정상적일 만큼 굵은 근육에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저건 건장하다고 불릴 범주를 넘어선 몸매였다. 이 세계에 떨어진 이후 엄청난 덩어리들을 많이 만나 보았지만 저런 덩치는 처음이었다. 목 어림에 겨우 닿을 만한 작은 키를 감안한다면 불균형의 극치였다.

하지만 다른 마물들에 비하면 그나마 정상적이라 할 만했다. 몸매는 이상했지만 팔 두 개, 다리 두 개, 눈, 코, 입 모두 정상이었다.

“저건 오크잖아?”

샤마노프가 차츠라를 향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일반적인 오크는 아니군.”

“아는 동물이요?”

그 말에 둘은 조노량을 쳐다보았다.

북부의 전사가 오크를 모를 수는 없는 일이다.

“오크를 모르시오?”

“워낙 깊은 산골에 살다 보니…….”

조노량은 적당히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이 세계에 속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굳이 알릴 필요는 없는 일이다. 설명 자체도 귀찮을뿐더러, 설사 설명을 한다고 하더라도 이해할 수 있는 종류의 이야기가 아니지 않은가? 기실 조노량 자신도 알지 못했다.

그래도 차츠라는 미심쩍은 눈초리로 조노량을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가장 흔한 몬스터 중 하나요. 일반적으로 먹지는 않소만, 지금으로선 가장 적당한 사냥감일 듯하오.”

샤마노프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조노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돼지를 닮았군. 상당히 질겨 보이긴 하지만 먹을 만할 것 같소.”

차츠라가 동의를 표했다.

“냄새를 포기한다면 그다지 나쁘진 않소.”

샤마노프가 울상을 지었다.

“그런데 좀 문제가 있군.”

샤마노프의 표정이 조금 펴졌다.

“일반적인 오크는 저런 색이 아니오. 약간 푸르다고 해야 하나? 저렇게 검지 않지.”

“내가 살던 마을의 돼지들은 다 저렇게 진한 회색이오.”

조노량의 말에 샤마노프의 얼굴이 다시 찡그려졌다.

“그렇다면 다행이오만, 왠지 꺼림칙하군. 일단 잡아야…… 쉿!”

검은색 오크가 조심스럽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몸을 웅크리며 손에 쥔 도끼를 들어 올렸기 때문이다.

‘들킨 것인가?’

조노량은 오첩도를 움켜쥐고 뛰어나갈 태세를 갖추었다.

“크르릉!”

그때 검은색 오크의 앞쪽으로 익숙한 기형의 마물이 나타났다. 인간에 비해 키가 조금 큰 갑각류를 닮은 종류였다.

취익!

마물이 나타나자 검은색 오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마물을 향해 달려들었다.

땅!

오크의 도끼가 기형 마물의 머리를 때렸다. 하지만 도끼는 마물의 두개골을 뚫지 못하고 튕겨 나왔다. 마물의 거죽은 일견해도 갑각류의 그것처럼 단단해 보였다. 조노량 역시 비슷한 놈을 상대해 본 적이 있었다. 기를 싣지 않으면 절대 저 마물의 거죽을 상하게 할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한 놈이었다.

비록 오크의 힘이 대단해 보였지만 쉬운 싸움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다행인 것은 마물의 움직임이 그다지 빠르지 않다는 점과 오크의 움직임은 생긴 것과 달리 날래다는 점이었다.

마물의 갈고리 손이 오크의 가슴을 가르려 날아들었지만, 오크는 가볍게 피해 내며 마물의 이마를 향해 연거푸 도끼를 날렸다.

땅, 땅, 땅

하지만 마물은 아무런 충격도 받지 않은 듯 거칠게 오크를 밀어붙이고 있었다.

자신의 공격이 마물에게 통하지 않자 오크는 서너 발자국 뒤로 물러서며 몸을 웅크렸다.

오크가 물러나자 마물은 승기라도 잡은 듯 포효하며 오크를 향해 달려들었다.

“크허엉!”

몸을 웅크렸던 오크가 튕기듯 마물을 향해 마주 달려들었다.

쾅!

거친 격돌음과 함께 둘의 몸체가 하나로 뭉쳤다.

그 순간 오크가 자신보다 머리 두 개는 큰 마물의 허리를 잡아챔과 동시에 믿을 수 없는 힘으로 마물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뒤로 밀리던 마물이 오크의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벌러덩 자빠졌다.

오크가 마물의 배를 깔고 올라타 버렸다. 오크의 왼손에 들렸던 도끼가 내려 찍히기 시작했다.

땅!

땅!

땅!

도끼질은 거칠기 짝이 없었다.

바닥에 머리를 대고 오크의 도끼를 받아내던 마물의 이마가 조금씩 균열을 보이기 시작했다. 위급함을 느꼈는지 마물이 두 손을 마구 휘둘러댔다. 마물의 갈고리 손이 오크의 가슴을 타격했지만 오크의 가죽도 만만치 않게 단단한 듯 쉽게 손상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타격을 받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오크의 상체 곳곳에서 붉은 핏물이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마음대로 요리되지 않자 오크는 거친 숨을 토해 놓으며 마물의 배를 깔고 앉은 채 왼쪽 다리를 들어 마물의 오른 갈고리를 밟아 버렸다. 짤막한 오크의 다리에 깔렸음에도 마물의 오른 갈고리는 못 박힌 듯 움직이지 못했다.

나머지 한 개의 갈고리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오크는 도끼를 두 손으로 바꿔 쥐고서 마물의 이마를 내려찍기 시작했다. 마물은 남은 한 팔로 필사적으로 도끼를 막아내려 했으나 갈고리의 강도는 이마의 강도만 못했는지, 잠시 후 오크의 도끼를 감당하지 못하고 퍼석 하고 부서져 버렸다.

오크의 도끼를 막아낼 수단을 모두 잃은 마물은 거칠게 몸부림쳤지만 오크를 떨어뜨려내지는 못했다.

오크의 도끼가 다시 마물의 이마와 안면부를 연속으로 타격하기 시작했다.

이를 지켜보던 셋은 황당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보았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마물들끼리 서로 죽자고 싸우다니?

그럴 거였으면 마계 광장에서 이미 싸움이 벌어졌어야 하는 것 아닌가?

차츠라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들었다.

마물들이라고 서로 간에 싸움을 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당연히 싸움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차츠라가 아는 상식선에서 이런 싸움은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짐승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우선 서열이 분명한 마물들 간에는 대항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반대로 서열 다툼이라면 싸움의 양식이 다르다. 그 자신이 사냥꾼이기 때문에 누구보다 잘 안다.

짐승의 서열 다툼의 경우, 우선 서로 간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탐색을 하다가 도전하는 측이 슬슬 시비를 건다. 그러면 도전 받는 쪽이 상대의 의사를 이해하고 힘겨루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싸움은 그다지 격렬하지 않다. 비교적 완만하고 신사적인 싸움이랄까? 단지 서로의 힘 차이를 확인하는 차원에서 마무리되곤 한다. 물론 그 와중에 서로를 상하게 하는 경우도 있으나, 그건 단지 싸움의 결과물일 뿐이다. 저처럼 서로를 죽이기 위해 악착같이 진행되지는 않는다.

저들은 애초부터 적대적인 관계였다고 판단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마계의 문에서 마물과 마물들 간의 목숨을 건 다툼이라?

단지 개체 간의 다툼일까? 아니면 세력 간의 다툼?

과거부터 있어 온 다툼일까? 아니면 새롭게 시작된 다툼일까?

좀 더 파악해 봐야겠지만 일단 싸움이 있는 것은 확실했고, 짐작컨대 개체 간의 싸움이라기보다는 세력 간의 다툼일 가능성이 높았다.

마계 광장을 벗어나면서부터 종종 볼 수 있었던 마물들의 시체. 그 이유를 이제 알 것 같았다.

☆ ☆ ☆

퍼석!

둔탁한 소리와 함께 마물의 머리가 통째로 깨져 나갔다.

검기를 일으켜야 겨우 벨 수 있었던 마물의 거죽을 힘으로 부숴 버린 것이다. 가히 공포스러운 힘이다.

싸움의 형태도 어이없었지만 그 결과도 어이없었다.

가르지 못하니 부순다?

셋 모두 멍한 표정으로 그 장면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어지간히 흥분했는지 오크는 아직도 거친 콧바람을 내뿜으며 씩씩대고 있었다. 오크의 두 눈에서 뿜어져 나온 붉은 광채가 회색빛 대기를 가르고 섬뜩하게 빛을 발했다.

조금씩 흥분을 가라앉히던 오크가 갑자기 낮은 울림을 토해 내며 남쪽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조노량 등도 오크의 등 너머 숲을 향해 시선을 집중했다. 뭔가 거칠게 숲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땅을 박차는 소리,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 등이 점점 커져 갔다.

“피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차츠라?”

“이미 늦었소. 몸을 움직이는 순간 들키고 말 거요. 상황을 지켜봅시다.”

쾅!

숲 한쪽이 터져 나가며 마물들이 나타났다.

덩치 큰 마물이 셋이나 모습을 드러냈다.

오크에 비한다면 두 배 이상 큰 덩치다. 아까의 마물과는 크기 자체가 달랐다. 더구나 셋이라면 오크에게는 아무런 승산이 없다.

오크 역시 이를 깨달았는지 마물들이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뒤돌아 뛰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 방향이 조노량 등이 숨어 있는 쪽이라는 것이다.

“빌어먹을!”

크게 놀란 조노량이 차츠라를 바라보았다. 차츠라 역시 뾰쪽한 수가 없었던지 더욱 몸을 낮춰 바위 아래로 숨어 버렸다. 샤마노프와 조노량도 차츠라를 따라 몸을 바짝 웅크렸다.

순식간에 다가온 오크가 바위를 밟고 도약해 일행의 머리 위로 뛰어넘었다.

하지만 세 명의 몸체를 가려주기에는 바위가 너무 작았다. 멀리 있을 때는 발견할 수 없었겠지만 오크가 바위 위로 도약한 순간에 일행들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 버렸다.

깜짝 놀란 오크가 일행을 향해 도끼를 던졌다.

깡!

조노량의 오첩도가 날아오는 도끼를 아슬아슬하게 받아냈다.

공격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방어를 위한 행동이었는지, 오크는 던진 도끼를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전면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오크로서는 진로를 방해받은 것도 아니고, 공격을 당한 것도 아니니 시간적 손실이 없었다. 그대로 도주하는 것이 올바른 판단이었다.

문제는 조노량 등이었다. 오크가 발견한 것을 시야가 더 높은 추적자들이 발견하지 못할 리가 없는 것이다.

조노량은 저린 손목을 문지르며 오첩도를 고쳐 쥐었다. 샤마노프와 차츠라도 긴장된 표정으로 각자의 무기를 움켜쥐었다.

가장 효율적인 공격은 기습이다.

다행히 일행들은 마물의 두꺼운 거죽을 충분히 베어낼 수 있을 만한 실력자들이다.

바위를 밟지도 않고 그대로 건너뛰려던 첫 번째 마물의 촉수가 공중에서 절단되어 나갔다.

마치 느린 그림을 보듯 두 개의 촉수가 몸에서 떨어져 하강하기 시작했다.

촉수를 가른 오첩도가 검기를 잔뜩 머금은 채 타원을 그리며 회수되고 있었다.

마물의 허리에서 초록빛 액체가 비산했다. 차츠라의 글라디우스가 횡으로 훑고 지나갔다.

샤마노프의 단창이 오오라를 발하며 마물의 턱 아래 연한 부분을 뚫고 들어갔다.

마물은 영문도 모른 채 그대로 두어 걸음 더 내디디다가 고꾸라졌다.

하지만 마물은 하나가 아니었다.

일행을 발견한 나머지 마물들이 이빨을 드러내며 새로운 목표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돌진하던 기세가 살아 있어, 정면으로 맞상대하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조노량은 첫 번째 마물의 촉수를 끊어냄과 동시에 환영보를 시전하며 옆으로 빠져나갔다.

두 번째 마물의 전진 방향에서 살짝 비껴난 것이다. 예상대로 첫 번째 마물에 대한 마무리는 나머지 두 사람이 훌륭히 처리했다.

이제부터가 진짜 싸움이었다. 기습으로 한 마리는 간단히 처리했지만 그로 인해 조노량 등의 존재도 드러나게 된 것이다.

가재를 닮은 두 번째 마물은 자신을 향해 강한 살기를 쏘아내는 조노량 쪽으로 몸을 틀었다. 워낙 격렬하게 달려오던 터라 마물의 중심이 조금 흐트러졌다.

조노량의 오첩도가 중심이 흐트러진 마물의 안쪽 무릎으로 파고들었다.

깡!

쇠가 부닥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마물의 갑각류 껍질이 일부 손상되었다. 워낙 창졸간이라 종아리 껍질과 허벅지 껍질 사이의 연한 부위를 정확히 타격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단번에 베어 내지는 못했지만 그 정도 타격만으로도 이미 흐트러졌던 마물의 중심을 무너트리기에는 족했다.

중심을 잃은 마물이 좌측으로 거칠게 나동그라졌다. 그 기세가 얼마나 거세었던지 마물의 몸체는 바닥을 긁으며 삼 미터나 미끄러진 후에야 멈춰 섰다.

그 사이 조노량의 시선은 세 번째 마물로 옮겨가고 있었다.

세 번째 마물은 기다란 갈색 털로 뒤덮여 있는 사 미터 크기의 고릴라였다. 얼핏 보면 정상적인 것처럼 보였지만 자세히 보니 정상과는 전혀 거리가 먼 모습이었다.

털로 착각했던 것들은 모두 뱀의 머리였다.

뱀 대가리들도 전신이 빼꼭히 둘러싸여 있는 고릴라의 모습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흉측했다.

각각의 뱀 대가리들은 갈라진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독아를 드러낸 채 조노량을 향해 소리 없는 포효를 내지르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고릴라의 머리에는 세 갈래 뿔이 일 척 길이로 돋아 있었고, 좌우 세 개의 손가락에서 돋아난 이 척 길이의 손톱은 거의 바닥에 끌릴 지경이었다.

달려들던 고릴라는 조노량의 일 장 앞에서 하늘로 도약해 올랐다. 눈으로 좇기도 힘들 만큼 날렵하게 날아오른 고릴라는 조노량의 머리 위에서 순식간에 몸을 뒤집었다. 원숭이과 동물들이 그렇듯, 이 기형 고릴라도 아주 유연하게 재주를 넘었다. 고릴라의 발이 하늘을 향하고 머리가 조노량의 머리 위에 머물렀을 때, 고릴라의 기다란 두 팔이 조노량의 등짝을 향해 찍어 내려왔다.

손톱이 조노량의 등짝을 사정없이 파고들려는 순간, 조노량의 신형이 꺼지듯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다시 한 번 환영보가 펼쳐진 것이다.

고릴라는 순간 당황한 듯 보였으나 찍어 가던 두 팔을 그대로 넘겨 채며 다시 한 바퀴 돌아 여유 있게 바닥에 착지했다.

착지했다 싶은 순간 다시 튀어 올라 조노량의 신형을 쫓았다. 그 동작이 얼마나 날렵하고 정확하던지 조노량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오첩도를 들어 고릴라의 손톱을 막아내야 했다.

깡!

캉!

날카로운 쇳소리를 울리며 여섯 개의 기다란 손톱과 한 개의 칼이 연속적으로 불꽃을 튕기기 시작했다.

조노량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손톱은 어떻게든 막아낼 수 있었으나 뱀 대가리가 문제였다. 수백의 뱀 대가리들이 길쭉하게 늘어나며 공격을 하는데,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갑각류의 마물처럼 칼이 안 들어갈 정도로 단단하지는 않다는 점이었다. 손톱까지는 어쩌지 못했지만 오첩도는 잠깐 사이에 수십 개의 뱀 대가리를 잘라냈다. 그래도 머리카락 몇 올 잘라낸 것처럼 아직까지 남아 있는 뱀 대가리가 셀 수도 없었다.

그때 두 번째 마물을 처리한 샤마노프와 차츠라가 전투에 가담했다.

쇠그물이 고릴라의 머리 위로 씌워졌고, 단창이 고릴라의 등짝을 찍어 갔다. 차츠라의 글라디우스가 고릴라의 왼팔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세 명이 펼치는 합공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순식간에 세 번이나 자리를 이동하며 단창과 글라디우스를 피해 낸 고릴라가 머리 위에 씌워진 그물을 거칠게 걷어냈다. 그 힘이 어찌나 강하던지 샤마노프는 어쩔 수 없이 그물을 놓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일, 이 초가량? 아주 짧은 시간 멈췄던 전투가 바로 재개되었다. 조노량의 오첩도가 틈을 보인 고릴라의 옆구리를 향해 바람처럼 쏘아졌다.

새로 나타난 적에게 신경을 빼앗겼던 고릴라가 오첩도의 진행을 눈치챘을 때, 오첩도는 이미 빽빽한 뱀 대가리들을 뚫고 본체를 가르고 있었다.

고릴라는 본능적으로 몸을 틀었지만 두 뼘 정도의 자상을 면할 수는 없었다.

“질기긴 해도 단단한 편은 못 되는군.”

조노량이 오첩도에 묻은 붉은색 액체를 털어내며 눈을 빛냈다.

“붉은 피는 오랜만이네요, 노리앙.”

“빨리 처리하고 자리를 떠야 하오.”

펄쩍 뛰어 추가 공격을 대비하던 고릴라는 옆구리 상처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보더니 흥분하기 시작했다.

“쿠어엉!”

가슴을 치며 크게 소리를 지른 고릴라가 상처를 입힌 조노량을 향해 몸을 날렸다.

“흥!”

조노량은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환영보를 이용해 좌측으로 빠졌다. 목표를 잃은 고릴라가 조노량을 찾아 고개를 돌리는 순간, 뒤쪽에 나타난 샤마노프가 단창을 내질렀다. 십여 마리의 뱀 대가리가 주인을 지키기 위해 몸으로 단창을 막았으나 오오라가 어린 단창은 가볍게 뱀 대가리들을 뚫고 본체에 상처를 입혔다.

더 깊이 찌르고 싶었지만 창의 길이가 짧아지면 샤마노프 자신이 뱀 대가리들의 사정거리에 들어가기 때문에 적당히 빠질 수밖에 없었다.

상처 입은 고릴라가 날뛰면 날뛸수록 전투는 편해졌다.

결국 오래 버티지 못하고 고릴라가 회색 대지에 몸을 뉘었다. 북부 최강전사 세 명의 협공은 무섭기 그지없었다. 혼자서는 애를 먹던 마물도 셋의 협공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거친 숨을 내쉬며 주변을 살피던 차츠라가 얼굴을 찌푸렸다. 차츠라의 시선에 아까의 오크가 잡힌 것이다.

오크는 도망가지도 않고 일행의 전투를 멀뚱히 지켜보고 있었다.

“저 자식, 잡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차츠라?”

“음, 동료라도 불러오면 골치 아픈데……. 거리가 너무 멀잖소?”

사실 아까 오크의 속도로 본다면 쉽게 잡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일행이 추격을 시작한다면 오크는 달아날 것이다. 시간의 제약만 없다면 한번 시도해 볼 만하겠지만 마계의 문에서 마물을 쫓는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얼마 쫓지도 못하고 다른 마물들에게 발각될 것이 틀림없었다.

일행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며 오크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때 오크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등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들어 올린 손이 뒤쪽을 향해 천천히 흔들렸다.

서서히 시야에서 사라져 가는 오크를 보며 일행은 멍청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저 자식, 인사하는 거 맞죠?”

“글쎄,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놀리는 것 같기도 하고?”

“잡기는 글렀으니 서둘러 자리를 피하는 것이 좋겠소.”

조노량의 말에 차츠라가 번뜩 정신을 차리며 조노량을 바라보았다.

조노량은 몸을 돌려 고릴라의 몸에서 뱀 대가리들을 발라내기 시작했다.

“저것들보다는 이게 더 연할 것 같아서.”

차츠라의 시선을 느낀 조노량이 갑각류 마물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조노량의 행동을 바라보던 샤마노프가 손사래를 쳤다.

“그걸 먹겠다고요? 독이 있을 겁니다.”

“내가 살던 곳에서는 좋은 간식거리로 치지. 독사일수록 더 맛있고.”

잠시 망설이던 차츠라도 단검을 꺼내 뱀 대가리들을 잘라내기 시작했다.

“오오라를 끌어올리지 않아도 쉽게 잘리는군. 샤마노프, 시간이 없소.”

샤마노프는 울상을 지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조노량을 도와 뱀 대가리를 잘라 배낭에 쑤셔 넣기 시작했다.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낮은 울부짖음 소리가 들려왔다.

“크르릉!”

☆ ☆ ☆

달리고, 숨고, 기척을 죽였다.

자신들의 영역에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 것을 눈치채기라도 한 것일까? 마물들의 움직임이 부산해졌다.

좁은 공간에 많은 수의 마물들이 몰렸다. 정말 절실한 마음으로 조심했지만, 지척을 오가는 마물들에게 오래 몸을 숨길 수는 없었다.

크헝!

일행의 불행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어제의 피로가 채 가시기도 전에, 또한 굶주림과 갈증을 그대로 간직한 채 전투가 시작되었다.

조노량이 길을 열고 샤마노프와 차츠라가 좌우와 후방을 막았다. 날카로운 손톱과 기상천외한 공격 수단들을 간신히 막아 내며 달리기 시작했다.

일행을 추격하는 마물들의 수는 어림잡아 십수 마리, 앞쪽을 막아서는 마물들의 수도 비슷하다. 더 안 좋은 것은 마물들의 수가 지금도 계속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일대일로도 만만치 않은 마물들이 떼로 몰려들었다.

전력을 다해 달리기에는 앞길을 막아서는 마물들의 공세가 무지막지하다. 그 탓에 얼마 달리지도 못하고 뒤를 따라잡힌다.

온몸의 근육이 긴장으로 팽팽하다. 매순간 신경을 곤두세우고 피하고, 베고, 몸을 날린다.

몸통만 한 촉수가 날아든다. 빠르지는 않으나 그 무게가 만만치 않다. 무기를 들어 막는다는 것은 엄두조차 낼 수 없다. 저 정도 무게라면 오첩도 정도는 간단히 부러져 나갈 것이다. 그렇다고 피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피한다면 샤마노프를 잃어야 할 것이다. 샤마노프가 상대하던 마물을 튕겨내며 바짝 다가섰기 때문이다. 샤마노프의 기척을 등으로 느끼던 그 짧은 순간 조노량의 몸이 먼저 반응했다.

“칫!”

조노량은 어금니를 깨물며 혼신의 기를 모아 몸통만 한 촉수를 향해 오첩도를 뻗어 갔다. 베지 못하면 무기를 잃게 된다. 단숨에 베어 내야 한다. 촉수의 단단함은 운에 맡길 뿐이다.

검기를 잔뜩 머금은 오첩도가 버텨 내지 못할 만큼 단단하다면, 그 다음은 몸으로 받아야 할 것이다. 그 결과는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뻔하다.

슷!

보기에도 섬뜩한 검기로 이글거리는 오첩도지만, 어느 순간 강한 저항을 받는다. 유연한 움직임을 보이던 촉수였지만 의외로 단단한 뼈를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조노량은 이를 악물고 검신에 힘을 가했다. ‘빠각’ 하는 파열음을 손으로 느낀 순간, 촉수의 반대편으로 오첩도가 빠져 나온다.

‘베어 냈다.’

하지만 위기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사람 몸통만 한 촉수는 절단되고도 흉험한 회전을 그대로 간직한 채 조노량의 머리를 타고 넘었다.

“어억!”

날아오는 몸통을 발견한 차츠라가 숨 막히는 신음을 토해 놓으며 바닥에 바짝 엎드려 버린다.

조노량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모습은 꼴사나웠으나 가장 훌륭한 대응이었다. 아슬아슬하게 차츠라를 스쳐 간 촉수가 격렬한 기세로 날아가 바닥에 한 번 튕기며 따라붙던 갑각류 마물의 다리통과 충돌한다.

간직된 힘이 얼마나 강했던지 조노량의 두 배는 됨직한 덩치가 하늘로 떠올랐다가 내팽개쳐진다. 뒤따르던 마물들이 엉킨다.

눈 깜짝할 순간의 일이었다. 조노량은 지체하지 않고 앞으로 튀어 나갔다. 어느새 몸을 일으킨 차츠라도 침착하게 따라붙는다.

앞을 가로막는 마물을 비껴가며 뛴다. 피할 수 없으면 적절히 타격을 가하고 빠져나간다.

“윽!”

날카롭게 스친 손톱에 조노량의 어깨가 패여 나간다. 세 줄기 핏물이 회색 대기를 물들인다.

등줄기로 날카로운 통증이 전해진다. 돌아보거나 만져볼 틈 따위는 없다. 가벼운 부상이길 기대하며 앞으로 내달렸다.

샤마노프가 그물을 놓쳤다. 거추장스럽고 무겁기 때문에 버린 것인지, 실수로 잃은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이유가 어떠했던 전사가 무기를 잃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보다 문제는 앞으로 그물을 손에 쥘 수 없다는 것이다. 마계의 문에는 공방 따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주력 무기를 잃은 것이다.

그물을 잃은 샤마노프의 왼손에 단검이 쥐어진다. 단검으로 어찌해 볼 만한 마물들은 아니었으나, 두 개의 무기를 쓰던 습관은 본능적으로 무엇이라도 들게 만들었다.

수많은 상처와 턱에 차오르는 숨을 참아가며 얼마를 달렸는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쉼 없이 싸우고, 달리는 동안 시간 개념은 상실한 지 오래다. 더 이상 굶주림은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갈증은 시간이 갈수록 정도를 더해 간다.

입술이 하얗게 터지고 갈라져 피딱지가 앉았다. 참을 수 없는 것은 입천장과 심지어 혓바닥까지 가뭄의 논바닥처럼 굵게 갈라져 간다는 점이다. 오랜 시간 윤활제를 공급받지 못한 혀가 입 속에서 움직임을 멈춘다.

사고가 서서히 멈춰진다. 오직 본능적인 움직임만이 조노량을 살아 있게 만들었다.

샤마노프와 차츠라의 형편도 그다지 다르지 않아 보인다. 조노량의 뒤를 놓치지 않고 따라붙고 있는 것 자체가 용하다.

처음과는 달리 조노량의 움직임에는 배려가 묻어 있지 않는다. 속도에 대한 조절도 그다지 없다. 뒤를 위해 미리 막아 가는 움직임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케 피하고, 쓰러지지 않고, 맞아죽지 않고 따라오고 있으니, 대단하다.

오첩도에 갈라진 마물의 목에서 안개처럼 피가 뿜어져 나온다. 붉은 피다. 피하지 않았다.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린다. 향채? 박하? 의외로 상쾌한 느낌이 퍼진다. 그리고 이어진 지독하게 쓴맛! 독일까?

독이라도 어쩔 수 없다. 이미 팔다리에 느낌이 흐려졌고, 진기가 끊어지기 시작했다. 입 안에 남아 있는 향과 쓴맛이 다시금 정신을 일깨운다. 언뜻 쓰러진 마물의 목을 물어 볼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하지만 발이 저절로 앞으로 나아간다.

다시 얼마간 시간이 흘렀다. 대기가 조금 더 진한 회색으로 물들어 간다. 얼마나 달렸는지 더 이상 따라붙는 마물이 보이지 않는다.

차츠라의 손이 조노량의 어깨를 붙잡는다. 조노량은 본능적으로 몸을 회전하며 오첩도를 날리다가 가까스로 멈춰 세운다.

“으어!”

차츠라 역시 제대로 된 발음을 내뱉지 못할 만큼 입의 기능을 상실했음을 알 수 있었다.

조노량은 멍한 시선으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검은색 이끼가 가득한 구덩이다. 세 사람의 몸을 숨겨 주기에는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가까이 와서 보지 않는다면 들키지는 않겠다.

셋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그대로 드러누워 버렸다.

거친 숨소리 외에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그러다가 샤마노프가 상체를 세우고 구역질을 시작했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구역질을 한참을 해대다가 그대로 기절해 버린다. 그저 눈만 돌려 바라볼 뿐 아무도 돌봐주지 않았다. 그럴 여력이 없었다.

검은 이끼는 의외로 두껍고 따뜻했다. 몸의 절반이 파묻힐 정도의 두께에 보온력도 탁월했다. 동굴에서 보낸 밤에 비해 오히려 포근하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급속히 식는 땀으로 인해 오한이 났지만 당장 얼어 죽는 것은 면할 정도는 되었다.

반시간가량이나 지났을까? 조노량이 꾸역꾸역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의문을 가득 담은 눈빛으로 조노량을 바라보던 차츠라가 곧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몸을 일으킨 조노량이 다리를 바짝 꺾어 앉은 채 눈을 감아 버렸기 때문이다. 두 다리를 묘하게 꼬아서 모으고 양 발바닥이 하늘을 향한, 일견하더라도 아주 불편한 자세였다.

참견할 만한 여유가 없었기에 차츠라는 그저 멍하니 바라보았다. 다시 반시간쯤 지나 겨우 원기를 회복한 차츠라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때까지 조노량은 같은 자세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주변을 살피기 위해 시선을 돌리던 차츠라는 옅은 안개 같은 아지랑이를 보았다. 그 안개는 조노량의 머리 위에 떠올라 맴돌고 있었다. 차츠라의 머리에 떠오른 생각은 ‘환각’이었다.

차츠라는 고개를 젓고는 샤마노프를 살폈다. 다행히 숨은 붙어 있었지만,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성한 곳이 하나도 없었다. 옷은 갈가리 찢기고 곳곳에 벌어진 상처에는 굳은 피딱지가 엉켜 있었다. 돌이켜보면 사지 중 하나가 떨어져 나가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다. 사지 중 하나가 떨어져 나갔다면 지금 이 자리에 있지도 못했겠지만.

셋 모두 몸성히(?)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이 기적이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샤마노프가 무사한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조노량에게 시선을 돌렸다. 환각은 사라져 있었다. 다행이다.

노리앙이라고 했던가? 진정 경이로운 사내다. 저런 작은 몸을 하고서 어떻게 그런 힘을 낼 수 있었을까? 전투의 절반은 그가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니, 전투의 질로 따진다면 거의 대부분 그의 작품이었다.

수많은 전투를 겪어 본 차츠라였기에 선두에 선다는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압도적인 전투력이 담보되지 않는다면 선두에 설 수 없다. 또한 압도적인 체력이 담보되지 않는다면 그 자리를 오래 지킬 수 없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진해진 회색빛 대기가 이미 날이 기울었음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그렇다면 전투를 벌인 시간은 적게 잡아도 세 시간 이상이다. 과연 어떤 선두가 단독으로 그런 격렬한 전투를 세 시간 이상 이어갈 수 있을까?

차츠라의 상념은 조노량이 눈을 뜸으로 인해 깨어졌다.

뚫어지게 자신을 바라보는 차츠라의 시선에 대해 조노량 역시 의문을 담은 시선을 보내왔기 때문이다.

조금 어색했기에 차츠라는 시선을 샤마노프에게 돌렸다.

“다행히 죽지는 않았소. 물론 조금 더 지난다면 얼어 죽겠지만.”

조노량은 고개를 끄덕이며 샤마노프를 흔들어 깨웠다. 기절에서 수면으로 넘어갔는지 오래지 않아 정신을 차렸다.

샤마노프가 깨어나자 조노량은 배낭을 벗었다. 옆구리가 짧게 찢어져 있었다. 등에 느껴졌던 그 타격이 배낭을 뚫어 버린 것이리라. 그 탓에 챙겨 놓았던 뱀 대가리들이 대부분 흘러내렸다.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배낭 밑에 몇 마리는 남아 있었다.

조노량은 그중 한 마리를 잡고 이빨로 머리를 뜯어낸 후 통째로 씹기 시작했다. 그러며 다시 한 마리를 꺼내 샤마노프에게 건넸다.

☆ ☆ ☆

샤마노프는 절망감에 멍해지고 말았다.

갖은 고생 끝에 동굴에 도착했건만 반기는 것은 싸늘한 냉기뿐이었다.

고립무원의 극지에서 만 삼 일을 헤맸다.

그리고 삼 일하고 한나절이 지나, 가까스로 동굴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동굴에는 썰렁한 냉기만 감돌 뿐, 본진은 이미 그곳에 없었다.

몸 상태도 말이 아니었지만, 심적 타격은 더욱 극심했다. 삼 일을 넘게 헤매며 유일한 희망이, 유일한 목표가 본진과의 합류였다. 그 외에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절망이었다.

한 마디 말조차 꺼내 놓을 수 없었다. 한동안 멍해져 있던 샤마노프가 일행을 둘러봤다. 넝쿨을 이용해 왼팔을 고정시킨 차츠라가 쓴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자신과 눈빛이 마주쳤음에도 아무런 말이 없다.

샤마노프의 시선이 다시 노리앙에게 머물렀다. 역시 멍한 표정이었지만 현실에 대한 반응은 아닌 것 같다. 벌써 이틀째 저런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뭔가 깊은 고민에 빠진 듯 시도 때도 없이 상념에 빠져들곤 했다. 심지어는 그로 인해 마물들에게 발각돼 큰일 날 뻔한 적이 몇 번씩이나 되었다. 처음에는 절망감에 넋이 나간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들었으나, 그건 또 아니었다.

상념에서 빠져나온 그의 무위는 그야말로 눈이 휘둥그레지도록 만들었다. 도대체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빠르기라면 자신 있다고 생각했는데, 눈으로조차 좇기 힘들 만큼 눈부신 동작들과 엄청난 파괴력을 보이곤 했다. 지칠 대로 지친 자신과 차츠라에 비하면 그야말로 펄펄 난다고밖에 표현할 말이 없었다. 실제로 이 자리에 도착할 수 있었던 이유의 구 할은 그의 활약 덕이었다.

전투가 끝나고 안전지대에 도착하면 그는 여지없이 이상한 자세로 휴식을 취한 후 또 멍하니 상념에 빠져들곤 했다. 지금의 저 표정도 그때와 다르지 않았다.

차츠라가 제일 먼저 움직였다. 그나마 불이라도 피울 수 있는 곳이지 않은가?

샤마노프는 만사가 다 귀찮았으나 온기에 대한 그리움으로 어느새 차츠라를 도와 불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런 둘의 움직임을 보면서도 노리앙은 구석에 있는 작은 바위 위에 걸터앉아 무언가 또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간의 노고를 생각한다면 그의 휴식에는 아무런 불만이 없다. 단지, 그에게 안 좋은 일이라도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스러운 마음일 뿐이다.

불을 피운 후 노리앙을 불가로 인도했다. 몸은 샤마노프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으나 정신은 여전히 상념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이끌면 이끄는 대로 움직일 뿐이었다. 저러다가 진짜 미치기라도 하면 어쩐단 말인가?

불가에 앉은 노리앙의 시선이 불꽃에 고정되어 움직일 줄을 몰랐다. 깜박임조차 보이지 않는다.

답답한 심정에 노리앙을 바라보던 샤마노프가 한숨을 내쉰 후 단단하게 얼어붙은 뱀 대가리를 하나 꺼내들고 굽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징그러워 만지기도 싫었으나 지금은 오히려 맛있다고 느낄 지경이다. 비릿하면서도 고소하다고 해야 할까? 굽고 있는 지금은 저절로 입가에 군침이 돌 지경이다. 날것으로도 제법 먹을 만한데, 따뜻하게 굽는다면 얼마나 맛있어질까?

샤마노프는 뱀 대가리를 굽는 한편, 배낭에서 검은 이끼 뭉치를 꺼내 한 움큼 입으로 가져갔다. 턱을 몇 번 움직이자 메케한 향기와 함께 입 안이 얼얼해져 온다.

그간 마물들의 위협은 어찌어찌 피해 다녔다지만, 추위와 갈증은 피해 다닐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을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이 검은 이끼 덕분이었다.

극한의 한기 속에서도 신기하게 온기와 수분을 간직하고 있는 이 이끼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죽어도 벌써 죽었을 것이다.

검은 이끼는 마계의 문 곳곳에서 군락을 이루며 자생하고 있었다. 숲 속 후미진 그늘이나 움푹 꺼진 구덩이마다 적당한 키의 검은 이끼들이 둥지를 틀고 있었다. 태양 빛조차 뚫지 못하는 회색 대기 속에서도 구태여 그늘지고 후미진 곳을 찾아 서식하고 있는 것이 조금 의문이었지만, 셋에게는 정말 고마운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이끼는 발목에서 무릎 높이까지 성장하는 듯했다. 무릎 높이 정도의 이끼라면 몸 전체를 파묻을 수 있을 정도였다. 이해하기 힘들지만 이끼는 온기까지 간직하고 있었다.

보통의 숲속이었다면 눈치채기 힘들었을 만큼 적은 온기였지만 뼛속까지 얼어붙는 냉기 속에서는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다. 평범한 식물이 극지의 냉기를 견뎌내며 생존할 수 있는 궁극기인 것이다.

셋이 마물들이 득시글거리는 숲속에서 안전하게 밤을 지낼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이 검은 이끼 덕이었다. 적당한 높이의 이끼 속에 몸을 파묻고 몸을 숨기며, 또 얼어붙는 것을 막았다. 이끼를 씹으며 모자란 수분을 보충했다. 이끼를 씹을 때마다 입 안이 얼얼하고, 알싸하게 배가 아려 왔지만 참을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 신체가 어느 정도 견뎌낼 수 있을 정도의 약한 독성을 띠고 있을 것이라 추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다. 바로 중화될 수 있는 독이든 몸에 누적되는 독이든, 안타깝게도 일행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독이건 아니건 먹지 않으면 바로 죽을 터이니 말이다.

뱀 대가리가 노릿하게 구워지며 고소한 냄새가 풍길 때쯤, 주변의 흔적을 살피던 차츠라가 말했다.

“떠난 지 이틀은 된 듯싶소.”

이틀이라? 따라잡을 수 있을까?

“불행한 일이 일어났군.”

마물들이 동굴을 발견하기라도 했다는 말일까? 그의 안색이 어둡다.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식인이 일어났소.”

샤마노프의 시선이 차츠라의 단검을 향했다.

땅바닥을 헤치던 단검 끝에 뭔가 길고 허연 물건이 걸려 올라왔다. 군데군데 거뭇거뭇하게 불에 그슬린 자국이 눈에 띈다. 연이어 갈색 털 뭉치 같은 것이 딸려 나온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그게 무엇인지 인지하지 못해 어리둥절했으나 다음 순간 그 허연 막대기와 털 뭉치가 뜻하는 바를 깨닫고는 소스라쳐 물러앉았다.

손에 쥐었던 뱀 대가리를 내팽개쳤다.

본진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누굴까? 샤마노프는 갈색머리를 가진 동료들을 하나씩 떠올려보았다. 누굴까? 누굴까……?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도 저 뱀 대가리처럼 모닥불에 구워졌겠지?

샤마노프는 그대로 바닥에 웅크리고 누웠다. 무릎을 바짝 끌어당겨 이마를 묻었다. 참으려 했으나 참을 수 없는 신음 소리가 샤마노프의 앙다문 어금니를 비집고 새어 나왔다.

“끄억, 꺽꺽.”

갈라 터진 입술에서 피가 터지며 푸들푸들 경련했다.

눈을 감았다.

본진에 합류할 수 있을까? 합류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몇이나 살아남아 있을까? 나를 잡아먹으려 들까? 혹시 노리앙도? 차츠라도?

샤마노프는 극도의 경계심을 품고 급히 둘을 둘러보았다.

차츠라는 여전히 뭔가 흔적을 뒤지고 있었고, 노리앙은 여전히 불꽃 깊이, 더 깊은 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들은 아닐 것이다. 설마? 마계대전 당시의 이야기를 들으며 커 왔지만 그건 그야말로 어린 아이들을 놀리기 위한 엄포일 뿐이었는데……. 식인이라니? 그것도 자신이 아는 누군가를 또 다른 누군가가 먹어 치웠다니……,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아고투스 아르고스를 함께 외치던 그들이?

커트리안은 허락했을까? 정신적 지주인 당신이, 당신의 전사를 잡아먹는 것을 진정 용인했단 말인가?

“남서쪽으로 갔군. 그래도 우리를 아주 버린 것은 아닌가 보오.”

‘버리지 않았다? 과연 감격해야 할 일인가?’

“이런 표식을 남겨 두다니, 커트리안 님답군.”

‘본진에 합류해도 될까?’

혼란스러운 마음과는 달리 오랜만의 온기 탓인지 샤마노프는 까무룩 잠이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을 때 샤마노프는 자신이 던져 버린 뱀 대가리를 무심히 씹고 있는 노리앙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냥 뱀 대가리일진대,

소름이 돋았다.

조노량의 고민은 깊어졌다.

혼란스러웠다.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무언가를 쫓는 기분이다. 형체도 없고, 식도 없고, 목표도 없다. 뭔가 알 듯 모를 듯, 흐릿한 느낌만 있을 뿐 구체적인 모습이 떠오르지 않았다. 조노량은 씹고 있던 뱀 대가리를 한 입에 털어 넣고 오첩도를 쥐고 일어났다.

샤마노프가 움찔거리는 모습이 보였지만 일절 신경 쓰지 않았다. 조노량의 관심은 오직 이 알듯 모를 듯,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이 정체불명의 느낌에만 쏠려 있었다.

오랜만이다. 달밤에 홀로 나가 검을 휘두르던 시절이 떠올랐다. 새로운 것을 배울 때면 어김없이 행해 오던 보무관 시절의 습관이다. 남들보다 부족했기에 남들보다 더 노력했고, 내공의 증진이 없었기에 기예의 정밀함으로 승부를 해야 했다. 제현의 독사라 불릴 정도의 악착같은 독기야말로 혈혈단신의 고아가 무림에서 살아남은 비결이었다.

조노량은 미친 듯이 오첩도를 휘둘렀다.

길이 보이지 않는다.

마음을 비우고 한바탕 칼춤을 추었다.

형이 이어지지 않는다. 끊어지고, 흔들리고, 멈춘다.

깨달음?

얻어 걸린 글자나 몇 개 알고 있는 무식한 무사로서 깨달음이라는 지고한 단어는 입에도 담아 본 적이 없다.

가르쳐 주면 가르쳐 주는 대로 익힐 뿐, 스스로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깨닫지 않으면, 한 발자국도 전진할 수 없는 경지에 도달해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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