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승급 심사(1)
어둠이 내리려면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았다. 하지만 하늘은 벌써 어두워졌다. 낮까지 멀쩡하던 하늘에 먹장구름이 몰려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곧이라도 함박눈이 쏟아질 기세다. 아니나 다를까, 송이송이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4월, 이름 모를 풀들이 수용소 곳곳에 숨어 연약한 싹을 틔우는 계절이다. 아니, 연약한 놈들이 아니다. 북부의 봄은 산동의 겨울 못지않다. 이런 눈발 속에서 싹을 틔우는 놈에게 연약하다는 표현을 사용하면 안 된다.
꾸러미가 어깨에서 흘러내리며 내용물을 조금 토해 놓는다.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기에 단단히 고정하지 않은 탓이다. 구멍 난 양말, 여름용 단화, 잡동사니 몇 가지. 주섬주섬 줍는데 노란 꽃 하나가 눈에 띈다. 싹을 틔우는 것도 모자라 벌써 꽃을 피우는 식물이 있다니? 조노량은 경이에 차 그 노란 꽃을 바라보았다.
민들레는 아니지만 민들레를 닮았다. 비슷한 놈인가?
고향의 것과 비슷하다면 작은 풀조각마저 그립다.
그리움은 파문이 퍼져 가듯 잔잔하게 그 영역을 넓힌다. 보가촌의 초라한 시장 한 켠, 좌판에 쪼그려 앉아 먹던 물국수가 그립고, 싸구려 백주를 팔던 후통의 후줄근한 이가주루가 그립다.
조노량은 고개를 저었다. 언젠가는 반드시 돌아가야 할 곳이지만 지금은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할 때다.
허리를 펴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눈송이가 어느새 굵어져 있다. 싸리눈이 아니라 함박눈이다. 4월이 다 지나가는데 눈이라니? 모처럼 휴일인데, 또 작업에 동원되게 생겼다.
‘아니지. 검투반은 작업에 동원되지 않지.’
조노량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4반 막사에서 검투반 막사까지는 사십여 미터. 십여 장이 조금 넘는 거리다. 그 짧은 거리를 걷는 사이에 바닥에는 벌써 눈발이 깔리기 시작했다. 잠깐 오다가 말 눈은 아니다.
조노량은 걸음을 멈췄다.
짙은 갈색의 나무 막사. 나무벽 곳곳에 보이는 검은 얼룩. 검투반의 막사도 여타 다른 반의 막사와 그다지 다른 모양이 아니다. 지붕이 뾰쪽한 사각형의 허름한 막사다. 단지 그 크기가 다른 막사의 세 배는 되어 보인다는 점이 다르다. 하긴 인원이 다른 반의 두 배가 넘으니 크기도 큰 것이 당연하다.
어느 막사에서나 들려오는 일상적인 소음. 하지만 검투반의 막사에서는 아무런 소음도 들려오지 않았다. 삼 년간 검투반의 막사 앞에 서 본 적이 없었던 조노량이다. 원래 검투반의 막사는 이렇게 조용한가?
허름한 나무문에 달린 고리를 잡고 막사문을 당겼다.
끼이익
아귀가 잘 맞지 않아 거슬리는 소리가 나는 점은 다른 막사들과 다르지 않구나.
한층 어두침침한 실내로 한 걸음 들여 놓았다. 눈이 어둠에 쉽게 적응하지 못한다. 하지만 단련된 감각은 뭔가 위험을 경고하고 있었다. 살기인가? 아니 살기와는 다른 느낌. 하지만 위험한 것만은 틀림없다.
아니나 다를까, 무엇인가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이것은 복부를 노리는 주먹이다. 이미 충분히 경계하고 있던 터라 가볍게 허리를 틀어 주먹을 피함과 동시에 자세를 낮춰 목표를 잃고 허둥대는 주먹을 겨드랑이에 꼈다.
이제 상대는 자신의 범위 안에 속했다. 조노량은 오른손바닥을 펴서 상대의 턱을 밀어 침과 동시에 왼쪽 겨드랑이에 끼인 상대의 오른팔을 휘돌려 버렸다. 관절의 반대 방향으로 가하는 힘이라 저항할 수 없다.
어느 정도 어둠에 적응한 조노량의 눈에 거구의 사내가 볼썽사납게 문가로 나뒹구는 모습이 보였다.
조노량은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사내에게서 시선을 거둠과 동시에 허리를 숙이며 좌측으로 한 발자국 회전했다.
그 반경 안에 누군가의 팔이 걸렸다. 허리를 숙임과 동시에 팔꿈치를 이용해 뻗어진 팔을 찍어 눌렀다. 부러지지 않을 정도로만, 충분히 주의해서 가격한다.
숙여진 상대의 안면을 향해 다시 한 번 팔꿈치를 돌렸다. 역시 너무 강하지 않게 주의한다. 또 다시 나뒹구는 마른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왼쪽에서 시커먼 무엇인가가 올라온다. 이번엔 무릎. 손바닥으로 내리누르며 몸을 반 바퀴 회전시켰다. 반대쪽 팔을 쭉 펴며 손등을 이용해 상대의 관자놀이를 가격했다. 시야가 밝아졌다. 어둠에 완전히 적응한 조노량의 시야에 연이어 수개의 주먹이 뻗어 오는 모습이 보였다.
가장 가까운 사내의 품속으로 뛰어드는 간단한 동작으로 모든 주먹의 타격 방향에서 벗어났다. 숙였던 무릎을 펴자 조노량을 안은 상대의 안면에 조노량의 머리가 작렬했다. 그 충격으로 튕겨져 나가려는 상대의 상체를 잡아채 반대 방향으로 밀어 버렸다. 뻗었던 주먹을 회수하던 수 명의 사내가 얼떨결에 던져진 사내를 받아 안았다.
그 틈에 조노량의 발이 왼쪽 사내의 허벅지를 가볍게 가격하고, 그 탄력을 이용해 오른쪽 사내의 옆구리까지 찍어 올린 후에야 발을 땅에 내디뎠다. 혈해(血海)와 대횡(大橫), 결코 만만치 않은 혈도들이다. 이 자들은 이제 경계할 필요가 없다. 마비와 극심한 통증에 한동안 움직이지도 못할 것이다.
숨 쉴 틈 없이 몰아치는 공격. 오랜 시간 잠들어 있던 무인으로서의 감각이 되돌아옴을 느꼈다. 온몸의 작은 세포 하나하나가 흥분으로 깨어났다.
나머지는 세 명. 흥분한 세 명의 사내가 콧바람을 내뿜으며 동시에 몸으로 부닥쳐 온다. 잡아 누르려는 심산이다. 하지만 뒷골목의 수많은 막싸움으로 단련된 조노량이다. 이 정도 막무가내 돌진에는 당하지 않는다.
입술 끝이 저절로 말려 올라간다. 조노량은 가슴을 바닥에 붙이듯이 낮추며 왼발을 꼭짓점으로 오른발을 크게 휘돌렸다. 쓸어차기, 그 반원의 범위 안에 세 사내의 종아리가 걸려든다. 달려들던 사내들은 제힘에 겨워 한꺼번에 조노량의 뒤쪽으로 나뒹굴어 버렸다.
초반에 쓰러졌던 사내 둘이 몸을 일으키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투기가 몰려온다. 이미 짐작했던 바다. 힘과 기세가 월등한 이들이다. 조절한 타격에 쉽게 무릎 꿇을 자들이 아니다. 그 사이 나중에 쓰러졌던 세 명도 몸을 일으켰다. 얼었던 몸이 풀린다. 온몸이 부르르 떨리며 쾌감이 밀려든다.
조노량의 신형이 거리를 무시하고 막 일어선 자들의 머리 위로 날아들었다.
퍼버벅! 팡!
연이어 터져 나오는 격타음. 몸을 일으킨 사내들은 한층 강해진 타격에 다시 한 번 나가떨어졌다. 도저히 방어고 뭐고 소용이 없었다. 묘한 각도로 찔러 들어오는 주먹과 현란하게 솟구쳐 오르는 발끝. 그리고 엄청난 통증. 사내들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 순간 조노량의 머릿속에서 날카로운 경종이 시끄럽게 울려댔다.
위험하다!
조노량의 뒤쪽, 막사의 안쪽에서 무엇인가가 엄청난 속도로 날아들었다. 조노량은 다급하게 몸을 돌리며 왼쪽으로 움직였지만 피할 수는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허리를 뒤로 빼며 최대한 몸을 가볍게 해 충격을 완화시키는 것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퍽!
조노량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의 주먹이 조노량의 복부에 작렬했다. 대단한 속도다. 조노량의 몸 전체가 뒤쪽으로 튕겨 나갔다. 아무리 몸을 가볍게 하고 뒤로 빼던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의 몸을 주먹 한 방으로 날려 버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날아가던 조노량을 뒤쪽의 사내가 엉거주춤 받아 안았다. 처음으로 조노량을 기습했던 거구의 사내다. 하지만 사내는 추가로 공격할 의사가 없는지 조노량을 안고는 새로이 등장한 사내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조노량은 거대한 충격에 숨까지 막혀 버리는 느낌이었다.
겨우겨우 기혈을 조절하며 호흡을 안정시켜야 했다.
“그만!”
달아올랐던 피가 순식간에 식어 버릴 정도의 차분한 목소리.
그는 심사관을 맡았던 검은 가죽조끼의 사내다.
“훌륭하다. B클래스로서도 부족함이 없구나. 혹시 마나를 다룰 줄 아나?”
조노량은 팔을 털어 거구의 품에서 벗어났다. 검은 가죽조끼의 사내는 언제 조노량을 공격했냐는 듯 냉정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난 마나를 다뤄 본 적이 없소.”
“아쉽군. 마나만 다룰 수 있다면 A클래스까지도 가능하겠어.”
사내가 다시 말을 이었다.
“자네, 운이 좋군. 승급심사가 내일이다. C클래스를 거치지 않아도 되겠어. 모여 보지.”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다. 의문을 표하기도 전에 등불이 켜지며 한쪽 구석에 앉아 있던 사내들이 검은 가죽조끼의 사내 앞으로 모여들었다. 심사를 통과했던 크리들과 하이오지, 뮤트와 지에도다. 제법 당했는지 얼굴이 성한 자가 없다. 크리들 역시 눈가에 멍이 들고, 입술이 깨져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내 이름은 스마르라고 한다. A클래스지. 앞으로 내 말이 곧 법이다. 항명은 용납되지 않는다. 단, 나를 꺾으면 더 이상 내 명령을 듣지 않아도 된다. 쉽진 않겠지만……. 자, 이제부터 검투반의 간단한 규칙 몇 가지를 알려주겠다.”
스마르의 시선이 신참들을 하나하나 훑었다.
“검투반은 철저히 무력에 의해 계급이 정해진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클래스는 총 네 개다. S, A, B, C클래스. 상위 클래스의 명령에는 절대 복종해야 한다. 물론 복종하지 않아도 좋다만, 그럴 경우 검투장 구경도 못해 보고 연습 때에 죽게 될 거다. 내일까지는 모두 C클래스다. 그 말은 대장간 작업을 담당하게 될 것이란 뜻이다. 검투반에서 사용할 무기를 생산해야 하지. 내일 승급심사에서 B클래스가 된다면 대장간 작업은 면제다. 또 하나, C클래스의 침상은 원하는 대로 차지할 수 있다. 물론 A클래스가 침상을 요구하면 양보해야 하겠지만…….”
그 후로도 몇 가지 주의사항을 말했지만 그다지 중요한 것은 없었다. 스마르가 정해준 빈 침상에 짐을 풀어 놓은 신참들은 다친 상처를 서로 돌봐주었다.
조노량은 상처라 할 것도 없었지만 하이오지를 제외한 나머지는 철저히 망가져 있었다. 신고식을 단단히 치른 모양이다. 유독 하이오지만 큰 상처가 없었다. 하이오지는 조노량의 시선을 느꼈는지 히죽이 웃어 보였다. 다분히 아부성이 짙은 미소다. 약삭빠른 하이오지는 벌써 검투반의 분위기에 적응한 모양이다. 절대복종. 스마르의 말대로 조노량은 B클래스에 가장 접근한 사내였다.
그때 거구의 사내 둘이 조노량에게 다가왔다. 낮에 조노량에게 맞아 기절했던 사내와 방금 전 조노량을 받아 안았던 사내다.
“난 구루라고 한다. 이쪽은 브라지니라고 하고.”
거구의 사내는 머쓱한 표정으로 악수를 청해 왔다.
“난 조노량이다.”
“조 노오리…….”
“조 노리앙.”
조노량은 귀찮다는 듯이 이곳 발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반복했다.
“노, 노리앙이군. 거, 검투반에 온 것을 화, 환영한다. 반갑다.”
조노량은 구루의 엄청나게 큰 손을 마주잡았다. 조노량의 손이 완전히 감춰질 만큼 커다란 손이다.
“이, 이런 조그만 주먹에서 어떻게 그, 그런 힘이 나오는 거지?”
구루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조노량의 손을 관찰했다.
“어, 어딜 어떻게 맞았는지 기억도 아, 안 나. 맞긴 맞은 거 같은데, 너무 아파서 저, 정신을 차릴 수 없더라고.”
덩치만큼 어눌한 말투다. 그런 말투로 용케 긴 말을 해낸다. 그때 둔탁한 종소리가 울렸다.
깡깡깡!
세 번. 저녁시간을 알리는 종소리다.
☆ ☆ ☆
조노량과 신참들은 습관대로 서둘러 문 앞에 정렬했다. 하지만 신참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왼쪽 침상 가장 구석에 누워 있던 사내가 몸을 일으켰다. 그는 전혀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여유 있는 몸짓으로 문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육 척에 이르는 건장한 삼십 대 사내다. 허글러처럼 유난히 크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멋지게 균형 잡힌 몸매를 가지고 있다. 얼굴 또한 준수하기 그지없다. 옅은 갈색머리와 갈색 구레나룻, 적당히 각이 진 턱선이 굳건해 보인다.
그제야 다른 반원들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그를 따라 막사를 나섰다. 하지만 정렬과는 거리가 멀다. 산만하다고 보일 정도다. 신참들도 줄의 끄트머리에 붙어 그들을 따랐다. 조금씩 내리던 눈이 어느새 하늘을 가득 덮고 있다. 수용소가 온통 하얗다.
줄은 식당이 아니라 훈련장을 향하고 있었다. 막사로부터 오십여 장, 이곳 단위로는 일백오십 미터 이상 떨어진 거리에 위치한 원형 경기장. 그곳이 바로 검투반원들이 점심과 저녁을 해결하는 곳이다.
훈련장에 들어서자 구수한 죽 냄새가 위장을 자극한다. 거기에는 고기 특유의 기름진 냄새도 포함되어 있다. 훈련장의 한쪽 끝에 세워진 간이 배식대에는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를 정도로 빵이 수북이 쌓여 있다.
배식을 담당한 두 명의 사내 중 하나의 얼굴이 눈에 익다. 4반의 밀정 아사다. 특수작업조원이 이곳에도 배치되어 있구나.
갈색머리 사내가 배식대에 다다르자, 아사는 얼굴에 함빡 미소를 띤 채 그릇 가득 죽을 퍼 담고 수저를 건넸다. 식기와 숟가락은 미리 준비되어 있다. 깨끗이 씻은 공용 식기와 놋쇠로 만든 정식 숟가락이다.
죽을 탄 검투반원은 옆 배식대로 가서 빵을 주워들었다. 저녁임에도 크기가 아침식사 때 지급받는 빵보다 오히려 크다. 그런 빵을 원하는 대로 주워 간다.
조노량이 아사의 앞에 서자 아사는 반갑다는 듯이 환하게 웃었다. 사실 조노량도 조금 반가운 마음이 들기는 했지만 밀정 따위에게 반가움을 표하기는 싫다. 조노량이 손을 내밀자 아사는 죽그릇과 수저를 건넸다.
“모자라면 얼마든지 다시 오라고.”
아사는 무뚝뚝한 조노량의 반응에도 여전히 친근한 표정이다.
조노량은 욕심껏 빵을 세 덩이나 집어 들었다.
빵과 넘칠 듯 퍼 담은 죽그릇을 조심스럽게 챙겨 들고 조노량은 다른 자들을 따라 관중석으로 올라갔다. 조노량은 적당히 자리를 잡고 숟가락으로 죽그릇을 헤쳐 보았다. 걸쭉한 건더기들이 숟가락을 따라 위로 떠오른다. 두툼하고 허연 비곗덩어리도 보인다. 고기다.
조노량은 허겁지겁 죽을 떠먹고 빵을 뜯었다. 얼른 먹고 한 그릇 더 먹을 심산이다. 다른 신참들도 조노량과 다르지 않은 반응을 보인다. 다들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듯 숟가락을 놀린다. 검투반에 지원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굶주림이다. 그런데 이런 식사를 대하자 모두들 감격한 얼굴이다. 뮤트는 눈자위까지 빨개졌다.
조노량도 질세라 숟가락을 놀렸다. 이래서야 과연 소화가 될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대충 씹어 삼킨다. 뜨거운 국물이 식을 새도 없이 목구멍을 넘어간다. 뭉클한 비곗덩어리가 씹힌다. 고소하고 진득한 육즙이 배어 나온다.
조노량은 오랜만에 느껴 보는 행복감에 뿌듯해지는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얼마 만에 맛보는 백육의 맛인가? 두툼하게 썰린 감자조각, 적당히 풀어진 양파와 당근, 밀을 빻아 넣었을 것이 틀림없는 구수한 맛. 무엇보다 큼직하고 넉넉히 들어간 고깃덩어리들. 그야말로 행복에 겨울 지경이다.
약간 싱거운 느낌은 있었지만 그 정도는 암염을 빨면 그만이다. 계획대로 세 개의 빵과 두 그릇의 죽을 비웠더니 배가 터질듯 불러왔다. 수년간 쪼그라들 대로 쪼그라들었던 위장이 갑작스런 포식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그 점에 있어선 다른 신참들도 마찬가지다. 한 번 더 먹는 것은 포기해야 했다.
조노량 등은 그제야 훈련장을 둘러보았다. 관중석 맨 뒤쪽 높은 곳에 백 명이 넘어 보이는 병사들이 빙 둘러 번을 서고 있다. 한 개 기대 정도의 병력이다. 강인한 인상의 규율이 잘 잡힌 병사들이다. 검투반의 행동에 간섭을 하지는 않지만 날카로운 눈빛으로 반원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반원들은 이미 익숙한 듯 별달리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다.
모든 반원들이 식사를 마치자 다시 막사로 향했다. 우르르 몰려다니는 형태지, 줄 따위는 없다.
막사로 돌아온 후에도 반원들은 자기 일에만 열중했다. 신입이 왔으면 궁금할 만도 할 텐데 다들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단지 크리들과 같은 반이었던 듯 두어 명의 사내가 크리들을 찾아 가볍게 알은 체를 하고 돌아갔다.
현재 검투반에는 4반 출신이 없다. 조노량이 알던 몇몇 인물들은 벌써 죽은 지 오래다. 그만큼 검투반에서 살아남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현재 검투반의 구성 인원 중 크로아지크 수용소 출신은 반의 반도 안 된다. 나머지는 포로가 된 직후에 실력을 인정받아 바로 끌려온 자이거나 다른 수용소에서 차출된 인원들이다.
“노, 노리앙.”
고개를 들어보니 또 구루다.
“내일은 스, 승급심사니까…… 모래 훈련 때 하, 한 번 더 상대해 줄 수 이, 있을까? 클래스가 다, 다르더라도 말이야.”
구루는 멋쩍은 듯 뒤통수를 긁적이며 조노량을 바라보았다.
“그러지.”
그다지 문제될 건 없다. 힘만 센 느림보를 상대해 주는 정도야 일도 아니다.
조노량의 승낙에 구루는 환한 얼굴이 되어 두서없이 이것저것 주절대었다.
정리하면, 원래 클래스가 다르면 함부로 검투를 신청할 수 없다, 너는 내일 당연히 B클래스가 될 것이다, 그런데도 상대해 주겠다니 고맙기 그지없다 등의 말이었는데, 알아듣는 데 무척 애를 먹었다. 검투반에 대해 묻고 싶은 것들이 있었지만 차마 구루에게는 물어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밤을 셀 각오를 하지 않는 이상 말이다.
구루가 돌아가고 나자 하이오지가 친한 척 말을 붙였다. 그다지 상대하고 싶은 자가 아니다. 조노량의 침묵에 하이오지는 히죽이 웃으며 침상에 몸을 누였다. 나머지도 변화된 환경과 낮의 힘들었던 시험 탓에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그 덕에 조노량도 방해를 받지 않고 운기를 하며 고단한 하루를 정리할 수 있었다.
오늘은 눈이 시릴 정도로 높고 푸른 하늘이다. 마치 산동의 가을 하늘을 연상케 한다.
어제 내린 눈은 오전 작업으로 깨끗이 치워진 상태였다. 검투반은 작업이 없다는 말은 단지 공동 구역에만 해당한다. 훈련장만큼은 검투반이 스스로 치워야 했다.
“다들 알겠지만 신참들을 위해 간단히 설명을 하겠다.”
검은 가죽조끼의 스마르다. 훈련장 가에 앉아 느긋한 표정으로 햇볕을 쐬고 있는 이십여 명을 제외한 나머지 육십여 명은 훈련장 가운데 정렬한 채 긴장된 표정으로 스마르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특기할 만한 일은 각자의 손에 병장기가 쥐어져 있다는 점이다.
그 때문인지 훈련장에서 관중석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치워져 있었고, 병사들도 관중석 끝이 아닌 맨 앞쪽까지 전진해 있는 상태였다. 또한 화려한 의상을 입은 이십 명의 사람들이 관중석을 띄엄띄엄 메우고 있었다. 부유한 시민이거나 귀족일 것이다. 그들의 목적은 조노량도 오래전부터 들어 알고 있었다. 아도니아 공식시합에 돈을 걸 검투사들에 대한 정보를 미리 입수하자는 의미다. 일부는 다른 검투단의 관계자로서 크로아지크 검투단의 전력을 탐색하려는 목적으로 방문했을 것이다.
스마르가 검투반원들을 한 차례 둘러보고 말을 이었다.
“승급 심사의 규칙은 간단하다. 상위 클래스 중 원하는 상대를 두 명 지목하라. 그들을 모두 꺾으면 승급이다. 반대로 지명되어 패배한 자들끼리는 다시 검투를 벌인다. 거기서도 패배한 자는 강급이다. 단, S클래스에 도전하는 자는 한 명만 이기면 된다.”
그의 말대로라면 상하 간에 이동은 있으나 클래스 간 인원수의 변동은 거의 없는 셈이다.
“위치로!”
그 말에 정렬하고 있던 사내들은 훈련장 외곽으로 물러나 자리를 잡고 앉았다. 뭔가 추가 설명을 기대했던 신참들도 미진한 표정으로 물러나 자리를 잡았다.
“먼저 A클래스부터 순서대로 시작하겠다. 지원자는 앞으로 나서라.”
그 말에 미리 자리를 잡고 앉아 있던 이십여 명의 사내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호리호리한 키에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삼십 대 금발 사내다. 깎은 지 며칠 되었는지 짤막한 금빛 수염이 삐죽삐죽 돋아 있다. 하지만 덥수룩하다고 표현할 만큼 많은 수염은 아니다.
“더 이상 없나?”
추가로 나서는 자는 없었다. 스마르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관중석에서 애석해하는 탄식 소리가 들린다. 보다 많은 검투가 있어야 그들이 얻어갈 정보도 많아지기 때문이다. 더구나 지금 진행되는 A클래스의 검투는 아도니아 제1시합의 아주 중요한 정보가 된다.
“제스, 지명하라.”
제스라 불린 사내는 앞으로 한 발자국 나선 후 손가락을 들어 누군가를 지목했다. 순한 표정의 사십 대 사내다.
제스는 스마르를 힐끗 쳐다보더니 짧게 말했다.
“롤을 지명하겠다.”
낮으면서도 명료한 목소리다.
그 말에 롤이라는 사내는 손가락으로 스스로를 가리키며 과장되게 깜짝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긴장하거나 두려워하는 느낌은 아니다. 오히려 재미있는 놀이에라도 초대되었다는 듯한 행동이다.
롤은 몸이 그다지 크지 않았고, 흔한 갈색머리에 인상도 좋아 보여 누구에게나 호감을 줄 만한 얼굴이다.
그러나 A클래스 사내에게 지목된 만큼 당연히 S클래스일 것이다. 다시 말해 크로아지크 검투단의 단 세 명뿐인 최강전사 중 한 명이라는 말이었다.
지명당한 롤이라는 사내가 싱긋 웃으며 자리를 털고 일어나 중앙으로 나섰다. 제스 역시 자신의 무기를 들고 중앙에 가 섰다.
제스라는 사내는 한 손에는 단창을 들었고, 다른 손에는 손목을 간신히 가릴 만큼 작은 방패를 매달고 있었다. 또 양손에 모두 징이 박힌 얇은 가죽장갑을 착용한 상태였다.
반대로 롤이라 불린 사내는 이곳에서 가장 흔한 무장인 짧고 두꺼운 검과 라운드실드라고 불리는 둥근 방패를 착용하고 있었다.
둘이 앞으로 나서자 스마르는 관중석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관중석에 앉아 있던 갈색 로브의 노인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옆에는 두 명의 기사가 호위를 선 상태였다.
“팔찌를 풀고 오시오.”
스마르의 말에 둘은 나란히 노인이 앉아 있는 관중석 앞쪽까지 걸어간 후 각자의 무기를 바닥에 내려놓고 양팔을 높이 들어올렸다. 그러자 병사 중 하나가 아래로 뛰어내려 롤의 왼팔을 잡고 옷을 걷어 내렸다.
드러난 롤의 손목에는 넓적한 은색 팔찌가 채워진 상태였다. 마법사로 짐작되는 노인이 지팡이를 들어 팔찌에 대고 주문을 외우자, 짧은 빛과 함께 롤의 손목에서 팔찌가 제거되었다.
노인은 차례대로 롤의 오른손목에 채워진 팔찌와 제스의 팔찌까지 모두 제거하고는 자리에 돌아가 앉았다. 그 과정 내내 노인을 호위하던 두 명의 기사는 각자의 검에서 손을 떼지 않고 있었다. 팔찌가 제거된 이상 롤과 제스 역시 두 기사와 같은 소드마스터다. 그들로서도 만의 하나의 사태에 대비해 긴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 ☆ ☆
검에 마나를 실어 오오라를 발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른 자를 일반적으로 소드마스터라 부른다. 검으로 마나를 다룰 수 있는 경지에까지 올라섰다는 의미로서 높여 부르는 말이다. 그리고 그것이 북부에서 기사가 될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이었다. 하지만 그 경지를 이룬 자 간에도 격차가 존재했다. 일반인이 보기에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경지지만 검사들은 소드마스터에 이른 이후부터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역사를 통틀어 그 경지의 궁극에 도달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혹 신의 기사라 불리는 엔젤나이트라면 모를까? 하지만 엔젤나이트의 전설은 그야말로 전설일 뿐이다. 그만큼 그 끝을 알 수 없는 경지다 보니 오히려 그 격차가 클 수밖에 없었다.
물론 오오라를 발하는 소드마스터의 벽을 갓 넘은 것만으로도 일반 전사와는 차원을 달리하게 된다. 검의 예기와 강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오오라가 실린 검과 일반 검이 부닥치면 일반 검은 버텨낼 수가 없다. 전투 중 무기가 부서진다는 말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A클래스 이상의 검투반원이라면 마나를 다루건 다루지 못하건 누구나 마나제어 팔찌를 차고 있다. 일명 마나 팔찌 혹은 은팔찌라고 불리는 이 팔찌가 바로 소드마스터가 마나를 모으는 것을 방해하는 역할을 한다. 이것이 아도니아 최고의 검투단 중 하나로 불리는 크로아지크 검투단의 강력한 무력을 통제하는 조치였다.
팔찌가 풀리자 둘은 손목을 매만지며 다시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어이, 제스! 이거 너무한 거 아닌가? 예니에프도 있고, 쥬시아누스도 있는데 왜 하필 나야? 내가 제일 만만해 보였단 말이지. 하하!”
“그건 아닙니다. 단지 롤에게 제대로 한 번 지도받고 싶었을 뿐입니다.”
과장되게 웃고 있는 롤과 달리 제스는 지나치게 정중히 말했다.
“크크크, 자네라면 적당히 봐 주면서 상대할 수 없겠구먼. 잘 알고 있겠지?”
짧은 대화 중 사람 좋아 보이던 롤의 목소리가 점차 음산하게 변해 갔다.
“쥬시아누스, 부탁하겠다. 저 친구를 죽이기는 싫거든. 크크크.”
허글러에 비견될 만큼 거구의 몸체. 그런 거구의 반신을 완전히 가릴 만큼 거대한 타워실드를 비켜 세워 놓은 사내가 롤을 향해 손을 들어 보였다.
잡담이 오가자 스마르가 건조한 목소리로 둘의 대화를 끊었다.
“준비되었습니까?”
롤이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되었나?”
제스도 단창을 고쳐 잡으며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
스마르가 올렸던 팔을 내림과 동시에 뒤로 빠졌다.
롤은 S클래스고, 제스는 A클래스다. 제스가 도전자이다. 무림에서는 도전자가 선공을 가하는 것이 도리다. 하지만 제스와 롤의 관계는 그와 달랐다.
중간에 서 있던 스마르가 뒤로 빠지자마자 제스는 작은 방패를 들어 올리며 방어적 자세를 취했다. 제스가 그렇게 한 이유는 금방 드러났다.
“어이, 제스. 뭐하나? 들어와야 할 것 아니냐?”
롤의 눈빛이 급속히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밝고 과장되었던 미소도 천천히 광기에 휩싸였다. 그것만으로도 마치 다른 사람을 보는 듯 느껴졌다.
‘광전사 롤.’
그것이 옆집 아저씨와 같은 인상의 롤의 본모습이다.
롤이 걸음을 천천히 내딛기 시작했다.
급격히 바뀌어 버린 롤의 기세에 제스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미 각오하고 있었고, 오랫동안 대비해 왔던 싸움이다. 하지만 서서히 광기에 물드는 롤의 모습을 직접적으로 마주 대하자 침착함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물러날 수는 없었다. S클래스 중 그나마 싸워서 승산이 있는 것은 롤뿐이다.
제스의 단창에 푸른 기운이 맺히기 시작했다.
조노량의 눈빛이 번쩍였다. 강철 창 전체를 물들이는 푸른 검기. 드디어 이곳 세계의 진정한 무공을 직접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때 조노량의 좌측에 앉아 있던 크리들이 정면을 주시하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오오라를 다루는 성취에 있어서는 제스가 한 단계 위다. 하지만 싸움은 그것으로만 결정 나는 것은 아니지. 롤은 제스가 감당하기 힘든 상대야.”
하이오지에게 하는 말인지, 조노량에게 하는 말인지 정확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노량의 귀에도 똑똑하게 들릴 정도의 크기였다.
제스는 느리지만 일정한 속도로 다가오는 롤의 왼편으로 돌기 시작했다. 그러자 롤의 전진 방향도 왼편으로 바뀌었다. 제스가 계속 왼편으로 돌자 롤의 방향도 계속 돌아갔다. 하지만 롤이 전진하고 있었으므로 둘의 거리는 어느새 삼 장여로 좁혀졌다.
도는 것만으로는 롤을 상대할 수 없다. 제스의 원도 조금씩 좁아지기 시작했고, 회전 속도도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했다.
롤의 짧은 검에도 어느새 붉은 기운이 맺히기 시작했다.
롤을 중심으로 마치 풍차처럼 돌아가던 제스의 신형이 빠르게 직선을 그리며 반지름을 갈랐다.
핑!
스팟!
후-잉!
거의 하나인 듯 세 개의 소리가 겹쳐졌다.
첫 번째 소리는 제스의 신형이 롤의 오른편을 스쳐 지나가는 소리였고, 두 번째는 롤의 왼쪽 옆구리가 찢기는 소리였으며, 마지막은 뒤늦게 제스의 뒤편으로 폭발하듯 터져 나오는 롤의 검풍 소리였다.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둘의 격돌은 마치 폭풍처럼 빠르게 진행되었다. 전광석화와 같은 제스의 공격과 묵직한 롤의 공격이 끊임없이 교차했다.
롤의 검이 휘돌고 연이어 방패가 휘돌았다. 마치 방패조차 공격 무기라도 되는 듯 롤은 방패를 공격용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둘 중 어느 하나라도 얻어맞는다면 생명을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공격이었다. 하지만 제스의 공격은 교묘히 두 개의 무기를 흘리며 틈새를 파고들었다. 단창이 스쳐 지나가고, 연이어 건틀렛의 송곳이 롤의 갑옷을 찢었다.
몇 합 겨루기도 전에 롤의 전신은 자잘한 상처로 붉게 물들어 갔다.
“역시 쉽지 않겠어.”
크리들의 말에 하이오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또 한 명의 S클래스가 탄생하는 장면이군요.”
크리들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게 아니야. 보게, 제스가 공격을 성공하고는 있지만 끝까지 이어지지 않고 있어. 치명적이지 않다는 말이지. 만약 공격을 끝까지 이으려 한다면 그 전에 롤의 검에 반 토막이 나고 말걸. 저기, 저 장면 보이지? 또 밀리지 않는가? 이미 승부는 끝난 셈일세.”
하이오지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저게 어떻게 밀리는 모습이란 말인가? 오히려 한 수 아래의 상대를 희롱하는 모습에 가깝지 않은가?
“롤을 상대로 한 번 밀리기 시작했다면, 회복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야.”
싸움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쾅!
싸움이 시작된 후로 처음 둘의 무기가 부닥쳤다.
제스가 두어 발자국 뒤로 밀렸다. 롤은 제스를 방패로 찍어 누르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계속해서 밀고 들어갔다. 하지만 제스는 롤의 힘을 옆으로 흘리며 빠르게 단창을 찔러 넣었다. 눈이 따라가기 어려울 만큼 순간적인 반응이었다. 텅 빈 롤의 옆구리. 도저히 방패를 돌려 막아낼 만한 겨를이 없어 보였다. 그렇게 느낀 순간 롤의 팔꿈치가 창대를 향해 내려 꽂혔다. 방패를 돌려세우기에는 시간적인 부족함이 있을지라도 팔꿈치를 내릴 만큼의 시간은 충분했다.
팍!
옆구리 대신 팔꿈치에서 피가 튀었다.
쾅!
롤의 검이 제스의 방패를 후려치는 소리다. 언제 뻗었는지도 모를 롤의 검이 연이어 제스의 작은 방패를 강타했다. 팔꿈치 상처 따위는 신경도 안 쓴다는 표정이다.
쾅! 쾅!
피의 보상이라도 받겠다는 듯이 롤의 검은 연거푸 제스의 방패를 가격했다. 빠른 몸놀림을 보여 주었던 제스도 미처 피하지 못하고 방패를 이용해 롤의 검을 받아냈다.
뿌직!
제스의 방패가 깨져 나갔다. 남은 무게를 이기지 못한 제스의 몸이 땅바닥을 몇 바퀴나 구르고 나서야 롤의 공격 범위를 벗어났다.
“크르르.”
붉게 물든 눈동자. 붉게 달아오른 검.
롤의 전진이 다시 시작되었다. 제스의 단창이 날아왔지만 롤은 전혀 피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방패에 닿으면 막고 안 닿으면 몸으로 막았다.
제스가 롤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안기려 하면 롤의 검이 제스의 생명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마치 같이 죽자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롤은 전진했고, 제스는 물러났다. 롤의 피가 튀기고 있었지만 위험한 상태에 빠지고 있는 것은 제스였다. 단 한 방만 제대로 맞으면 부상이 아니라 목숨이 끊길 만큼 롤의 기세는 흉흉했다. 롤의 모습은 절대 제정신을 가진 사람의 모습으로 보이지 않았다.
제스의 푸른 오오라가 갈수록 진해지는 만큼 롤의 붉은 오오라도 갈수록 살기를 더해 갔다. 한쪽은 물러나고 한쪽은 돌진한다. 그런 모습으로 둘은 훈련장을 한 바퀴 반이나 돌고 있었다. 둘의 격돌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훈련장 내벽을 두들겨 구멍을 내기도 했고, 관전 중인 검투반원들을 덮치기도 했다. 그때마다 검투반원들은 우르르 자리를 이동해야 했다. 롤의 검은 그야말로 미친 자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줄기줄기 쏟아져 나오는 붉은 오오라가 미친 듯이 제스의 푸른 오오라를 압박해 들었다. 제스는 기교에서도, 오오라의 정순함이나 속도에 있어서도 롤에 비해 앞서 있었다. 하지만 기세만큼은 도저히 롤을 당하지 못했다. 그 기세가 제스의 견갑을 부수고 어깨뼈를 드러내었다.
롤의 검에는 검 이상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 제스의 단창이 미처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 제스는 혼신의 힘을 다해 급히 몸을 젖혀 롤의 칼을 피했다. 안 그랬다면 왼쪽 어깨부터 팔까지 통째로 떨어져 나갔을 것이다.
이미 승부가 난 것이다.
하지만 그런 제스의 몸을 따라 롤의 붉은 검이 계속 뻗어져 나왔다.
그동안 휘두르기만 했던 롤의 검이 앞으로 세워진 채 순간적으로 찌르기를 감행한 것이다. 도저히 좌우로 피할 시간을 벌지 못한 제스가 빠르게 뒤로 몸을 튕겼다. 그것이 제스로서는 불운이었다. 다급한 나머지 지면에 착지하자마자 다시 몸을 빼던 제스의 발아래 작지만 깊이 박힌 자갈이 있었고, 물러나던 제스의 뒤꿈치가 절묘하게 자갈에 걸리고 말았다. 상처를 입고 튕겨져 나가던 와중에 무게중심에 걸린 작은 저항. 그 저항이 제스의 균형을 무너트렸다. 제스는 마침 소동을 피하려고 몸을 일으켜 세우던 조노량을 덮쳤다. 그리고 그 위로 롤의 검이 날아들었다.
조노량은 왼손으로 제스를 밀어냈다. 그리고 롤과 같은 형태의 짧은 검이 하늘을 날았다.
쾅!
붉게 소용돌이치는 롤의 검과 오오라를 전혀 발하지 않는 조노량의 검.
두 개의 검이 공중에서 마주 부닥치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쾅! 쾅!
이지를 상실한 롤의 검은 상대를 가리지 않았다. 롤은 새로 등장한 상대를 적으로 간주한 것이다.
“크르르.”
롤의 검과 조노량의 검이 연이어 부닥쳤다. 제스의 단창과 부딪힐 때와 달리 육중한 소리가 났다.
퍽!
그때 누군가 엄청난 속도로 롤의 등을 향해 돌진했다. 그와 롤은 한 덩어리가 되어 몇 바퀴나 굴렀고, 훈련장 벽에 닿아서야 회전을 멈췄다.
허글러만큼이나 커다란 덩치를 지닌 쥬시아누스다. 쥬시아누스의 단단한 두 팔이 뒤에서부터 롤을 감싸 안고 뒹굴고 있었다. 그의 팔뚝은 롤의 허벅지만큼 두꺼웠다. 상대적으로 왜소해 보이는 롤의 팔뚝이 그 안에서 꿈틀거렸다. 그때마다 쥬시아누스의 관자놀이와 팔뚝에 힘줄이 돋아났다. 덩치와는 달리 쥬시아누스의 힘이 별거 아니거나 혹은 롤의 힘이 그에 비견될 만큼 강하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단 세 명의 S클래스. 당당히 그중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쥬시아누스. 전자일 가능성은 희박했다.
“멈춰라! 세스카의 롤! 싸움은 끝났다.”
쥬시아누스가 롤의 귀에 대고 덩치만큼 커다란 소리를 질렀다. 연속 세 번이나 같은 소리를 지르고서야 롤의 움직임이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다.
<2권에서 계속>
2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