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생기-6화 (6/142)

6. 검투반으로

조노량이 눈을 떴다.

특이할 정도로 긴 숨을 토해 놓는다.

“몸을 좀 움직여 봐야겠다.”

“무슨 말이죠?”

“검투반으로 옮길까 한다.”

“그게 무슨 터무니없는 말입니까? 몸 좀 움직이려고 검투반에 지원한다고요?”

조노량은 지그시 루드의 눈을 바라보았다.

루드는 순간적으로 노리앙의 눈빛에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검은 머리, 검은 눈동자가 그리 흔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희귀한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저토록 깊이 있는 눈은 본 적이 없었다. 과거에도 노리앙의 눈빛이 저러했던가? 루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세요. 몸이야 막사 안에서도 얼마든지 놀릴 수 있고, 곧 있으면 지겨운 갱도 작업도 재개될 것이고, 어쨌든 몸을 움직일 만한 거리는 얼마든지 많잖아요. 미르코프 자식의 일도 기억 안 나세요?”

“검투반은 어떤 곳이지?”

도대체 자신의 말을 듣고나 있는 걸까? 한 달 가까이 말도 몇 마디 않더니 뜬금없이 검투반으로 옮기겠단다.

“쓸데없는 생각은 마세요. 듣자하니 조만간 휴전협정이 진행될 거라는 소문도 들리더군요. 그때까지 조용히 지내는 거예요.”

“검투반은 어떤 곳이지?”

도무지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

“노리앙!”

“내공을 되찾았다. 훈련이 필요하다.”

“찾긴 뭘 찾아요? 뭐 잃어 버렸었어요? 제 말을 듣고나 있는 겁니까?”

“나는 중원의 무사다.”

무사? 아, 전사 말이군. 여기 전사 아닌 자가 하나라도 있던가? 결국 싸우고 싶다는 말이구나. 북부 출신들의 고질병이다. 그 점에 있어선 노리앙 역시 다르지 않은가 보다.

한동안 티격태격하다가 루드는 결국 고개를 젓고 말았다. 하여간 먹통들뿐이다.

“정 원한다면 어쩔 수 없지요. 말라 죽느니 실컷 먹고 죽는 것이 나을지도…….”

조노량이 움찔했지만, 루드는 모른 척하고 차분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노리앙도 어느 정도 알고 있겠지만 검투는 아도니아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스포츠죠. 공식 검투단만 해도 다섯 개가 있고, 귀족들이 보유한 사설 검투단은 아마 그 두 배 정도 될 거예요. 그중 가장 유명한 검투단 중 하나가 크로아지크 검투단이죠. 그게 바로 이곳 수용소의 검투반을 말하는 거예요.

크로아지크 검투단의 탄생은 이십삼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죠. 이 수용소가 생긴 때와 거의 일치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처음에는 별 기대도 없이 재미삼아 만들어졌는데, 그게 의외의 결과를 불러왔어요.

저 유명한 헤트르 폰티나를 비롯해 어둠의 클라흐, 거신 고골리 등이 이 수용소에 있었던 거죠. 그로 말미암아, 탄생한 지 불과 이 년도 안 된 크로아지크 검투단이 아도니아 제1시합에서 우승을 차지해 버린 거예요. 그 전까지 부동의 최강자로 군림하고 있던 로티우스 사설 검투단을 완전히 몰락시켜 버리면서 말이죠. 우승을 위해 최강 조합을 짰던 크로아지크 검투단은 아주 잔인했어요.

헤트르 등은 일부러 상대 검투사들의 목숨을 거두어 버린 거예요. 그 후 십 년간은 크로아지크 검투단의 독주시대였죠. 아무도 크로아지크 검투단의 최강 조합을 깰 수가 없었던 겁니다. 그 당시는 다들 크로아지크 검투단과의 시합을 회피하기 급급했어요. 크로아지크 검투단은 철저히 상대의 목숨을 노렸거든요.

그래서 854년에는 상대의 목숨을 취하기 전에 반드시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제도가 생기기도 했는데, 치열한 검투 중에 벌어지는 우발적인 상황을 막을 도리는 없었죠. 그들은 일부러라도 그런 상황을 만들었거든요.

그러던 그들이 십여 년 전 돌연히 은퇴를 해 버렸어요. 포로 주제에 은퇴라니 말이 됩니까? 하지만 그 후 그들은 수용소에서 사라졌고, 지금은 어디에 가 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완전히 사라졌거든요. ‘마계의 문’으로 보내졌다는 소문도 있고……. 죽었는지도 모르죠. 어쨌든 그 이후 소식은 아무도 몰라요.

그러나 그들이 사라진 후에도 크로아지크 검투단의 위세는 크게 줄지 않았어요. 그들에게서 훈련받은 검투사들도 만만한 실력은 아니었거든요. 그들이 존재했었던 시기만큼 절대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여전히 3대 검투단 중에 하납니다. 물론 최근 몇 년간 많이 약화되기는 했지만요.”

“기사들과 비교한다면 어떤가?”

“글쎄요……. 헤트르 등의 실력은 저도 소문으로만 들은 정도라서 잘 모르겠고요. 지금의 S클래스라면 일반 기사들보다 월등히 낫다고 보시면 됩니다. A클래스 중 일부는 원래 기사였으니 당연히 기사급이고요. 나머지는 종사급 정도랄까?

그래서 그들에게는 마나 팔찌가 채워지죠. 기사급이라면 기본적으로 마나를 다룰 수 있거든요. 마나 팔찌는 마법구로서 마나를 봉인하는 역할을 하죠. 뭐, 어쩔 수 없죠. 기사급들을 다룬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거든요. 오직 시합 때만 팔찌를 풀어 줍니다. 아, 물론 강제로 풀려고 했다가는 엄청난 전격계 마법의 방문을 받게 됩니다. 반쯤 죽는다고 보시면 돼요.

B클래스는 마나를 다루지 못하지만 검투에 있어서는 상당한 경지에 오른 자들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검투에서 가장 재미있는 승부가 펼쳐지는 클래스죠. 뭐, 믿음이 가지는 않지만 허글러의 드러난 실력 정도라고 보시면 됩니다.”

“드러난?”

“부반장님은 생긴 것과 다르게 제법 음흉한 분이죠.”

조노량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C클래스는?”

“수습 정도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수용소 생활을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자포자기 심정으로 검투반에 지원한 자들이 대부분이에요. 하지만 그들도 절대 무시할 만한 실력은 아니죠. 우선 검투반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엄격한 실력 검증 절차를 거쳐야 하거든요. 저기 제라드 정도라면 대충 통과는 무난하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대장간에서 무기 만드는 일이 대부분이죠.

아시겠지만 북부의 쇠는 중앙대륙에 비해 많이 무르죠. 기사들이 오오라를 몇 번 사용하고 나면 그 무기는 대체로 못 쓰게 됩니다. 기사의 오오라를 감당할 만큼 단단하지 않은 거죠.”

이 말에 조노량도 고개를 끄덕였다. 곡괭이질을 하더라도 날이 쉬이 상해 못 쓰게 되기 일쑤였다.

“S클래스나 A클래스의 무기는 그만큼 자주 망가지고, 그걸 만드는 것이 C클래스의 주임무입니다. 그리고 아도니아 제3시합 등의 삼류 검투시합에 나가 목숨을 바치는 것도 그들의 몫이죠.”

“그들의 일과는?”

“아침은 우리랑 같이 먹어요. 오전엔 각자 수련을 하고 오후엔 대장간에서 작업을 하죠. 아침은 보는 눈이 있으니 적당히 포로 취급을 받지만 점심과 저녁은 다릅니다. 충분한 육류와 신선한 야채가 지급되니까요. 아주 매혹적인 조건이죠. 아침시간에 전체 검투반원의 절반도 안 되는 인원만이 식당에 나타나는 이유도 그거죠. 그들의 식사는 경비병들도 부러워할 만큼 양질의 것이라고 하더군요. 검투시합, 그거 꽤 돈이 되거든요. 큰돈을 벌기 위한 투자인 셈이죠.”

“그렇군. 마음에 들어. 목숨의 대가가 그 정도는 돼야지.”

루드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목숨의 대가로 양질의 식사라? 전이었다면 절대 이해 못했을 말이지만 지금은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았다.

“궁금하지 않으세요? 아무리 최고한테 훈련받았다고 하지만 크로아지크가 아직까지 최고 수준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 말이에요.”

조노량은 물끄러미 루드를 바라보았다. 궁금하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마치 알아서 말하라는 듯한 시선이다.

‘에휴.’

루드는 한숨을 삼키며 정말로 알아서 말을 이었다.

“포로수용소야 여기 말고도 여러 군데 있어요. 하지만 검투단을 키우는 곳은 이곳 한 군데 뿐이죠. 그 이야기는 다시 말해, 포로 중 뛰어난 자들만 이곳으로 선발된다는 말입니다. 수용소 배치 전에 크로아지크에 의해 우선적으로 선별되죠. 그런 사람들은 처음부터 선택권이 없어요. 오자마자 바로 검투반으로 직행인 거죠.

뭐, 켈커티스라고 기사가 없겠어요? 아도니아보다 더 거친 사람들인데 말이에요. 더드리안 알죠? 그도 그들 중 하나죠. 전쟁 중에 아도니아를 아주 애먹였다고 하더군요. 흑색 갈리온의 더드리안이라고 했다던가? 참 안 된 일이죠. 아, 오해는 마세요. 검투사가 된다는 것이 그렇게 부끄러운 일은 아니니까요. 남의 도시에서 강제로 된 것이 문제지만 말이죠.”

“그들이 그렇게 강한가?”

“강하죠. 이곳 북국에서 가장 명예로운 호칭이 기사라고요. 저 남쪽의 이름뿐인 기사들과는 차원이 달라요. 기본적으로 오오라를 다룰 줄 모르면 기사가 될 수 없죠. 오오라를 다룬다고 해도 다 기사가 되는 것도 아니죠. 자기 기대를 가질 만큼 능력을 인정받지 않으면 안 돼요. 그래서 평생 종사로 끝나는 자들도 많아요. 기사를 만나면 절대 칼을 마주하지 마세요. 내 칼이 치즈처럼 잘리는 것을 보게 될 테니까 말이죠.

노리앙,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 어때요? 정식시합은 두말할 것도 없고, 훈련 중에 죽어 나가는 자들도 부지기수예요. 아무리 노리앙이라고 하더라도 오래 버티긴 힘들 거예요. 무슨 말인지 알죠?”

“꽤 잘 알고 있군?”

“잘 알죠. 아도니아 출신이니까.”

어쩐지 목소리가 딱딱해진 느낌이다. 언제나 상냥한 루드지만 자기 신변 이야기만 나오면 입을 다문다. 몇 번인가 물어본 적이 있지만 대답을 들은 적은 한 번도 없다. 단지 그가 아도니아 출신이라는 것 하나만 알려져 있다. 왜 아도니아 출신이 아도니아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는 것일까?

조노량에게는 상대방이 싫어하는 이야기를 억지로 캐내는 취미는 없었다. 조노량은 고개를 끄덕여 고마움을 표했다.

“오늘 얘기 고맙군.”

루드는 사실 걱정스러웠다. 얼마 전 보여준 노리앙의 무위가 상당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검투반은 고르고 고른 북국의 전사들로 구성되어 있다. 전사들이 목숨을 건 검투를 통해 추려지고 또 추려진 정예가 바로 그들이다. 결코 만만한 치들이 아니다.

과연 노리앙에게 무기를 쥐여 준다면 어떨까? 글쎄, 아마도 쉽지 않을 것이다. 몸이 빠른 것은 인정하지만 반대로 힘은 너무 약하다. 무거운 검을 들고 지금의 몸놀림을 유지할 수 있을까? 글쎄…….

더구나 북부의 검은 단단하고 예리한 대륙의 것과 달리 타격만을 염두에 둔 무딘 것들이다. 날카로움에 의지해 일격필살을 노리는 용도와는 거리가 멀다.

레이피어 같은 무기가 주어진다면 좋겠지만, 이처럼 정련이 필요한 무기는 애초부터 만들기가 어렵다. 설사 있다 하더라도 북국의 거친 사내들은 거들떠도 안 본다. 그들의 눈에 레이피어 따위는 장난감으로 비칠 뿐이다.

조노량의 상념이 깊어갈 때 루드는 안타까움이 담긴 시선으로 조노량을 바라보았다. 쯧, 어느새 또 눈을 감고 있다. 북부의 검만큼 무딘 자다. 루드는 고개를 저었다. 쉽지 않은 일이다.

노리앙을 보노라면 루트리우스가 생각난다. 노리앙만큼 무디고 무뚝뚝한 사내였다. 자신이 유일하게 의지하고 사랑했던 사내. 자신 때문에 아버지 손에 죽은 남자다.

눈을 감은 노리앙의 얼굴 위로 루트리우스의 무심한 얼굴이 겹쳐졌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했는데……. 루드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고 말았다.

‘당신의 충실한 기사를 베면서까지, 내게, 이 손에, 기어코 검을 쥐여 줘야 했단 말입니까?’

슬픈 듯 파르라니 떨리던 루드의 눈썹이 치켜떠졌다. 붉게 물든 흰자위가 섬뜩하다. 굳게 다문 입술 사이로 작은 핏줄기가 배어나왔다. 파란 힘줄이 돋아난 관자놀이가 분노로 요동치고 있었다. 그렇게 루드는 다시 한 번 정신을 잃었다.

낡은 가죽신을 손질하고 있던 허글러의 무심한 시선이 루드를 스치듯 지나쳐 갔다.

☆ ☆ ☆

거친 바람이 연신 원형의 훈련장을 할퀴어댄다. 그 탓에 며칠 전 내린 눈발이 날개를 달고 사납게 퍼덕대고 있었다.

‘빌어먹을 날씨군.’

무료함도 달래고 언 발도 녹일 겸 발로 바닥을 긁어 본다. 꽁꽁 얼어붙어 꺼풀조차 쉬이 벗겨지지 않는다. 같은 곳을 집중적으로 공략한 끝에야 얕고 기다란 갈색 선이 드러났다. 그나마 눈이 올 때마다 꼬박꼬박 치워 준 훈련장이기에 흙바닥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식당 앞 공터만 해도 눈이 가슴에 이른다.

조노량은 코끝이 찡해 오는 느낌에 인상을 찌푸렸다. 조금 전 관사에서 신체검사를 위해 벌거벗은 직후, 서둘러 끌려 나온 탓에 미처 체온을 회복하지 못한 모양이다.

“이 친구는 너무 왜소한 것 아닌가?”

“모르는 소리! 이런 몸이 진짜라고. 보게, 겉으로 보기엔 밋밋해도 자, 이렇게 손으로 눌러보면, 탄탄한 근육이 만져지지 않나. 순발력과 지구력은 이런 잔 근육에서 나오는 법이지. 그리고 이 얄팍한 가죽 좀 보게. 어디 자네 뱃가죽과 비교 좀 해 보라고.”

신체 곳곳을 꾹꾹 눌러대며 마치 가축을 품평하듯 식견을 자랑하던 병사들의 대화도 그다지 불쾌감을 주지 않는다.

보무관의 독사라고 불리며 제현의 밤을 지배했던 이 조노량이 그 정도 모욕에 감흥조차 일지 않았더란 말인가? 모멸감은커녕 오히려 그때 관사의 온기가 그리웠다. 삼 년간 길들여진 탓이리라. 참 많이도 순해졌구나.

조노량은 옆으로 시선을 옮겼다.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저자는 도대체 왜 이곳에 있는 것일까? 젊은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반쯤 벗겨진 갈색머리, 그리고 유난히 긴 관중과 주걱턱 덕에 말처럼 보이는 사내. 바로 하이오지다. 도둑과 사기꾼의 도시로 알려진 크리푸. 그곳 출신으로서 모자람이 없는 자다.

하이오지는 추위 탓인지 연신 투덜거리며 몸을 비비 꼬고 있다.

그 옆에 크리들의 모습도 보인다. 하긴 크리들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얼마 전 신출내기 티프에게 부반장 자리를 빼앗기고 말았다.

작업에 대한 식견, 감독관이나 수용소 측과의 관계, 작업 배정 등의 정치적인 일이 주가 되는 반장과 달리 부반장은 대부분 힘에 의해 결정된다. 힘이 모자라면 물러나는 것이 당연한 자리다. 그렇게 물러난 자는 그 반에서 버티기 힘들다. 여러 면에서 의도적인 불이익을 받기 때문이다.

조노량의 시선을 느꼈는지 크리들이 멋쩍은 웃음을 보낸다. 갱도 복구 작업 때 얼굴을 튼 탓이다. 그러고 보면 나머지 십여 명도 대부분 안면이 익은 자들이다. 이 정도 규모의 수용소에서 몇 년씩 부대끼다 보면 이름까지는 몰라도 얼굴 정도는 익히게 된다. 얼굴이 익지 않은 일부는 아마도 최근에 보충되어 온 신입들일 것이다. 제법 힘깨나 쓸 것 같은 덩치들이 많다.

조노량은 다시 종종걸음을 치기 시작했다. 가만히 서 있어서는 추위를 이길 수가 없다.

벌써 한 시간째다. 뭐한다고 이토록 꾸물거리는 것인가. 내공을 돌려 보지만 피한을 극복하기에는 아직 역부족이다. 조금 전부터는 이까지 부닥치기 시작했다. 볼썽사나운 일이다.

다른 자들도 이미 파랗게 질려 있다.

“이봐, 노리앙. 이것도 시험인가?”

하이오지가 뻔뻔스럽게 질문을 해 온다. 몇 달 전 일을 생각한다면 시선을 피해도 시원찮을 판에 무슨 친한 사이라도 되는 것처럼 굴고 있다.

하긴 시험치고는 큰 시험이다. 통곡의 계절이 지났다고는 하지만 아직 겨울의 끝자락이 대지에 드리우고 있었다. 북부에서는 겨울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충분한 살상력을 가진다.

“혹독한 시험이군.”

조노량 대신 크리들이 대답한다.

“지랄 같네.”

하이오지는 양팔을 겨드랑이에 낀 채 잔뜩 웅크리고는 주저앉아 버렸다.

저런 자세로는 당장은 좀 낫겠지만 조금만 지나면 더 추워진다. 이런 상황에서는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이 체온 유지에 도움이 된다.

훈련장은 경기장의 기능을 겸하고 있다. 그런 만큼 검투를 감상하기 위한 관중석으로 사방이 둥그렇게 둘러싸여 있다. 족히 이 장(丈)에 가까운 높이다. 그 탓인지 와류가 형성돼 훈련장 가운데에는 작은 얼음 알갱이들이 회오리치고 있다. 바람이라도 멎어 준다면 추위가 한결 덜할 텐데.

대기 중인 사내들은 관중석 담을 등지고 최대한 바람을 피하고 있었다.

끼이익

조노량이 들어온 문 반대쪽에 위치한 육중한 나무문이 서서히 밀려나며 일단의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섰다. 하이오지가 허리를 펴며 일어선다. 지원자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시험 대상자는 불과 열세 명인데, 들어선 인원은 무려 이십여 명이다.

검투반 감독관인 중년의 기사와 종사로 보이는 인원 두 명, 그리고 나머지는 대부분 검투반원으로 보였다. 그들의 손에는 여러 가지 도구가 들려져 있었다. 커다란 바윗덩이 하나 그리고 여러 가지 조잡해 보이는 무기들이다. 바윗덩이를 든 자는 한눈에도 허글러에 비견될 만큼 덩치가 커다랗다. 저런 바위를 둘러메고도 별로 힘든 기색이 아닌 것으로 보아, 힘 역시 허글러에 비견될 만한 자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들어선 자들은 어디를 봐도 절도 있는 동작들이 아니다. 껄렁거리는 걸음걸이를 통해 구경삼아 나왔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자도 있었고, 노골적으로 귀찮은 표정을 짓는 자도 보였다.

“집합!”

조노량 등은 검투반원으로 짐작되는 검은색 가죽옷을 걸친 삼십 대 사내의 지시에 따라 훈련장 중앙에 삼 열로 정렬했다. 아마도 그가 이번 시험을 주관하는 시험관인 모양이다.

정렬하고 보니 너무 적은 인원이다. 하긴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 검투반에 지원하는 자가 많을 수는 없겠지.

기사와 종사 둘은 한편에 서서 그저 지켜만 보고 있다. 직접 관여하지는 않고 참관인이나 감시인 역할만 하는 모양이다.

“조금 지체되었다. 지금부터 영광스런 검투사가 되기 위한 기본 자격을 심사하겠다. 미리 말해 두겠는데, 검투사가 되면 절대 일반 포로로는 돌아갈 수 없다. 죽거나 자유인이 되거나 둘 중 하나다. 둘 다 나쁘지는 않다. 구질구질하게 사느니 전사답게 죽는 거다. 자신 없는 자는 지금이라도 빠져라.”

조금 지체되었다고? 조금 지체된 것치고는 좀 심하지 않은가. 이미 모두들 몸이 얼어붙어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울 지경이다.

삼십 대 사내는 지원자들의 얼굴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빠지는 자는 아무도 없다. 하긴 이제 와서 빠질 거면 애초에 지원하지도 않았으리라.

“좋다. 아주 간단하고 어렵지 않은 시험이니 모두들 합격할 수 있기를 기대하겠다.”

말 그대로 시험은 단순했다.

우선 한 명씩 앞으로 나서 십 장 밖에서 던지는 나무창을 피하는 시험을 치렀다. 미리 준비하고 있는 상태에서, 던지는 것을 뻔히 보면서 피하는 것이니 피하지 못하면 비정상이다. 하지만 의외로 두 명이나 이 심사에서 나가떨어졌다. 추위로 몸이 굳은 탓일 거다.

두 번째는 커다란 바위를 들어 올리는 시험이었다. 기본적인 힘을 테스트하는 것이다.

맨 먼저 지목되어 앞으로 나간 조노량은 바위를 감싸 안고 무게를 가늠해 보았다. 족히 이백오십 근가량?

정상적인 힘으로는 들어 올릴 수 없는 무게다. 잠시 물러난 조노량은 중원에서의 습관대로 육합권의 몇 가지 기수식을 취하면서 몸을 풀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검투반원들과 지원자들이 헛웃음을 흘렸다.

“이봐, 춤이라도 추는 건가?”

그 말에 다시 몇몇이 웃음을 터뜨렸다.

처음 보는 자들은 우스꽝스러울지 몰라도 기수식은 내공을 효율적으로 돌리기 위한 준비 동작이다.

오른손을 앞으로 쭉 뻗어 펼치고 다른 손은 가슴에 모은 자세로 마무리를 지었다. 그러자 짜릿한 느낌과 함께 단전에 모여 있던 기가 혈도를 타고 사지백해(四肢百骸)로 고루 퍼져 나갔다. 준비를 마친 조노량은 다시 바위 앞으로 다가갔다.

“핫!”

기합과 함께 양팔을 넓게 벌려 바위를 감싸 안았다. 팔 길이가 약간 모자란 느낌이다. 같은 무게라도 힘을 효율적으로 쓸 수 없다면 들어 올리기가 어렵다. 제대로 조여지지가 않기 때문이다.

바위를 바꿔 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무조건 들어 올려야 한다.

기를 다리와 허리 그리고 팔에 집중했다. 현재 몸 안에 축적된 내공은 십 년가웃, 이전에 쌓았던 내공을 훌쩍 넘어선 경지다. 단 육 개월 만에 쌓은 내공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천고의 기재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공 부분에 있어서만은 천하의 둔재였는데, 우습게 되어 버렸다.

이대로 계속 수련을 쌓는다면 일류 고수의 경지도 꿈이 아니다. 하지만 현재 수준의 내공은 순간적인 속도와 파괴력을 증가시켜 줄 뿐, 힘을 증가시키기에는 모자람이 많다. 지금은 그것이 문제였다.

“으라차!”

워낙에 동작이 요란하고 기괴한 기합까지 질렀던지라 모두들 호기심에 가득 찬 표정으로 결과를 지켜보았다.

보통 무거운 것이 아니다. 온몸의 진기를 두 팔에 모았다. 하지만 들썩이기만 할 뿐, 쉽게 지상에서 들려지지 않는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으라차차!”

혈기가 얼굴로 치솟고, 이마에는 굵은 힘줄이 돋아났다.

꼼짝도 하지 않았다.

“4반 노리앙, 실패!”

“하하하!”

“크크!”

시험관의 냉담한 선언에 폭소가 터져 나왔다.

- “자연지기가 선천지기와 동일할 수 있다는 말을 들어 보았나? 적어도 난 들어보지 못했다.”

☆ ☆ ☆

이번 시험에서는 조노량을 제외한 나머지 열두 명 모두 무난히 통과했다.

조노량은 얼굴이 조금 달아올랐으나 표정의 변화는 없었다. 저 정도 무게라면 보무관 전체에서도 들어 올릴 만한 사람이 몇 없을 것이다. 이곳 사람들이 비정상적으로 힘이 센 것뿐이다.

세 번째가 이번 시험에서 가장 중요한 대무였다.

검투반원 중 첫 번째 대무 상대로 나선 이는 바위를 둘러메고 들어 온 거한이었다.

시험을 받는 자들 중에서도 가장 덩치가 커 보이는 낯선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뺨에 기다란 검상이 무척 사나워 보이는 인상이다.

검은 가죽옷을 걸친 삼십 대 시험관이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무기를 고르든, 맨손으로 하든 선택하라.”

사내는 거한을 한 차례 둘러 본 후 당당히 말했다.

“맨손으로 한번 해 보겠소.”

시험관이 고개를 끄덕이고 뒤로 물러나자마자 대무가 시작되었다.

뺨에 검상이 있는 사내가 먼저 거칠게 돌진하며 태클을 시도했다. 하지만 거한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내의 힘도 만만치 않은지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는 모습이 보인다. 아니, 그렇게 보였을 뿐이다. 공격을 위한 의도된 물러남이었던가 보다. 거한은 뒤로 한 발자국 뺌과 동시에 두 손을 깍지 낀 채 들어 올려 자신의 허리를 감싸 쥐고 있는 사내의 등판을 그대로 내리쳐 버렸다.

그걸로 끝이었다. 사내의 두 팔은, 거한의 다리를 훑어 내리듯이 힘없이 흘러서 바닥에 퍼져 버렸다. 미련한 자다. 아무리 힘이 좋아도 자신보다 힘 센 존재에게는 힘으로 승부를 걸면 안 되는 법이다.

그 후 다섯 명의 사내가 연속적으로 거한의 주먹에 무릎을 꿇었다.

하이오지가 비릿한 미소를 머금고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조노량은 얼핏 거한의 힘이 빠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이오지에 대한 편견이 굳은 탓이다. 크리들도 아직까지는 나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조노량이 앞으로 나섰다.

여기저기에서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린다. 가장 쉬운 시험에서도 떨어진 왜소한 검은 머리 사내가 주제도 모르고 나섰음을 비웃는 것이리라.

조노량 역시 맨손을 선택했다.

거한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조노량을 바라보았다. 아직 숨결조차 흐트러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두부살은 아닌 모양이다.

조노량은 거한을 향해 씩 웃어 보였다.

거한은 잠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이마를 찡그리며 조노량을 향해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다지 무서워 보이지는 않는다. 자세히 뜯어보니 의외로 순박하게 생겼다.

조노량은 제자리에서 두어 번 껑충껑충 뛰어 본 다음 빠르게 거리를 좁혀 들어갔다. 의외의 빠르기에 거한은 다급히 몸을 틀며 팔을 휘둘렀다. 저런 휘두름은 상대를 타격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단지 상대의 접근을 막기 위한 손짓일 뿐이다.

조노량은 살짝 박자를 죽였다가 거한의 팔이 지나가자마자 거한의 머리에 한 손을 대고 솟구쳐 올랐다. 조노량의 신형이 재주를 넘듯 거한의 머리 위로 한 바퀴 빙글 돌아 착지했다. 모두들 서커스라도 보듯 조노량을 쳐다보았다.

쿵!

모두의 시선이 조노량을 향한 순간, 거한이 나무토막처럼 앞으로 쓰러져 버렸다. 쓰러지는 모습만으로도 그가 완전히 정신을 놓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거한의 머리에 닿은 조노량의 손은 재주를 넘기 위한 지지대 역할이 아니라 타격이었던 것이다. 조노량의 중권이 정확히 거한의 계맥(瘈脈)을 찍고 내려섰던 것이다. 계맥은 일종의 사혈이다. 진기를 주입해 가격하면 자칫 죽음에 이를 수도 있는 위험한 혈도다.

조노량을 향하던 시선이 일제히 쓰러진 거한으로 옮겨졌다.

잠시간 상황파악을 하지 못하던 검투반원들이 부랴부랴 거한에게 다가갔다.

“죽지는 않았습니다.”

“도대체 무슨 수를 쓴 거야? 어떻게 한 방에 구루가 넘어갈 수 있지?”

검투반원들에 의해 거한이 뒤쪽으로 옮겨지자 시험관이 앞으로 나섰다.

“노리앙이라고 했나? 다룰 줄 아는 무기는 있나?”

“칼은 좀 다뤄 보았소.”

“저기서 골라라.”

시험관은 왼손을 뻗어 뒤편을 가리켰다. 바닥에 여러 종류의 무기들이 수북이 뒹굴고 있었다. 검투반원들이 들어오면서 가지고 온 것들이다.

가까이 가서 보니 철퇴와 검, 창 등의 무기와 각종 모양의 방패들이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었다.

아무리 살펴봐도 중원에서 다루던 일반적인 모양의 칼은 없다. 도는 없고 대부분 검이었으며, 그나마 쇠몽둥이에 가깝다. 엄청난 크기의 쇠몽둥이 한 개와 짧은 쇠몽둥이 여러 개. 손가락을 가져다 대고 문질러도 베어지지 않는 것을 날이라고 불러도 되는지 의심스럽다. 조노량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도무지 쓸 만한 무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창을 들자니 창법은 한 번도 익혀본 적 없는 조노량이다. 큰 쇠몽둥이는 들고 휘두를 자신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작은 쇠몽둥이를 택했다. 한 팔 길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 짧은 놈이 무겁기가 단저(短杵)에 가깝다. 그럴 법도 한 것이, 무슨 놈의 검신을 이토록 두껍고 넓게 만든단 말인가? 검을 세 개 정도는 합쳐 놓은 모습이다. 두께가 비슷한 검병과 운두도 도무지 손에 맞지가 않는다.

기본적으로 조노량은 도를 주로 사용해 왔다. 약간 휘어진 양손도가 주무기였다. 양손도에는 운두가 없다. 오히려 거치적거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 개 안 되는 짧은 검 중 운두가 없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조노량이 무기를 골라 오자 심사관이 검투반원 중 한 명을 호명했다.

“포에가, 나서라.”

짧은 갈색머리 이십 대 사내였다. 눈매가 날카롭고 몸이 호리호리한 것이 제법 빠르게 생겼다. 포에가라 불린 사내는 떨어진 무기 중 기다란 창을 하나 들고 앞으로 나섰다.

“포에가는 창을 쓴다. 제법 빠르니 주의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조노량과 포에가가 중앙에 마주섰다. 포에가의 창끝이 하단을 향했다. 그러한 자세는 찌르기보다는 휘두르기 위주의 공격을 즐겨하는 자들의 습성이다. 그리고 창의 휘두르기는 범위는 넓으나, 그만큼 회수가 느리다.

포에가가 조노량을 가운데 두고 돌기 시작했다. 노량은 고개만 돌려 포에가의 신형을 좇았다. 포에가가 조노량의 좌측 뒤쪽에 이르렀을 때 창이 짧은 호를 그리며 다리를 가격해 왔다. 가벼운 견제 동작이다. 조노량은 같이 좌측으로 돌며 한 발자국 물러나는 것으로 간단히 피했다. 그러자 창은 그대로 찔러 들어오다가 우측으로 휘돌아 온다. 빠른 편이다.

조노량은 슬쩍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빨라도 창에는 허점이 많다. 일대일 대결에서 창은 칼을 당할 수 없다. 더구나 포에가라 불린 사내의 창은 중원의 기준으로는 그다지 빠른 속도가 아니다.

조노량은 우측으로 흘러 들어오는 창의 궤도를 정확히 예측한 후, 흘러 나가는 순간을 노려서 창대를 타듯이 검을 밀고 들어갔다.

창은 조노량의 힘과 자체의 관성에 의해 외곽으로 밀리며 주인의 몸통을 내어 줬다. 그걸로 승부는 결정 났다. 조노량의 검은 어느새 포에가의 목덜미에 멈춰져 있었다.

☆ ☆ ☆

포에가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비록 C클래스라고는 하나, 속도에 있어서만은 B클래스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해 왔었다. 그런데 너무나 어이없이 당해 버렸다.

상대의 움직임을 보지 못한 것이 아니다. 뻔히 눈에 보이는데도 맞힐 수도 피할 수도 없었다. 방심했다고 생각해 보려 했지만 첫 번째 견제가 들어갔을 때 이미 만만치 않음을 직감했던 터였다.

검은 머리 사내가 창을 뒤로 물렸다.

창끝에 힘이 들어갔다. 승부욕이 아니라 단지 한 번만, 한 번만 더 확인해 보고 싶었다.

포에가는 간절한 눈빛으로 히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신도 모르게 창끝이 들렸다. 상대방도 검을 한 번 털어 보였다. 피가 묻었을 리는 없지만 포에가의 눈에는 마치 핏방울을 털어 내는 모습처럼 비쳤다.

히든이 고개를 저었다.

“물러나라.”

히든의 시선이 검은 머리 사내에게로 옮겨졌다.

포에가의 창끝이 바닥에 떨어졌다.

“잘 하는군. 차차 검증해 보도록 하지. 들어가라.”

칭찬을 하는 듯하면서도 전혀 감정이 묻어나지 않는 건조한 목소리다.

조노량은 검을 내렸다. 이번 시험에 통과한 것뿐만 아니라 합격되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검투반에서 포에가 대신 다른 사내가 나섰고, 심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예상했던 대로 크리들도 무난히 상대방을 쓰러트림으로써 부반장이라는 자리가 거저 얻은 것이 아님을 증명해 보였다.

뜻밖에 하이오지 역시 압도적인 승리로 시험에 통과했다. 그동안 하이오지를 너무 무시했었나 보다. 그는 이번 시험에서 상당히 뛰어난 기량과 힘을 보여주었다.

하이오지는 상대로 나선 검투반원의 검을 단번에 부러트렸다. 상당한 집중력이다. 상대방의 검을 부러트리는 일은 우연히 이루어지는 경우가 드물다. 내 검이 최고의 힘을 받을 수 있는 시점, 그리고 최대의 타격력을 얻을 지점이 정확히 만나야 상대의 무기를 파괴할 수 있는 것이다.

하이오지는 쓰러진 상대의 목덜미를 걷어차는 것으로 대무를 마무리 지었다. 그 부분에서는 인상이 찌푸려졌지만 대무의 내용은 나무랄 데 없이 깔끔했다. 내공을 찾기 전에 붙었다면 승리할 수 있었을까?

실력과 인간성이 꼭 비례 관계를 형성하지는 않는가 보다.

마지막은 체력 시험이었다. 훈련장을 달려서 도는 간단한 시험이다. 세 바퀴를 돌 때마다 맨 뒤에 처진 한 명씩 탈락시키는 형태였다. 훈련장이 그다지 넓지는 않았지만 경쟁적으로 속도를 내야 했기에 절대 만만한 시험은 아니었다.

지원자들은 자신이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도로 훈련장을 돌았다. 불과 일각도 지나지 않아서 스스로 포기하는 자들이 생겨났다.

하지만 조노량에게는 너무나 쉬운 시험이었다. 경공을 발휘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달리는 것이라면 종일이라도 달릴 자신이 있다.

당연하게도 마지막까지 달린 자는 조노량이었다.

모든 심사가 끝나자 심사관은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중년의 기사와 몇 마디 주고받더니 즉석에서 심사 결과를 발표했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는 시험 과정에서 미리 예상했던 그대로다. 합격자는 총 다섯 명. 크리들, 조노량, 하이오지, 뮤트 그리고 예상 밖으로, 시험 결과가 신통치 않았던 지에도라는 왜소한 체격의 청년이 선정되었다.

합격자와 불합격자 모두 즉시 막사로 돌려보내졌다. 불합격자는 당연히 자신의 반으로 복귀하는 것이었고, 합격자는 개인 사물을 챙겨 오기 위함이었다.

시험은 항상 월에 한 번 있는 휴식일에 치러진다. 검투반 지원을 핑계로 작업을 빼먹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조노량이 막사로 돌아왔을 때는 다들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조노량이 막사 문을 밀고 들어오자 일제히 시선이 집중되었다.

루드가 채 신발도 꿰지 못하고 조노량에게 다가왔다. 그 외 반원들도 우르르 조노량을 둘러쌌다.

“노리앙?”

루드의 목소리에서 작은 떨림이 전해져 왔다. 시험의 결과를 묻고 있는 것이다.

“짐을 챙기러 왔다.”

그 순간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와!”

함께 기뻐해 주는 것이다.

무려 삼 년간 같은 막사에서 부대끼며 살았던 동료들이다.

조노량의 어깨에 손을 얹고 미소를 보내는 사람도 있었고,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툭툭 치는 이도 있었다. 몇몇은 축하해 주면서도 걱정 어린 눈길을 보내고 있었고, 또 어떤 이는 부러운 눈초리를 감추지 못했다. 이미 부상에서 완쾌된 반장 테무아 역시 조노량의 곁으로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축하하네, 노리앙. 부디 최고의 검투사에 올라 자유인이 되기를 빌겠네.”

반장과는 이미 이야기가 되어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고 있기 때문에 형식적인 인사를 건넨 것이다.

단 한 명을 제외한다면 예를 찾아볼 수 없는 검투반의 규칙. 크로아지크 검투반의 명예를 드높인 자는 부상이나 나이 때문에 물러날 때, 아도니아 시민의 자격으로서 은퇴할 수 있다는 규칙을 말하는 것이다. 이십 년이 넘는 기간 동안 공식적으로는 그 규칙을 적용받은 자가 오직 한 명뿐일 정도로 가능성이 희박한 이야기다. 하지만 희망을 말하지 않는다면 너무 슬프지 않은가.

조노량은 굵직한 테무아의 손을 마주잡았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도 반장이었고, 지금도 반장인 테무아. 말도 안 통하고 생김새가 다른 조노량을 아무런 차별 없이 한 식구로 동화시켜 준 테무아. 그리고 조노량의 능력을 객관적으로 인정하고 존중해 줬던 테무아다. 더구나 자신을 이곳에서 빼내 줄 유일한 동아줄이 되었으니 감정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반장……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몸을 다듬으며 기다리겠습니다.”

반장은 무슨 말인지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조노량의 손을 굳게 잡았다.

“대지의 여신 로리안의 축복이 함께하길 바라겠네. 하지만 최고의 채광 장인을 잃게 된 점은 무척 아쉽군.”

조노량도 마주잡은 손에 힘을 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정해진 시간까지 검투반으로 가려면 시간이 촉박했다. 조노량은 서둘러 사물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모포는 루드와 바꿔 주자. 비록 구멍이 뚫리기는 했지만(결국 이런저런 이유로 기우는 데는 실패했다.) 루드의 것보다는 월등한 상품이다. 깔개도 비교적 상태가 양호하니 라솝과 바꾸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양모 방한모와 양말 역시 루드를 줘야겠지.

힘이 약한 것을 제외하고는 하이오지와 너무도 닮은꼴인 제호프가 침상 앞에 서서 껄떡거리고 있다. 하지만 제호프에게까지 줄 것은 없다. 조노량은 제호프의 간절한 시선을 외면하고 내의를 벗어 젝에게 건넸다. 낡은 것이지만 한 겹이라도 더 입으면 다음해 통곡의 계절을 버티는 데 도움이 된다. 젝은 슬픈 눈으로 내의를 받아들었다. 소리 내어 고맙다는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고마워하고 있는 것을 안다.

어차피 검투반으로 가면 새것을 지급받게 된다. 아까워할 이유가 없다. 조노량은 꼭 필요한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주거나 바꿔 주었다. 이것저것 정리하는 데도 깨나 시간이 걸렸다. 이제 가봐야 할 때다.

조노량은 짐을 꾸린 후 이들의 습관대로 일일이 악수를 건넸다. 정중하지는 않지만 서로의 체온을 느낄 수 있어서 읍보다 오히려 정감이 있다.

이들 중 절반은 조노량이 포로로 잡혀 오기 전부터 이 막사를 지키고 있던 자들이다. 조노량의 어깨를 두드리고 있는 라솝 같은 자는 수용소에서 청춘을 다 보내고 이제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었다.

조노량은 처음 이 막사에 들어섰을 때를 기억했다. 전투 중 입은 부상이 완쾌되지 않아 다리에 붕대를 동여맨 상태였다. 잘라내는 것이 정상일 정도로 큰 부상이었지만 신기하게도 무척 빠르게 완치되었다. 지금은 흉터조차 희미하다.

조노량이 시험에 합격했음을 기뻐해 주면서도, 한편으론 안타까움을 뒤로 감추고 있는 이들. 바로 이들이 말도 통하지 않고 생김새도 다른 조노량의 의원이 되어 주었고, 가족이 되어 주었다.

조노량의 시선이 오랜 동료들의 얼굴을 천천히 훑었다.

조노량을 둘러싸거나 혹은 침상에 앉은 채로 미소를 보내는 이들과,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또 다른 이들의 얼굴을 말이다. 가장 가깝게는 갱도의 어느 구석에서 썩어 가고 있을 칸의 얼굴처럼.

조노량이 중고참이 되기까지 많은 이들이 막사를 떠났다. 병으로 죽거나 사고로 죽었고, 또 강한 자들은 조노량이 앞으로 생활해야 할 검투반으로 옮겨 가서 죽었다. 부반장도 벌써 두 명이나 갈렸다. 다행히 세 번째 부반장은 쉽게 막사를 떠날 것 같지 않다.

허글러가 천천히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허글러가 다가오자 조노량을 둘러섰던 반원들이 자리를 양보해 준다. 허글러의 높은 시선이 조노량의 눈을 내려다보았다.

“노리앙, 너는 멋진 사내다. 헤르모스의 눈길이 네 머리 위에 머물길 바란다.”

전투의 신 헤르모스. 역시 허글러다운 인사다.

조노량이 먼저 오른손을 내밀었다. 조노량의 두 배쯤 되는 허글러의 손이 마주 뻗어 온다. 하지만 허글러의 손은 조노량의 손을 지나쳐 손목을 움켜쥐었다. 조노량은 순간적으로 흠칫 놀랐으나 곧 허글러의 손목을 마주잡았다. 일견 서로의 완맥을 제압한 모양새다.

“전사는 이렇게 인사한다.”

허글러는 조노량의 손목을 힘차게 잡아주고는 손을 풀었다.

“부반장…….”

“사내의 작별은 짧을수록 좋다.”

말과 함께 허글러는 뚜벅뚜벅 걸어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둘의 인사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4반에서 가장 말이 짧은 두 사람의 인사다. 이 정도로도 충분했다.

조노량은 왼쪽 어깨에 멘 단출한 꾸러미를 한 번 추스르고는 막사의 문을 밀었다. 북국의 차가운 바람이 조노량을 반기고 있었다. 삼 년 전 봄, 처음 이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와 똑같은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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