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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159화 (159/227)

#159화

아렌의 어려운 부탁에도, 두 기사는 그저 인상만 조금 찌푸렸을 뿐이다.

“어차피, 네가 그런 놈인건 옛적부터 알고 있으니 뭐.”

“아렌 공이 절 험하게 다루는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니까요.”

둘은 한숨 섞인 승낙을 했지만, 모두를 안쪽에 내보낼 필요는 없다.

아렌이 둘을 고른 데에는 이유가 있다.

말단 기사를 내보내기보다는 고위급 기사를 보내는 것이, 만약의 사태가 일어나도 사기 진작에 더 도움이 된다.

이런 자리일수록 높은 지위의 기사가 본보기를 보여야 하기에. 그건 발커스, 더글라스도 이해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기사 여럿이 필요 없는 이유는, 상대가 싸우지 못하는 꼬맹이 한 명 뿐이라는 점과, 아렌의 언령에 닥치는 부담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서였다.

낮안개 기사단장 발커스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그 꼬마를 처리하는 게 목적이죠? 다람쥐를 잡는데 굳이 소잡는 칼을 가져올 필요는 없겠죠. 제가 가겠습니다, 더글라스 경.”

“허, 안될 소리를. 그럼 발커스 경은 다람쥐 잡는 칼이란 뜻인가? 말도 안 되지. 그 이유대로라면 발커스 경도 나서선 안 됩니다.”

발커스와 더글라스의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하지만 둘 모두 다른 기사보다 상급의 기사가 나서야 한다는 데에서는 의견이 일치했다.

“둘 다 싸우지 말아요. 제가 정할 테니까.”

중재를 맡은 아렌. 조금 고민 하는 듯했지만, 실은 이미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려놓고 있었다.

“그럼, 발커스 경에게 부탁해도 될까요?”

“…아렌. 나는?”

더글라스가 대놓고 서운한 기색을 내비쳤다.

“어쩔 수 없어요. 기사단장은 대체할 수 있지만, 검성에 버금가는 실력의 근위기사는 대체할 수 없으니까요.”

그 말만으로 더글라스를 완전히 납득시킬 수는 없겠지만, 지금 시간을 들여 차근차근 설득할 시간은 없었다.

지금도 제이드는 한 걸음 한 걸음 남하하며, 죽음의 지대를 남쪽으로 앞당기고 있을 테니까.

아렌은 왕의 길을 통제하던 병사에게 물었다.

“지금 사건의 중심지에서 어느 정도 거리까지가 봉쇄된 거죠?”

“…그건, 왜 물으시죠?”

“제이드는 남쪽으로 향하고 있으니까요. 아무리 걸어간다지만, 서로 나란히 남쪽을 향하면 죽음의 원 안에 머물러있는 시간이 더 길어요. 왕의 길 옆으로 빙 돌아 남쪽에서 북으로 향한다면, 죽음의 원 안에 있는 시간도 더 줄일 수 있겠죠.”

아렌의 방법이 얼마만큼의 시간을 줄여줄지는 모른다. 하지만, 두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이상 아주 조금이라도 시간을 줄일 수 있다면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제국군은 예상지점을 중심으로 반경 2km를 차단선으로 잡고 있습니다. 칼처럼 명확한 것은 아닙니다만, 대략 2km 지점부터 한기를 느끼며 1km 안쪽부터 위험하다 알려져 있습니다.”

“생각보다는 범위가 작군요.”

물론, 저 범위 밖에서 안쪽을 노릴 수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의 두 부하가 사지로 걸어가는 것은 아닌지, 불안한 레온나토스였다.

“아렌. 특별한 계획은 있나?”

“먼저, 다른 기사들의 외투와 망토를 빌려 모두 걸칠 거에요. 옷을 몇 겹이나 겹쳐 입는 거죠.”

“그건 이미 시도해 본 모양이지만. 그리고?”

“그리고, 횃불을 여러 개 준비해 들고 가는 겁니다. 바람이 거의 불지 않는다면, 횃불로 약간이나마 온기를 얻을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고작 추위를 좀 더 막는 정도로 제이드를 잡을 수 있었다면 이미 제국군이 그리 했을 것이다.

황자와 병사들을 설득할 또 다른 요인이 필요했다.

“제이드를 온천 지대에서 만났을 때는 저희도 무사했습니다. 협곡을 지나올 때도 그랬고요. 그 능력의 세기를 자유자재로 조종할 수 있다면, 가장 약한 순간을 점괘로 파악하는 것도 가능하겠죠.”

“하지만 아렌! 네 점괘는-”

레온나토스는 하려던 말을 안으로 곱씹었다.

아렌의 점술이 예전만하지 않다고 알고 있으니, 사실상 자살임무나 다름없다고 여긴 것.

‘문제는, 언령이 얼마나 효과 있느냐인데.’

선페일 영지에서 남하하기 직전에도, 아렌은 먼저 언령을 걸었다.

언령의 내용은 ‘제이드의 능력에 피해자가 더이상 생기지 않을 것.’

하지만 그 언령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분명, 제이드도 운명석 계약자였기 때문이겠지. 혹시나 했지만, 역시 계약자구나.’

먼젓번의 언령의 주체가 운명석 계약자인 제이드였기에 통하지 않았다면, 이번에는 주체를 발커스와 아렌으로 한정 지으면 된다.

적어도 발커스는 운명석 계약자가 아니고, 언령이 적용될 대상도 불특정 다수가 아니라 두 명으로 제한하면 언령의 반동도 그만큼 줄어들 테니까.

불안요소가 있다면 그건 아렌 자신이 언령의 사용자면서 운명석 계약자라는 점이었다.

“…하지만 아렌. 이 경우 네가 직접 갈 필요는 없지 않은가?”

레온나토스의 지적에 아렌은 고개를 저었다.

“제 점괘라 해도 당연히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런 곳에 발커스 경 혼자 보낼 수는 없습니다. 그게 제 나름의 각오입니다. 잘 된다면 둘 다 살겠고, 그게 아니라면 둘 다 죽겠죠.”

“…….”

레온나토스는 설득을 단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렌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느긋하게 인사를 나눌 시간도 없었다.

발커스와 아렌은, 곧바로 길 옆을 벗어나 크게 반원을 그리며 남으로 향했다.

길을 중심으로 2km 반경의 원이 위험지대이니. 제이드를 앞서가려면 길 옆을 크게 도는 수밖에 없었다.

말 위에서, 혀를 씹는 것을 조심하며 아렌은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기사단장 발커스는 유랑족 제이드에게 얼어 죽지 않는다.”

“비서관 아렌은 유랑족 제이드에게 얼어 죽지 않는다.”

“기사단장 제이드는-”

두 마디를 번갈아 가며 말하는 아렌.

한 문장에 두 명의 이름을 모두 넣는 것은 일부러 피했다.

혹시나 아렌에게 언령이 적용되지 않는다면, 적어도 발커스라도 살아남으라는 아렌 나름의 배려였다.

말로 달리면 금방인 거리였다.

왕의 길 주위 곳곳을 통제하고 있는 제국군을 지나쳐 남쪽 방면 왕의 길로 접어든 발커스와 아렌.

아렌은, 곧바로 미리 준비해둔 횃불을 꺼냈다.

주변의 나무를 잘라서 만든 삼지창 모양의 거치대에는 한 번에 세 개의 횃불을 걸어둘 수 있었다.

갑자기 횃불이 모두 꺼지지만 않는다면, 제이드에게 향하는 동안 약간의 보온 대책은 될 것이다.

가져온 옷을 모두 껴입으며 횃불에 불을 붙이는 발커스.

“…젠장. 전장에서 죽는 상상이라면 가끔 해봤지만, 설마 가을에 얼어 죽는 걱정을 할 줄은 몰랐습니다.”

“제가 발커스를 지목한 것, 원망하나요?”

“됐고, 이걸로 아트레움 궁전에서 있었던 빚은 모두 갚은 겁니다?”

발커스는 아직도 6년 전 아트레움 궁전에서 아렌을 끝까지 지키지 못한 것에 부채감이 있었다.

“…그거, 아직 기억하고 있었어요? 난 벌써 다 잊은 줄만 알았는데.”

“아렌 공에겐 별것 아니겠죠. 전 아직도 가끔 꿈에도 나온다고요.”

“…이번 일이 성공하면, 오늘 일도 꿈에 나오겠죠. 부디 그러길 빌자고요.”

꿈도 살아있어야 꿀 수 있다.

발커스와 아렌은, 각오하고 왕의 길 북쪽으로 한발씩 내디뎠다.

잠시 뒤, 차가운 냉기가 둘의 피부를 꿰뚫었다.

*****

제국의 제1 황자 라이안은, 손님의 자격으로 벌써 몇 달째 교국에 머물러 있었다.

드러난 가장 유력한 황자이기도 하고, 손님 자격으로 와 있는 만큼 교국에서도 따로 축객령을 내리지는 않았다.

교국으로서도 이웃 대국의 차기 황제와 면을 트는 것은 그리 나쁘지 않은 일.

교국의 배려와 의도에 의해, 라이안은 교국의 비원궁에 머무르며 그들 사이에 깊이 스며들어 있었다.

“…전하. 교국과 관계를 충분히 다진 것 같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주신 임무가 너무 쉽다고는 하나, 이곳에 더 머물러 있다 하여 다른 성과가 더 생길지는 의문입니다.”

“교국에 막연한 선입견이 있었는데, 역시 사람은 직접 겪어봐야 하는군. 자신의 교리를 멋대로 설파하지는 않으니 어울리기 쉬워. 태양교와는 다르군.”

참모가 걱정스레 진언했지만, 라이안은 딴소리였다.

“전하.”

“미안하군, 무시하려던 건 아냐. 하지만 비원궁에 온 건 이번이 처음이란 말일세. 처음 온 곳이라 꽤 신선하니, 나도 모르게 오래 눌러앉게 돼.”

“그 마음은 이해합니다만-”

“아니. 자넨 이해 못하네.”

“…?”

라이안은 비원궁의 난간에 기댄 채 아래를 내려다봤다.

아래로는 거센 파도가 몰아치고 있었고, 파도는 거대한 사원을 지탱하고 있는 건 송곳처럼 높이 솟아오른 바위기둥 아래를 때리며 산산히 부서졌다.

“참, 인상적인 건축물이란 말야. 전에는 그저 과장이라고만 여겼는데. 실제로 보니 알겠군. 이건 인간이 지을 수 있는 건축물이 아냐.”

혹시 황자가 종교에 눈을 뜨는 건가, 참모는 걱정했다.

“아아, 걱정 말게, 전에도 말했듯 종교에 빠질 일은 없을 테니.”

“…송구스럽습니다, 전하.”

속마음을 들킨 듯 뜨끔한 마음에 참모는 얼른 고개를 숙였지만, 동시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전에 그런 말씀을 하신 적 있나? 들었다면 잊지는 않을텐데.’

종종 라이안은 영문 모를 말을 하곤 했다. 참모는 이번에도 의문을 머리 한편으로 던져버렸다.

“경치는 어찌 마음에 드시는지요?”

뒤에서 들려온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라이안이 돌아봤다.

테라스 난간에 선 라이안에게 다가온 건, 흰색 주교의 복장을 한 은발의 여인이었다.

그녀를 보자마자 라이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당신, 어딘가에서 본 적 있는 것 같은데.”

“글쎄요. 전하께서 비원궁에 계신 시기가 꽤 되니. 그 사이 지나면서 뵈었을지도 모르죠.”

여인은 살짝 무릎을 굽히며 예를 갖췄다.

“그간 인사가 늦었습니다. 진리성전의 아홉 번 째 자리에 있는 주교 아르테라 합니다.”

“…주교? 이렇게 젊은데?”

그녀의 인사에, 라이안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찾아오지 않았는데, 이렇게 인사라니. 내게 볼일이라도 있는 건가?”

그녀의 인사에 황자는 묘한 표정을 짓는다.

마치, 항상 지나던 길 옆에, 처음 보는 샛길이 나 있는 것처럼.

“그동안은 업무가 바빠 미처 인사를 드리지 못했기에, 이렇게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결례였다면 용서해주시지요.”

“신경 쓰지 않네, 주교 아르테.”

아르테는 생긋 웃으며 옆에 있는 참모에게도 꾸벅 목례했다.

아르테는 운명석 계약자다. 사람의 마음을 모두 읽을 수 있지만, 황자 라이안의 마음은 읽을 수 없었다.

라이안 역시 운명석 계약자라는 추론이 가능한 이유다.

하지만, 설령 라이안의 마음은 못 읽더라도 그와 항상 붙어 다니는 참모의 마음은 읽을 수 있다.

자신의 본진이기도 하니, 아르테는 모험을 걸어 라이안에게 접근했다.

그때 라이안이 물었다.

“그런데 자네, 혹시 제국의 열두 번째 황자의 비서관을 알고 있나? 아렌이라는 이름인데. 아직 어리고 건방진 녀석이지.”

“유명하신 분인가요? 주교가 된 후 비원궁 밖을 나가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군요.”

“…그런가? 어쨌든 반갑군. 자네를 만난 건 이번이 처음이야.”

라이안은 묘한 웃음을 지으며 아르테의 눈을 응시했다.

“앞으로 잘 부탁하네, 주교 아르테.”

황자의 검은 눈이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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