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아렌과 레온나토스, 기사들은 왕의 길 위를 무겁게 내려갔다.
간간이 길 아래에서 현황을 보고해왔고, 왕의 길과 특히 더 가까이 있었던 마을 하나가 초토화되기도 했다고 한다.
미처 대피하지 못한 주민들만 해도 30명, 집계되지 못한 피해자까지 포함하면 운명석 계약자 제이드로 인한 피해는 더 늘어날 전망이었다.
“…세상에. 내가 산맥 남부에 재앙을 불러온 격이야!”
“아닙니다, 전하. 자책하지 마시지요. 그때 저희에게 그가 운명석 계약자임을 알만한 수단은 없었습니다.”
“…그래. 위로 고맙네, 아렌.”
아렌의 말은 황자를 위로하기 위함이었지만, 실은 자신도 그게 사실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방법이 없었다니, 말도 안되는 소리지.’
제이드가 운명석 계약자라면 필연적으로 몸 어딘가에 운명석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그를 데리고 오면서 간단한 몸수색은 진행했지만, 어디까지나 형식상 했을 뿐. 수형자의 몸 수색을 하듯 더 샅샅이 뒤졌어야 했다.
그럼에도 운명석을 삼키거나 했다면 못 찾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그 시도조차 하지 않은 것은 분명 문제가 맞다.
‘만약, 그렇게 했다면 우리조차 몰살했을까?’
레온나토스와 아렌이 제이드를 전혀 경계하지 않은 이유에는, 그동안 제이드에게 어떤 위협도 느끼지 않은 것이 컸다.
‘물론, 우리가 무사해야 녀석도 안전하게 산맥을 넘어갈 수 있으니까 그런 거겠지만.’
지금 왕의 길 인근의 시설과 마을에 대대적인 소개령이 내려졌다. 제이드가 지금도 길 위에 있다면 기사단이 따라잡는 건 시간문제다.
문제는, 제이드에게 접근할수록 그 능력의 범위 안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
“…….”
평소라면 산적도 적군도 없는 영토 안 관도 위다. 별다른 경계 없이 지날 수 있는 길이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언제 죽음의 사정권 안에 들어갈지 모르는 일.
기사들은 침묵한 채 조심조심, 말을 전진시켰다.
선페일 영지에서 가까운 길의 모습은 이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기사들이 말을 타고 반나절쯤 달렸을 때.
“-여기부터인가?”
레온나토스가 탄식하며 말했다. 그의 말처럼, 길 양옆으로 보이는 모든 초목들이 갈색으로 시들어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었다.
순식간에 얼어붙은 뒤, 그대로 녹은 흔적이었다.
말들조차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했는지 갈변한 수풀의 경계 안쪽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았고, 기사들 역시 머뭇거리는 건 마찬가지였다.
자신들의 안위도 걱정이지만, 저 안에 들어갔을 때 레온나토스를 지킬 수 있는지에 대한 걱정이 더 컸다.
그때, 아렌이 말에서 내렸다.
“…아렌?”
“개미가 줄지어 다니고 있어요.”
“개미?”
“네. 지표면 위를요.”
이곳이 죽음의 땅이었던 것은 맞지만, 지금은 아니다. 적어도 지표면의 개미가 활동할 정도는 된다.
아렌은 말에서 내린 채 수풀이 갈변한 왕의 길 안쪽으로 한걸음 내디뎠다.
한때는 죽음의 땅이었지만 지금은 다만 온후하기만 했다.
“지금은 괜찮습니다. 제이드가 능력을 발현시킨 게 적어도 이틀 전이니, 계속 걸어갔다면 여기보다 한참 앞에 있겠죠. 이 부근은 안전할 겁니다.”
“…하지만 아렌 공. ‘언제부터 위험한지’에 대한 지표는 없지 않습니까? 이미 주변의 수풀이 모두 죽었으니까요.”
낮안개 기사단장 발커스가 지적한 대로였다.
“그건, 어쩔 수 없죠. 갑자기 추워지는 것을 신호라고 인식하는 수밖에.”
“…아티스의 옛 궁이 생각나네요. 이런 꺼림칙한 경험은 다시 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건 아렌도 마찬가지.
아무리 정예인 기사들이라 해도, 이런 실체 없는 위협에까지 능통하지는 않았다.
자칫하면 제국에서도 손꼽히는 정예병을 떼죽음시킬지도 모르는 일.
하지만, 하는 수 없었다.
기사들은 레온나토스를 감싼 채 천천히 왕의 길을 걸었다.
언제고 상황이 급변하면 곧바로 뒤로 물러설 태세를 갖춘 채.
얼마나 걸었을까.
곧, 기사단의 눈에 또 다른 참상이 보였다.
길 한편에 아무렇게나 방치된 마차와 그 위에 옷깃을 아무렇게나 푼 채 죽어있는 행상인.
참혹한 광경에 레온나토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또 옷을 벗으려 했군. 얼어죽는 와중에도.”
“네. 설원의 유랑족들은 종종 일어나는 일이라고 했지만, 역시 익숙한 일은 아니에요. 산맥 남쪽에도 동사자는 존재하지만, 이런 경우는 드무니까.”
충분히 체온이 내려간 상태에서 어떤 조건이 맞아 착란 효과가 생긴 것이겠지만, 그것 또 한 운명석에 의한 능력에 포함되어있는지, 아니면 단지 우연히 착란을 잘 발생시키는지는 알 수 없다.
혹시 모르니, 아렌은 기사들에게 옷과 갑옷을 끈으로 단단히 동여매라고 명령했다.
끈으로 꼬아서 쓸만한 풀은 지천에 널려 있었다. 갈색으로 말라 죽어, 길 옆으로 축 늘어선 수풀들. 조금 비벼서 묶어주기만 하면 즉석 끈으로 손색없었다.
이렇게 해도 벗으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벗을 수 있겠지만, 조금이라도 더 손이 간다는 것이 중요했다.
옆 사람이 착란에 빠진 동료를 구해줄 시간이라도 벌 수 있을 테니까.
잘 갖춰입은 갑옷 위를 풀로 볼품없이 묶은 것이 보기는 좋지 않았지만, 갑자기 목숨을 잃는 것보다는 낫다.
기사들은 기꺼이 감내했다.
말에서도 내린 채 주변의 변화에 집중하며 아래로 내려가던 중.
-후욱!
층을 이룬 것 같은 한기가 갑자기 들이닥쳤고, 말들도 놀라 발을 굴렀다.
아렌은 곧바로 알아차렸다. 여기부터가, 제이드의 영향권 안이라는 걸.
“…고작 이 정도인가? 추울 뿐이네!”
기사단장인 발커스가 허세부리며 말했다.
그의 말대로 지금 당장은 견딜 만했다. 확실히 말하자면 산맥 너머의 설원보다도 춥지 않은 날씨.
하지만 고작 몇 발자국 차이인데도 온도의 변화는 확연했고, 그 변화가 끝이 아니라는 것도 확실했다.
“그래, 한기가 느껴지는군, 발커스 경. 그런데 이만한 추위를 못 눈치채는 게 가능한가? 온천지대의 원주민들은 이 고작 추위일 뿐이었는데 제대로 대항하지도 못했어.”
레온나토스의 의문에 답한 건 아렌이었다.
“아마, 우리가 제이드의 능력권 밖에 있다 들어와서 더 명징하게 느껴지는 걸 겁니다. 그리고, 이게 산맥 북쪽의 상황이었다면 원래도 원체 추운 곳이니 갑자기 추워져도 별로 경계되진 않을 테고요.”
눈의 사생아들의 방심과 서서히 목을 조여오는 심부온도가 이들의 죽음을 앞당겼다.
이제 왕의 길 위에는 하얀 서리가 잔뜩 껴 있었다. 저 길 앞에 모든 사건의 원흉, 제이드가 있을 터.
기사들은 검집에 손을 가져다 댄 후 조심스레 안쪽으로 움직였다.
자꾸만 뒷걸음치는 말의 고삐를 당기며 힘겹게 전진하는 기사들.
“잠깐, 잠깐!”
그때, 수풀 옆에서 누군가 달려오며 외쳤다.
키 크고 작은 두 병사는, 제국군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어느 영지의 분들인지는 모르지만, 이 앞은 위험합니다! 부디 다른 길을-”
이 길을 통제하고 있었던 병사는, 숨이 멎을 것처럼 놀랐다.
제국 전역에까지 그 위엄이 퍼진 낮안개 기사단, 그리고 그들의 주군인 유력한 황태자 후보, 12번째 황자인 레온나토스를 알아본 것이다.
“-전하! 어찌 이곳에…?”
“지금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어서 고하라. 이 앞이 위험하다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두 병사 중 키 작은 쪽이 황망히 말했다.
“네, 네. 그렇습니다. 이 앞쪽으로 극한의 냉기가 모여 있어 길을 통하는 건 위험합니다. 사태가 해결될 때까지 이 주변은 봉쇄입니다.”
“그렇군. 수고가 많네. 하지만, 어떻게 자네들은 냉기가 모여있는 곳과 아닌 곳을 구분하지? 직접 가보지는 못했을 것 아닌가.”
“…실은, 아직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초기에 몇몇 희생이 있었습니다. 그 이후에는, 사육한 비둘기를 쓰고 있습니다.”
그들이 설명한 방법은, 운명석 계약자가 있을 거라 예상되는 방향으로 비둘기를 날려 보내는 것이었다. 비둘기는 일정 거리를 날았다 돌아오게 교육받았고, 다시 돌아오지 않으면 가까이에 운명석 계약자가 있다는 계산이었다.
‘-과연.’
그 과정에서 숱한 비둘기가 희생됬겠지만, 아렌이 주목한 건 다른 부분이었다.
‘비둘기를 원래 그런 식으로 사육하나? 마치 이런 일이 일어날 걸 마치 예측이라도 한 것 같군.’
그건 아마 사실일 것이다.
콕 짚어 이런 능력을 상정한 건 아니겠지만, 언젠가 이런 재앙에 가까운 능력자가 눈을 뜰 걸 대비해, 여러 준비를 해둔 건 사실이겠지.
사경을 헤맨 병상 위에서조차 제국의 미래를 고려했던 브륀할트 8세였다.
‘황제라면, 능히 그럴 만하지.’
“…혹시, 자네들에게 또 다른 대책은 있나?”
“그건… 딱히 없습니다. 길 위에 장애물을 설치하는 것도 고려했지만, 그랬다가 오히려 길 위를 벗어나면 진로 예측이 더 힘들어지기에… 다행스럽게도 그가 지금 두 발로 걷고 있고, 일정하지만 그 속도가 꽤 느리다는 점입니다.”
레온나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밖에. 고작 열 살 남짓의 소년일 뿐이니. 계속 걸을 체력은 충분하지만 보폭이 크지는 않을 거야.”
“…그걸 전하께서 어떻게 아십니까?!”
병사들은 화들짝 놀랐다.
멀찍이 길을 봉쇄하고 물러날 뿐, 소년의 실체를 본 사람은 제국군 안에 없었다.
죽음의 지대는 소년에 가까워질수록 더 짙어졌고, 소년을 눈으로 볼 때쯤 되면 이미 죽는 것이 정상이니까.
“실은-”
레온나토스가 병사에게 사실대로 고하려는 찰나였다.
“-왜냐면, 우리가 산맥 북부에서부터 그자를 쫓고 있었기 때문이죠.”
“역시! 전하께선 이미 위협을 알고 막으려 하고 계셨군요!”
감탄하는 병사들.
레온나토스는 험악한 눈으로 아렌을 돌아봤다.
완벽한 기만이었고, 아렌도 알고 있었다.
‘…이게 올바르지 않다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사건은 이미 벌어졌다.
정당한 책임을 지는 것 역시 하나의 매듭을 짓는 일이고, 양심에 맞는 행동이다.
아렌은 양심을 저버리고 실책을 오히려 기회로 삼기로 작정했다.
이 위기를 제대로 수습한다면 이 실책은, 정반대로 공로가 된다.
이미 길 위에서 죽은 자들이 적지 않다. 진실을 밝혀서 그들을 살릴 수 있다면, 아렌은 얼마든지 진실을 말했을 것이다.
아렌이 말했다.
“이 앞이 위험하다 하셨죠. 어느 정도까지 가봤죠? 접근을 시도해본 적 있나요?”
“그게… 옷을 아무리 껴입어도 옷 사이로 한기가 스며든다 하더군요. 더 무서운 건, 어느 정도 지나면 더이상 추위를 느끼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더위를 느끼고, 더위를 참지 못해 옷을 풀어 헤치게 된다고요.”
아렌과 병사들이 산맥 너머에서 본 증상과 완전히 같았다.
선페일 영지에서 출발할 때, 아렌은 제이드에게 언령을 걸었다. 그가 더이상의 희생자를 내지 못한다고 점술의 형식으로 말했지만, 그는 보란 듯 새로운 희생자를 내고 있었다.
‘…내가 멍청했어. 언령이 운명석으로 얻은 능력이라면, 제이드에게 통할 리가 없는데.’
운명석을 통해 얻은 능력은 같은 운명석 계약자에게 ‘직접적으로’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제이드의 추위를 아렌도 느끼는 것처럼 주변 환경을 바꾼다면 능력자에게도 ‘간접적으로는’ 통하게 할 수 있다.
‘…만약, 내 언령으로 저 맹추위를 상쇄시킬 수 있을까?’
확신은 없다. 하지만 다른 방법도 없었다. 이대로 그를 황도로 보낸다면, 인명피해가 문제가 아니라 제국의 존망조차 위태로워진다.
“…더글라스, 발커스.”
“뭐냐, 아렌.”
“말하시죠, 아렌 공.”
아렌은 황자의 근위기사와, 직속 기사단장 둘에게 물었다.
“둘 중, 제국과 전하를 위해 목숨을 걸어줄 사람 있어요?”
아렌의 말에 두 사람의 표정이 동시에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