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닮은 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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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비뉴 황궁.
“······.”
“······.”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며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가 한쪽이 고개를 돌리고 묻는다.
“다시 말해보라. 뭐가 어떻게 됐다고?”
그의 시선 끝엔 엎드린 병사가 입에서 하얀 김을 뿜어내고 있었는데, 아직도 숨이 찬지 헐떡였다. 말에서 내린 후 전력으로 달려와서 그런지 폐가 튀어나올 것 같지만 자신의 임무를 다한다.
“사라졌습니다. 그 어디에서도 태자님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거짓말을 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전하는 말 자체가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
집정관은 어금니를 악물고 옆을 본다. 은사 역시 조금 전 도착해서 믿기지 않는 얘길 했다. 어쩌면 태자가 배신할 수도 있으니 전권을 넘겨받으라고. 그분께서 그리 말씀하셨다고.
“허..”
그런데 전권이고 뭐고, 콩가에서 출발했다던 태자의 군대가 감쪽같이 사라졌단다. 무려 4만 명이 말이다.
“배는?”
“그것이.. 비 때문에 시야가 좋지 못한 것을 고려해도 그렇게 많다면 분명 보여야 하는데..”
배도 없다.
그 배에서 내린 4만의 병사도 없다. 이게 말이 되는가?
집정관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병사를 빤히 내려보는데, 옆에서 은사가 말했다.
“벨버른 쪽으로 숨어들었을지도 몰라.”
“벨버른?”
“그래, 시간을 벌면서 기회를 보려는 거지. 수도가 텅 비기만을.”
확실히 가능성 있는 얘기였다. 하지만 그건 적군으로 가정했을 때 할 수 있는 생각 아닌가? 에비뉴를 돕겠다고 찾아온 태자다. 그들이 사라졌는데, 의심부터 하는 것은 아니 될 말이었다.
“그 마왕군은 어디에 있나?”
집정관의 물음에 병사가 빠르게 답했다.
“수도 북쪽 이틀 거리의 쟈스민트 지역에 웅크리고 있다고 합니다.”
“신성국 군대는?”
“놈들과 반나절 거리에서 대치 중이랍니다.”
“으음..”
집정관이 척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이건 마치.’
포위된 형국 아닌가? 전체적으로 보면 그러한데, 더 자세하게 들여보면 수도에 징집한 약 5만의 병사가 빠져나가길 사방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노리고 있는 것 같은데?’
병력을 황제에게 보내면 수도가 털리고, 그렇다고 갖고 있으면 황제가 위험하다. 태자가 이끌고 온 콩가의 군대가 합류한다면 모든 걱정이 해결되겠지만, 어째 돌아가는 꼴을 보니 그조차 믿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강에서 수도까진 말로 엿새 거리.
서남쪽으로 향했다면 벨버른이 나올 것이고, 동쪽 어딘가에 숨었다면 수도를 향하는 것이리라. 4만 대군이 행군하려면 배 이상이 걸릴 것이니 아직 멀리 가진 못했을 터!
‘진정, 폐하께 등을 돌리려는 건가?’
이건 반역이다. 역모였다. 그것도 나라가 전쟁하는 도중에 뒤통수를 치는 아주 악질적이고 잔인한!
“너는 바로 가서 전하라. 강변부터 시작해서 수도에 이르는 모든 길을 샅샅이 수색해 흔적을 찾으라고.”
“네, 알겠습니다!”
하필 에비뉴 전역에 비가 오고 있었다. 듣자하니 이 비구름은 제국까지 덮고 있다고 하는데, 그 때문에 말 발자국이나 대규모 인원이 이동한 흔적이 쉽게 지워져 버렸다. 멀리서 움직이면 비에 가려 눈에 띄지도 않았고.
“모든 방위를 꼼꼼하게 살펴야 할 것이야!”
“예! 그리 전하겠습니다!”
병사가 나가자 집정관이 은사에게 물었다.
“그분께선 어떻게 확신하신 거지?”
“감이겠지.”
“으음.”
못 들었다면 모를까 폐하의 명령을 듣고 나니 자꾸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거긴 어때? 한 달 정도 지원군 없이 버틸 수 있을까?”
“길어야 보름이야. 그 이상이면 힘들어질 거다. 긴 전투로 병사들이 많이 지쳤어. 칼을 쥘 힘도 없겠지.”
보급도 문제고, 제국이 가만히 놔둘 이유가 없다. 소문에 의하면 이미 제국 쪽 동맹국에서 대규모 군사가 출정했다고 하니 시일을 맞추지 못하면 에비뉴 군은 그대로 쓸려버릴지도 몰랐다.
전쟁은 타이밍 승부다. 앞으로 일주일 안에 수도에 징집해둔 병사를 보내야 한다는 건데,
“환장하겠네.”
수도 인근에 세 무리의 그 속을 알 수 없는 자들이 있었으니,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는 집정관이었다.
“병력을 쪼개볼까?”
“절반만 우선 보낸다는 건가?”
“그래.”
2만 정도로 폐하를 일차로 지원하고, 나머지로 수도를 지키다가 돌아가는 상황을 봐서 보내면 어찌어찌 될 것도 같다. 태자가 변심할 거란 건 어디까지나 심증뿐이니까. 그동안 더 많은 병사를 징집할 시간도 벌면 좋고.
“나쁘진 않군.”
“일단 돌아가는 상황을 보지.”
“그러자고. 나도 십위에게 알아보라 이를 테니.”
두 사람은 그렇게 헤어졌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다. 하지만 원망스러운 비는 멈추지 않고 계속 내렸다. 태자의 흔적을 찾으라 보냈던 병력은 감감무소식이었고, 집정관은 요사이 피가 바짝 말라가는 기분을 맛봤다.
그렇게 이틀이 더 흘러 이젠 지끈지끈 머리가 아프기 시작할 때,
“급보急報입니다!”
집무실에 한 병사가 뛰어들며 외쳤다.
오늘 아침 맑은 하늘을 봤다. 그래서일까? 묘하게 기대되는 하루다.
“태자님의 소식인가?”
“그렇습니다!”
“어서 말해보라! 어서!”
추적의 귀신들이라는 은사의 십위조차 아직도 헤매는 이때, 가뭄의 단비와도 같은 일이었다.
“태자님이 이끄는 3만 군사가 마왕군을 쳤다고 합니다!”
“뭐, 뭐어..?”
오싹, 소름이 돋는 순간이었다.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사건에 잠시 할 말을 잃고 병사를 멍하니 바라보던 집정관.
“태자님께서 쟈스민트 지역에 나타났다는 것이냐? 그런 말이냐?”
“그렇습니다! 정확한 보고는 따로 오겠지만, 급히 전달받은 내용은 그렇습니다! 그쪽은 이미 전투에 돌입해 치열한 상황이라고 합니다! 마왕군은 태자님이 이끄는 군대에 기습을 당해 허둥대다가 북쪽으로 물러나고 있다고 하는데..”
집정관의 눈빛에 생기가 돌았다.
‘위엔 신의 망치가 있지.’
이제야 부글부글 끓던 속이 시원하게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그럼 그렇지!”
집정관이 벌떡 일어나며 박수를 치자 병사가,
“예?”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아니다. 너는 더 자세한 소식이 들어오는 대로 내게 즉시 알리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병사가 나가자 집정관은 다시 의자에 앉았다.
“휴우..”
최악의 상황을 면했다. 혹시나 태자가 변심했을까 노심초사하고 있었는데, 아니었던 거다.
‘혹 마왕군에게 정보가 샐까 염려하여 몸을 사리며 이동하셨던 건가?’
이제야 아귀가 딱딱 맞아 들어간다. 태자는 배를 타고 빠르게 남하하여 마왕군이 수도로 들어서기 전에 저지하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군?’
분명 지난번엔 콩가에서 출발한 병력이 대략 4만이라 하지 않았나? 그런데 3만이라고?
‘잘못 봤던 건가?’
하긴 지켜보는 자가 일일이 다 머릿수를 세어보진 않았을 것이니.
‘어쨌든 다행이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집정관은 피식 웃었다.
지난 며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여러 주의할 인물들에게 사람을 붙여놨었다. 만약 태자가 흑심을 품었다면 그 치밀한 성격에 준비하지 않았을 리 없을 테고, 엄마와 동생을 방치하며 일을 도모하진 않았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황비나 샨 황자는 평소와 다름없이 생활하고 있었다. 아무리 황좌가 탐이 난다고 해도 가족을 위험에 내몰리 없다 생각하는 집정관은 번 황자가 그들을 진심으로 아낀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아서 그런가? 폐하께서 날카로워지셨나 보군.’
집정관은 그렇게 집무실에서 오래간만에 긴장 풀린 모습으로 쉬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이제 하늘은 완벽하게 맑았다. 언제 그렇게 비를 쏟았나 싶을 정도로 별이 반짝였다. 다른 소식을 가져온 병사를 보며 집정관은 크게 끄덕인다.
“잘됐구나. 잘됐어.”
태자의 군대가 마왕군을 크게 격퇴하며 북쪽으로 계속 쫓고 있는데, 벌써 마왕군은 1만 가까이 숫자가 줄었다고 한다. 기습이었고 오크나 고블린 같은 약한 것들이 먼저 도륙되었겠지만, 엄청난 성과였다.
거기에 더 반가운 소식은 이제까지 망부석처럼 꼼짝하지 않고 있던 신성국의 군대도 마왕군의 방향으로 남하하고 있다고 하니, 내일 이맘때쯤 마왕군은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에 부닥칠 것이다.
“고생했다. 쉬도록.”
“예.”
병사가 나가자 집정관은 한쪽에 치워뒀던 종이를 앞으로 끌어왔다. 황제에게 보낼 편지를 한 장 써야 하고, 두 개로 나눠놨던 병력을 다시 하나로 합쳐 본래 일정대로 징집병을 제국으로 보내야 했다.
“휴우..”
이제야 마음이 놓인 듯 그가 내쉰 편안한 숨결이 집무실을 떠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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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집정관을 만나고 나온 병사는 궁을 나와 거리로 녹아들었다.
밤늦게까지 하는 술집 거리로 접어든 그는 한곳으로 들어갔다. 지치고 고된 몸을 달래려는 걸까? 하지만 그러기엔 그의 몸가짐이 너무도 굳어있었다.
복도를 돌아 어떤 방으로 찾아간 병사.
“마스터. 데런입니다.”
-들어와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목소리가 들려오자, 병사 데런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테이블엔 간단한 음식과 차가 놓여있었는데, 오래되었는지 과일은 누렇게 말랐고, 차는 싸늘하게 식었다.
마스터라 불린 남자가 묻는다.
“어떻더냐?”
데런은 자신이 보고 느낀 솔직한 감상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집정관은 크게 기뻐하는 것 같았습니다.”
표정은 어떠했고, 말투와 행동은 어땠는지 조목조목 다 들은 마스터는 미소 지었다.
“수고가 많다. 앞으로도 계속 지켜보도록.”
투욱.
마스터는 돈이 담긴 주머니를 데런에게 던졌다.
“감사합니다!”
데런은 주머니를 빠르게 챙긴 뒤 방을 나섰다.
2년 전부터 수도의 밤을 지배하기 시작한 이 남자는 ‘마스터’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는데, 막대한 금력과 빠른 행동력으로 많은 부하를 거느리고 있었다. 항간에는 그의 돈을 받는 자가 수도에만 수천에 달한다고 하니 대단한 인물임엔 확실하다.
데런이 나가고 다시 둘이 되자 마스터는 옆의 여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일이 잘되어 여인의 품이 필요한 것인가? 아니다. 마스터의 손을 잡는 여인의 표정엔 그 어떠한 것도 담겨있지 않았다.
그녀는 녹색 마녀.
마스터의 연인이 아닌 오직 한가지 임무 때문에 그의 곁에 있는 것이었다.
두 사람의 손이 닿았다.
마스터가 말한다.
“태자님과 지금 대화가 가능한가?”
저쪽 마녀가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답했다.
-기다리세요.
10분쯤 흘렀을까?
-나다.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새로운 소식이 있나?
“그렇습니다. 태자님. 집정관이..”
마스터는 아까 데런이 했던 말을 그대로 전했다.
-잘됐군. 예정대로 진행해.
마왕군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던 태자. 그런 그가 마스터란 사내와 이렇게 은밀하게 소통하고 있었다.
이걸 과연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때가 오면 어머니를 부탁한다. 바티산.
“여부가 있겠습니까.”
통신이 끊어졌다.
그런데 방금 태자가 뭐라 했나?
바티산.
에비뉴 4황자의 이름 아니던가?
「저를 거두어주십시오!」
7황비를 제거하고 파티장을 나서던 길에 마주쳤던 두 사람.
「오래전부터 태자님을 흠모해왔습니다! 저를 곁에 두신다면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때 맺은 인연이 이렇게 이어져 왔다. 바티산은 번이 콩가에 발이 묶였을 때도 황비를 그림자처럼 암중에서 도우며 그녀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게 해주었고, 언젠가 그의 옆에 당당히 서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마스터라는 신분으로 수도의 밤을 지배하고 수천의 눈을 심었다.
그리고 오늘. 그 노력이 결실을 본다.
“가지.”
바티산이 일어섰다.
이제 화살은 쏘아졌다.
과녁에 명중할 때까진 멈출 수 없다.
“손님 맞아야 하니까.”
1만의 무장병력을 은밀하게 수도로 들여야 하는 엄청난 작업을 시작해야 했다. 그리고 이게 어쩌면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사건이 될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