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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좌의 게임-167화 (167/177)

# 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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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침부터 쏟아지기 시작한 비는 오후가 되자 전쟁까지 멈추게 할 정도로 퍼부었다. 병사들은 비로 피를 씻어내며 지친 몸을 아무렇게나 눕혔고, 장장 52일간 이어진 전투는 잠시 소강상태를 맞았다.

“대장군.”

“폐하.”

막사.

피를 뒤집어쓴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 남자는 대 에비뉴의 황제이며, 다른 한 사람은 철의 군대를 이끌고 있는 대장군이다.

이 둘의 표정만 봐도 지금 전쟁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단편적으로 알 수 있었는데, 오늘도 전장을 이탈하는 병사 넷을 직접 참수하고 오는 길이었다.

나라 지키겠다고 여기까지 와서 싸운 자식 같은 놈들을 잡아 죽이는 것이 내킬 리 없었으나 이렇게 하지 않으면 다른 멀쩡한 사람까지 전염시킨다. 야속하게 보일지라도 지금은 공포로 통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간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뚫을 수 있을 것 같은가?”

황제의 물음에 딘딘은 입술에 침을 발랐다. 피 맛이 난다.

“안돼도 뚫을 것입니다.”

“그래, 그래야지. 이대로라면 우리 피해가 너무 커. 이 전투가 장기화되면 이겨도 이긴 게 아니게 되는 거야. 며칠 안에 끝을 봐야 돼.”

제국군을 맞서 에비뉴의 병사들은 훌륭하게 싸워주고 있었다.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성벽도 이제 벌집이나 다름없이 여기저기 허물어졌고, 총공격을 가하면 내일 밤쯤엔 내성으로 진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피해가 너무 컸다. 여기가 에비뉴라면 모르겠지만, 제국이라는 게 문제였다. 놈들은 2차 3차 병력을 계속 보내올 것이 분명했으니 말이다. 아무리 약 기운 떨어져 벌벌 떨어대는 놈들이라지만, 그들 손에 쥔 창에 찔리면 죽는 건 똑같고 숫자도 많았다.

지원군을 포함해 25만의 병사 중 절반 이상이 죽었다. 그것도 부상자가 많아 멀쩡한 이들이라곤 5만이 안 되는 상황. 이 숫자론 제국 수도는커녕 여기서 버텨내기도 벅찰 것이다.

“태자는..”

황제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스캇이 불편한 얼굴로 서 있다.

“아직도 답이 없는가?”

“예..”

“으음..”

황제의 이마가 와락 구겨졌다.

콩가가 움직이지 않으니 다른 동맹국도 눈치만 보고 있었다. 생각 같아선 제국이고 뭐고 동맹국부터 전부 다 불사르고 싶을 지경이다.

“집정관은?”

“벨버른과 이곳저곳에서 활발하게 징집하고 있다 하니, 머지않아 5만 정도는 충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자들도 포함해서?”

“예..”

“허, 거참.”

훈련도 제대로 받지 않은 여자들이 뭘 할 수 있겠나? 적병에게 조롱당하다 강간이나 당할 것이다.

“뒤통수 맞았구나. 뒤통수를 맞았어.”

황제는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흡사 고립된 기분이었다. 여기저기 도와달라 외쳐보지만, 누구도 들어주지 않는 외딴 섬. 무시했던 발키리 3만이 아쉬워지는 순간이었다.

“아직 속단하긴 이릅니다. 태자도 생각이 있겠지요. 콩가만 움직이면 다른 동맹국도 따를 것입니다.”

딘딘의 말에 황제가 안면을 구겼다.

“안 움직이면?”

“······.”

“내가 그놈을 너무 쉽게 봤어. 생각해보면 태자는 아쉬울 게 없지 않나? 에비뉴 태자 자리? 콩가 정도면 먹고 살만하지. 시간만 주어지면 몇 배로 불릴 능력도 있는 놈이고.”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게 힘들게 경연을 치르고, 태자 지위를 확보했는데..”

“그건 그때고.”

황제는 태자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제 삶은 언제나 전장이었습니다.

이젠 그 말의 뜻을 알 것 같다.

바로 한 치 앞도 모르는 것이 전쟁터다. 언제 죽을지, 언제 전세가 역전될지 예측할 수 없는 하루하루,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매 순간 최선을 다하는 것밖에 없지 않은가? 그건 무수한 선택을 동반할 것이고, 태자는 고민했을 것이다.

에비뉴를 돕는 게 이득인가?

버리는 것이 이득인가?

“허허허..”

황제가 허탈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태자의 생각을 읽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여기서 죽어주길 바라고 있을지도 모르겠어.”

“설마 그렇게 악독하게 하겠습니까? 충과 효를 버리면 그 누구도 그런 자를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야. 이 자릴 위해선 누구든 그럴 수 있지.”

고작 나무로 대충 만든 의자였지만, 그가 앉아 있기에 특별해진다.

황좌란 그런 것이다.

그때였다.

막사로 한 사람이 들어왔다.

“폐하!”

콩가의 소식을 얻기 위해 떠났던 은사가 돌아온 거다.

“왔는가? 먼 길 다녀오느라 고생이 많았네.”

“아닙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뭐, 전쟁터에서 별일 있겠나? 명줄 붙어 있으면 된 것이지.”

황제는 말을 하면서도 입이 바짝 타들어 간다. 어서 말해보게! 콩가는 지금 뭘 하고 있는가! 라고 눈빛으로 재촉한다.

“우선 아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황제는 끄덕였다. 다 이유가 있으니 은사가 사족을 달겠지.

“상황이 묘해져서..”

폴라리스에 출몰했다는 마왕이 남하했다. 놈들을 격멸하기 위해 신성국의 군대가 쫓고 있었는데, 몇 번의 가벼운 충돌이 있었고 추격전은 이어졌다.

“뭐..?”

황제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물었다. 옆에 있던 딘딘까지 신음한다.

“예측이지만, 지금쯤 마왕의 군대가 우리 에비뉴의 북쪽 국경을 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 아니 그냥 재수가 더럽게 없었다고 말하는 게 딱 지금 심정이다.

“그놈이 왜 하필..”

스캇도 황당한지 말을 잇지 못했는데, 은사는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입을 열었다.

“병력을 전부 이곳에 동원하고 있던 터라 국경을 지킬 병사가 충분치 않았습니다. 마왕군이 벨버른 쪽으로 향하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만일..”

“염병..”

황제가 벌떡 일어섰다.

“그놈들이 얼마나 되는데?”

“고블린이나 오크 같은 자잘한 것들까지 포함하면 족히 3만은 될 것 같다 합니다. 폴라리스가 쑥대밭이 될 동안 주변국들이 모아놓은 군대를 보내지 않고 뜸을 들이는 통에 오히려 늘었습니다.”

3만.

엄청난 숫자였다. 작은 왕국 정도는 일거에 쓸려버릴지도 모르는 병력 아닌가?

“이놈이나 저놈이나..”

황제는 한심한 표정으로 혀를 찼다.

폴라리스에 마왕이 출현했단 얘길 들었을 때만 해도 일이 이렇게 흘러갈진 상상도 못 했다. 그쪽 왕국에서 군사를 모아 마왕을 무찌를 것이라 들었으니까 말이다. 신성국에서도 군대를 파견했고.

“혹시 처음부터 이걸 노렸나?”

번뜩, 떠오른 생각 하나.

“신성국이 제국과 손을 잡고?”

황제의 말에 은사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도 정보를 수집하며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일까?

“상황이 아주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은사가 품에서 지도를 하나 꺼냈다. 에비뉴의 북쪽 위주로 대충 그려놓은 것이었는데, 몇 가지 표시가 되어 있었다.

“여기 이 강 보이십니까?”

“······.”

황제가 말없이 끄덕였다.

“콩가에 있던 태자가 배를 이용해 군사를 이끌고 에비뉴로 향한다 합니다.”

“태자가..?”

“예. 마왕군보다 한발 앞서 수도를 지키고, 신성국 군대가 도착하면 양쪽에서 공격할 것으로 보입니다. 제가 알아본 것에 따르면 태자가 배에 태워 떠난 병사의 숫자가 4만에 달한다고 하는데, 그 정도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발키리 3만이 아무리 여인들이라곤 하나 몬스터를 상대하기엔 부족함이 없으니까요.”

은사가 다행이라는 투로 말했지만, 황제의 얼굴은 쉽게 펴지지 않았다.

“4만..”

애매하다. 수도에 집정관이 버티고 있으니 4만 병력으론 뭔가를 도모하긴 어려울 것이다. 집정관도 이미 그 정도 숫자를 징집해서 이쪽으로 보내려고 할 테니까 여차하면 쓸 수 있다.

“왜 그러십니까?”

은사가 묻자,

“아니야. 계속하지.”

황제는 일단 더 들어본다.

“태자가 마왕군을 무찌르면 이쪽에 합류하지 않겠습니까? 어느 정도 피해는 있겠지만, 2만 정도만 남아도 우리에겐 큰 보탬이 될 것입니다. 후처리는 신성국 군대가 할 것이고요. 마왕이 사라지면 그들은 명분이 없지 않습니까?”

징집병과 태자의 병사가 합치면 무시할 수 없는 숫자가 되는 건 맞다. 하지만 그건 태자가 그리했을 때 얘기고.

“은사.”

“예. 폐하.”

“지금 바로 십위를 대동하고 수도로 떠나 집정관에게 전하라.”

황제의 말투가 매서워졌다.

“수도..로 말씀입니까?”

“그래.”

황제는 눈을 가늘게 뜨고 힘주어 말했다.

“태자의 병력이 도착하면 모든 전권을 집정관이 넘겨받으라 해. 황명이다.”

“······?”

은사가 눈을 깜빡거리며 고개를 갸웃하자, 황제는 더욱 충격적인 명령을 내렸다.

“만약 태자가 거부할시.”

옆에 있던 스캇이 침을 꿀꺽 넘겼다.

“반역죄로 자네가 직접 처형하고 보고 하라.”

“······!”

“그, 그건..?”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라 한다.

황궁이나 왕궁에선 자주 일어나는 일이라곤 하지만, 적어도 지금 상황에선 상상할 수 없는 그림이었다.

“그리하면 콩가와의 동맹은..”

남편을 죽였는데, 여왕이 에비뉴를 위해 군대를 보낼까? 제국의 편에 붙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재고하셔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폐하. 태자가 수도를 지키러 온다고 하지 않습니까?”

모두가 말려보지만, 황제는 확고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이미 그의 마음속에서 자라난 어떤 의심의 싹은 잘라내기엔 너무 크게 자라버렸다.

“태자가 없어도 이 전쟁은 이길 수 있다.”

“······.”

“······.”

황제는 스캇과 딘딘, 은사를 둘러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

“하지만, 태자가 변심하면 이 전쟁은 패한다.”

“으음..”

“폐하께선 태자가 그리하시리라 보십니까?”

“우려하시는 바는 알겠지만 강력한 아군을 잃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만류에도 황제는 꿈쩍하지 않았다.

“나는 그놈을 알아. 내 자식이니까.”

태자가 이 모든 것을 계획하진 않았겠지만, 상황이 기묘하게 흘러간다.

“기회가 있다면 언제든 내 불알을 차버릴 거야. 그리고 그 기회가 녀석에게 왔어. 지금.”

그때, 그 경연에서 똑똑히 보았다. 녀석이 얼마나 독해질 수 있는지를. 이기기 위해선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할 수 있는 사람.

“내기해도 좋아.”

황제가 이를 사납게 드러냈다.

“······.”

“······.”

스캇과 딘딘이 서로를 바라보며 입을 다물자, 은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태자가 전권을 넘겨줄 수도 있으니, 상황 봐서 수행하겠습니다.”

은사가 꾸벅 머리를 숙이자 황제는 끌끌 혀를 차고 웃었다.

“아직도 그놈을 모르는군. 믿나? 태자를?”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렇습니다. 그런 마음을 품어왔다면 그때 이미 움직였을 것입니다.”

지난번 전쟁을 말하는 것이리라. 태자가 적기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정말 위험했을 전투.

그래. 그때는 황제도 그러했다. 손에 쥐고 주무르면 입맛대로 키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내기하자니까?”

하지만 이젠 알겠다.

콩가가 지원군을 보내지 않는 이유도. 녀석이 하필 지금 수도로 향하는 것도.

“나는 내 목을 걸지.”

너무 공교롭지 않은가? 흡사 이 순간을 기다린 것처럼.

“안 그러셔도 됩니다.”

은사는 머리를 흔들며 뒤로 물러났다. 더 있다간 무슨 소릴 들을지 모르겠다.

“명 받들겠습니다. 부디 강녕하십시오. 폐하.”

그렇게 은사는 막사를 빠져나왔다.

솨아아아아아아.

아직도 비는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퍼부었다. 문득, 은사는 그런 탁한 하늘을 올려보았다.

‘설마..’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지만,

‘그렇게까지 하려고?’

일단 가보면 알겠지. 태자가 어떤 선택을 하든 자신은 그때 움직이면 되는 것. 미리 골치 아플 이윤 없었다.

“십위.”

그의 말에 주변에서 그림자들이 모여들었다.

“수도로 간다.”

“존명!”

“존명!”

솨아아아아아아.

내리는 비는 모이고 모여 한곳으로 흘러갔다. 줄기가 되고 지하로 흘러들어 굵은 수맥을 이뤘다. 그리고 사방에서 모인 물은 거대한 하나의 흐름에 합류한다.

강江.

거친 물살에도 유유하게 떠서 하류로 향하는 수십 척의 배가 있다. 멀리서 보면 거대한 괴물 거북들이 단체로 이동하는 거로 보일 것이다.

그 중 무리에서도 중심에 있는 한 거북의 위용이 대단하다. 뱃머리엔 커다란 용의 대가리를 달았고, 등엔 뾰족한 가시를 박았으며 옆구리엔 44대의 포가 달렸다.

기이이이이이이잉.

배가 파도에 움직일 때마다 나무와 몸체가 뒤틀리며 으스스한 소음을 냈지만, 거센 바람에도 한 남자가 뱃머리 위에 서서 팔짱을 끼고 있었다.

“큭큭큭. 날씨까지 도와주는군.”

번이었다.

그는 저 먼 곳을 바라보며 우렁차게 소리쳤다.

“속도를 높여라!”

그 목소리에 아래 있던 병사들이 복창했다.

“속도를 높여라!”

“속도를 높여라!”

우우우우우우우웅.

마나 엔진이 모든 힘을 뿜어내자 배는 더욱 빠르게 하류를 향한다.

번은 다시 명령했다.

“우현으로!”

병사들이 복창했다. 그걸 보며 씨익 입가에 미소를 띠는 번.

“가자! 이제 곧 에비뉴다!”

“가자!”

“우와아아아아!”

환호하는 병사들을 보며 번은 기분 좋은지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크크크..”

그래! 외쳐라!

우리가 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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