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좌의 게임-134화 (134/177)

# 혼돈의 장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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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대청은 평소완 달리 인파로 북적였다. 평소였으면 이제 막 시비들의 빗자루 소리가 들려야 할 대청이었지만, 밤새 한잠도 이루지 못하고 나온 대신들은 벌건 눈으로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둘째 왕자님을 모셔오는 것이 어떻소이까? 차분하고 부지런한 그분의 성품이라면 이 혼란을 잘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건 임시방편일 뿐이지 않소? 그보다는 세손을 미리 정하여 후일을 기약하는 것이 어떻소?”

“섭정을 세우자는 말씀이시오?”

“뭐,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라 이거외다.”

권력자들은 누가 왕좌에 앉아야 자신에게 유리한지 계산했다. 망나니나 다름없는 셋째 왕자를 불러들여야 한다는 의견까지 나오는 걸 보면 쉽게 결정되긴 힘들 듯 보였다.

“거, 참..”

피벗 공작 역시 밤을 꼴딱 새웠다. 그는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주변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게다가 조금 전 격리된 세자를 보고 와서 더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치료를 맡은 담당 사제나 여러 마법사도 세자가 이미 어둠에 오염되어 이전으로 돌아가긴 불가능하다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시간은 계속해서 흘렀다. 이렇다 할 뾰족한 방법은 나오지 않은 채 사람들은 자신의 주장이 맞는다며 목청을 높여댄다.

‘세손이라..’

확실히 그 방법이라면 자신이 지금보다 훨씬 강력한 권력을 쥘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이 드는 피벗 공작이었다. 다른 공작이나 후작 중엔 섭정 역할을 할만한 깜냥을 가진 이가 없었으니 자연스레 드는거다.

그러나 그는 유능했지만, 자신의 분수를 아주 잘 알고 있는 자였다. 이인자는 감당할 수 있어도 모든 것을 책임지는 자리는 싫다. 길고 가늘게 오래가는 것이 그의 목표였으니 말이다.

‘전하께서 승하昇遐하시면 더욱 혼란이 가중될 터인데, 이거 큰일이로다.’

정치란 게 그렇다. 말도 안 된다 생각하던 일도 몇 사람 입 모아 떠들기 시작하면 그게 현실로 된다. 아무래도 지금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니, 훗날 왕좌를 이을 세손을 정해 밀어주거나 셋째 왕자를 불러들일 것 같은데, 둘 다 피벗 공작에겐 탐탁지 않았다.

2시간쯤 지났을까?

이제 동이 튼지도 꽤 됐고, 아침을 먹을 시간이 되었다. 그 사이 대청엔 사람들이 더 모여들어 미어터질 지경이 되었다. 소식을 들은 지방 제후들과 왕족들이 간밤을 달려 속속 도착한 것이다. 최근 몇 년 동안, 오늘이 가장 많은 귀족이 입궁을 했다.

‘줄을 서보겠다는 거지.’

나라의 대소사가 있을 때도 코빼기 하나 비추지 않던 자들까지 대거 모습을 드러낸 것을 보며 피벗 공작은 쓴웃음을 짓다가,

“......?”

누군가 대청에 드는 것을 보며 시야가 확 밝아짐을 느꼈다.

-아, 저분은 공주마마 아니신가?

-허어, 공주마마께서 미모가 절정에 오르셨소이다. 잠이 싹 달아날 지경이로군요!

-그런데 저분은 뉘십니까?

-그 소문 자자한 대공이 아니오?

-아! 에비뉴의 태자라던?

두 사람이 대청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카시오페이아는 새하얀 순백의 드레스를 입었는데, 수수한 것 같으면서도 얼굴을 한껏 단장해놓아 참으로 아름다웠다. 붉은 입술, 하얀 피부, 긴 속눈썹과 탱글탱글한 콧망울은 어떤 사내라도 방심이 흔들릴 거다.

그 옆의 남자.

카시오페이아와는 대조적으로 새까만 차림 일색이었다. 큰 키와 떡 벌어진 넓은 어깨. 다부진 눈매와 당당한 걸음걸이는 유명한 기사를 보는 것 같았다. 그는 공주의 손을 올려잡고 에스코트하듯 안내하며 중앙으로 걸어왔는데, 사람들은 둘을 멍하니 바라보며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절로 했다.

“오셨습니까.”

피벗 공작은 자신의 앞에서 드래스를 잡고 무릎을 살짝 굽히는 카시오페이아를 보며 인사했다.

“일찍 나오셨습니다.”

“허허,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럴 만도 합니다.”

잠시 번과 인사를 나눈 피벗 공작은 주변을 힐끔 돌아보았다. 이목이 쏠려 있었지만, 그 누구도 선남선녀 이상의 비중을 두진 않는 분위기다. 하지만..

‘어차피 누군가 임시로 세워야 한다면.’

피벗 공작의 머리가 절로 돌아갔다.

‘이분 또한 꽤 그럴싸하지 않나?’

슬쩍 공주를 보는 그의 눈이 빛난다.

콩가 왕실에서 여왕이 탄생한 적은 없었지만, 다른 나라들을 보면 없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어디까지나 다음 대를 이을 후계가 장성할 때까지만 맡으면 되니 부담도 없다.

‘드래곤을 낳았다는 명분도 있고.’

왕실의 직계 혈통이기도 했다.

‘심지어 언젠가 에비뉴로 떠날 몸이시니.’

확실히 그는 계산이 빨랐다.

그러나 그는 모르고 있었다.

이 순간, 반짝이는 눈 하나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번이었다.

‘시선은 끌었고.’

카시오페이아는 어디에 내놔도 눈길을 모을만한 미모를 가졌다. 예쁘다는 게 이런 장점도 있지만, 사람이든 동물이든 일단 호감을 느끼면 대상의 허물은 쉽게 무시해버린다.

‘분위기 메이커만 있으면 되는데.’

공주를 여왕으로 만들려면 번이 나서는 것은 그리 모양이 좋지 않았다. 그는 에비뉴 사람이고, 공주의 남편이기에 오해를 받기 아주 좋은 위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 도와주어야 한다.

-네 장의 카드를 다 모았다면서? 끝난 거 아니냐?

그래, 포카드 패는 손에 쥐었다. 하지만 판이 깔려야 뭐라도 해보지 않겠나? 내 패가 아무리 좋아도 상대가 허무하게 죽어버리면 곤란하고, 아직 본격적인 배팅도 하지 않았다. 세상 모든 일은 타이밍이 있는 법.

‘그리 간단했으면 나는 이미 대륙통일을 했을 거다.’

-큭, 그래? 그럼 또 뭐가 필요한데?

‘선동꾼. 그리고 제물.’

앞으로 3년. 번은 철저하게 공주의 뒤에 숨어 힘을 기를 생각이었다. 그러나 몸을 사리겠다는 건 아니었다. 이 콩가 왕국의 모든 것에 개입할 생각이다. 이런 걸 두고 비선실세라 하던가? 권력은 없지만, 모든 결정권을 쥔 자. 벨버른에서 이룬 것을 황제에게 빼앗긴 그 쓰디쓴 교훈을 잊지 않는 번이었기에 철저하게 실속만 챙길 생각이었던 거다.

그러기 위해 필요했던 4장의 카드.

별을 가려줄 밝은 달.

나 대신 음지에서 움직여줄 그림자.

누구에게도 의심받지 않고, 나설 수 있는 상황과..

‘명분은 있으니.’

번이 알기엔 이 콩가 왕실엔 포카드를 능가할 강력한 패를 가진 이가 없다.

‘카시오페이아를 밀어줄 세력만 있으면 승부를 볼 수 있다.’

-저놈들이 그리 호락호락하게 넘겨줄 것 같진 않은데?

에비뉴도 그러했지만, 남존여비男尊女卑는 이곳에도 짙게 깔려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 점 덕분에 허를 찌를 수도 있는 거다. 늑대가 다른 늑대에게 먹이를 빼앗기느니, 토끼에게 잠시 맡겨놓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으니까.

‘언제는..’

번은 살짝 미소 지으며 주변을 둘러보다가 생각했다.

‘줘서 뺏었냐?’

-캬캬캬! 그래! 그게 네 방식이지! 잘 해봐라! 너라면 할 수 있을 거다.

악마가 웃어 재낄 때, 대청을 울리는 박수가 짝!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다.

“오셔야 할 분들은 다 참석하신 것 같으니, 이제 회의를 시작합시다!”

후작의 말에 사람들이 끄덕이며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번은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손안의 패를 언제 어떻게 깔지 가늠해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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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간 대단한 남자라니까..”

넓은 방.

깨끗하거나 고급스럽지는 않았지만,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모두 마련되어 있었다. 재료를 올려둘 선반도 넉넉했고, 필요한 책과 구하기 어려운 마법 시약 따위도 가득했다.

“흥, 흥~ 흥~”

잠시, 번을 떠올린 그녀는 다시 콧노래를 부르며 솥단지의 액체를 열심히 노 저었다.

그녀가 콩가 왕국으로 온 것도 어느덧 반년이 지났다. 아직 그녀는 노파의 모습이었지만, 나이답지 않게 생기가 넘쳤다.

“눌어붙지 않게 꼼꼼히.”

그녀는 노래하듯 읊조리며 두 팔을 열심히 움직였다. 지난 반 년간 부단히도 노력한 결실이 오늘 완성될 거다.

“마법보다 위대한 저주!”

이 솥 안엔 666가지의 재료가 들어갔다. 모든 것들을 새로 구해야 해서 호되게 고생했지만, 왕실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기에 일은 순조로웠다. 물론, 세상 어느 왕실이 마녀를 돕겠느냐마는 여기 콩가에선 가능했다. 그녀를 뒤에서 밀어주는 이가 다름 아닌, 대공이었으니까 말이다.

“빛보다 밝은 어둠으로!”

6개월 전.

여기 콩가 왕국은 새로운 지도자를 맞이했다. 사상 최초의 여왕의 탄생에 백성들도 동요하는 모습이었지만, 그녀가 품은 드래곤과 앞으로 콩가 왕국의 번영을 위해 내놓은 7가지 정책은 참으로 신박했고 기발했으며 효율적이었다.

특히, 경제발전 3단계 계획과 친서민정책의 일환인 세제개혁은 서민층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렇게 조금씩 민심이 움직이니 절로 권력이 생겨나고, 지도층은 일단 관망하는 추세였다. 그 누구도 여왕이 오래 왕좌를 차지할 것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것들이 번의 머릿속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고 있는 융은 당연한 결과라 생각했다. 이미 벨버른에서 그가 보여준 기적과도 같은 일들을 알고 있었기에 의심하지 않는다.

‘이제 나만 잘하면 돼. 나만.’

그가 약속했다. 이번 일만 성공하면 다시 예전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해준다고. 융에겐 지금 그 무엇보다 간절한 것, 바로 그것말이다. 그 잊을 수 없는 쾌락도 함께누릴 생각에 그녀는 이미 애가 탈대로 타있었다.

사실 번이 콩가 왕국에 발이 묶였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녀도 고민했다. 자유로워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던 거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넘어가자, 그녀는 깨달았다. 삶이 재미가 없다고.

번은 태풍 같은 사내다. 물론 그 강력한 바람에 떠밀려 자빠지고 다칠 수도 있지만, 중심에 선 그와 떨어지지만 않는다면 고요 속에서 세상이 이리저리 휘둘리는 것을 감상할 수 있다.

‘허리케인 아이eye.’

그래서 이 주문의 이름도 그리 지었다.

“끌끌끌, 어서 일어나거라. 널 기다리는 분이 계신다.”

솥을 바라보며 말하는 융의 매부리코에서 땀방울이 맺혔다. 그녀의 흥얼거림도 멈추고, 집중에 침묵이 따라왔다.

1시간쯤 지났을까? 삐이걱, 문이 열렸다.

“계속해.”

번의 목소리가 울렸다.

융은 끄덕이며 계속 국자를 저었다.

자박, 자박.

번의 발걸음 소리가 작게 방안을 울렸다. 찌걱, 찌걱 솥에선 액체가 엿처럼 끈덕지게 뭉쳤고, 저쪽 책장에 팔짱을 끼고 기대선 번은 흥미롭게 그 모습을 주시했다.

지난 반년.

번은 조금 더 자랐다. 열 여섯 살이 되었지만, 이젠 그 누구도 그를 10대로 보지 못할 것이다. 눈은 더 깊게 파였고, 눈썹은 흑단처럼 짙어졌다. 우람한 팔뚝과 다부진 가슴과 대조되는 허리엔 군살이 없고, 엉덩이는 동산처럼 솟아 여인들의 가슴을 뒤흔들었다.

-저거면 되는 거냐?

악마가 물었다.

‘그래.’

피벗 공작과 클리오 후작을 부추겨 카시오페이아를 여왕으로 만드는 대엔 성공했지만, 아직 대청을 완전히 장악했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었다. 심지어 4개월 전 왕이 죽은 뒤론, 후계를 이을 세손을 시급히 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다.

비 온 뒤 땅이 단단히 굳는 것에도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모든 일엔 꼭 필요한 시간이 있다. 특히 군주가 성군으로 불리거나 유능함을 인정받기까지엔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그러나 번에겐 그걸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특효약이 필요했는데, 인간사에서 가장 빠르고 즉각적으로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크크크! 전쟁이다! 전쟁!

그래, 전쟁이었다.

누구도 원하지 않지만, 인간이란 동물을 발전시키는 것. 그 답은 전쟁이다. 남을 이기기 위한 경쟁은 기술의 발전을 부추기고, 죽지 않기 위한 몸부림은 그 어느 때보다 성실함을 요구한다.

번은 카시오페이아를 통해 왕실을 안정시키며 쓸모있는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는 한편 도시에 숨어든 정체불명의 ‘어둠’을 끊임없이 흡수했다. 다행히 그 과정은 이전보다 훨씬 쉬웠다. 이제는 모두가 그 괴상한 것들을 인식하고 있었고, ‘신의 이름으로!’ 번이 지목하면 누구도 방해할 수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이제 융의 저것만 완성되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여왕의 입지를 더욱 견고하게 해줄 사건을 만드는 것이다.

-피의 계절이 왔다!

앞으로 콩가 왕국 주변 5개국은 훌륭한 제물이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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