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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좌의 게임-133화 (133/177)

# 혼돈의 장 2 #

장내는 순식간에 분위기가 변했다.

끼기기기기..

음산한 웃음을 줄줄 흘려대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눈동자는 짐승처럼 또렷하지만, 초점은 탁한 시선으로 번을 주시하자 모두는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꼈다.

그러더니,

“캬아아아아-!”

포효하며 달려들기 시작하는 ‘그것들’을 보며 번은 쓰게 웃었다.

“밑천이 드러난 게냐?”

가소롭다는 듯 주먹을 말아쥐는 번. 그의 옆에 있던 아이리스 여사가 기겁하며 개처럼 네발로 기어 옆으로 빠지고,

“어딜!”

다코비치 또한 마력을 끌어올리며 고함쳤다.

“습격이다!”

“반란이다!”

“호, 호위! 뭣들 하느냐! 저놈들을 막아라!”

순식간에 대청이 발칵 뒤집혔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불길한 기운 물씬 풍기며 날뛰자, 그들의 지인들은 우왕좌왕 난리가 난거다.

“대공! 위험합니다! 피하십시오!”

다코비치가 괴인들의 발을 묶고자 얼음 속성의 마법을 쓰려는지 양손에서 한기를 풀풀 날리며 외쳤지만, 애석하게도 이미 적아가 뒤섞인 이곳에선 마법이 그리 유용하지 못했다. 흡사 아비규환. 메뚜기처럼 사방으로 튀는 사람들 틈에 자칫 죄 없는 사람이 희생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

그러나 다코비치의 걱정과는 반대로 번은 아주 침착했다.

“가소롭구나.”

이놈들은 어둠의 결정이나 마찬가지다. 일반 무사가 상대하려면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겠지만, 번에게는 예외였다.

“오라-!”

번의 천둥같은 외침에, 한 놈이 바짝 다가왔다.

20대 중반의 사내. 녀석은 아주 조급한 표정이었는데, 인간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있다고 해도 속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후욱, 놈의 매서운 공격이 번의 가슴을 향해 날아든다. 대청에는 무기반입이 안 되기에 어쩌다보니 맨손으로 주먹질이 시작되었는데, 그 힘은 어지간한 돌도 부술 정도로 강했다. 물론 그래 봐야 잡졸일 뿐이지만 말이다.

이제껏 녀석들을 사냥하며 쌓인 경험이 번에겐 가득하니, 저게 뭐 무서울까?

우우웅!

입술을 비틀며 팔을 뻗는 번의 주먹에 우윳빛 광채가 서렸다.

“신성력?”

지켜보던 다코비치가 놀라 외칠 때, 번의 주먹은 이미 습격자의 주먹과 일직선으로 맞닿는 중이었다.

그리고,

콰직, 뚝, 뚜두둑.

보통 사람이라면 평생 듣고 싶지 않을 끔찍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주먹부터 시작해서 팔의 상박과 하박이 부러지고, 어깨까지 뒤틀렸다. 그걸로 끝이 아니다. 주먹을 거두자마자 앞으로 파고든 번은 팔꿈치로 사내의 가슴을 찍었다.

빠직!

가슴이 함몰되며 뒤로 쭉 날아가 처박히는 사내.

이때부터 번의 독무대가 시작되었다.

휘익, 휘익.

사람들은 눈으로 좇지도 못했다. 유령처럼 허연게 이리저리 사람들 사이로 빠르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을 뿐이다. 하지만 번이 지나는 길엔 어김없이 한 사람이 바닥을 나뒹굴었고, 어떤 이는 팔이 통째로 잘렸다.

“꺄아아아악!”

수발을 들기 위해 대청에 들어와 있던 궁녀가 옆의 중년인 머리가 수박처럼 터지는 것을 보며 비명을 질렀다. 번은 뒤통수를 따라오는 비명을 무시하며 계속해서 움직인다. 몸을 가볍게 띄워, 사내 하나의 허벅지를 발로 찍었다.

우직, 단단한 허벅지 뼈가 수수깡처럼 동강 나고, 중심이 아래로 허물어진 그의 턱을 번의 무릎이 올려 찬다. 그의 몸엔 아주 얇은 막이 코팅처럼 덮여있었는데, 그게 괴인들에겐 너무나도 치명적이었다.

“끄으..!”

어찌나 세게 맞았는지 휙! 뒤로 넘어간 그의 뒤통수가 바닥에 닿자마자 으적 깨져버린다.

“대단..하구나.”

다코비치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지금 번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사람 중 몇 안 되는 하나였기에 저것이 얼마나 압도적인지 아는 거다. 저길 보라. 호위들이 한 사내를 어쩌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이 괴물들은 칼로 베어도 아무렇지 않는 듯 날뛰며, 고통 따윈 느끼지도 않는 것 같았다.

그런데 대공의 주먹질엔 픽픽 쓰러져버렸다.

“으음..”

다코비치는 지금 막 바닥에 쓰러진 사내를 유심히 보았다. 뒤통수에서 붉은 피 대신 새까만 어둠이 왈칵 터져 나오는 게 보인다.

“역시 그런 것인가..”

뭔가가 인간의 몸에 침입하여 기생하고 있다는 그의 추론이 맞은 것이다.

“과연 신성력이로다.”

악마에 들린 적이 있다더니, 저 신앙의 힘으로 이겨내며 얻은 걸까? 퍼즐처럼 그의 행동과 말이 떠오르며, 그가 괴팍하고 종잡을 수 없는 모습을 보인 것이 이해가 간다. 그간 어떤 어려움을 이겨냈을지 충분히 상상이 갔으니까.

소란이 일긴 했지만, 다행히 상황은 빠르게 정리 되어갔다. 마침 세자의 일로 평소보다 많은 무사가 대청에 들어와 있었고, 백작쯤 되는 귀족은 박투에 능한 이들이 많았다. 기사 출신도 여럿 있었고 말이다.

거기에 괴인들이 철저하게 대공 하나만 노리고 있었기에 다른 피해는 미약했다. 제가 놀라 도망치다 자빠져 무릎이 깨진 정도?

다코비치는 빠르게 걸음을 놀려 번에게 다가갔다.

“대공.”

사내 하나를 꿇려 흡사 뱀의 몸통을 밟듯 발로 누르고 있던 번이 그를 돌아보았다.

“가까이 오지 마시오. 이놈들, 이리 허접스럽게 보여도 보통이 아니니까.”

사람들은 놀란 가슴에도 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번이 말했다.

“연구해보시겠소?”

마법사라면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한거다.

“여봐라! 이자를 포박하라!”

다코비치가 눈을 빛내며 무사들을 향해 외쳤다. 번의 발에 밟혀 벌레처럼 사지를 발악해대던 사내가 호위들에게 제압되자, 번은 그제야 손을 털었다.

피핏.

살점과 피가 바닥으로 튄다. 다코비치조차 절로 눈을 찌푸릴 광경이었지만, 번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과연 전장 경험이 있다더니 담력이 대단하다 생각하며 다코비치는 물었다.

“어찌 아셨습니까?”

수도에서 일어나는 괴사건을 해결하고자 연구하고 있던 다코비치였다. 그런데 그게 이런 식으로 밝혀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말했잖습니까. 보인다고.”

번이 서늘한 눈으로 주변을 스윽 훑자, 시선에 닿은 이들이 움찔움찔 몸을 떨었다. 지은 죄가 없는데도 괜히 가슴이 콩닥콩닥 뛴다.

이 사이 피벗 공작이 다른 인사들과 함께 다가왔다.

“허어.. 이런 일이 다 있나!”

피벗 공작은 혀를 내두르며 물었다.

“대공께선 진즉 알고 계셨습니까?”

번은 머리를 흔들었다.

“짐작만 했을 뿐입니다. 악마가 이리 깊이 궁에 침투해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지요. 제가 놈들을 알아보는 것처럼 놈들도 그걸 느껴 몸을 사립니다.”

“아..”

눈으로 봤으니 믿지 않을 수도 없다. 지금도 저쪽을 보면 누군가의 잘린 팔이 말라비틀어진 생선처럼 쪼그라 들어있었는데, 그 안에 있던 어떤 것이 빠져나가서 그렇다.

“그 몹쓸 악마의 정체가 대체 무엇입니까?”

악마.

이제는 번의 말이 공신력을 얻게 되었다.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수도 곳곳에 아주 교묘하게 숨어 있던 것 같은데, 뭘 준비하는 건지..”

번은 저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모두의 시선이 그걸 따랐다.

사지가 꽁꽁 묶여 몸을 바르르 떨어대고 있는 세자의 등이 보였다.

“이런 것들을 부리려면 보통이 아닐 것엔 분명합니다.”

“허어.. 사악한지고.”

“감히 어떤 간악한 자가 이런 일을 획책한단 말입니까!”

“악마라 하지 않았습니까?”

“하긴 이런 종자를 다루려면 인간의 힘으론 어려울 것입니다.”

사람들의 낯이 어두워졌다. 이건 가볍게 생각할 일이 절대 아니었다. 대청에 버젓이 숨어들어 무방비나 마찬가지인 사람들을 언제든 공격할 수 있었고, 이미 왕이 병상에 누웠으며 세자가..

“대공..”

이마를 찡그리며 세자에게서 얼굴을 돌린 피벗 공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세자께선.. 어찌 되는 것입니까?”

번은 답을 알고 있었다. 이미 세자는 죽었다. 그저 껍데기만 그의 것일 뿐, 알맹이는 이미 다른 것으로 대체되었다. 하지만 피벗 공작을 보며 머리를 흔들 뿐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 모습을 본 다코비치가 대신 답했다.

“제가 신전과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가세家勢가 기우는 것은 순식간이라 한다. 이제사 에비뉴에 동맹을 맺고 제국에 대항할 생각마저 했을 정도로 진취적으로 견고하던 콩가 왕실은 오늘 단 하루 만에 풍비박산이 났다.

“일단.. 오늘은 마무리하도록 합시다. 다들 놀랐을 터이니..”

아직 왕실 직계혈통이 도착하지 않았지만, 이런 대청에서 계속 이어가긴 무리가 있었다.

“내일 아침 일찍 다시 모이도록 하지요.”

피벗 공작의 말에 모두가 끄덕일 때, 번은 악마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너무한거 아냐?

‘뭐가?’

-억울하다고! 이런 일은 대악마도 못해!

‘크크크..’

맞다. 콩가가 어디 오지의 작은 부족국가도 아니고, 왕궁 가까이 신전까지 버젓이 있는데, 악마가 이리 날뛸 순 없는 거다. 그러나 사람들은 직접 본 것을 믿을 수밖에 없었고, 번은 생각보다 일찍 기회를 잡았다.

그리고 이 남자는 한번 물면 절대 놓지 않는 남자이기도 하다.

‘어쩌라고? 악마가 나쁜 놈인 건 맞잖아?’

-그래도 이건 아니지! 이 사실을 마계에서 알면!

‘알면?’

-어, 음.. 뭐..

악마의 반응에 번은 간신히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아니꼬우면 ‘그놈’ 찾아가서 따지던가.

.

.

그날 밤.

“제가요..?”

카시오페이아는 침을 꿀꺽 삼켰다. 흔들리는 호롱불빛이 그녀의 요동치는 심정을 대변해주는 것 같았다.

“그렇소. 그대가 나서야 할 때요.”

“하지만 저는..”

수년간 말도 못하고 이곳에 스스로를 가두고 살아왔다. 그런 그녀가 정치판에 나서서 뭘 할 수 있을까? 시작도 하기 전에 가슴이 답답해지고 겁이 덜컥 난다.

“아무것도 모르는 걸요.”

번이 그녀의 옆에 앉아 부드럽게 어깨를 감쌌다.

“내가 있지 않소?”

콩가 왕실엔 세자를 대체할 자원이 없었다. 번의 예상대로라면 왕은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이 세계에 마법과 신력이 공존한다고 해도 안 되는 건 안되는 거니까.

“네이를 지켜야 하지 않겠소?”

“······?”

그녀가 번을 바라보았다.

“전하께선 마음이 바다와 같이 넓어 우리를 지켜주셨지만, 다른 사람은 모를 일이 아니겠소? 네이는 보물이라오. 누구든 탐내지 않을 수 없겠지.”

“..아.”

“무릇 보물이란 건 지킬 수 있는 힘을 가질 때, 평화로운 법이라오. 우리에겐 이제 울타리가 없소. 어느 밤에 맹수가 쳐들어올지 모를 일 아니오?”

특별히 설득하려 하지 않아도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게다가 당장 내일부터 궁은 혼란에 빠져들 것이 분명하오. 이런 때일수록 누군가는 중심을 잡아야 하지 않겠소?”

마음은 살짝 기우는 것 같았지만, 아직도 겁이 나나 보다. 카시오페이아의 목소리가 기어들어간다.

“..피벗 공작님도 있고.. 셋째 오빠도 근처에 있는데..”

번은 단호하게 머리를 흔들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누가 되든 반대하는 자들이 나올 거요. 하지만 당신이라면 다르지.”

“제가요? 왜요?”

그녀는 여자다. 그것도 타국의 사내와 혼인까지 한 몸이다. 당연하게도 그렇기에 그녀가 아주 잠시 왕좌를 차지한다고 해도 그게 영원할 거라 믿는 사람은 없을 거다. 바로 그 틈을 노린다.

“알게 될 거요. 그러니 그대가 할 일은 나만 믿고 따라오는 거라오.”

“예.. 해볼게요. 네이를 위해서..”

카시오페이아가 결심한 듯 말하다가,

“아?”

“왜 그러시오?”

뭔가 생각난 듯 눈을 크게 뜨고 깜빡였다.

“그러고 보니 경황이 없어서 아직 말씀 못 드렸는데, 손님이 왔어요!”

“내게 말이오?”

“네! 에비뉴에서 왔다고 하던걸요? 손님방에 묵고 있을 거예요.”

순간적으로 번의 시선이 저쪽을 향했다. 하지만 눈으로 보는 게 아니다. 기척을 읽으려는 것이다.

‘누구지?’

그러나 걸리는 게 없다. 거리도 거리였지만, 그녀는 이미 번이 감지할 수준의 어둠조차 품지 못하고 있었다.

“할머니인데.. 융이라던가? 그랬던 것 같아요.”

융. 마녀 융.

“······.”

번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걸렸다. 그걸 보는 카시오페이아는 그가 반가움에 웃는다 생각했겠지만, 번은 이때 세상 모든 것이 나를 중심으로 굴러가고 있는듯한 기분을 맛보았다.

우연과 행운이 겹쳐, 네 장의 카드가 모였다.

포카드!

이제 그걸 까 보일 순간만 잡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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