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좌의 게임-129화 (129/177)

# 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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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나선 번이 의미심장한 얼굴로 명망 있는 마법사의 마탑을 향해 가고 있을 때, 대륙 저 아래 어떤 나라에선 수도 전체에 함성이 울려 퍼졌다.

-황제 폐하 만세!

-에비뉴 만세!

-철의 군대 최고다! 멋지다!

개선장군凱旋將軍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일 것이다. 제국과의 일전을 치르고, 그에 더해 몇 개의 국가와 동맹까지 맺고, 드디어 그 걸음도 당당하게 수도에 돌아온 것이었다.

사실 백성들에게 얼마 전까지는 황제가 황국으로 천명했다고 해도 제국이나 다른 대륙의 열강들에 비하면 다소 처지는 감이 없잖아 있었는데, 그 대단한 제국과 칼을 맞대고 어깨를 나란히 하고 돌아왔으니 이보다 기쁜 것이 또 어디에 있겠나?

“폐하.”

성벽 밖까지 마중 나와 있던 집정관이 황제가 탄 말을 향해 허리를 깊이 숙였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황제는 집정관을 보며 피식 웃으며 답한다.

“고생은. 이제부터가 고생이지.”

당분간 황궁에 처박혀 있을 생각에 벌써부터 삭신이 쑤시는 표정이었다. 그 마음, 절절히 전해지니 집정관이 웃으며 머릴 설레설레 흔들뿐.

후욱.

말에서 내린 황제. 집정관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기 시작했다.

-우와아아아!

-멋지다!

-잘 돌아왔어! 장하다!

병사들을 향해 격려와 갈채가 쏟아진다. 이것들이 있기에 지금 이 순간, 전장의 그 끔찍했던 기억들은 한여름 얼음처럼 녹아내릴 것이다.

“준비는 차질 없나?”

황제는 콩가 왕국에 있으면서도 파발을 통해 집정관과 끊임없이 소통해왔다. 그가 타지에 있다고 해서 나랏일을 완전히 등진다고 생각하면 오산인 것이다. 그만큼 철저하고 치밀한 사람이었다. 이 에비뉴의 황제는.

“충분한 물량은 확보했습니다. 이거면 내년이 지나기 전에 제국 전체를 사정권에 넣을 수 있을 것입니다.”

척하면 딱 알아듣는다.

“유통 경로는 확보했다는 거야?”

“예, 주로 도둑 길드나 상인들, 용병들을 통해 뿌릴 생각입니다. 적당한 단체에 적당한 양을 쥐여 주면, 판매는 그들 스스로가 할 테니까요.”

“하긴. 제 목숨 걸고 지키려 하겠지. 그게 돈이 얼만데.”

레인보우 립은 보물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미 그것을 맛본 사람은 시간이 흐를수록 퇴색되긴커녕 점점 더 갈증이 심해지고, 벗어날 수 없는 금단현상에 빠졌으니까. 이런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돈이나 명예 따위가 아니었다. 인생의 1순위가 되어버린 쾌락. 그것은 오직 레인보우 립으로만 얻을 수 있었다.

“게다가 올해만 지나면 제국 놈들이 눈치챈다고 해도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위에서 아무리 찍어눌러도 밀수를 완전히 차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수요가 있으면 공급자들은 아무리 넓고 넓은 바다라도 건널 것이고, 하늘까지 치솟은 산도 넘을 테니까.

“그래도 조심해야 해. 국가적으로 나서기 시작하면 골치 아파지니까.”

“예. 때가 올 때까지 꼬리 밟히지 않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황제는 레인보우 립을 전략무기로 사용하려 했다. 그 마약이 지닌 강력한 중독성을 직접 전쟁을 통해 확인했으니, 이것에 오랫동안 제국의 병사들이 노출된다면 분명 쇠약해질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국내에 빼돌리는 놈들이 있을지 모르니까 은사와 상의해서 본보기 확실히 보이고.”

“즉결처형 수준으로 할까요?”

그때나 지금이나 황제는 마약이 에비뉴 백성을 좀 먹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하지만 당연히 이건 무척 어려운 것이다. 마약의 최대 생산국에 중독자가 없길 바라는 것 자체가 너무 뻔뻔한 것 아니겠는가?

황제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황송하다는 듯 감격한 얼굴로 넙죽 머리를 숙이는 백성들이 보인다. 그런 그들을 보며 황제가 빙긋 미소 지었다. 그러면서 집정관에게 대답했다.

“사지를 찢어, 성벽에 걸어.”

21세기 미국의 한 심리학자는 이런 연구를 했었다. 사이코패스가 어떤 조직의 지도자가 되면 본연의 역할을 아주 잘 수행하며 기업에는 흑자가 나고, 시간이 흐를수록 번창한다고. 카더라 통신이긴 했지만, 세계 100대 기업 CEO를 살펴보면 10%가 넘는 이들이 이런 의심을 받아왔는데, 이 남자 역시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내뱉는 말을 보면 확실히 남달랐다.

“······.”

“장례도 치르지 못하게 하고, 썩어 문드러져 독수리 밥이 되도록 내버려둬.”

“소문도 흘리고요?”

“당연하지. 누구든 마약에 손을 대거나 유통하려고 시도만 해도 잡혀 죽을 거란 공포를 깊이 새겨.”

“그리하겠습니다.”

그 주인에 그 하인이랄까?

집정관 역시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대열과 맞춰 궁을 향해 걸으며 이런저런 의견을 나눴다. 그러다가,

“그쪽은 어때?”

이번에도 역시나 귀신같이 알아듣는 집정관.

“마굴 인근 회색 숲 전 지역을 관계자 외 출입통제구역으로 지정하고, 사업을 추진 중입니다.”

“그들이 말을 듣던가?”

다크 엘프를 말하는 것이리라.

“여왕이 까탈스럽게 굴긴 했으나 다른 곳으로 이주할 능력도, 배짱도 없으니 그들로선 말을 들을 수 밖에요.”

“그렇지. 서운하지 않게 적당히 조여.”

“예.”

“참, 그 마계의 나무도 최대한 많이 늘리고.”

태자가 이룬 모든 것들을 집정관은 빠르게 흡수했다. 발키리 같은 경우 본격적으로 정규군에 예편했고, 하나 상단은 벌써 몸집을 두 배로 불렸다. 번이 짜놓은 시스템과 집정관의 권력이 가세하니,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

집정관이 말끝을 흐리자, 황제가 그를 바라보았다.

“왜?”

“다소.. 문제가 있습니다.”

“무슨 문제?”

“태자를 따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에비뉴 중앙 정부에서 보낸 지휘관들의 말을 고깝게 듣는 자들도 있고, 그로 인한 사소한 마찰도 여럿 보고받았습니다.”

황제는 피식 웃었다.

“놔둬.”

“예?”

“너는 나 말고 다른 사람 모시라 하면 웃는 얼굴로 하겠어?”

“아..”

“이럴 땐, 시간이 약이야. 그만큼 녀석이 잘 해왔다는 거고.”

황제는 번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러면서 짓궂게 웃었다.

“이 벽을 넘어서면 태자는 더 큰 것을 얻을 테지. 국가와 황제보다 그 녀석을 그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거니까.”

“크게 될 인물임엔 확실합니다.”

집정관도 인정한다.

“그래, 하지만 그 정도론 안 돼. 압도적이고, 절대적이어야 한다. 장차 에비뉴란 이름을 등에 지려면.”

물가에 내놓은 아이에게 낚시도 하고, 수영도 하라 떠미는 것도 유분수지 황제는 가혹할 정도로 아들을 내몰았다. 그러나 이조차 이겨내 꿋꿋하게 자랐을 때, 그땐 그 어느 누가 녀석의 앞길을 막을 수 있을까.

“보자고. 이제 열다섯 살이야.”

“예.”

집정관이 미소 지으며 황제를 따랐다.

어느덧 그들은 궁에 도착한다.

가장家長의 귀환에 모든 사람이 나와 있었는데, 20명 이상의 황비들과 그 자식들, 주요 친인척이 모이니 일백은 가뿐히 넘어갔다.

이럴 때, 보이지 않는 권력이 누구에게 집중되어 있는지를 알 수 있다. 2황비와 7황비가 사건에 휘말려 밀려난 이후론 여인들의 천하는 무주공산이나 다름없었는데,

“호오..”

황제는 자신의 앞으로 걸어오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아스트리드?”

집정관이 옆에서 작은 목소리로 고했다.

“최근 활동이 많습니다. 아무래도 태자의 일로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기억 속 그녀가 잔상처럼 스친다. 조용한 성격에 나서길 좋아하지 않는 여자. 하지만 당찬 면도 없잖아 있었다.

그런데 보라.

그녀가 마치 대표처럼 황제를 맞이하는데, 저지하는 이가 없다. 집정관의 말처럼 그녀는 묘하게 변해있었다. 황제를 바라보는 시선도 다부졌으며, 목소리 또한 당차다. 물론 그러면서도 황제의 기분을 맞추려 노력함을 잊지 않는다.

“하루하루 매일매일 모든 신께 기도했습니다.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폐하.”

집정관이 고개를 숙이며 물러나자, 황제는 그녀를 맞았다.

“어쩐지 그대의 목소리가 전장에 들리는 것 같더라니. 고맙소. 덕분에 일이 모두 잘 풀렸나 보오.”

아스트리드는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며 다소곳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절대 나긋나긋하지 않다. 지금 이 순간에도 생각한다. 가장 적절한 말을, 무엇이 제일 좋은 표정인지까지도.

“왜들 힘들게 이리 나와 있소? 들어갑시다. 하하!”

황제가 가볍게 그녀의 허리에 손을 두르며 걷자, 황비들의 눈빛이 반짝였다.

아스트리드.

현 태자의 어미이며, 망국의 공주 출신.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아니 누구도 가능하다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고개를 들어 앞을 보니 그녀의 뒷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번이 콩가 왕국에 버려졌다는 소식을 들은 그 순간, 아스트리드의 머릿속에서 뭔가가 뚝! 끊어졌다. 그녀는 그 길로 람보르로 달려가 아버지에게 조언을 구했는데, 이미 그는 모든 것을 준비해놓고 기다리던 상황이었다.

하나 상단은 돈을 쥐고 있었다. 광산 사업과 이윤이 많이 남는 각종 유통을 쥐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수도 귀족들과 연이 닿아 있었는데, 번은 그런 모든 인맥을 쌓아두고 떠났다.

그리고 이제 그녀가 나선다.

아들이 갈아놓은 텃밭에 소매를 걷어붙이고 들어선 거다. 비록 이제 아들은 없지만, 그녀는 믿는다. 언제고 번이 돌아오면 푹신한 카펫을 깔아줄 수 있으리라고.

“식은 잘 치렀나요?”

대청으로 들어서며 아스트리드가 물었다.

“며느리가 아주 예쁘다오. 그대도 보면 아주 좋아할 거요.”

무능하고 무기력한 엄마는 이제 없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여자가 되리라!

“태자가 의젓하긴 하지만, 객식구 눈칫밥 먹을까 걱정이 앞섭니다.”

그녀는 이제 할 말은 한다.

“하하! 행여라도 그런 걱정은 하지 마시오. 그 녀석이 콩가 왕실을 구워삶아 먹었으면 벌써 두 번은 먹었지, 어디 가서 기죽을 아이요?”

“하오나 이 못난 애미의 마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 공을 세운 태자가 그리 모진 환경에서 자립해야 하는 상황도 쉽게 납득하기 어렵고요.”

그건, 녀석이 나를 속이고 여러 가지 불미스러운 일을 벌여서 그렇소. 라고 말할 순 없었다. 보는 눈 듣는 귀가 많았으니까.

“태자에 관한 것은 나중에 따로 얘기합시다.”

아스트리드도 딴지 걸지 않고 끄덕였다. 그녀도 내막은 안다. 하지만 모르는 척, 순진한 척 연기한 거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말 한마디 받아내려고 말이다. 이것만 보아도 그녀가 얼마나 저돌적인지 알 수 있었다. 여자이기에 할 수 있는 일, 황비여서 가능한 것을 꼭꼭 챙기고 있었다. 그녀 덕분에 이 자리에 없는 태자에 대해 모두가 한 번씩 떠올리게 되었으니까.

“예.”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옆으로 물러나자, 황제는 자신의 의자 앞에 가서 외쳤다.

“먼 길 늠름하게 다녀온 우리 에비뉴의 자랑스러운 전사들에게 앞으로 사흘 동안 술과 고기를 마음껏 내린다!”

이미 콩가 왕국에서 한바탕 거하게 얻어먹었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에비뉴에서 벌이는 축제는 타국에 보여주는 용도도 있었다.

이번에도 우리는 이겼다!

철의 군대와 함께라면 언제나 승리할 것이다! 라고 말이다.

“축제를 열어라!”

주인의 빈자리가 무겁게 내리누르던 궁에 오래간만에 활력이 돌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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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콩가 왕국에서 가장 뛰어난 마법사라 들었소.”

늙은 마법사는 자신을 찾아온 사내를 바라보았다. 불과 얼마 전엔 그리 냉대하더니, 오늘은 또 무슨 일인가?

“과찬이십니다. 대공.”

마탑을 찾은 번은 거침이 없었다. 긴 세월 모진 세상의 풍파를 다 겪어본 어진 마법사였지만, 번은 그가 예상할 수 있는 범주를 아득히 넘은 인간인 듯했다.

“모두가 한 목소리로 말할 땐, 그게 진실이란 것이겠지. 겸손할 것 없소. 그대가 오늘까지 흘린 피땀이 그러한 위상을 만든 것이니.”

에비뉴에서 온 대공이 말을 참 잘한다는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란 생각이 든다.

“한데, 그런 사람이 왜 그리하셨소?”

어느새 마법사의 앞엔, 으르렁대는 호랑이 한 마리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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