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좌의 게임-128화 (128/177)

# 오라이-! #

생명이 태어나는 순간은 언제나 경이롭다. 내 배 아파 낳은 것이 아니라도 이걸 목격하면 냉담하던 수컷도 없던 부정이 생길 정도다.

비슷한 이유로 카시오페이아도 침을 꿀꺽 삼켰다. 비록 진짜 그녀가 낳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미 그녀의 마음속엔 내가 엄마야! 라는 생각이 뿌리박혀 있었다. 드래곤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는 죄책감을 이런 식으로 이겨내는 것이랄까.

“네, 네이가 나오려고 해요!”

카시오페이아가 알에 바짝 붙어 말하자, 번은 혀로 입술을 축였다.

도와줄 때를 보고 있는 거다.

-너무 가까이 붙지 마. 자칫하면 물린다. 어떤 영혼이 깃들었는지도 모르잖아! 갓 태어나도 드래곤은 드래곤이야. 악어 정돈 가볍게 넘어서는 턱을 가졌을 걸?

드래곤은 죽기 전, 만령을 사산한 알에 넣었다. 텅 빈 깡통에 소프트웨어를 탑재한 것과 같은 건데, 악마는 이걸 두고 계속 우려를 표해왔었다. 보통 인간도 믿을 수 없는데, 한恨이 되어 남은 것들이 오죽하겠느냐는 말. 거기에 더해, 드래곤의 그릇에 인간의 보잘 것 없는 영혼을 담았으니, 그게 제대로 되겠나?

‘조용해.’

하지만 번은 통제할 자신이 있었다.

그 자신이 수없이 해봐서 안다. 아무리 날고 기어도 어린 몸뚱이론 아무것도 못 한다는 것을 말이다. 또한 타고 난 본성이 어찌 됐든, 후천적으로 충분히 커버할 수 있다고 믿었다.

스윽.

번이 두 손을 알에 대었다.

두근! 두근!

정신을 집중하자, 녀석의 작은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떤가요?”

카시오페이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번은 턱짓했다. 물러서란 뜻이다.

“예..”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저번에 흉한 꼴을 당했던 것이 머리에 스쳤는지 세 걸음 물러나는 그녀를 보며 번은 눈을 감았다.

‘움직이고 있어.’

보통 알 속에선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다. 그 안에서 답답하다 느껴질 때쯤이 이제 세상 밖으로 나갈 때가 되었다는 것인데, 녀석이 날개를 양쪽으로 밀어내는 힘이 알껍데기를 타고 전해져왔다.

‘준비가 된 건가?’

번은 끄덕이며 손에 조금씩 힘을 주기 시작했다.

저저적.

아주 조심스럽게, 한 번에 깨어지지 않게 악력을 썼다. 문어 빨판처럼 알에 달라붙은 손바닥은 느리게 좌우로 벌어졌는데,

쩌저저저저저적!

찔끔찔끔 균열을 보이던 것이 어느 순간, 아래까지 쭈욱 찢어져 내렸다.

그리고,

“아? 앗!”

카시오페이아가 절로 터지는 비명을 두 손으로 틀어막았다.

“······?”

눈 앞엔, 다 자란 매보다 약간 큰 까만 녀석이 깨진 알 속에 있었는데,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오징어처럼 추욱 늘어져 있었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숨을 못 쉬잖아?

악마는 주로 생명을 거두는 쪽이지 산파는 아니다. 새생명에 대해선 아는 게 무지하다는 것. 그러나 번은 이쪽으로 경험이 많았기에 빠르게 손을 움직여 작은 생명의 입에 손가락을 넣고 이물질을 빼낸 뒤, 녀석의 등을 두드렸다.

양수에 싸여 있던 인간의 아이도, 단단한 알껍데기 속에 들어있던 이런 녀석도 그 안에선 숨을 쉴 수 없다. 이제 세상에 나와, 첫 숨을 쉬어야 비로소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마셔!”

번이 응원하듯 외쳤다.

그 자신이 여러 생명으로 태어나봤기에 이 순간이 얼마나 답답하고 중요한지 잘 알고 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배우는 것. 숨쉬기였다.

“어서!”

번이 녀석의 가슴을 꾹꾹 손등으로 누르자,

파하..!

아직 눈도 못 뜬 녀석의 주둥이가 붕어처럼 뻐끔거리며 숨을 토해냈다.

“됐어요!”

카시오페이아가 후다닥 달려와, 꺄악 꺄악 소리를 질렀다.

“귀, 귀여워!”

번들번들한 비늘은 뱀의 그것과 같고 새까만 색은 마냥 불길했지만,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예뻐 보인다 하지 않은가? 카시오페이아는 양손으로 볼을 감싸고 어쩔 줄 몰라 했다. 세상을 다 얻은 표정이랄까?

하지만 번의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이상해.’

그랬다. 폐가 활성화되고 첫 숨으로 세상을 들이마셨지만, 어린 드래곤은 뭔가 묘했다. 분명, 숨은 쉬는데 여전히 척추 없는 동물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어딘가 아파 보이는 건 아니다. 이건 마치..

‘의지가 없어?’

끈 달린 목각인형보다도 더 자의식이 느껴지지 않았다.

-저놈 왜 저래?

그때였다.

“케엑! 켁, 켁!”

드래곤이 고통스러워하기 시작했다. 머리를 미친 듯이 부르르 털어대기도 하고, 몸을 까뒤집으며 데굴데굴 구르기도 했다. 목에 이물질이 걸린 것 같달까?

“이런..!”

번은 녀석을 돕기 위해 급히 손을 뻗었다. 아직 꺼내지 못한 어떤 것이 녀석을 괴롭히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쿠아악!”

녀석이 뭔가를 뱉어 냈다.

흠칫.

-어어? 어어어? 저건?

악마가 알아보았고,

“······!”

번 역시 그게 뭔지 눈치챘다.

엄지손가락 한 마디만한 하얗고 영롱한 구슬처럼 생긴 그것이 엄청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왜?”

번이 구슬을 손에 집어 들었다.

구슬이 품은 것은 아주 불쾌하기 짝이 없다. 이걸 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지구의 그 어떤 쓰레기보다도 더러운 기분을 느낄만큼.

-하나 빼고, 나머지를 뱉어낸 건가?

악마는 그렇게 예상했지만,

“으으으으으..!”

어린 드래곤이 몸을 바들바들 떨어대자, 번은 다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재빨리 녀석이 뱉어낸 구슬을 품에 넣어두고, 다시 손을 뻗는다.

그런데 그 순간!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아주 익숙하고도 낯선.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음성이 그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너..?”

오싹.

소름이 돋을 정도로 어이가 없다.

어린 드래곤의 눈꺼풀이 올라간다. 그리고 그 안에서 뱀의 그것처럼 반질거리는 눈동자가 세상을 본다. 또렷한 초점과 그것에 거울처럼 비치는 상은 번이다.

푸르르..

온몸을 털더니, 엉덩이로 중심을 잡고 뒷다리로 받쳐 상체를 세운 드래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번을 빤히 올려보며 다시 말한다.

「내가 꿈을 꾸고 있나?」

그런 기분을 느끼는 것은 드래곤 뿐만이 아니었다.

-이건.. 불가능해! 저놈은 죽었다고!

악마가 물리적인 주둥이가 있었다면 침이 한바탕 튀었으리라.

“대체...”

번은 고개를 갸웃하며 팔짱을 꼈다.

놀랐지만 회복이 빠르다. 지금 눈앞에 세상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지만, 그에겐 그다지 특별한 일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신 역시 그러했으니까.

‘네가 인간의 영혼을 밀어낸 건가?’

「그런 시도도, 기대도, 인식도 없었다. 나는 죽었어. 확실히 말할 수 있다. 그 영면으로 향하는 순간을 맛봤으니까.」

-그래! 저놈은 죽었다고! 우리가 모두 봤잖아!

번은 어깨를 으쓱했다.

‘아마.. 누가 장난친 모양이야. 지켜보는 놈들이 많다고 했으니.’

이게 가능한 것은 오직 하나. 신神이다.

그리고 번은 이때, 아주 작지만 어떤 가능성을 본다. 정체는 모르지만, 내 인생을 이리 꼬이게 한 그놈이 근처에 있다고. 모든 신이 이런 권능을 가진 것은 아닐 테니 말이다.

‘애초에 영혼을 넣으려고 했던 거잖아. 안될 게 뭐 있어. 그놈들보다는 네가 더 잘 맞았나 보지.’

복잡하게 생각할 것도 없다. 어차피 이 문제는 답해줄 누군가를 만나, 멱살 잡지 않는 한 절대 풀 수 없다는 걸 아니까.

「허허허..」

드래곤은 마치 세상 다 산 인간처럼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겉으로 보면 눈을 똘똘하게 부라리며 주둥이를 새처럼 짹짹거리고 있을 뿐이지만. 그리고 이런 모습에 껌뻑 죽는 존재가 여기 하나 있다.

“꺄아아악! 네이!”

카시오페이아가 드래곤에게 달려들어 껴안고 얼굴을 비벼 댔다. 물론 이 와중에도 그녀는 팔에 최대한 힘을 푸는 것을 잊진 않는다. 조심하느라 엉덩이도 뒤로 쭉 빼고..

그 모습이 너무나 우스꽝스러웠지만, 그래서 더 진하게 전해진다. 그녀의 사랑이.

“아가! 우리 아가!”

엄마니까.

.

.

.

‘간단하게 현실 파악하자. 차라리 잘됐잖아? 타락한 영혼보다는 네가 백번 낫지. 너도 더 살고 싶어 했잖아.’

카시오페이아가 깨끗한 수건으로 몸을 닦아주는 것이 그리 싫진 않은 지 얌전히 앉아 번을 바라보는 네이는 아직 충격에서 완전히 벗어나진 못한 것 같다.

드래곤의 환생.

그는 번 이후로, 기억을 가지고 새 삶을 얻게 된 두 번째 존재가 된 것이다. 물론 세상을 뒤져보면 이러한 경우가 더 있을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성적인 드래곤으로선 쉽게 납득하기 어려웠나 보다.

「이런 방식의 영혼 전이가 가능하다니.. 죽음을 앞둔 고룡들이 알면 눈이 뒤집히겠군.」

‘글쎄. 그게 원한다고 다 될 것 같진 않은데?’

우연이든, 어떤 놈의 장난이든 확실한 것은 이게 의도적으로 할 수 있는 영역을 아득히 넘어있다는 거다.

“아유-! 이 발가락 좀 봐! 어쩌면 이리 예쁠까!”

고사리 같은 네이의 앞발을 만지작거리며 카시오페이아가 좋아 죽겠다고 날뛰자, 번이 피식 웃으며 묻는다.

‘너, 크는 데 얼마나 걸려?’

사실 번은 새끼 드래곤에게 별 기대를 하지 않았었다. 그저 상징 정도로 쓰며, 정치적인 입지를 다지는 데 주력하려 했으니까. 그런데 이렇게 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기억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 그건 바로 제한속도를 아득히 넘어 질주하는 고속버스나 마찬가지 아니겠나?

-야, 막 태어난 녀석에게 그게 할 말이냐?

악마가 금세 적응한 번이 어이 없단 듯 말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은데?」

네이도 악마와 비슷한 기분이었는지 씁쓸하게 말한다. 하지만,

‘그럼 뭐가 중요해?’

번은 당당하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가 중요한가? 아니. 번에겐 모르는 건 반드시 밝혀야 직성이 풀리는 집착 따위보다는 차라리 앞을 보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 비리비리한 몸이 좋냐? 공주가 수발들어주니 좋아?’

「아,아.. 아니다.」

‘어리광부리지 마. 넌 애가 아니야.’

번은 생존에 관해서라면 아주 가차없는 남자였다. 자신에게나 타인에게나. 심지어 드래곤처럼 쓸모있는 녀석이 공주의 품에서 뒹굴 거리는 꼴은 곧 죽어도 못 본다.

부릅뜬 눈으로 녀석을 빤히 바라보자,

크르릉.

네이는 불편한 듯 머리를 돌렸다. 그러면서 말했다.

「육체적으로 성체가 되려면 적어도 천 년은 지나야 하지만, 네 어둠이 성장에 도움이 될 순 있겠지.」

‘천 년?’

장난하냐? 번의 얼굴이 일그러지자, 악마가 말했다.

-해츨링이라 불리는 드래곤의 유아기는 아주 길고 더디다. 오크 같은 미개한 몬스터는 몰라도 상위 마족이나 괴수들에게 사냥을 당할 정도로 약하기도 하지. 그래서 드래곤 어미는 새끼가 완전히 자랄 때까지 끼고 산다. 네가 본 둥지가 그렇게 넓고 오래된 것에는 다 이유가 있지.

‘그거야 일반적일 때고.’

천 년이라니! 내가 늙어 죽고 난 이후에 써먹을 수 있는 보물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녀석이 기억을 보존하고 있다고 해도 육체가 성장하지 않으면?

- 어쩔 수 없다. 그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법칙이라 거스를 수 없어.

‘법칙은 개뿔..’

번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이죽거리자, 네이가 불안한 표정으로 움찔댔다.

“네이야. 어디 불편하니? 엄마가 여기 긁어줄까?”

카시오페이아가 네이를 안아 들었다. 저러고 있으니 귀부인 품의 고양이 같다. 5천 년이나 살았고 세상 모든 미련을 버리고 떠났건만, 인간 여자의 손길에 이리저리 몸을 맡긴 드래곤. 이게 참 적응이 힘들다.

그런데 그를 더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번의 눈동자였다.

“세상에 안되는 건 없어.”

소리 내어 말하는 번의 모습에 카시오페이아가,

“네?”

고개를 갸웃했다.

번은 설명 대신 씨익 웃으며 그녀에게 말한다.

“오늘 하루만 네이를 부탁하오.”

부탁한다니 반사적으로 끄덕이긴 하는데, 이상함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하루만?

“나는 가볼 곳이 있으니.”

현관을 향해 뚜벅뚜벅 걷는 그에게 악마가 물었다.

-뭘 하려고?

‘뭐긴.’

손에 든 스트레이트를 포커로 바꿔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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