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위 1 #
-집중해!
‘알아.’
번의 가장 큰 장점. 바로 이 순간 집중력이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감정에 흔들리지 않고, 몰입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아주 큰 차이를 만들 수 있다.
맹수가 바로 옆에서 어슬렁거려도 내 발치의 풀을 뜯어 먹으며 버티는 얼룩말의 차분함. 주변에서 큰 싸움이 나도 내 사냥감만을 쫓아 달리는 하이에나의 선택 집중력. 그런 것들이 번에게는 있었다. 그리고 그런 것이 없다면 이 주문은 절대 완성할 수 없다.
“넌 오늘 멀쩡히 돌아가지 못할 거다. 그 주둥이를 완전히 뭉개주지!”
그래서일까? 카이사르가 아무리 도발해봐야 번에겐 먹히지 않았다. 이미 자신만의 세계로 빨려 들어갔으니까.
‘우로 차가움을.’
번의 오른손에 얼음 결정과도 같은 푸른 빛무리가 얽혔다. 이 주문은 아무런 도구 없이 시술자의 몸을 기반으로 하여 순간적인 마법진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마나를 느끼지 못한다곤 하지만, 이제 몸속 기운을 움직여 배치하는 것은 문제가 없었다.
마나를 품었지만, 느끼진 못한 애매한 상태. 그게 번도 답답했다. 공기가 빵빵하게 들어있는 풍선을 볼 순 있지만, 그 안의 공기는 파악할 수 없달까? 어쨌든, 풍선이라도 어딘가? 덕분에 이런 편법으로 하나는 건졌지 않나? 이제 주문만 완벽하게 외면 된다.
‘좌로 뜨거움을!’
번의 왼손엔 이글이글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6개월 전, 스캇이 맨 처음 번에게 무얼 알려줄까? 물었을 때, 번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몸을 지킬 수 있는 거요!’라고 답했었다. 그것이야 말로 번의 무의식에 깔려 있는 강렬한 생존 욕구의 표출이자, 현재 가장 필요한 능력의 염원이기도 했다.
‘정확한 비율로 둘을 섞어..’
방패가 필요했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지켜줄 수 있는, 강력한 보호장비를 원했다. 그것이 바로 이 주문이며 번이 성공한 첫 번째 마법이다.
‘물에 담는다.’
열火과 냉冷을 물水에 넣어, 미온수로 만들어야 했다.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융합하여 서로 싸우게 만든다. 그러면 이 공간에서는 서로의 온도를 빼앗으려는 대류가 일어나게 되는데,
쩌어어어엉-!
이렇게 만들어진 얇은 막은 다른 것들이 침범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크레이지 실드!”
약 2미터의 푸르스름한 방패 모양의 막. 번의 두 손이 그걸 움켜쥐고, 앞으로 뻗었다.
그그그그그그극-!
실드가 미친듯이 떨리고 있었다. 스캇이 직접 창안한 주문이며, 창안자를 닮은 마법. 그야말로 미쳤다. 오죽하면 크레이지란 단어를 앞에 붙였겠는가?
“크윽!”
-버텨! 이제 시작이다!
‘알아! 안다고!’
손을 타고 밀려오는 진동은 시전자의 오장육부를 뒤흔들 정도로 강렬했다. 30년 된 낡은 버스를 타고 비포장 시골길을 질주하는 기분? 매스꺼움이 아마 그 몇 배는 되리라. 이는 쉴 새 없이 딱딱 부딪혔고, 다리는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이 비틀거린다. 하지만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보통사람이라면 이 시점에서 비명을 지르거나 고통에 몸부림치며 주문을 풀어버렸을 거다. 하지만 번은 그 누구보다 강인한 인내심으로 버텨낸다.
“오! 대단하군요. 마치 얼음으로 만든 방패 같습니다! 아름다운 마법이네요.”
집정관이 크게 놀라며 번에게 물었다.
“이제 준비가 되신 겁니까?”
번이 힘겹게 끄덕이며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예..”
몸이 정확히 양분되어 한쪽은 뜨겁게, 다른 한쪽은 차갑게 시달리고 있었다. 보통 제물이나 다른 마정석 혹은 오행의 힘을 막아줄 기물로 이 힘을 받아내야 하는데, 번에겐 그게 없으니 오롯이 몸뚱이로 감당할 수밖에 없었다. 반쪽은 한여름 아스팔트에 누워 몸을 지지는 기분, 반쪽은 얼음물에 푹 담가놓은 것 같았다.
“좋습니다! 그럼 카이사르 황자님! 시작하십시오!”
집정관이 외치며 뒤로 물러나자, 카이사르가 번을 노려보며 자세를 취했다. 그 창끝이 정확히 번의 심장을 겨누고 있었고, 살짝 열린 입술에선 섬뜩한 말이 나왔다.
“다시 말하지만, 내 창이 어디로 향할진 나도 모른다.”
카이사르는 이번에야말로 기필코 번의 팔다리 하나쯤은 반드시 끊어놓을 생각이었다. 그런 다음 힘 조절에 실패했다고 둘러대면 그뿐 아니겠는가? 그의 솔직한 심정으론 지금 좋은 점수를 받아 경연에서 이겨야 한다는 마음보다는, 번을 어떻게든 후려치고 싶은 마음이 더 강했다.
그 순간,
피식. 웃는 번의 작은 도발.
또다시, 빠직! 뒤통수 신경이 끊어지는 기분을 맛보고 있는 카이사르였다.
“이노오오오옴-!”
카이사르가 볼 땐, 번이 들고 있는 방패가 너무도 허약해 보였다. 종잇장 같은 거 하나 믿고 저리 서 있다는 것 자체가 코웃음만 나왔다. 하지만 그는 오늘만큼은 방심하지 않는다. 전에 그렇게 데이지 않았나? 얕보지 않으리라. 이 찌르기 한 번에 지난 1년을 넘어, 평생 훈련했던 모든 땀과 노력을 담으리라!
“차아아아아아-!”
카이사르의 창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냥 찌르는 것이 아니다. 창대를 쥔 손을 돌려 회전력을 가미하고, 이렇게 찌르는 창은 강선을 판 소총에서 튀어나온 탄환처럼 관통력을 지닌다.
-히이익!
-어멋!
-저, 저걸 어째!
군중도 놀랐다. 공기마저 마찰력에 타들어 가며 창이 지나는 길에 불그스름한 꼬리가 만들어질 정도로 놀라운 위력의 창술이었다.
"죽어라-!"
카이사르의 창이 순식간에 번에게 달려들었다. 그걸 보고 있는 번은 마치 불에 달군 거대한 쇠말뚝이 날아오는 기분이 들었다.
'······!'
언젠가 이런 순간이 있었던 것 같다. 한가로운 어느 날 오후 풀을 뜯어 먹고 있는데, 문득 올려본 하늘에서 독수리의 날카로운 발톱이 후욱! 눈앞으로 다가왔을 때, 야심한 시각 사람들의 눈을 피해 나무 열매를 따 먹고 있는데, 갑자기 날아온 화살에 허리가 뚫렸을 때. 토끼나 원숭이였던 그때는 전혀 대항도 못 해보고 절명했었지만, 이젠 다르다.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할 것이다. 나는 강하다고!
쩌엉-!
“크흡..?”
카이사르의 창 촉이 방패와 닿는 순간, 엄청난 반탄력이 카이사르를 덮쳤다. 이제까지 번이 감당하고 있었던 진동이 창을 타고 카이사르에게 옮겨간 것이었다. 커다란 종을 친 후 곧장 손으로 만져보면 울림과 떨림이 팔을 타고 그대로 전해지듯, 그와 같은 원리! 그 스케일이 다를 뿐이다.
방패의 또 다른 효과, 공명!
‘이게 뭔..!’
창을 쥐고 있던 두 손을 타고 밀려드는 해일 같은 진동에 카이사르는 왈칵 토악질이 나왔다. 순간적으로 뒤틀린 창은 미는 힘과 버티는 힘, 거기에 더해진 진동에 공명해 견디지 못하고, 와작! 부서지기 시작했고,
“우우웁..”
구토를 참는 카이사르의 입가로 선혈까지 비쳤다.
“이럴..수가..”
번의 방패는 견고했다. 카이사르의 힘을 다 받고도 한 걸음조차 움직이지 않았으며 흠집조차 없었다. 반투명한 방패 너머로 둘의 눈이 마주친다.
“······?”
“······.”
말은 없었지만, 표정으로 안다.
‘고작 이거냐?’
번이 카이사르를 깔보며 웃었다.
방패의 성능은 이미 몇 번이나 확인했다. 카이사르가 아닌 저 스캇을 상대로 말이다. 물론 물리력에 버틸 수 있는 것을 확인하고자 페트릭에게도 부탁했었다. 아주 사소한 것도 준비하고, 또 검토하는 번의 성향은 이렇게 압도적 결과를 만들어내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 이 자식이..!”
카이사르가 분노와 자괴감 섞인 여러 가지 감정의 폭풍에 치를 떨고 있을 때, 집정관이 다가왔다.
“오! 놀랍군요! 대단한 방어력입니다! 과연 총군사께서 칭찬할 만한 실력입니다!”
집정관의 말과 함께 사람들이 소리쳤다.
-대단하다!
-막아냈어!
-이겼다! 번 황자님이 이겼어!
-최고예요! 꺄아아아! 멋있어! 어쩌면 좋아!
이미 승부는 끝난 듯 보였다. 하지만 아직 번은 방패를 풀지 않았다. 집정관이 묻는다.
“카이사르 황자께서 전력을 다한 공격을 펼쳤는데, 이리도 손쉽게 막아내다니. 어지간한 몬스터는 감히 엄두도 못 내겠습니다.”
“과찬이십니다.”
“이거, 유지시간은 얼마나 되는 겁니까?”
이번 경연은 대련이 아닌 학습이다. 집정관에게는 번이 카이사르를 이기고 말고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지난 1년간 얼마나 많이 노력하고 배웠느냐가 핵심.
“연속으로 사용할시 5분 정도입니다.”
“아! 잠깐잠깐 필요할 때마다 쓸 수도 있다는 뜻이군요?”
“그렇습니다.”
번이 보란 듯이 방패를 풀었다.
몸을 반으로 쪼개 할퀴는 고통이 사라지자, 표정이 한결 편해진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저쪽에 방치된 카이사르는 미친듯이 몸을 떨고 있었다. 분노로 인한 것도 있었지만, 크레이지 실드의 반탄력이 아직 그를 괴롭히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공격자가 이런 대미지를 입는다는 사실은 쏙 빼고 장점만 얘기하는 번이다.
“좀 더 크거나 작게도 형태를 변형할 수 있습니다.”
“오! 원하는 부위에 선택적인 방어를 할 수도 있다는 말이군요? 보호구나 갑옷처럼요?”
“그렇습니다.”
“과연, 언제 어디서나 이런 방패를 소환할 수 있다면 늘 위험에 노출된 군주로선 일만 대군을 등 뒤에 놓고 있는 기분일 겁니다. 배우고자 한 의도도 좋았고, 그것을 성실히 수행하여 얻어낸 것도 기특합니다. 나라를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 군주의 안전도 중요하니까요.”
집정관의 칭찬이 이어지자, 군중은 더욱 타올랐다.
-와! 대단해요! 번 황자님! 여기 좀 봐주세요!
-번! 번! 번!
-나를 가져요! 꺄아!
젖을 내놓고 흔드는 여자, 목이 터질 때까지 고함을 지르는 사내, 미래의 황제를 향해 눈길이라도 한번 받아보겠다고 악을 쓰는 사람까지. 난리가 났다.
이때, 집정관의 뒤로 한 사람이 다가왔다.
스캇이었다.
“일견 쉬운 주문인 것 같아도 이 크레이지 실드는 술식에 대한 이해와 빠른 계산, 단 한 치의 실수도 없어야 펼칠 수 있는 고위 마법입니다.”
능글능글하게 웃는 그는 아주 만족스러운 듯 보였다.
‘좋냐?’
집정관이 웃음을 참으며 눈짓했다.
‘그래 좋다! 음하하하!’
스캇도 기분을 숨기지 않았다.
둘의 대화는 이어진다.
“제 마법은 보통의 마법보다 더 까다롭고,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번 황자께서는 아주 잘 따라와 주었습니다. 이 경지는 명석하다 이름난 영재도 마탑의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수업을 받아야 3년 안에 이룰까 말까 한 것이며, 이 한 수로 다른 전반적인 지식을 포괄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저기 앉아 계신 내로라하는 마법사분들께 직접 여쭈어도 좋을 것입니다.”
집정관은 군중 사이에 앉은 고깔모자를 쓴 마법사 집단을 힐끔 보며 끄덕였다. 대중의 관심이 높은 행사인 만큼 다양한 곳에서 관람을 왔는데, 마법사들의 표정만 봐도 스캇이 호언장담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좋습니다. 총군사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다른 기초지식에 대한 것은 넘어가도 좋을 것 같군요.”
“해도 좋습니다만, 시간 낭비일 것입니다.”
자신만만한 스캇을 보며 집정관이 혀를 찼다.
‘그만 좀 해라. 이놈아.’
‘내가 뭘?’
느글거리는 스캇을 본 집정관은 돌아선다. 본래는 마법에 대한 이해와 그간 스캇에게 어떠한 것들을 배웠는지 물어야 했지만, 생략하기로 했다. 이미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아 보이니까. 얄미운 스캇과 더 말을 섞기도 귀찮고.
-이겼다!
-번 황자님께서 이겼어!
-멋져요! 멋져!
이미 번이 후계자라도 된 듯 분위기가 휩쓸리자, 그걸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아닙니다! 이건 잘못되었습니다!”
카이사르였다.
“으음?”
집정관의 얼굴이 돌아갔다.
“잘못되었다고요?”
“그렇습니다! 제 창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아마 앞선 시범 때 충격이 누적되어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누가 봐도 억지였다.
“저놈의 마법이 그리 대단한 게 아니란 말입니다! 제가 실수한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십시오!”
사람이 어디까지 추잡하게 곤두박질칠 수 있는지를 카이사르가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한번만 다시 기회를 주세요! 이번엔 깰 수 있습니다! 제가 이길 수 있다고요!”
집정관이 자신도 모르게 딘딘을 돌아보았다.
“..끄응..”
딘딘도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골치 아프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래도 1년을 가르친 제자인데, 추태를 보이는 것이 안타까운 거다.
‘질투심에 눈이 멀었구나.’
번은 이제 열 살이다. 고작 그런 동생에게 저리되다니. 이건 군주의 자질이고 뭐고 떠나서, 사람이 덜된 거 아닌가? 심지어 그걸 이렇게 만천하에 들킬 정도로 아둔하다니.
‘카이사르는 끝났군.’
집정관이 이리 느끼고 있었으니,
“쯧..”
황제는 더 가차 없이 평가하고 있었다.
능력이 부족하면 심성이라도 곱던가, 그것도 안되면 정치라도 잘해야 할 것을 남 탓으로 돌리는 버릇을 들이면 훗날 그 누가 그를 지지할까? 나라가 망해도 남 탓, 전쟁에서 져도 남 탓을 할 거 아닌가!
군주라는 자리가 위대하고 대단해 보여도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는 무거운 자리다. 가뭄, 역병, 기근, 심지어 홍수나 태풍이 와도 나라님 탓을 하지 않나? 그 모든 것을 담담하게 받아 낼 줄 아는 것도 바로 군주의 미덕이었다. 한데 저런 인성으로 뭘 하겠는가?
집정관은 혀를 차며, 경연을 끝내려 했다. 더 해봐야 추잡할 뿐이라 여긴다.
그런데 이때,
-숏타임이다!
악마가 외쳤다.
‘야, 말조심해. 숏이 아니라 쇼타임이라니까?’
-그거나, 그거나! 어서! 지금이다! 딱 좋아!
“크크크크.. 가소롭구나.”
번의 입이 열리고, 철판을 긁어대는 것 같은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움찔!
모두의 머리가 번에게 돌아갔다.
활활 타오르는 것도 모자라, 시뻘건 핏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두 눈동자. 물씬-! 사방으로 풍기는 음습한 기운까지! 번의 모습이 변해있었다. 그 냉철한 집정관조차 순간, 뒤로 물러나게 할 정도.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