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과 방패 2 #
한편, 군중과 함께 관람석에 앉아 있던 대현자 오그마리온은 옆에 앉은 딸에게 물었다.
“어떻게 보느냐? 네 생각엔 번 황자께서 이길 것 같으냐?”
“글쎄요. 승리야 확신할 순 없지만, 워낙 총명하시니 그래도 구십 점은 받지 않을까요?”
그녀의 말에 오그마리온 역시 끄덕였다. 95점을 받은 카이사르의 창술이 그만큼 뛰어났다는 증거이기도 했고, 그걸 압도할만한 뭔가를 보여주기에 번이 어린 것이 항시 걸렸다.
지난 반 년간 오그마리온은 시간이 날 때마다 번을 도우려 노력했다. 하지만 문제는 번이 너무 바쁘다는 것이었다. 대현자의 가르침을 어느 누가 마다 하겠느냐만은, 동이 트기도 전부터 이어지는 번의 살인적인 일과는 언제나 해가 지고도 끝이 날 줄 몰랐다.
악마를 뽑아내는 작업을 오전 내내 하고, 오후엔 총군사 스캇에게 주문을 배웠다. 그것이 끝나면 망국의 왕 페트릭에게 검술을 배웠으며 그 과정에서 늘 지친 몸을 이끌고 꾸역꾸역 버텨내는 것이 안타깝기 이를 때 없었다. 어른도 지칠 수 밖에 없는 힘든 일을 그 누가 이렇게 해낼 수 있을까? 게다가 고작 열 살 짜리가 말이다.
‘황자께서 높은 점수를 받았으면 좋겠지만..’
충분히 장하다, 기특하다 칭찬받아 마땅할 일들을 해내고 있었지만, 이번 경연은 그런 것을 평가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그저 하나의 스승에서 배운 것을 오롯이 뽐내는 자리 아니던가? 하루를 온전히 창에만 투자했을 카이사르에게 밀린다는 생각이 드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게다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카이사르를 연호하는 군중이 점차 늘어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그나마 지난 대련 때 승점을 얻었을 테니, 충분히 상쇄하지 않을까요?”
그녀의 생각은 긍정적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다행이겠지.."
현자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인다. 뭐랄까? 예측할 수 없는 앞날에 대한 두려움이랄까.
“한 치 앞을 모르겠구나. 하아, 이래서야 어디 대현자라 불릴 자격이 있겠느냐.”
오그마리온의 한탄에 그녀가 생긋 웃었다.
“뭘 그리 깊이 생각하세요. 이건 도박이잖아요. 누가 이길진 하늘만 안다고요.”
그만큼 박빙이란 뜻이었다.
“저 어린 황자가 잘 됐으면 좋겠구나..”
오그마리온은 진심으로 번을 응원했다.
이제까지 번 황자가 보여준 사상이나 백성을 위하는 마음, 어떤 상황에서도 이성을 잃지 않는 차분함 같은 것들이 후계자로서 딱 맞다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저돌적이며 어디로 튈지 모르는 현 황제보다도 말이다. 심지어 그런 황제와 담판을 짓는 그 강단이란!
“저 사람이 스승이란 게 가장 큰 불운이네요.”
우리아가 저 아래 스캇의 뒷모습을 보며 입을 삐죽였다.
“짠돌이, 바보, 멍청이..!”
최근 스캇에게 데이트 신청 비슷한 것을 했다가 차인 것이 그녀가 토라진 이유일 게다.
“하긴, 스캇이 이런 면에선 아주 공정하다 못해, 냉정하지.”
제자였기에 안다. 스캇이란 사람이 얼마나 솔직하고, 냉소적인지 말이다. 그 뿐인가? 눈치 보는 성격도 아니어서 하고 싶은 말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막 내뱉지 않나?
“구십 점도 어려우려나..”
그때였다.
오그마리온이 근심 어린 얼굴로 말끝을 흐리는데,
“점수가 나오려나 봐요!”
우리아의 놀람과 함께,
“허업..! 백.. 점..?”
“허! 뭐라? 지금 뭐라 했느냐?”
오그마리온이 눈을 번쩍 떴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거대한 함성!
-우와아아아아아아!
-번! 번! 번!
-스캇! 스캇! 스캇!
“맙소사!”
우리아가 흥분한 얼굴로 말했다.
“만점이에요!”
-백 점이래!
-그게 말이 돼?
-카이사르 황자님보다 높다고?
-부족함이 전혀 없다는 뜻 아닌가?
-자기가 가르쳤다고 너무 막 퍼주는 거 아냐?
-에이. 말도 안돼! 두고 보면 알겠지!
그랬다.
번이 최고점을 받은 것이었다.
'백 점이라..'
집정관이 묘하게 웃으며 스캇에게 물었다.
“단 하나의 단점도 없었다는 건가요?”
이건 오히려 번에게 마이너스로 작용할 수도 있다. 곧 이어질 시범에서 조금만 모자람이 보여도 모두가 물고 늘어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번의 몸집은 작다. 이미 다 성장하여 시원시원한 동작으로 좌중을 압도하던 카이사르의 잔상이 아직 그대로 남아있을 터. 그것에 비교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 거다.
‘예뻐하는 건 알겠는데, 너무 심했다고. 너.’
집정관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런 눈치를 주었지만, 스캇은 전혀 굽히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조금 전보다 목소리를 키웠다.
“단점이라.. 사실 번 황자를 평가하기엔, 백 점도 모자랍니다. 상한선이 없었다면 이백 점, 삼백 점도 주고 싶을 정도니까요.”
스캇의 황당한 말에 집정관이, ‘야, 네가 그러면 점수 짜게 준 우린 뭐가 되냐?’ 라는 표정이다.
“여러분 모두가 아시다시피 번 황자님은 최근 어려운 일을 겪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성실함을 넘어 독할 정도로 학업에 매진했고, 당초 제가 잡아놓았던 수업을 일찌감치 뛰어넘어 그 다음을 배우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스캇이 5를 준비했다면, 어느새 번은 10을 배울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이제 그걸 증명하기만 하면 되는 일!
“좋습니다.”
집정관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번을 힐끗했다.
“총군사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자! 어디 한번 봅시다!”
번이 남다르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저 깐깐한 스캇이 만점을 줄 정도였나? 순수하게 궁금증이 치밀었다.
-와아아아아!
-번! 번! 번! 번!
더 큰 환호성이 울려 퍼지고, 번은 여유롭게 군중을 향해 손까지 흔들어 보인다. 그리곤 고개를 돌려 집정관에게 묻는다.
“한 가지 청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갑작스러운 요구에 집정관이 갸웃했다.
“말씀해보세요. 들어드릴 수 있는 범위라면 문제없습니다.”
번은 끄덕이며 담담하게 말했다.
“제가 스승이신 총군사 스캇 경께 배운 것은 한 가지 주술과 마법의 기초이론이었습니다.”
마법은 방대하다. 평생을 매진해도 한 계열의 속성도 통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였고, 특히 스캇의 경우엔 아주 변칙적인 혼합 스킬을 구사하기에 배우기란 더욱 어려웠다. 그래서 우선 번은 마법은 무엇이고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가, 속성은 어떻게 나뉘고 어떤 장단점이 있는가부터 시작해 그것을 응용하는 절차와 방법에 대해 배워갔다.
하지만 고작 반년. 이론을 공부하며 실전에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을 구사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하나만 팠다.
“그 한가지 주술을 선보이려 하는데, 이것이 방어용도로 쓰이는 것이라 주술의 위력이나 효과를 증명하기에 어렵습니다.”
“흐음. 그렇다는 건, 그 주술의 성능을 증명해 줄 공격자가 필요하다는 거군요?”
역시 집정관답게 머리가 잘 돌아간다.
“그렇습니다.”
“뭐,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군요.”
집정관이 뒤를 둘러보며 웃었다.
이 자리엔 에비뉴 최고의 무력을 지녔다 평가되는 사내들이 있다. 딘딘, 은사 누구라도 번 황자가 다치지 않게 잘 조절하여 공격할 것이다.
그러나,
“공격자를 제가 직접 요청해도 되겠습니까?”
번은 황당한 요구를 했다.
“특별히 바라시는 상대라도 있습니까?”
반사적으로 묻는 집정관에게 번이 끄덕였다. 그러면서 옆을 돌아보았다. 입꼬리에 가느다란 미소를 매달고서 말이다.
“카이사르 황자를 청합니다.”
“······?”
"······!"
순간, 카이사르는 하마터면 우억-! 소리를 낼 뻔했다. 그만큼 놀랐다는 것이다.
집정관도 궁금해했다.
“이유가 있나요?”
번은 이 시점에 아주 묘한 말을 내뱉었다.
“마지막으로 그와 어울려보고 싶습니다.”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하며 번이 한 말의 의미를 찾으려 할 때, 빠르게 다음 말을 잇는 번. 확실히 노련했다.
“어차피 카이사르 형님은 제가 넘어야 할 상대이기도 합니다. 좋은 가르침을 받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명백한 도발이었다.
“이..!”
'개자식!'
욕은 삼키지만, 카이사르의 얼굴은 이미 구겨졌다. 집정관은 웃음을 참을 수 없다는 듯 번에게 물었다.
“제가 볼 때, 이 제안은 득보다 실이 많을 것 같은데요?”
누가 이기나 정면승부를 해보자는 건데, 집정관이 보기에 번은 저울의 아래에 있었다. 아까 집정관이 칭찬했 듯 카이사르의 성취는 정말 놀라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체구의 차이도 있었고, 번은 공식적으로 알려진 바로는 마나를 느끼지 못한다 되어있었다. 아직까지도 말이다. 스캇의 주문을 배웠다곤 하나, 기본적으로 마법도 시술자의 능력에 비례하는 것 아닌가?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뒤떨어지는 번이 위태롭게 보일 수 밖에 없었다.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단정하는 버릇은 좋지 않다 스승님께 배웠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까보기 전까진 누구도 모른다는 거다.
“크크큭.”
언젠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라는 말을 넌지시 했는데, 그걸 이렇게 써먹나?
스캇이 웃었다.
"흐음.."
이런 맹랑한?
집정관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저편을 본다. 황제의 허락을 구해야 할 것 같았다.
그윽하게 바라보던 황제,
-본인들이 좋다고 하면 하라.
허락이 떨어졌다.
“응하시겠습니까?”
집정관은 카이사르에게 물었다. 이제 그의 선택만 남은 것이다.
"이...!"
눈에 불길이 치솟는 카이사르.
그는 지금 어이가 없고, 화가 나서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렇게 죽기살기로 노력해 가진 모든 것을 쏟아 부었는데, 이놈은 고작 몇 마디 말로 주목받는 것도 모자라 자신을 우습게 보고 있는 것 아닌가?
“네, 하겠습니다! 대신, 제가 서툴러 힘 조절이 미숙할 수도 있습니다! 그 점 양해해주신다면 얼마든지 좋습니다!”
독기어린 시선으로 번을 노려보며 카이사르가 답했다. 집정관이 끄덕이며 번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느 정도의 힘까지 견딜 수 있습니까?”
집정관이 진지하게 묻지만, 번이 환하게 웃으며 답한다.
“최선을 다하셔도 됩니다.”
"······!"
그 말에 카이사르는 머릿속에서 뭔가가 투욱-!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죽여주마!’
카이사르는 자신있었다. 예전의 그 치욕스러움은 정말 말도 안되는 상황이었던 거다. 자신은 마나를 이용할 수도 있고, 이번엔 창을 이용할 수도 있었다. 지금 그의 능력이면 창으로 굵은 통나무를 꿰뚫을 수도 있었으며, 힘을 실어 후려치면 바위도 부술 수도 있을 정도. 게다가 이제 딘딘의 기술까지 배웠으니, 호랑이에 날개를 단 격이라 자신을 평가하는 카이사르다.
“창과 방패라.. 좋습니다. 이 승부로 모든 것이 증명되겠군요.”
다시 펼쳐지는 카이사르와 번의 대결.
이번에 카이사르를 번이 막아낸다면 백 점을 준 스캇을 돕는 셈이 될 것이요, 카이사르는 큰 것을 잃을 것이다. 당연히 막아내지 못한다면 그 반대가 될 것이고 말이다.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십니까?”
집정관이 말하는 사이, 카이사르는 이미 창을 움켜쥐고 번의 근처로 다가오고 있었다. 군중은 갑자기 마련된 흥미진진한 이벤트에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잠깐이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끝나면 말씀해 주세요.”
-카이사르! 카이사르!
-번! 번! 번!
많은 이들의 함성으로 귀가 먹먹해진다. 하지만 번의 머릿속은 오직 악마의 음성만이 울린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그냥 까발리면 간단하게 끝나잖아?
지난 반년, 번은 아주 많은 정보를 손에 거머쥐었다. 일단 만나는 사람들이 죄다 황실의 핵심인물이기도 했고, 어부지리로 얻은 마녀 역시 아주 큰 비밀을 가지고 있었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제 살겠다고 어찌나 떠벌리던지. 의도하진 않았지만, 번은 이미 이 경연에서 이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가슴속에 품고 있는 폭탄을 터뜨리기만 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는다.
‘넌 정치를 몰라.’
-뭐? 내가 뭘 몰라?
‘실력으로 확실히 눌러야 뒷말이 안 나온다고. 카이사르만 경쟁자가 아니니까.’
-이런 악마 같은 놈! 완전히 지근지근 밟을 생각이구나! 다른 놈들 모두 보란 듯이!
‘남 말하고 있네. 악마 주제에 누구보고 악마래? 하여간 웃기는 놈이라니까.'
번이 피식 웃자, 카이사르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웃겨? 지금 웃음이 나오냐? 조막만한게 아주!”
어느새 둘의 거리는 대화를 할만큼 가까워져 있었다. 군중까지는 퍼지지 않는 적당한 소리로 말이다.
“쯧.”
번은 혀를 찼다.
어디가서 꿀리는 성격도 아니었고, 저렇게 건들거리며 나오는데, 예의를 갖출 필요도 못느끼는 번이다.
“도대체가 학습이 안 돼요. 학습이.”
이번 경연의 주제가 바로 학습이다. 그걸 비꼬아 말하는 번.
“저번에 그렇게 깨져놓고, 또 덥석 무냐?”
“뭐? 뭐어?”
카이사르는 당황스럽다. 일단, 번의 말투도 그랬고, 표정 또한 카이사르를 형으로 대하지 않고 있었다. 동네 불량배를 상대하는 느낌? 딱 겨우 그 정도로 말이다.
“불쌍한 놈. 시작하지?”
한심하다는 듯 카이사르를 노려보던 번. 스윽 팔을 들어 올린다.
스캇에게 배운 실전주문.
이제 그것이 모두의 앞에 모습을 드러낼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