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재입니다 #
“쯧..”
황제가 혀를 찼다.
녀석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는 게 재미있어 놀리긴 했지만, 이토록 진지하게 여기고 있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럴 필요까지 있었느냐?”
돌연 황제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조금 전까지 장난스럽던 경박한 톤은 온데간데없다. 장난은 여기까지. 스캇은 황제에게 가벼운 자가 아니었다. 등을 맡길 수 있는 몇 사람 안 되는 전우이며, 속을 다 까뒤집어 보여줘도 부끄럽지 않은 친구 중 한 사람 아닌가?
스캇 역시 황제의 뜻을 알아채곤, 허리를 깊이 숙였다. 그의 얼굴도 사뭇 진지해졌다.
“개인적인 욕심도 있지만, 그 이전에 풀리지 않는 의문이 더 강하여 대현자의 지식을 청했습니다. 지금 번 황자의 몸속엔 세 가지 힘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이는 유례가 없던 것이며 잘 이용하면 복이 될 터이지만, 자칫 큰 화를 당할 수도 있어 고명한 지식인에게 조언을 구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성녀가 노력하는 만큼, 스캇 또한 번의 상태를 매일같이 살펴왔다.
나 때문에 이리되었다. 내가 어떤 실수를 했을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고, 하필 이게 경연 기간이라는 것이 그를 더욱 몰아붙였다. 모두가 지켜보는 무대에서 후계자로 가장 유력하던 황자 하나를 폐인으로 만든 등신이 되는 것 아닌가?
“네가 그리 생각한다면.. 말리진 않겠다. 하지만..”
황제는 걱정스러운 듯 스캇을 보았다. 그와 스승의 관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리하진 마라.”
“······.”
스캇은 머리를 꾸벅 숙였다.
황제의 마음이 전해진 것이다.
“그 아저씨, 오랜만에 보겠군. 9년 만인가?”
황제의 말에 은사가 피식 웃었다.
“11년 만입니다.”
“벌써 그렇게 되었나?”
황제는 과거를 추억하듯 묘하게 미소 짓다가 팔을 내저었다.
“최고 대우로 모시도록. 그 까칠한 양반이 서운하지 않게.”
“예이..”
대청에서 나오는 길.
스캇의 뒤로 집정관이 빠르게 따라붙었다.
“진짜 괜찮겠냐?”
“······.”
스캇은 대답이 없다.
“그녀도 올 텐데?”
“그..”
스캇이 오만상을 찌푸렸다.
“노처녀완 상관없는 일이다.”
“왜 상관이 없어? 거울 주랴? 네 얼굴을 봐. 누가 봐도 의식하고 있다고. 지금.”
흠칫, 스캇은 잠시 멈췄다가 다시 빠르게 걸었다. 마치 귀찮은 벌레를 떼어내려고 하듯이 말이다.
“야! 야아-! 스캇!”
저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스캇의 뒷모습을 보며 집정관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 그의 등을 뒤따르던 은사가 툭 쳤다.
“많이 흔들리는 것 같지?”
집정관이 끄덕였다.
“그럴 거야. 저 완벽주의자 녀석이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에 봉착한 거니까.”
스캇이 가장 껄끄러워하는 사람을 꼽으라 하면, 첫 번째 손가락에 대현자가 꼽힐 것이다. 두 번째가 그의 딸이고. 그런데도 그에게 자문을 구했다는 것은 정신적으로 벼랑 끝까지 몰려 있다는 것과 같았다.
“쓰읍..”
혀를 찬 은사가 숨을 길게 쉬었다. 녀석이 저리 헤매는 것이 보기 좋지 않았던 거다.
“빨리 전쟁터로 가버렸으면 좋겠군.”
그편이 백번 낫겠다. 거긴 생과 사 말곤 아무것도 신경 쓸 일이 없었으니까.
집정관이 그런 은사의 가슴을 툭 쳤다.
“기다리라고. 어떻게든 내가 구멍을 찾아볼 테니까.”
주변국은 그냥 싸워 이기면 그만이었지만, 앞으로 나아가야 할 국가들은 제국과 정치적, 군사적으로 촘촘히 얽혀있었다. 괜히 잘못 건드렸다가는 여우 굴에서 곰이 튀어나올지도 모른다는 거다.
“폐하께서 한계에 다다르신 것 같아. 이참에 이벤트라도 하나 벌이는 건 어때?”
은사의 말에 집정관이 갸웃했다.
“이벤트?”
“그래, 왜 사냥대회 같은 거 있지 않나? 토벌도 괜찮고.”
“오-!”
좋다. 아주 좋은 생각이다.
“시시한 여우 몰이나 하자면 경을 치시겠지?”
“당연하지.”
은사는 집정관의 어깨를 툭툭 치곤 떠나가며 씨익 웃었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말라고. 나도 발끝까지 근질거리던 참이니까.”
집정관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래, 짐승들을 우리에 너무 오래 가둬두었다. 한번 풀어놓을 때도 되었지 않나?
.
.
.
몸을 관조해본다. 구석구석 머리부터 가슴을 지나 팔과 다리, 손끝 발끝까지 세밀하게 훑었다. 번의 육체는 지금 일종의 탈태환골奪胎換骨을 거치며 무武를 익히기에 아주 적합한 상태가 되었는데, 그렇다고 한달음에 산을 넘거나 강물을 뛰어넘을 수 있는 정돈 아니었지만, 꽤 만족스러웠다.
-아직 멀었다. 이제 고작 어퍼 홀 하나를 뚫었을 뿐이니까.
악마가 비아냥거렸다.
“언제는 이것도 대단하다며 추켜세우더니.”
-그땐 그때고, 안주하지 말란 거다. 아직 갈 길이 멀어.
“알아. 시끄럽다. 말 시키지 마.”
닥치란 소리에 악마가 조용해졌다.
번은 다시 명상에 빠져들어 갔다. 전신에 퍼진 신성력과 몸 곳곳에서 반짝이는 오색마나. 저 깊은 곳에 웅크린 어둠의 힘까지 세세하게 관찰하고, 어떻게 써야 할지 시뮬레이션을 한다. 이제 이것들에 적응해 가면서 조울증 걸린 성녀님을 잘 다독여 더 많은 신성력을 확보하면 뭔가 해볼 수 있을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잡았다!
악마가 다급하게 외쳤다.
“어디야?”
침대에 앉아 있던 번이 벌떡 일어났다.
-북서쪽 400미터 정도!
번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또 2황빈가?’
실란, 그 여자가 무슨 수작을 부렸는진 모르겠지만, 저주의 기원은 거기에서 출발했고, 악마가 거짓을 말한 게 아니라면 그곳에 뭔가 있다고 봐야 했다.
“끝까지 더러운 수작을 부리는구나..”
실란과의 인연은 아주 질기고 깊었다. 번이 아주 어릴 적부터 괴롭힘을 주었던 시녀도 실란이 심어놓은 첩자였고, 레인보우 립부터 시작해 그녀와의 아들과 이제 철천지 원수가 되었으니 말해 뭐하나. 무슨 짓을 벌여서라도 후계자 싸움에서 번을 탈락시키려 하는 걸 거다.
“으음..”
하지만 실란이기에 쉽진 않다.
그녀는 황실에서도 가장 큰 권력을 가진 여자 중 하나였고, 그의 아들 또한 촉망받는 후계자 후보다.
-고민할 필요 있나?
번의 고개가 비틀렸다.
“좋은 수라도 있어?”
-받은 만큼 되돌려주면 되는 거 아닌가?
“······?”
지난 반 년간 악마에게 이런저런 지식을 전수 받았다곤 하지만, 아직도 번은 이쪽으론 초보나 다름없었다. 수천 년간 보완되고 이어진 마법과 저주, 지혜가 어디 하루아침에 통달할 수 있겠는가? 심지어 이 악마 놈은 얕은수로 매번 번을 가지고 놀려 든다. 따라올 테면 따라와 봐. 라는 식.
“사냥개만 잡을 생각은 없어. 그쪽에선 토사구팽兎死狗烹하면 그만이잖아. 잃는 게 없다고.”
-아니, 방법은 많다. 저주는 그리 단순하게 작용하지 않아.
“······?”
번이 귀를 기울이자, 악마가 속삭였다.
-나도 슬슬 제물이 필요해. 여기서 버틸 힘이 사라지고 있다.
“네가 살겠다고 수작을 부리는 거야?”
-아니지. 서로 좋자고 하자는 거다. 네가 말했잖아? 윈-윈. 벌써 잊었나? 너는 복수하고, 나는 힘을 얻고. 어제 널 돕는 바람에 밑천까지 다 쏟아부었다고.
번을 매개로 버티기엔 신성력이 너무도 충만했다. 악마가 토양으로 삼기엔 볕이 너무 뜨겁달까? 새로운 피와 공포에 점철된 영혼이 필요했다.
“흐음.”
번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 특별할 것은 없는 방이다. 그래서 특별한 것들이 생기면 의심을 피할 길이 없다. 당장 악마가 힘을 잃고 비리비리해지거나 사라지는 것도 번이 원하는 것은 아니었고 말이다.
“솥단지를 놓을 공간은 없는데? 땅굴이라도 팔까?”
마녀가 하는 행태를 전생에서 본 번이기에 그리 말했다. 하지만 악마는 낄낄거린다.
-그럴 거 없다. 내가 위치를 잡았으니, 저쪽에서 다시 준비를 시작하면 포착할 수 있어. 그때 반격하면 돼.
“카운터 펀치?”
-그렇지.
저주는 철저하게 갑과 을의 법칙에 따른다. 만일 힘이 대등하다면 약한 쪽으로 곤두박질치게 되어있다. 때문에 마녀들의 주술엔 대상의 기력을 깎고 정기를 갉아먹는 것이 우선되며, 그런 후에야 원하는 저주를 담을 수 있다.
‘야구 같은 거군.’
번은 그렇게 이해했다.
저쪽 투수가 공을 던지면 이제 이쪽에서 방망이를 휘둘러 그 공을 던진 놈의 코에 명중시킬 거다. 지금까진 공이 어디서 오는질 모르고 있었으니 무력하게 당했다면, 앞으론 다르다.
-넌 그냥 기다리면 돼. 신호가 오면 내가 알려주겠다.
우리 타석엔 원하는 곳으로 공을 정확하게 칠 수 있는 훌륭한 타자가 대기하고 있지 않나?
‘완전히 박살 내주지.’
씨익.
번이 그렇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잔뜩 벼르고 있을 때,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그놈이 앓아눕긴커녕 전보다 더 나았다잖아요! 벌써 소문이 자자하다고요!”
2황비의 처소에선 고성이 오갔다.
“······.”
마녀 융 또한 아주 곤란하게 되었다. 그토록 자신만만했는데, 일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전혀 짐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방법을 달리해야겠어.”
“또 무슨 방법을 찾겠다는 거예요! 이제 와서!”
“그럼 때려치울 거야?”
그건 아니다. 사실 융이 아니면 그 녀석에게 뭔가 시도해볼 방법조차 없었으니까.
“놈이 몸을 보신할 수 있는 수단을 지닌 것이 분명해. 그러면 이렇게는 안 되지.”
“것 봐요! 어려서부터 독이 통하질 않았다고요! 몇 번이나 말해줬잖아요!”
“알아! 나도 안다고!”
융이 히스테리를 부리며 빼액 소리쳤다. 그리곤 손톱을 신경질적으로 뜯으며 방안을 돌아다니며 중얼거린다.
“오래 안 걸려. 이번엔.. 반드시..!”
그녀의 예쁜 얼굴이 일그러지며 표독하게 변한다. 그리고 융의 머릿속엔 그녀가 할 수 있는 가장 악독하고 광범위한 저주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놈이 빠져나오지 못할 올가미를 칠 거니까.”
.
.
일주일 후.
말 두 필이 소로를 한가롭게 거닐고 있었다. 말엔 두 사람이 타고 있었는데, 노인과 여자였다. 이미 약속한 날짜엔 한참이나 늦었지만, 둘의 표정엔 조급함이 전혀 없다.
“수도는 참으로 오랜만이구나.”
노인이 저 멀리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성벽을 바라보며 말하자, 여자가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재고해주실 수는 없으세요?”
‘그’의 부탁을 받아 여기까지 온 것이 영 내키지 않은 그녀. 하지만 노인은 빙긋 웃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그 녀석 때문이 아니다.”
노인은 세상의 모든 지식에 해박하다는 에비뉴 유일의 대현자로 불리는 사람이었다. 그와 밥 한 끼, 차 한잔 마시고자 청하는 사람이 줄을 섰고, 돈이나 명성깨나 있는 집안에선 스승으로 모시려고 안달이 나기도 했다. 의술에도 대단히 견문이 넓어 아픈 사람들이 끊임없이 그를 찾아왔으며 성자聖者로 불리기도 했다.
과거엔 에비뉴 왕실의 대스승으로 지냈었지만, 이젠 모든 것을 내려놓고 지방 마탑에서 학문에만 몰두하고 있던 오그마리온. 그가 다시 세상에 나온 이유는 단 하나였다.
“직접 눈으로 보기 전엔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으니..”
그랬다. 세 가지 기운이 동시에 한 몸에 공존하는 괴사가 벌어졌다 한다. 신성력과 마나라면 이해가 간다. 드물긴 해도 기사나 마법사였던 이가 신전에 입적하면 그런 경우가 간혹 있었으니까. 하지만 어둠의 힘까지? 이건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스캇, 그 녀석이 일반적인 기준에서 한참 이상하다곤 하지만, 이런 일로 거짓말을 할 리는 없었다. 게다가 그 과정 또한 흥미롭지 않은가? 정령 소환 마법진에서 악마가 튀어나오다니? 어찌 호기심이 동하지 않을 수 있을까? 스캇이 사용한 그 마법진 자체가 오그마리온이 창안하고 보급한 것이었기에 더욱 관심이 생겼다.
“괜히 사사로운 옛 감정 때문에 여러 사람 불편하게 하지 말거라.”
“제가 뭘 어쨌다고요.”
여자의 입이 삐죽 나왔다.
혼기를 훌쩍 넘긴 나이였지만,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다만 고집스러운 눈매와 표독해 보이는 입꼬리가 흠이라면 흠일까? 그녀는 결혼 대신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저명한 현자가 되길 자처했는데, 그 이면에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너무도 잘 아는 그는 늘 아버지로서 가슴이 찢어졌다. 늦게 얻은 딸. 그만큼 애지중지했는데..
“저기 마중을 나온 모양이로구나.”
성문이 가까워지기 시작하자, 잘 차려입은 기마대가 보였다. 손님맞이용 휘장과 깃발을 아주 깨끗하게 단장했다.
대현자 오그마리온.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지금은 누가 봐도 몰라볼 것이다. 허름한 의복과 여느 노인과 다름없는 백발, 허허로운 주름들이 가득할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전직 왕실 대스승이었던 사람이다. 황국으로 거듭났다곤 해도 그때부터 일하던 사람들은 아직도 그를 기억한다.
-일동 차렷!
쩌렁쩌렁한 음성에 지나는 사람들의 시선이 돌아갔다.
-예를 갖춰라!
-충!
-충!
번쩍번쩍한 갑옷을 두른 기사들이 검을 뽑아 그 끝을 하늘 높이 들었다. 황실의 정식 행사 때나 볼 수 있는 모습에 행인들이 어리둥절할 때, 기사단장이 하얀 말을 몰아 오그마리온을 향해 질주했다. 그는 오그마리온의 앞까지 와서는 날랜 동작으로 말에서 내리며 절도있는 동작으로 외쳤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허허.”
오그마리온은 11년 만에 본 반가운 얼굴을 보며 웃었다.
“내가 괜한 사람 고생시킨 모양이군.”
“아닙니다.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일 뿐입니다!”
눈가에 주름을 잔뜩 만들며 오그마리온이 흐뭇하게 웃었다.
3일이면 올 거리를 일주일이나 설렁설렁 왔다. 그 때문에 이들은 대현자가 언제 도착할까 오매불망 여기에서 계속 기다렸을 것이다. 이 사내 이름이 콰트로였던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평기사 신분이었던 것 같은데, 단장까지 올라왔다니 세월이 참으로 빠르다.
“모시겠습니다.”
“그럼, 부탁하네. 콰트로 단장.”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준 것에 감격했는지 기사단장은 힘차게 끄덕이며 두 사람을 황궁으로 이끌었다.
-대현자님.
-대현자님..
수도에 들어서자 여러 사람이 오그마리온에게 다가와 손등에 입을 맞추고 허리를 숙이곤 했다. 십 년이 훌쩍 지났건만, 아직도 그를 기억해주고 존경하는 사람이 이리도 많은 거다. 그런 이들을 정겹게 맞아주며 저 멀리 보이는 황궁으로 가던 오그마리온.
“잠시 멈춰줄 수 있겠나?”
기사단장을 향해 돌연 입을 열었다.
“예.”
극진히 모시라는 황명을 받지 않았다 하더라도 오그마리온의 청을 거절할 생각은 없다. 곧 행렬이 멈추고, 오그마리온은 말에서 내려 한쪽으로 걸어갔다. 그 뒤를 여자가 뒤따랐다.
그는 주택 벽 그늘에 앉아있는 9살 정도 되는 남자아이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몸을 숙여 앉으며 묻는다.
“아이야. 언제부터 이랬던 것이냐?”
수도에 들어와서부터 느낀 위화감. 대부분은 밝고 활기가 넘쳤지만, 좀 더 주의 깊게 보면 여기저기 그늘이 짙게 내려앉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오그마리온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어제 아침부터 똥이 멈추질 않아서 기운이 없어요.”
“배탈이 난 게냐?”
“모르겠어요..”
아이의 눈 밑이 퀭했다.
설사로 인해 가벼운 탈수가 진행되면 이런 수척한 얼굴이 동반하겠지만..
‘역병이 창궐한 건가?’
한둘이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오죽하면 오그마리온이 말에서 내렸을까?
“손을 줘보겠느냐?”
아이의 손목을 잡고 잠시 생각하던 그가 일어나서 일행에게로 돌아갔다.
“우리아.”
“네.”
“네가 보기엔 어떠냐?”
이미 아버지가 답을 구했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그녀는 늘 그랬듯 자신의 생각을 말한다.
“여기까지 오는 길에 적어도 스물 이상이 낯빛이 좋지 않았어요. 기력도 쇠해 보였고, 이 따스한 햇볕조차 버거워하는 걸 보면..”
오그마리온이 끄덕였다.
“이제 시작인 것 같아 더 걱정이구나.”
그는 다시 말에 오르며 기사단장에게 말했다.
“좀 더 빨리 가세.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으니.”
에비뉴가 지향하는 바와 달라 뜻을 함께하지 못해 수도를 떠났지만, 아직도 그의 가슴속엔 민초를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했다. 저 어린아이가 무얼 잘못 먹어 일시적으로 아픈 것이라면 불행 중 다행이겠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알겠습니다! 이랴! 가자! 선두! 속도를 올려라!”
이 징후는 재앙의 전초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황궁으로 안내되었다. 11년 전보다 훨씬 더 규모가 커지고 으리으리했지만, 그 틀은 같으니 추억이 새록새록 돋았다.
“폐하께 가는 것이 아닌가?”
“예, 폐하께선 오늘 시간을 내실 수 없습니다. 아마 내일쯤 기별이 있을 것입니다.”
하긴 첫날이니 여독을 풀라 시간을 주었을 수도 있다. 황실에도 법도가 있고, 손님이 감 놓으라 배 내놓으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알겠네.”
그런데 숙소로 이동할 줄 알았던 기사단장은 두 사람을 다른 곳으로 이끌었다.
작은 연못과 함께 소박하게 가꿔놓은 정원. 정교하게 조경을 해놓아 주변의 건물이나 성벽이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마치 작은 숲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어머나. 이런 곳이 있었네요?”
우리아가 감탄하며 말했다. 견식이 넓은 그녀가 보기에도 많은 정성과 노력이 든 곳이었다. 돌 하나, 나뭇가지 하나조차도 모든 것이 있어야 할 제자리에 있는 듯한 자연스러움.
“새로 만든 모양이구나.”
11년 전엔 이런 곳은 없었다.
“귀한 손님이 오셨을 때, 쓰이는 장소입니다.”
기사단장은 그리 말하곤, 두 사람을 연못 가장자리로 데려갔다. 비를 피할 수 있는 지붕이 있고, 그 아래 다섯에서 열 명 정도가 앉을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는 곳. 21세기 대한민국에 살았던 이라면 정자亭子를 떠올릴 것이겠지만, 여기선 생소한 풍경이 펼쳐졌다.
‘여러 왕국을 정벌하고 다닌다더니, 그들의 복식을 이렇게 차용하는구나.’
오그마리온은 주변을 훑으며 계속해서 안쪽으로 나아갔다. 큰 나무를 돌자, 가장 먼저 한 사람이 보였다. 그는 흰옷을 입고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는데,
“스..캇..”
흠칫, 멈춰선 우리아가 먼저 반응했다.
“..가자꾸나.”
점차 거리가 좁혀졌다. 스캇은 머리를 깊이 숙이며 옛 스승에 대한 예를 갖췄다. 힐끔. 우리아와 눈이 마주치자 눈매가 파르르 떨렸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애쓴다.
서로 딱히 무슨 인사를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기엔 그 끝이 너무 좋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다행인 건, 이 어색함을 풀어줄 대상이 옆에 있었다는 거다.
“번 황자님이신가 보군요. 인사 올리겠습니다. 오그마리온 폰 사마라입니다.”
과거 에비뉴가 왕국일 때, 국가에 큰 공을 세운 인물에겐 ‘폰’의 이름을 내렸었다. 이젠 하지 않는 옛 전통이긴 해도 이 이름을 하사받은 사람들의 저력은 말해 뭐할까?
“우리아 사마라입니다.”
그의 딸도 공손하게 인사했다.
“그리 어렵게 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번은 민망한 듯 웃으며 말했다.
최근 이렇게 황자라고 치켜준 사람은 없었기에 어색하기 그지없다. 아무래도 이들은 예전 왕국, 옛 관습이 몸에 배서 그런가 보다.
“앉으세요.”
스캇이 청하자, 모두가 의자에 앉았다.
“······.”
“······.”
어색한 정적이 흐르자, 크흠, 오그마리온이 헛기침하며 말했다.
“오다 보니 사람들의 안색이 좋지 않았습니다. 혹 황실에서도 알고 있는 것입니까?”
스승과 제자 사이였지만, 이젠 남이 되었다. 당연히 스캇에게 말을 높이는 오그마리온이다. 스캇 입장에선 불편할 수밖에.
“말씀 편하게 하세요. 폐하께서 아시면 경을 치실 겁니다.”
“허허..! 그리 말하니 알겠네.”
스캇은 쓰게 웃으며 끄덕였다.
“저도 오늘 보고받아서 알고 있습니다. 병이 돌고 있는 듯한데. 좀 더 자세히 조사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말을 하며 스캇은 힐끔 번을 바라보았다.
지금 수도에 어떤 소문이 퍼지고 있는지 알기 때문이다.
악마에 잡아먹힌 황자가 역병을 몰고 왔다!
황자가 병을 뿌려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다!
이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소린지 알고 있는 스캇이기에 번이 측은할 뿐이다.
하지만 번은 이때, 다른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대현자라, 경계해야 할 인물이군. 그런데 그놈들이 이번엔 머리 좀 썼는걸? 이거 잘못하면 완전히 궁지에 몰리겠어. 네가 아닌 주변을 노리다니. 저쪽에 똘똘한 놈이 하나 있나 본데?
누군가 의도적으로 퍼뜨리듯, 소문은 빠르게 번지고 있었다. 아주 일관되고 한결같이 번을 원인으로 지목하는 것들이.
번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이런 방식으로 공격해올 줄이야. 그러나,
‘날 몰라도 너무 모르는군.’
순순히 당할 번이 아니지 않은가? 마침 명망 있는 대현자란 사람까지 와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