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그러나 검집에서 검이 뽑혀 나오다 막혔다.
“안 돼. 아직은 전대 영웅이야.”
차우원이 단우의 손을 눌렀다.
단우는 이가 갈렸다.
“팀장 배신하고 나온 새끼가 영웅?”
“그래도 아직 영웅이지. 지금 손대면 전대 영웅을 죽이는 거야. 그런 논란은 짐이 돼. 너를 괴롭힐 거야. 네 손을 더럽히진 말자.”
“안 더럽히면, 저 새끼가 알아서 머리 처박고 죽어 줘?”
“그런 기대는 안 해도 될 것 같다. ……들으셨죠. 조사 부탁드려도 될까요.”
차우원이 뒤를 돌아봤다. 정부 요원들은 자신의 역할을 알았다.
“예. ……구속하겠습니다.”
정부는 차문경의 죽음으로 가장 타격을 받은 세력이었다. 그들은 이단우의 추궁이 시작됐을 때부터 숨을 멈추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 발언이 사실이라면 그들은 족쇄를 벗을 수도 있다.
명분도 훌륭했다. 차문경의 아들이 조사를 요청하지 않았는가?
그게 아니라도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협조 부탁드립니다. 저항하지 말아 주십시오.”
“이게 무슨……. 협박에 의한 증언은 효력이 없어. 그대들도 봤잖아. 저자가 나를 죽이려 들었어!”
“예. 이곳을 나가 듣겠습니다.”
“안 돼, 내가 누군 줄 알고……. 차우원, 차…….”
마력 구속구에 제압된 은퇴 길마는 축 늘어진 채 끌려 나갔다.
차우원은 그를 보고 있었다.
‘단우가 죽이게 할 수는 없지.’
이번 대 영웅이 전대 영웅의 목을 날리는 사건은 두고두고 논란이 될 터였다. 그는 단우에게 그런 고난을 겪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단우는 그런 속내 따위는 알지 못했다.
‘얘는 왜 이러지?’
양심 갈아 먹은 새끼가 살겠다고 차우원을 부르고 있는데, 그게 또 마음에 걸려서 개자식을 쳐다보고 있다.
한 손은 이단우의 손을 잡고 있었다. 단우가 검을 뽑지 못하게 하려고.
‘왜 이렇게 착해 빠졌지?’
차우원의 도덕심과 이타심은 견고해서, 누가 죽을 것 같으면 살리고 본다.
그래서 은퇴 길마 같은 개새끼도 살리고 이단우도 살려 버렸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살아남았어야 하는 건, 그래서 영광을 누리고 좋은 일을 겪어야 하는 건 차우원이었어야 했는데.
이단우가 그걸 다 빼앗아 버렸는데…….
몸이 떨려서 단우는 손에 힘이 들어가지도 않았다. 한 뼘 뽑힌 검이 검집으로 돌아가며 철컥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신호였다.
미친 듯이 몸이 떨려서 단우는 스스로를 주체할 수 없었다.
“왜 네가 이런 일을 겪어야 해?”
차우원의 눈이 커졌다.
“이런 개같은 일이 있었으면 안 되지. 너한테는 좋은 일만 있어야 하잖아. 계속 그랬어야 했는데…….”
과거와 현재와 모든 미래에, 차우원에게는 좋은 일만 있어야 했는데.
이단우는 자신이 망쳐 놓은 걸 모두 돌려주려고 왔는데.
그의 과거에 저따위 끔찍한 일이 있어서는 안 됐는데.
* * *
‘아.’
단우가 자신을 끌어안아서 차우원은 두 팔을 늘어뜨렸다.
차우원은 얼마간 단우와의 접촉을 의식적으로 피해 왔다.
‘고백을 거절당한 사람이 상대에게 부담을 주면 안 되지.’
라는 이성적인 생각에서였다.
사적인 접촉을 그만두자는 행동 방침이 무의식에 남아, 그를 마주 안아도 되는지 순간 판단이 되지 않았다.
-네가 느끼는 거 성욕이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진지하게 말하던 단우가 떠올랐다.
‘그게 거절은 맞나?’
종종 의아해지긴 했으나…….
그건 거절이 맞을 터였다. 차우원은 자신의 감정을 말했는데 단우는 밀어냈으니까.
고백은 처음이라 차우원은 이런 식으로 거절당하는 게 평범한지도 알 수 없었다.
아마 아닐 것 같기는 했다.
차우원은 단우에게 평범을 바라지는 않았다. 그는 차우원이 만난 가장 이상한 사람이어서 모든 상황에서 예측이 어려웠다.
다만 차우원은 어디서부터 그런 오해가 시작됐을지 궁금했다. 실은 너무 충격적인 발언이라 그 뒤로 단우를 보면 그 말이 저절로 떠올랐다.
‘내가 단우를 만지는 걸 좋아하지…….’
그런 자각은 있었으나, 단우에게는 더 심각하게 느껴졌다는 게 아닌가?
거절당한 것과 별개로 차우원은 좋아하는 사람에게 오해를 사고 싶진 않았다.
거리를 둔 건 순정을 증명해 보려는 시도였다.
그리고 차우원은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단우를 이렇게 자주 만졌나?’
시도 때도 없이 사심을 채워 왔던 모양이다. 의식하고 참으려니 품이 허전하고 괴로웠다. 오해를 받아도 할 말이 없을 지경이었는데…….
단우가 자신을 끌어안았다.
-이런 개같은 일이 있었으면 안 되지. 너한테는 좋은 일만 있어야 하잖아. 계속 그랬어야 했는데…….
차우원은 그를 마주 끌어안을 수도 없는데, 어쩔 수 없이 가슴이 부풀었다. 단우의 이마와 젖은 얼굴이 연신 가슴을 파고들어서.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정말 모르는 걸까?’
단우는 역시 나를 사랑하는 것 같은데.
저렇게 말하면 자신은 기대하게 되는데.
단우가 자신을 팀 동료에게 성욕이나 느끼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면, 그 밤은 뭐였던 건지.
차우원은 고민하는 성격이 아니었는데 이단우는 풀 수 없는 문제 같았다. 되풀어 생각하는 걸 멈출 수 없었다.
차우원은 이림 전 길마가 저질렀다는 일에 크게 충격받지는 않았다. 놀라운 일이었으나 화를 내기에는 그가 어머니에게 느끼는 거리감이 너무 멀었다.
차문경은 그에게 어머니라기보다 전대 영웅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는 영웅에게 일어난 비극적인 일을 들은 기분이지만.
그걸 듣고 슬퍼할 차우원 때문에 이단우가 울었다. 차우원은 가슴이 저릿저릿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차우원은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왜 어머니를 원망하지 않는지도 알 수 없었다. 어머니를 그렇게 사랑할 수 있다니 이상한 일이라고 늘 생각해 왔다.
‘아버지는 밀려난 게 아닌가.’
그녀는 선택하지 않았나.
세상에 뛰어난 헌터가 그녀뿐인 것도 아닌데, 그녀는 갓난아이 둘을 두고 <최후의 던전>으로 들어갔다.
차우원은 극단적으로 생각할 마음은 없었다. 그러나 그건 그들이 그녀의 가치 판단 영역에서 어느 정도 뒤로 밀린 게 아닌가.
기억도 안 나는 어머니에게 차우원은 별 감정이 없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아버지에게 동정심이 들었다. 아버지를 사랑할 수 없는데도 그의 기대를 저버리기가 쉽지 않았다.
어머니를 숭배하는 아버지가, 그 어머니를 닮았다는 자신에게도 외면당하는 건 안된 일인 것 같아서.
그런 자신이 기희윤의 폭로에 상처받을 일은 없지만.
이단우가 동그란 머리를 차우원의 가슴팍에 기댄 채 온몸을 들썩이고 있었다. 차우원은 받지도 않은 상처가 아무는 듯했다.
‘안 되지.’
차우원은 입 맞추고 싶은 충동을 참고 그의 등에 팔을 둘렀다. 이단우는 멈칫하지도 않고 강하게 마주 안아 왔다. 역시 사랑스러워서, 차우원은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아버지를 이해하고 싶진 않았는데.’
이단우는 어머니와 같은 부류의 사람이다.
자신은 다시 후순위로 밀리겠지만.
그는 아버지처럼 버림받을 생각은 없었다. 그는 이단우를 따라 <최후의 던전>에 들어갈 테니까.
그가 성물 쟁탈전에 참가한 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이단우는 합리적인 성격이었다. 우수한 팀원을 버릴 리 없다. 그가 <성검>을 가로채겠다는 계획에 도움이 안 되더라도.
잡다한 과정을 제치고 영웅팀부터 되고 보자는, 효율적이고 위험한 작당은 어그러졌다.
남은 방법은 절차를 통하는 것뿐이다.
그렇다면 성검의 주인이 이단우가 되는 건 당연했다.
처음부터 차우원은 이번 대 성검의 주인이 이단우라는 데 어떤 의구심도 없었다.
그리고 성검은 이단우를 선택했다.
* * *
성검의 유출과 그로 인해 벌어진 학살은 세상을 발칵 뒤집었다. 과거처럼 정보 통제가 가능한 시대가 아니다. 던전 브레이크로 시도 때도 없이 통신망이 끊기는 탓에 그만큼 복구 시스템도 훌륭하게 갖춰져 있어서, 정보는 빛의 속도로 퍼져 나갔다.
성검은 회수됐고 성검 강탈자 기희윤은 1센터에 구금됐으나 논란을 덮을 수는 없었다.
세간에 알려진 <성물>은 종말을 끝내고 그들을 지켜 줄 물건이었는데 그것은 자격 없는 사람의 손에 들어간 순간 악몽이 됐다.
성물이 외부로 유출되어 있던 시간은 채 두 시간이 되지 않았다.
그사이 사망자만 이백 명이 넘었다.
각 길드의 상층부가 1센터 회의실로 모였다.
성물에 대한 중대한 정보를 정부에서는 그들에게조차 숨겼다. 성물 쟁탈전의 정보 유출 금지 조항은 물론 성물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쟁탈전이 끝난 뒤에도 비밀 조항이 유지되는 이유를 헌터들은 그들 간의 공식적인 서열을 만들지 않기 위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다른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청연 길드장 류시환이 머리를 헝클였다.
“애초에 자격 없는 인간은 손댈 수도 없다면서요?”
“맞습니다. 많은 희귀 아티팩트가 그렇듯 주인의 자격 요건을 시험하는 물건입니다. 이미…… 다른 분들이 시험해 보셨듯이요.”
센터장이 대답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회의실 한가운데로 향했다.
성검은 그곳에 꽂혀 있었다.
센터장이 하는 말을 그들은 알아들었다.
세간에는 ‘한 시간 반 만에 성물 회수’ 따위로 알려진 이 매끄러운 과정에는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
성검을 옮기려 들었던 몇 명의 헌터가 거부 반응으로 부상을 입었다는 게 그것이었다.
손바닥의 살과 신경이 서로 붙을 정도의 화상이었다.
결국 무너지는 건물에서 성검을 들고나와 이곳에 꽂아 놓은 사람은 이단우였다.
그들의 시선은 회의장 한구석에 오도카니 앉아 있는 이단우에게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