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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인성 교육-37화 (37/170)
  • 37.

    단우가 지나가지 않고 구석을 빤히 쳐다보자 그들도 단우의 존재를 눈치챘다.

    “누, 누구세요?”

    권준홍이 배지슬 앞을 막아섰다. 배지슬을 지키려는 듯한 모양새였다.

    ‘둘이 무력은 비슷하지 않나.’

    오히려 순수 힐러에 가까운 권준홍보다 배지슬의 공격력이 강했던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둘 다 단우가 손가락 하나로 쓰러뜨릴 수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지금 둘은 각성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배지슬도 권준홍도 각성이 늦었지.’

    배지슬은 언제 각성했는지 모른다. 단우가 <차우원 공격대>에 들어갔을 땐 이미 그 팀의 힐러로 있었으니까.

    다만 권준홍의 각성 시기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배지슬의 죽음 이후다.

    그녀가 죽고, 단우를 찾아온 권준홍은 ‘<최후의 던전>을 닫고 그 안에서 지슬이를 데려오고 싶다. 나도 같이 가게 해 달라’고 매달렸다.

    권준홍은 막 각성한 상태였고, 그 자신이 왜 각성했는지 알고 있었다.

    모든 헌터들은 ‘각성 조건’을 달성해야 각성했는데, 그 조건이란 게 어려운 내용에서부터 말도 안 되게 쉬운 것까지 다양했다. 그리고 달성하기 전까지는 그게 각성 조건이라는 것을 스스로 알 수 없었다.

    권준홍의 각성 조건은 쉬웠다.

    ‘배지슬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

    배지슬의 소꿉친구 권준홍은 그녀가 첫사랑이었는데, 그녀가 약혼하고서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고 그녀가 죽은 뒤에야 그걸 알았던 것이다.

    배지슬이 다른 남자랑 행복해지는 건 아무래도 좋지만 그녀가 죽는 건 견디지 못하는, 단우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이었다.

    아무튼 권준홍은 배지슬이 죽고서야 그녀를 사랑한다는 걸 알았고, 그 깨달음이 너무 괴로워서 줄줄 울고 있었다. 멍청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단우가 그를 데려가기로 한 건 그가 불쌍해서가 아니었지만.

    ‘권준홍은 각성하면 S급 찍는다.’

    순수 힐러의 최상위 티어 직업 <성자>를 찍는 인간이었다.

    그래서 권준홍은 <이단우 팀>의 힐러가 됐고…….

    이단우는 이 소꿉친구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닮은 꼴이라는 사실을 금방 깨닫게 됐다.

    ‘이번에는 없을 일이다.’

    하지만 권준홍의 얼굴을 보는 게 반갑기는 했다.

    애가 맹해서 이번엔 언제 자기감정을 깨달을지는 모르겠지만.

    이단우가 차우원과 배지슬의 관계를 의심하지 않았던 건, 둘이 순수한 동료 관계로 보여서만은 아니었다.

    단우가 <차우원 팀>의 동료들을 잃은 뒤 만난 권준홍이 너무도 배지슬에게 헌신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헌신적인 사람을 곁에 두고, 보통 다른 곳에서 연인을 찾겠는가?

    ‘배지슬도 권준홍만큼이나 맹한 성격이었지.’

    싶어서, 단우는 둘이 정말 그냥 친구 관계였을지 의문이었다. 서로 말만 안 하고 깨닫지만 못했지 감정은 있었던 거 아닌가?

    이미 죽은 사람을 두고 생각하는 건 아무 의미 없었지만.

    그때 단우는 아무 생각이나 했지만 그걸 입 밖으로 내진 않았으니 권준홍이 상처 입는 일은 없었을 터였다.

    -너 눈이 없는 새끼야? 아니면 귀가 없어? 힐 그만하라는데 왜 말을 안 들어 처먹어.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뼈가 부러진 게 보여서…….

    -그니까 마나 아끼라고. 팔 부러졌다고 죽냐고.

    -검사가 팔 부러지면 보통 죽지 않을까요……?

    같은, 업무적인 이야기밖에 나누지 않았던 것이다.

    배지슬이 입을 막았다.

    “아! 외부 경호팀인가 보다. 아빠가 부르셨다는, 그…….”

    “아아……! <차우원 팀>! 이단우 헌터다! 어, 팬이에요!”

    권준홍이 깜짝 놀라며 외쳤다.

    ‘어떻게 알아봤냐.’

    단우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인터넷에 떠도는 이단우 얼굴이라곤 증명사진 정도밖에 없을 텐데?

    “<차우원 공격대> 정말 멋져요. 요즘 세상에 거대 길드도 들어가지 않은 채 자신만의 힘으로 시민들을 구하고 던전을 개척해 나가는 젊은 헌터들이라니…….”

    배지슬이 반짝반짝한 얼굴로 말했다. 권준홍이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차우원이나 소서정이나 다 가문 지원 받아서 성장한 애들인데?’

    이 둘이 생각하는 자신만의 힘의 기준은 단우와는 다른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예. 길을 잘못 들어서, 두 분이 내밀한 얘기를 하시는데 엿듣는 꼴이 됐네요.”

    “아니에요! 저희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는데요. 집이 좀 넓죠. 손님 묵으시면 꼭 길 잃는 손님이 계신다니까요. 안 쓰는 방은 다 금줄 쳐 놓자고 해도, 아버지가 말을 안 들으세요. 보기 안 좋다고. 허세가 보통이 아닌 분이라…….”

    배지슬이 말하다가 입을 막았다.

    “아하하……. 제가 아버지 험담하려는 건 아니고요. 아버지 정말 존경해요. 멋지고 훌륭한 분이시죠. 아버지를 지켜 주러 와 주셔서 정말 기뻐요.”

    “사실 아까 다 들었습니다. 아버님 싫어하신다고요.”

    단우가 실토했다.

    ‘정확히는 아버지가 돌아가셔도 자기가 안 슬퍼하면 어쩌냐는 말이었지만…….’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왜냐하면 배지슬은 지나가던 짐승이 쓰러져서 죽어도 통곡할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헉. 잘못 들으신 거예요. 진심이 아니었어요. 제가 세상을 구한 영웅인 아버지를 존경하고 마음 깊이 따르지 않을 리 없잖아요.”

    “맞아요. 지슬이는 아저씨를 정말 좋아해요. 아까 들으신 얘기는 저희가 말을 하다가 맥락이 꼬여서 오해의 소지가 있게 된 거예요.”

    배지슬과 권준홍이 열심히 해명했다. 그런데 한다는 소리가 잘못 쓴 대사 지문 수준이었다.

    ‘내가 잘못 들었나?’ 의심하던 사람도 ‘제대로 들었군’하고 확신할 만한 표정과 태도여서 단우는 할 말이 없었다.

    “거짓말을 하실 때 목소리가 그렇게 떨리면 들킬 텐데요.”

    “제, 제 목소리가 떨리고 있어요? 떨리고 있네요.”

    배지슬이 목을 잡았다. 권준홍이 그녀의 등을 쓸어 주는 꼴을 보며 이단우는 어떻게 쟤네가 사귀는 게 아닌지 의아했다.

    둘이 형제도 아닌데 저렇게 장단이 잘 맞으면 결혼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아버지껜 이 말씀 하지 말아 주세요! 상처받으실 거예요! 아버지는 상처받으셔도 싸지만!”

    “맞아요, 그분이 좀 나쁜 분이긴 하지만 세상을 구하시기도 했는데. 하나뿐인 딸이 자기를 엄청나게 싫어하고 원망한다는 사실을 알면 우실지도 몰라요.”

    둘이 부탁했다.

    ‘그렇게 싫어하고 있으면 은퇴 길마 놈도 이미 알지 않겠냐?’

    단우는 생각했으나 말에 돈이 드는 것도 아니었다.

    “예. 말 안 할게요.”

    “정말요? 언론에도 말씀하지 말아 주세요! 엄청난 스캔들이 될 거예요!”

    전 영웅의 딸이 영웅을 싫어한다니 스캔들이 될 것 같긴 했다.

    ‘이 태도로 어떻게 안 들켰냐.’

    단우는 그게 더 궁금했으나 다시 약속했다.

    “예. 언론에도 안 풀겠습니다.”

    “정말 감사해요! 이단우 헌터! 듣던 대로 훌륭한 분이시네요!”

    “지슬이 아버지를 꼭 지켜 주세요!”

    권준홍이 양손으로 단우의 손을 잡았다. 민간인 권준홍의 손은 수련이라곤 조금도 안 되어 있어서 말랑말랑했다.

    ‘듣던 대로?’

    단우는 배지슬이 어디서 제 얘기를 들었나 싶었다.

    ‘어쨌든 이 저택에 들어온 첫 번째 목적은 달성했다.’

    배지슬과 안면을 텄다. 이제 배지슬이 각성하면, 누구보다 먼저 그녀를 낚아채서 팀에 집어넣기만 하면 된다.

    ‘그러려면 호감을 사 둬야 하는데.’

    배지슬이 말은 저렇게 해도 아버지를 구해 놓으면 감사해하긴 할 것이다. 그녀에게 누군가를 싫어하는 감정과 그 사람을 구하는 것은 별개의 메커니즘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차우원 팀> 팀원이라고 할 수 있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런데 저 방을 못 찾겠어서요.”

    말하며 단우는 권준홍을 봤다. 권준홍은 팀의 잡일을 도맡아 하던 성격이었다.

    ‘다른 놈들이 안 해서 그냥 자기가 한 것 같지만.’

    “아! 길을 잃으셨다고 했죠. 일행분들이랑 떨어지신 거겠네요.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지슬아, 혼자 있어도 괜찮겠어?”

    “나도 갈래. 우리 아버지 지키러 와 주신 분인데, 내가 안내해 드려야지. 너도 손님이잖아. 나 걱정해서 와준 건데. 그런데 아버지는 너한테도 일이나 시키려고 하고……. 정말…….”

    배지슬이 면목 없다는 듯 얼굴을 붉혔다.

    “됐어. 아저씨가 우리한테 도움 주신 게 얼만데. 내가 있어서 너한테 도움 되면 나야 좋지. 넌 들어가 있어. 아저씨 마주치기 싫잖아. 너한테 소개해 줄 손님 있다고 하는 것도 불안하다면서…….”

    “그렇긴 하지만…….”

    ‘연애하나?’

    단우는 이 둘이 뭐가 소꿉친구 사이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이단우야 소꿉친구는커녕 친구도 없었으니 원래 친구 관계가 저렇게 애틋하다고 우기면 할 말이 없긴 한데…….

    그때 복도 뒤편이 소란스러워지더니 단우와 떨어졌던 일행이 뒤에서 다시 나타났다.

    “아! 여기 있었네! 저택이 워낙 커서 손님들이 종종 길을 잃거든. 친구가 잘 따라오지 못한 것 같은데……. 어? 마침 잘됐네! 소개시켜 주려던 사람이 여기 다 모였잖아!”

    은퇴 길마가 떠들어 댔다.

    단우는 심장이 잠깐 떨어졌다.

    내려앉았다 다시 뛰는 가슴에 손을 얹고, 단우는 고개를 들었다.

    ‘차우원이 배지슬을 본다면.’

    어린 배지슬과 친했다는 차우원이, 성장한 배지슬을 본 순간의 표정을 단우는 봐 둬야 했다.

    멍청한 짓을 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단우는 상처의 딱지를 뜯는 기분이었다.

    ‘……?’

    “단우야, 찾았잖아.”

    차우원은 배지슬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가 한숨을 쉬며 단우의 어깨를 짚었다. 그리고 권준홍 옆에서 떼어 냈다. 단우의 손을 잡고 있던 권준홍의 손도 같이 떨어졌다.

    ‘어……?’

    차우원이 물었다.

    “누구셔?”

    “길을 잃어서……. 안내해 주신다는 분을 만났는데.”

    단우는 자신이 왜 변명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 변명이 아니지.’

    그냥 설명 아닌가? 그런데 왜 변명하는 기분이 드는지 알 길이 없었다.

    행동을 변명하는 건 과거의 이단우가 과거의 차우원에게나 하던 짓 아닌가?

    “단우가 불장난만 좋아하는 줄 알았더니 길도 잃는 줄은 몰랐네.”

    이단우를 대책 없는 어린애 취급하며 차우원이 권준홍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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