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강울림 어머니는 보증으로 한 번 데어 본 사람이었다. 계약서를 경계하는 법을 알았다.
“무슨 계약서요?”
“울림이 저희 팀으로 스카우트하려고요. 울림이가 센터 연수생이었잖아요. 이 나이대 각성자 중에 가장 뛰어난 유망주 중 하나라는 의미인데……. 우원이가 그랬거든요, 강울림 이상으로 대단한 탱커 유망주를 본 적 없다고. 차우원 아세요?”
“차우원……? 울림이가 말한, 그 엄청 잘한다는…… 차문경 아들?”
“얜데요.”
단우가 차우원을 앞으로 밀자 차우원은 예의 바른 미소를 지었다. 전부터 생각했으나 차우원은 얼굴이 보증 수표였다. 반듯하게 생긴 놈이 그러고 있으니 굳어 있던 강울림 어머니도 반사적으로 미소를 그렸다.
‘경계는 반쯤 풀렸고.’
“계약서 가져왔는데요. 조항 다 읽어 보시면 아시겠지만, 독소 조항 없고요. 강울림에게 강제 조항도 없어요. 저희 팀의 목적은 ‘정의’를 추구하는 거고요. 강울림이 생각하기에 이 팀이 ‘정의롭지’ 않다고 생각해서 나가고자 한다면, 저희는 붙잡을 수 없어요. 그리고 계약금으로 저희는 이만큼을 드릴 생각입니다.”
단우는 테이블에서 멋대로 펜을 하나 잡더니 계약서 중간 부분에 쭉 줄을 그었다.
0이 몇 개인지 셀 수 없는 숫자에 밑줄이 그였다.
“……!”
강울림 어머니는 고개를 기울이고 그 개수를 헤아리는 듯했다.
그녀는 금액을 이해하자마자 고개를 들었다.
“자, 잠깐만요. 우리 울림이가 뭘 해야 한다고…….”
“그냥 팀원 활동 하면 됩니다. 방금 차우원이 설명해서 들으셨겠지만, 강울림이 빚 갚겠다고 일한 곳 불법 업소였거든요.”
“우리 울림이는 좋은 아이예요! 알고 그런 게 아니었을 거예요. 책임감이 강해서, 저희가 바보 같은 짓을 저지르는 바람에…….”
그녀가 허둥거리며 변명했다.
단우는 강울림의 가정사에 관심 없었다.
“아무튼 강울림이 저지른 짓은 불법 가담이었고요. 피해자라고 해도 별로 좋은 일을 한 건 아니잖아요?”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단우야.’라는 표정으로 차우원이 단우를 돌아봤다.
피해자에게 무슨 책임이 있다고 갑자기 죄를 덮어씌우냐는 것이다.
물론 단우는 강울림을 데리고 법정으로 갈 생각이 없었다.
‘이 사람은 혼자서는 결정 못 한다.’
누가 떠밀어 주지 않으면 결정을 못 내리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데, 아무래도 단우가 보기엔 눈앞의 강울림 어머니가 그랬다.
“저도 울림이가 좋은 애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이미 저지른 죄는 갚아야 하잖아요. 그리고 생각해 주세요. 울림이의 원래 꿈은 헌터였잖아요. 센터 연수생으로 들어갈 정도니 얼마나 갈망했겠어요. 집안에 문제가 생겨서 그만뒀던 거잖아요.”
“그, 그래요. 그랬어요.”
강울림 어머니가 손수건을 꼭 쥔 채 고개를 끄덕였다.
꼭 법관이 되고 싶은 열망이 있어야 법대를 가는 건 아니었으나, 이단우는 논리를 비약시켰다.
강울림이 헌터가 되고 싶어서 센터에 들어갔든, 그냥 어느 날 각성했는데 자신의 각성 능력이 너무 뛰어나 별생각 없이 센터에 들어갔든 단우가 알 바 아니었으니까.
“원하던 헌터가 되어,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해 나가며…… 지금까지 가족을 위해 지었던 죄를 갚는 거예요. 저는 울림이가 그럴 수 있는 애라고 생각해요. 제 친구라서 그런 게 아니라요. 울림이는 몸도 마음도 강한 애니까요.”
“그래요. 맞는 말이에요.”
강울림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런 큰 금액을 계약금으로 준다는 건……. 그러니까, 울림이 능력이 대단하다고 전에 센터에서 온 무슨 선생님도 말씀하시긴 했지만, 이런 금액까지는 감당이 될지 모르겠는……. 저는 이런 일을 잘 몰라서요.”
그녀가 횡설수설하며 걱정했다.
‘이쪽에서 비싼 값으로 주고 산다고 하면 이 새끼 호구구나 하고 물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녀가 왜 단우를 걱정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으나, 어쨌든 단우는 말했다.
“울림이에겐 그럴 가치가 있고요. 또 걱정하실까 봐 드리는 말인데, 계약금 건넸다고 노예 계약 하는 거 아니고 급여도 정당하게 지급됩니다.”
“이런 돈을 주시고 또 급여를 지급한다고요?”
‘자기 아들을 팔아넘기려고 했나?’
뭐 물건 넘기는 것도 아니고…….
단우는 슬슬 이 가족의 금전 감각이 의심스러웠다.
“……예. 물론이죠. 계약서 사인하기 전에 변호사 만나 보는 거 잊지 마시고요. 변호사 상담 비용 걱정되시면 센터 가 보세요. 담당 공무원한테 헌터 계약 관련해서 상담받고 싶다고 하면 친절하게 도와드릴 테니까요. 그쪽은 나랏돈 받고 일하는 사람들이라 상담 비용도 안 듭니다. 대기 시간은 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네, 네. 그럴게요. 그런 걱정은 하지도 않았어요. 어머, 내 정신 좀 봐. 우리 울림이를 구해 준 친구들한테 차 한잔 대접을 못 하고…….”
“차는 됐고요.”
단우는 마력 부족 때문에 속이 뒤집혀서 이제 거의 헛구역질이 나올 지경이었다.
피곤해 죽겠는데 뭘 더 붙잡겠다는 건가?
“그래도, 아! 시간이 늦었는데. 집은 좁지만, 하룻밤 자고 내일 울림이 일어나면 바래다주라고…….”
‘이 집 딸 있지 않나.’
한번 믿으면 밑도 끝도 없이 믿어 버리는 강울림 성격이 어디서 온 건지 알 만했다.
거의 생각이 사라지는 수준이라 단우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심정을 숨기지도 못했다.
“방이 너무 좁죠……. 미안해요.”
강울림 어머니가 사과했다.
차우원이 나서서 난장판을 정리했다.
“아니에요, 어머니. 새벽에 놀라셨을 텐데 어머님도 울림이도, 가족분들도 다 쉬셔야죠. 저희는 타고 온 차가 있어서 돌아갈게요. 계약서 검토해 보시고, 내일 울림이 일어나면 저희한테 연락 달라고 말씀 주세요.”
그사이 이단우는 자기 번호를 강울림 휴대폰에 찍고 있었다. 그리고 휴대폰을 차우원에게 넘겼다.
“번호 저장해.”
속삭이자 차우원은 입을 꾹 닫고 같은 짓을 했다. 강울림을 방으로 옮기느라 강울림 어머니는 그 꼴을 못 보고 있었다……. 절친한 친구라면서 서로 번호도 모르는 꼴을 보일 수는 없지 않은가?
이단우가 어머니 뒤를 따라갔다.
“제가 도울게요.”
“어머, 고마워라.”
강울림을 받는 척하다 이단우는 손에서 힘을 뺐다.
쿵!
“아, 실수.”
“……?”
“우, 울림아! 울림아!”
강울림은 바닥에 고꾸라져서 정신을 차렸다.
“뭐, 뭐야. 여기는…… 집?”
그가 헛소리를 했다. 단우는 무릎을 꿇고 강울림을 부축했다.
“우리가 네 목숨 살려 줬다. 잊지 말고. 내일 경찰 조사 너도 받으러 가야 하는데 우리가 도와줄 테니까 연락해라. 아침에 뉴스도 좀 보고.”
“……?”
“가자.”
단우는 지독하게 피곤했다. 약간 어지러워서, 그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러다 넘어질 뻔한 걸 차우원의 팔을 붙잡아 간신히 막을 수 있었다.
‘…….’
심장이 떨어져서 단우는 차우원을 쳐다봤다.
‘들켰나?’
차우원은 별 표정 변화가 없었다.
원래 그런 놈이라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는 단우를 잡아 주더니 다정하게 어깨동무까지 했다.
“안녕히 계세요. 울림아, 쉬어.”
차우원이 다정하게 인사하고 현관문을 열었다.
“단우야, 괜찮아?”
“뭐가.”
“흠.”
차우원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단우와 어깨동무를 한 채 빌라 아래층까지 내려갔다.
그들은 빌라를 벗어나 대기를 부탁한 택시에 다시 올라탔다.
그동안 둘 다 말이 없었다.
단우는 차우원의 팔을 잡은 걸 후회하고 있었고 이 어깨동무를 언제 떨쳐 내면 자연스러울까 고민 중이었으며…….
차우원은 완전히 다른 생각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는 정말이지 참을 수 없었다.
택시에 타고, 문을 닫고, 창문을 올리고.
바깥에 소음이 빠져나가지 않겠다는 확신을 하고서야 차우원은 폭소했다.
“푸하하하!”
“…….”
‘드디어 미쳤나?’
이단우는 본인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가끔은 차우원도 미친놈 같았는데, 도저히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하지 않을 만한 짓을 할 때마다 그랬다.
일단 보통 사람이라면, 자신을 죽이려 든 이단우 같은 반동분자 놈을 본인 팀에 넣지 않는다…….
팀 정원이 다섯인데, 그중 하나를 C급인 데다 본인 말에 일일이 반대하는 놈으로 채우겠다는 발상은 어떻게 할 수 있는 건가?
사람들이 너무 많이 죽고 고통받으니, <최후의 던전> 같은 위험한 곳에 앞장서 들어가 <종말>을 막겠다는 발상은?
어쨌든 차우원은 그런 놈이었다.
차우원이 처웃고 있으니 단우는 역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얜 진짜 미친 게 맞지 않나?’
하지만 의혹만 있는 차우원과 달리 단우는 정말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차우원이 그러고 웃는 꼴을 보니 얼굴이 멋대로 움직이고 허파에서 바람이 새어 나갔다.
“하…… 하하…….”
‘난 왜 처웃고 지랄이야.’
하지만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차우원이 고개를 젖히며 말했다.
“단우야, 이 말 하면 너 또 화낼 거지. 근데 나 정말 살면서 사기 쳐본 적 없다.”
“사기 안 쳤어.”
“‘정의로운’ 활동만 하겠다며? 건물에 불 질러 놓고 무슨 소리야?”
“강울림을 거기서 빼냈는데 정의롭지. 그럼 그게 불의로 가득 찬 일이야?”
“아니, 애초에 복면 필요 없는 거 아니었어? 다 때려눕히고 몬스터 잡고 나올 건데 복면은 왜 쓴 거야? 덥고 수상하기만 했잖아.”
“강울림이 조금만 덜 멍청했으면 복면 쓰고 다 해결 가능했거든.”
그들은 킥킥거리다 서로 몸이 부딪혔다. 그것도 웃겨서 시트에 거의 나뒹굴다시피 한 채 웃었다.
그러다 단우는 눈물이 났다.
‘와…….’
진짜 돌아 버린 거 아닌가.
그는 자신의 감정 중추가 무슨 구조로 돌아가는지 알 수 없었다.
이단우는 좀 미쳤지만.
헌터 경력 좀 된다는 놈들 중에 안 미친 놈들이 있던가?
하지만 그건 6년 차 베테랑인 이단우의 판단이었고, 신입 헌터 입장에선 또 다를 터였다.
차우원에게도 미쳤다는 걸 들켜선 곤란했기 때문에 그는 얼른 눈물을 닦아 냈다. 코도 한번 훌쩍이고 고개를 들었다. 6년 차 헌터의 짬이 있어서, 그만한 동작으로도 이단우의 얼굴은 멀끔해졌다.
그는 유리창에 이마를 붙인 채 쾌활하게 웃는 차우원을 쳐다봤다.
찬 데 붙은 이마도 기분도 시원해져서, 좋았다.
물론 이단우의 생각과 달리 차우원은 그가 뭘 했는지 다 봤다.
‘또 저러네.’
이단우는 잘 울었다.
우는 이유를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정말 알기 힘든 사람이었다. 그게 아니라도 기본적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기는 하지만…….
차우원의 인생에 이렇게 막 나가는 사람은 없었다.
이단우는 대체 뭘까?
차우원은 살면서 오래 고민하는 법이 없었는데, 대개의 문제는 그냥 생각한 순간 답이 나왔기 때문이다.
답 없는 문제는 애초에 고민하지 않는 성격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앞에 나타난 이단우는 답도 없는데 궁금한 사람이었다. 이상하고 흥미로웠다.
이단우는 대충 흘려듣는 듯했지만.
정말로, 차우원은 이 모든 일이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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