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8잔. 재점화. >
1.
전야제가 가득했던 주말이 지나가자 곧바로 세계 대회가 시작된다.
어쩌면 떠들썩했던 전야제도 대회의 일부였을 지도 모를 지금.
전 세계에서 40여 개국의 대표 바텐더가 참가한 대회는 그렇게 공식적인 막을 성대하게 올렸다.
짜오프라야강이 보이는 거대한 데크에서 진행된 작은 개막식.
더운 날씨 덕에 밖에서 오래 있지는 못했지만, 사원과 높은 건물이 적당히 섞인 방콕의 풍경도 바텐더들의 행사를 축하하는 것만 같이 보였다.
탁하게 흐르는 짜오프라야강을 동동 떠다니던 배들은 저마다 이곳에서 무슨 행사가 벌어지는지 궁금해하던 눈치였다.
바씬의 가장 큰 행사라도. 이쪽과 관련이 없는 이들에게는 말 그대로 강 건너 불구경일 지도 모른다.
“안으로 들어가서 기다리시죠. 설명은 안에서 따로 진행할 겁니다. 필요한 커트는 전부 딴 것 같으니까요.”
“그래도 되는 건가요?”
“카메라가 안 돌죠? 그럼, 괜찮을 겁니다. 사실 밖에서 하는 행사는 요식이라서요.”
정환의 옆에는 한국에서 파견 나온 직원이 일대일로 붙어 그의 대회 진행을 돕고 있다.
호텔에서도 수년을 근무한 정환이기에 언어는 큰 장벽이 아니었지만, 한국 지사도 무언가를 도우려 노력하는 모습이다.
“회사라서 어쩔 수가 없네요. 이해해 주세요.”
“이해하죠. 이런 대회를 열어 주는 것만 해도 어딘가요.”
대회는 그저 바텐더의 기량만을 겨루는 장이 아니다. 이건 하나의 큰 마케팅의 장이기도 한 곳.
대회를 연 주류 회사는 대회의 모든 모습을 기록하며 하나의 PR자료를 만들어 가기 바쁘다.
홍보용 비디오 촬영에 라이브 스트리밍까지. 할 수 있는 모든 건 동원하는 주최 측이다.
“다른 바텐더들은 만나 보셨어요?”
“네. 유명한 사람들이 많이 왔더라구요. 다들 쟁쟁해요. 전부 아는 건 아니지만요.”
“유명하다면, 어떤?”
주류 회사 직원은 엄밀히 말하자면 바씬에 속한 이들은 아니다.
바씬과 밀접하지만, 어디까지나 아웃써클에 속하는 이들.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텐더라도, 함께 일하지 않는 이상 이들이 모르는 것도 이상한 건 아니었다.
정환은 주변을 한 명씩 시선으로 가리키며 그들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제일 처음 정환의 눈에 들어온 이는, 주말에도 마주한 이였다.
멀끔한 복장에 쓰리 피스를 갖춰 입고 포마드로 머리를 깔끔히 올린 바텐더가 이들의 눈에 들어왔다.
“저기. 제일 처음 보이는 건 역시나 사지마 츠바사 바텐더네요.”
“아. 저분. 저분은 저도 압니다. 일본 바텐더죠? 첫날 전야제에 나왔던 그 신의 손의 제자!”
“맞습니다. 요즘은 그런 수식어가 없이도 제법 유명한 분이죠. 또, 저쪽은 미국에서 온 바텐더가 보이네요. 제이미 로스.”
“제이미 로스요?”
“뉴올리언스 출신에 뉴욕에서 일하는 바텐더로 벌써 IBA에 시그니처 레시피가 등록된 바텐더죠. 나이는 고작 스물아홉이지만요.”
“허어. IBA라면 국제바텐더협회가 아닙니까. 거기 레시피가 등록되었다는 건···?”
“평생 바텐딩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는 거죠. 서른도 전에.”
정환은 대단한 이야기를 가볍게 하며 어깨를 으쓱한다. 벌써 놀라다니. 그런 표정까지 지어보는 정환.
제이미 로스라는 바텐더에 대해서는 정환도 아는 게 제법 많다.
지금이야 한 개의 레시피를 올린 바텐더지만. 곧 두 개를 넘어 총 세 개의 레시피를 IBA에 등록하며 바씬에는 굵직한 족적을 남기는 바텐더가 바로 제이미 로스였다.
창의력과 참신함이야 뛰어났지만, 손기술이나 다른 바텐딩 스킬이 뛰어났던 바텐더는 아니기에, 대회에서 큰 위협이 되는 이는 아니었다.
‘뭐. 창작 쪽으로 가면···’
그때는 조금 선전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레시피를 만드는 것과 맛있는 칵테일을 만드는 건 엄연히 다른 영역이다.
“저쪽에는 영국에서 온 다니엘 우드. 아직은 그리 유명한 바텐더는 아니지만, 곧 크게 유명해질 겁니다. 어쩌면, 여왕 전속 바텐더가 될 수도 있죠.”
“여왕 전속이요···?”
“사보이 호텔이라고 들어보셨나요?”
“그 명동에 있는?”
“···아뇨. 영국에 있는. 런던···.”
엉뚱하게 나오는 답에 정환은 못 말리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정답을 알려준다.
여기저기 이름을 많이 도용당한 원조는 늘 서글픈 법이다.
“영국 런던에 있는 유서 깊은 호텔입니다. 100년도 넘은 호텔이죠. 그리고 월드 베스트 50바에서 몇 번이나 1위를 차지한 바가 바로 그곳의 바, 아메리칸 바이구요. 거기 신입 바텐더가 바로 저 다니엘 우드란 친구예요.”
“굉장한 명문 출신이란 말이네요! 이야. 그런데, 여왕 전속이란 말씀은 무슨 뜻이세요? 거기 출신들이 다들 그렇게 되는 건가요?”
물론 그런 건 아니다. 다만, 이건 정환이기에 알 수 있는 무언가.
다니엘 우드란 이를 보고 잠시 기억을 되짚었던 정환은 어디선가 본 적이 있던 여왕의 전속 바텐더란 말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는 한 10년쯤 후. 영국을 넘어 바씬 전체에서 큰 화제가 된다. 제품이 아닌 한 명의 사람으로서 로얄 워런트(Royal Warrant), 즉 영국 왕실 인증 품질 보증을 받는 것.
거기에 더 나아가 여왕의 전속 바텐더까지.
어렴풋이 지나가던 잡지에서 봤던 그의 얼굴이 오늘 마주친 이의 얼굴에도 조금 남아 있었다.
“뭐. 그럴지도 모른다는 뜻이죠. 추측입니다. 추측.”
이를 말할 수 없는 이는 이번에도 어영부영 넘어갈 뿐이다.
“저긴, 홍콩에서 왔다는 바텐더네요. 일본인일 겁니다.”
“일본인이요? 홍콩 바텐더가요?”
“지역 대회이긴 해도 해당 지역 사람만 나갈 수 있는 건 아니라서요. 일하는 업장이 그 지역에만 있다면 누구나 참가는 가능합니다.”
“그랬군요. 이야. 세계 대회에 두 명이나 진출을 시킨 거네요, 일본은.”
“따져 보자면 그렇죠. 물론, 우승해도 기록은 홍콩으로 남겠지만요.”
“미묘하네요.”
“다른 건 몰라도, 이쪽 업계에서는 일본이 최강국 중 하나니까요.”
“그건 그렇죠. 주류 판매량도 어마어마하고. 지사 크기도 아마 차이가 제법 날 겁니다.”
“제가 분발해 보겠습니다.”
“저희도 분발하겠습니다.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아-.”
어느덧 친해진 걸까. 두 사람은 장난스레 서로 고개를 숙여가며 잘 해보자는 다짐을 주고받는다.
세계 대회 우승자가 한국에서 나온다. 이건, 어쩌면 이제까지 없던 바씬과 주류 업계에 큰 호황을 조금 이르게 끌고 올지도 모를 일이다.
정환의 기억에 따르자면 2027년까지 세계 대회 한국인 우승자가 없었던 건 아니다.
다만, 주의해야 할 건 ‘한국인’ 우승자라는 말.
아마 2019년 정도에 우승했던 한국인 바텐더는. 싱가포르 대표였던 것으로 정환은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
스피드 런을 끝내고 마지막으로 후원사의 제품인 조니워커 잔을 스트레이트로 들어 올리며 세레모니를 펼쳤던. 그럼에도 5분 대의 시간을 기록했던 그녀의 모습을 정환은 잊지 못하고 있다.
결과야 아직 알 수는 없다. 참가하는 이들이 정환의 설명처럼 쟁쟁하기도 하고.
허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정환 역시 이런 쟁쟁한 이들 사이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정환은 가슴을 넓게 펴고는 이를 상기했다.
- 톡톡.
행사장 안에 전부 닿아 겨우 흐르던 땀을 식혀가던 때. 행사장 안에서는 본격적인 대회 개막식이 시작된다.
외부에서 진행한 건 어디까지나 보여주기식. 이제는 펼쳐질 챌린지에 대한 설명과 함께 과제가 공개된다.
예상이 가지 않는 과제들은 아니다. 결승을 제외한 과제는 스피드 런과 마리아주, 칵테일 파티, 그리고 마켓 투어 챌린지일 터.
로컬 대회에서 참가자는 최대 2개 이상을 수행했지만, 아직 수행하지 않은 두 개가 있기에 이번에는 이 4개를 모두 수행하게 될 것이다.
“월드 클래스 글로벌 대회 참가 규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참가자분들은 모두 주목해 주십시오.”
마이크를 톡톡 치던 몇 번의 소리가 들리고 진행자의 말이 내부를 채운다.
이어지는 건 예상과 딱 맞아떨어지는 대회 규정 설명.
앞으로 있을 3일간 참가자들은 4개의 챌린지에 모두 참가해야 하고, 그때마다 순위를 정하며 이에 맞춰 점수를 부여한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매 챌린지마다 탈락자를 선정하지 않는 일종의 점수 합산식 방식인 것이다.
챔피언들이 모여 치르는 대회인 만큼, 하루마다 탈락자를 배출하는 배려 없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물론, 조금 더 깊게 들어가자면. 해당 국가의 스트리밍 시청자를 오래 붙잡아 두려는 그런 속내도 있겠지만.
“그런 식으로 진행한다고 하네요. 뭐, 통역 없이도 사실은 이해하신 거죠?”
옆에서 진행자의 설명을 통역하던 직원은 먼저 고개를 끄덕이는 정환을 보며 정환이 이미 이해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자세히는 아니지만요. 통역 덕분에 더 잘 이해했습니다.”
“제가 점점 하는 일이 없어지는 느낌이네요. 허허. 죄송스러워서 어쩌죠?”
“아니에요. 그래도 구체적인 건 옆에서 설명해주시는 게 도움이 됩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죠. 조금 덧붙여서 설명하자면 최종 결승에는 아마 5인이 올라갈 겁니다. 최종 순위가 5위 안에 들면 된다는 뜻이죠. 한 챌린지에서 실수가 있어도 점수는 합산이니까 만회하실 수 있을 거구요. 결승 과제는 이번에도. 비공개입니다.”
“4개의 챌린지 중 하나는 아니란 뜻이겠네요.”
“그렇죠. 작년에는 클래식 칵테일 딱 한 잔으로 승부 보는 과제였고 재작년에는 창작 칵테일이었죠. 때로는 프레젠테이션이 나오기도 합니다.”
“프레젠테이션이라. 그건 좀 어렵겠는데요?”
“대부분 언어가 큰 장벽이죠. 때로는 춤이나 노래를 준비하는 분들도 있고요. 뭐. 차정환 바텐더님은 언어 걱정은 없어 보이시는데요?”
“아뇨. 대충 알아듣는 거라서요. 그래도 프레젠테이션은 힘들죠.”
“만약 그런 과제가 나온다면, 저희가 서포트할 테니 마음 편히 가지십시오. 본사도 저도! 최선을 다해서 돕겠습니다! 또, 김 교수님이랑 이명진 마스터도 계시니까요.”
“그렇죠. 이것도 일종의 팀업이니까요.”
바텐더가 개인 자격으로 참가하지만 결국은 팀업이 중요한 대회다.
이건 국가 대항전이라면 당연한 이야기. 이곳에 참가한 이들은 대부분 자신의 팀을 꾸려 어떻게든 서포트를 받아가며 대회에 참가할 준비를 하고 있다.
김태현 교수와 명진을 데려오며 팀을 과하게 꾸린 건 아닌가 했던 정환은 도착한 후 자신의 팀이 상대적으로 적은 수임을 알 수 있었다.
누구는 열 명도 넘는 팀이 이곳에 함께 도착하기도 했다. 사비를 들여서라도. 이 대회는 우승할 가치가 있다는 뜻일 것이다.
“첫 번째 과제를 발표하겠습니다.”
직원과의 대화가 마무리되어 갈 즈음, 진행자는 무미건조한 어투로 첫 과제를 발표하려 했다.
극적임을 최대한 주려는 한국의 진행자와는 다른 스타일의 진행이었다.
웅성거리며 자신의 팀과 대화를 나누던 바텐더들이 일시에 조용해지며 중앙에 시선을 모았다.
- 위이이이잉.
하는 소리를 내며 내려온 커다란 화면은 첫 과제를 발표하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월드 클래스 글로벌의 개막을 알릴 첫 번째 과제는···”
진행자는 여전히 긴장감이라고는 없는 덤덤한 어투로 발표를 이어갔다.
무미건조해 보이지만, 참가자들은 덕분에 더욱 긴장이 되는 어투였다.
진행자가 슬쩍 몸을 돌리며 화면을 가리키자, 그의 말 대신 화면에서 첫 과제의 정체가 빛을 발한다.
모두의 시선이 모인 화면에는.
- Market Tour Challenge.
라는 글이 번쩍이며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정환은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과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