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7잔. 정하다. >
5.
오늘 자주 이런 표정을 지어간다. 이건 해외라는 곳에 나와 있으면 자주 겪는 일일까.
15년을 해외에서 살았던 정환은 단호하게 말할 수 있었다.
그건 아닐 거라고.
그저 얽히고 얽힌. 그래서 또 설킨. 그런 묵은 연이 이제야 빛을 발하는 것뿐일 것이다.
바씬이 좁다는 말이 이렇게 절실하게 다가온 적은 없을 것이다.
이건 비단 바씬이 아닌 긴자라는 이름만으로 보아도 무리는 없을 터.
정환은 명진이 긴자 출신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도, 전 스승인 쿠즈하라 미즈오와 아는 사이일 것이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바씬은 좁지만 크다. 이건, 역설적이지만 사실인 명제. 정환만 해도 강남에 있는 모든 바텐더를 알진 못하며, 이름만 들어본 이들도 적진 않았다.
바 문화의 불모지인 한국이 이럴진대 일본은 오죽할까. 긴자에는 수백 개의 크고 작은 바가 있으며 그곳에는 평균적으로 2-4명의 바텐더가 있다.
그들 중 이렇게 연이 닿은 이들이 가까울 것이라곤. 상상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 전생에 정환이 명진이라는 이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 역시 이런 예측을 하지 못한 것에 큰 역할을 했다.
스승의 옆에서 몇 년을 붙어 있던 동안. 이명진이라는 한국인 바텐더에 대한 말은 들은 적이 없는 정환이다.
‘저 영감님도 참···.’
친근한 성격에 붙임성 좋은 이가 아닌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해도 너무 하지 않나.
한국인 제자 1호였던 정환은 이제 섭섭함마저 몰려올 지경이다.
거기에 명진의 성 앞에 붙는 칭호도 상(さん)이라는 높임말. 이는 저 노인이 일본에서는 잘 쓰지 않는 칭호임이 분명했다.
“이게 얼마만입니까! 10년! 아니지 15년 정도인가요? 리 상! 어찌, 이럴 수가!”
“격조했습니다. 연락을 드렸어야 했는데···.”
“몇 달 전에는 일본에도 들렀다, 가셨다지요? 멀리서나마 소식은 듣고 있었습니다. 용퇴하셨다는 이야기도···. 그 소식을 듣고 얼마나 가슴이 아프던지!”
“그렇게 되었습니다. 쿠즈하라 상. 걱정을 끼쳐드렸군요. 송구스럽습니다.”
“무슨 그런 말씀을! 이럴 게 아닙니다. 갑시다! 가요! 오늘은 이렇게 넘길 수가 없습니다! 아니, 그것보다. 여긴 무슨 일로?”
명진이야 제 모습을 바씬 내에서 잘 드러내지 않는 성격이었다. 주목받는 걸 즐기지도, 또 이를 목적에 두지도 않는 사람.
그렇기에 이런 큰 행사에서 마주하는 건 처음인 미즈오 상은 명진이 이곳에 있는 이유를 물어간다.
유독 작은 그의 눈이 의문을 비추자, 명진이 인자한 표정을 지으며 미즈오 상의 대각선 뒤에 멀뚱히 서 있는 정환을 가리켰다.
“···누구?”
누구냐. 넌.
어느 영화에서 들은 적이 있던 저 대사가 저 사람에게서. 또 나한테. 이렇게 쓰일 줄은 몰랐던 정환.
정환은 당황하며 그저 명진만을 바라봤다. 제자가 결승에 나갔더라도. 경쟁자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 미즈오 상의 모습이다.
명진은 인자한 표정과 함께 정환의 곁으로 다가와 말을 이었다.
“제 제자입니다.”
!
“리 상의 제자! 허어. 이런 일이! 제자가 둘 정도 있다고는 들었습니다만. 첫째입니까?”
“셋째입니다. 말년에 운이 좋아 복처럼 얻은 좋은 인재지요.”
제자를 이야기하는 스승의 자부심이 명진 쪽 얼굴에 걸린다. 한때는 정환을 이야기할 때면, 늘 맞은 편에 서 있는 사람의 얼굴에 걸리던 표정이다.
“그렇게 된 거군요. 아, 아니지요. 이게 맞는 거지요. 리 상의 제자라면. 암요. 리 상의 제자라면.”
둘 사이에 오가는 자세한 상황은 알 수 없다. 둘 사이에 어떤 인연이 있었는지도.
다만, 확실히 알 수 있는 건 누군가에게 정도 인정도 잘 주지 않던 전 스승이 현 스승인 명진을 무척이나 인정하고 있다는 것.
정환은 제 3자의 입장에서 바라봄에도 이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정환 씨. 이쪽으로 와서 인사하세요.”
무언가 상황이 바뀐 것만 같지만, 명진이 정환을, 정환의 전 스승에게 인사시킨다.
정환은 어정쩡한 표정과 모습으로 그들의 곁으로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바텐더, 차정환이라고 합니다. 이명진 선생님의 제자입니다.”
유려하게 흘러나오는 정환의 일본어. 대부분은 지금 이 일본어를 듣고 놀라는 이들과 부대끼며 익힌 것들이다.
전 스승은 가볍게 까딱하는 고개로 정환의 인사에 답하며 익히 아는 이름을 들려준다.
“쿠즈하라 미즈오라고 합니다.”
“정환 씨도 들어본 적은 있으시죠?”
“그럼요. 핸드···”
아차.
스승이 제일 싫어하는 말을 꺼낼 뻔했다. 정환은 서둘러 나오려던 말을 넣고는 다른 말을 골라 스승을 설명해 본다.
“현대 바텐딩 기술을 새롭게 재정립하신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 기쁩니다.”
이번에도 만나서 기쁘다는 말로 인사를 건네보는 정환. 다행히 두 스승은 이런 정환의 말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스승님께서는 긴자에서도 인정받던 바텐더였습니다. 한때는 옆 업장에서 일하며 서로 경쟁도 했었죠. 허허. 그때 유일하게 제가 인정했던 바텐더가 바로 리 상입니다. 많이 배우세요. 그리고, 이번 대회에 우승까지 해주시면 더 좋을 겁니다.”
!
“네?”
이번 대회는 미즈오 상의 수제자인 츠바사 바텐더도 나오는 대회다.
거기에 유력한 우승 후보가 바로 그 사람. 겉치레라기에는 본 것이 있어, 저 말뜻을 그대로 받아보는 정환이다.
“그런 놈이 세계 최고 권위를 가진 대회에서 우승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마음만 같아서는 내가 참가라도 해서···! 크흡!”
되묻는 반응에 조금 더 세세한 사정을 들려주는 미즈오 상. 그는 말을 뱉어가다 이내 올라오는 혈압에 잠시 말을 이어가지 못한다.
제자들이 재빨리 다가와 그를 부축했다.
“스승님. 고정하세요.”
“혈압에 좋지 않으십니다.”
“사형도 그런 의미는 아닐 거예요.”
“······.”
들려오는 말이 보여주는 상황이 점점 명확해진다. 무언가 있는 것만 같은 두 사람의 관계.
이전 생에서도 그저 딱딱 형식적인 관계만을 주고받았지만, 정환은 막내에 속해 알지 못하는 것이 더 많았던 관계기에 이를 전혀 모르고만 있었다.
그저 남들에게 늘 친근하지 않았던 스승이기에 츠바사에게도 그런 줄 알았던 게 전부.
아무래도 두 사람 사이에는, 묵은 갈등이 있는 모양이다.
“진정하셔야 합니다. 쿠즈하라 상. 건강 관리가 정말 중요하더군요. 몸이 상하시면 큰일입니다.”
쿠즈하라 미즈오는 명진이 나서고 나서야 겨우 몸을 가눈다.
“이럴 게 아니라, 가시죠. 가서 우리 오랜 회포를 풀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정말 그러고 싶지만, 이번 대회 기간은 참을까 합니다. 개인적인 일로 온 것이 아니라서요.”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면? 아. 제자의 일이군요.”
“부탁을 받고 왔습니다. 제 역할을 다해볼까 합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어쩔 수가 없지요. 알겠습니다. 허면, 주가 바뀌는 수요일에는 어떠십니까?”
“수요일이면, 챌린지가 진행 중이 아닙니까?”
“결승에 올라갈 이들은 모두 정해진 다음이겠지요. 하루 쉬어가는 목요일도 있고. 뱀부 바에서 제자들과 함께 게스트 바텐딩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부디 와주신다면, 영광일 겁니다.”
“···정말 그러고 싶습니다만.”
“힘들겠습니까?”
쿠즈하라 미즈오는 이대로 명진과 헤어지는 게 아쉬운지 자신답지 않은 모습으로 조금 질척거려 본다.
정환까지 바라보며 동의를 구하는 그의 모습.
정환은 고개를 절레흔들며, 대신 답을 들려준다.
“마스터께서는 몸이 상하신 뒤로 술을 거의 드시지 못하십니다. 한잔. 딱 한 잔이 하루에 전부십니다.”
“그 정도로···!”
은퇴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그저 바텐더로서 몸이 상한 줄만 알았다.
이제는 손님으로도 마음 편히 잔을 즐기지 못한다고 하니, 애처로운 눈빛이 미즈오의 눈을 타지 않을 수 없었다.
모처럼 열리는 게스트 바텐딩은 손님의 머릿수로 인원을 제한하기에, 한 잔만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참석을 피하는 게 예의일 것이다.
“다음에 정식으로 찾아뵙겠습니다. 이제는 번거로우셔도 식사로 하시지요. 우리 자주 마주치던 그 가게에서 제가 꼭 밥 한 끼 사겠습니다.”
“꼭 그럽시다. 이 쿠즈하라 미즈오, 어디 가서 밥은 안 얻어먹고 다닙니다만, 이번만 예외로 꼭 기억하겠습니다. 일본에 오거든 꼭 긴자로 와주십시오.”
애처로움이 눈에서 흘러나와 명진의 손까지 자리한다. 손을 꼭 마주 잡은 미즈오는 젊은 시절을 함께 보낸 동료를 작게 토닥였다.
명진은 따스하게 이를 받고는 조심히 입을 열어본다.
“대신···.”
무언가 조건이 하나 붙는 것만 같은 말. 평소 이런 모습을 보이지 않는 사람인 걸 알기에 미즈오는 조금 놀라며 명진을 빤히 바라본다.
명진은 그런 눈빛에도 자신의 말을 완성해 갔다.
“여기, 차정환 군을 대신 보내도 되겠습니까?”
“그게 무슨···?”
“게스트 바텐딩에 굳이 한자리를 내주신다면, 정환 군을 한번 보내고 싶습니다.”
뻔뻔하게 조금은 아무렇지 않게. 그렇게 자신의 말을 완성하는 명진.
미즈오의 제자 역시 결승에 올라 있다는 걸 모르지 않은 사람이 한 말치고는 제법 뻔뻔한 말이다.
하지만.
“그러시지요.”
!
그는 명진의 눈을 한번 보고는 그대로 그의 부탁을 받아 버린다.
당장에 쿠즈하라 미즈오의 게스트 바텐딩을 줄까지 서가며 기다리는 이들이 몇인가.
그 즉답을 듣고 당황하는 제자들에게.
“차정환 바텐더. 그 이름으로 예약 걸어 놓거라. 시간은 후반으로. 가게가 한산할 때에 맞춰서.”
“···예. 마스터.”
쿠즈하라 미즈오는 단호하게 명진의 말을 재차 불러줄 뿐이다.
명진이라는 사람은 아무런 이유 없이 이러지 않는 사람임을 그는 모르지 않았다.
쿠즈하라 미즈오는 명진에게 다시금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 옆을 지나간다.
반가운 만남이지만, 언제나 반가움은 아쉬움으로 끝나는 법이다.
과거는 그렇게 정환과 현재를 스쳐, 저 멀리 가버리고 말았다.
일본인들이 사라진 복도에는 정환과 명진만이 남아 있다.
“저어, 마스터···?”
정환은 왜 그런 말을 남겼냐는 투로 명진을 바라본다. 한 번쯤 다시 가보고는 싶었다.
적어도 손님으로 만난다면, 오늘보다는 더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도 있었을 테니까.
허나, 이런 생각을 명진이 어떻게 알았는지는 정환도 알 수 없다.
명진은 그저 늘 그렇듯 인자한 표정과 함께.
“편하게 다녀오세요. 멀리서 보고 있었습니다. 아까부터···, 이곳을 서성거리더군요. 무언가 사연이 있는 거겠죠.”
!
홀로 모든 걸 포용할 뿐이다.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이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제가 모든 걸 알아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게 고용주일 때도 그렇고. 그저 이렇게 멘토로 지낼 때도 그렇지요. 정환 씨의 움직임이 처음부터 예사롭지 않은 건 알고 있었습니다. 말할 수 없는 사정이야 있다는 것도. 하지만, 굳이 그걸 파헤쳐 볼 생각 따위는 없습니다. 때로는 그저 그대로 일어난 일이, 또 흐름이. 모든 걸 말해주기도 하지 않습니까. 허허. 정환 씨는 그저 정환 씨로 우리에게 다가왔을 뿐입니다. 우리에겐 그거면 그만. 저는 그저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입니다.”
명진은 말을 마치고 정환을 지나가며 어깨를 한 번 토닥인다. 마치, 괜찮다. 말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네가 더 힘든 걸 안다는 듯 따스하게 토닥여지는 정환의 어깨.
명진에게 무언가를 들킬 때면, 언제나 이런 식이다.
그리고 명진은 언제나 무언가를 알아챘을 때도 정환을 챙겨준다.
현재로 돌아와 놓쳐버린 정환의 과거이자 미래를, 이렇게 또 연결해 주는 명진이다.
명진이 떠나간 복도에 잠시 서 있던 정환이 서둘러 명진의 뒤를 쫓아간다.
잠시 바라본 건 과거의 인연들이 지나갔던 자리.
허나, 이내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인지.
정환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스승 복 하나만큼은 터진 것만 같은 정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