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잔. 여기는.
2.
“…….”
미친 소리다.
주용은 준비된 것처럼 나오는 바텐더의 말에 입을 닫고는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조금 전까지 주고받았던 이야기를 뭐로 들은 걸까. 그런 생각에 더한 설득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드는 그.
다만, 앞에 놓인 술병이 조금씩 비어 있는 모습을 보니, 바텐더가 적당히 연습은 하고 온 거라는.
또, 나름의 진심을 표하고 있는 거라는. 그런 생각마저 들어 그는 생각을 정리하는 중이다.
“간단하지만, 팝업 스토어. 그런 느낌이 되겠네요.”
“언제 이런 걸 준비한 겁니까? 제게는 말도 없이….”
“당연히 원작자께서 허락하지 않는다면, 진행하지 않을 겁니다. 전 그저 제안을 드리는 것뿐입니다.”
“내가 싫다면, 이대로 끝이다…. 이 말씀입니까?”
“물론입니다. 오늘 이야기도, 이대로 끝을 낼 수도 있습니다.”
생각보다 단념이 빠르다. 아니, 이건 어쩌면 하나의 설득 방법일지도.
주용은 자신에게 넘어온 선택권 속에서 짙어가던 불신이 점점 흐려짐을 느끼고 있었다.
차라리 저쪽에서 강경하게 나온다면 반동적으로라도 자신도 강하게 부딪혀 볼 텐데.
저렇게 선택권을 넘겨버리니, 이내 힘이 빠져 뭐라 더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 그였다.
“…….”
“시간이 많지는 않아서요. 50분이네요. 10분 후면, 영업이 시작됩니다.”
길어지는 침묵 속에서 바텐더는 조용히 그를 압박해 온다. 영업 전에 부른 이유가 있다더니, 이런 걸까.
복잡한 머릿속에서 주용은 도저히 전통주를 밀어내는 손님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눈앞에서 거절을 당하는 걸 마주하고 싶지 않다. 그의 속마음은 단순했다.
그저 전통주가 아닌 자신이 만들어낸 레시피에 전해질 혹평. 그리고 거부감.
그런 걸 제대로 마주하고 버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런 고민에 조금은 두려워지는 그의 눈.
그렇게 고민이 깊어질수록.
시간은 빠르게만 흘러갔다.
잔잔한 침묵 속에서.
딸랑.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린다.
고민은 아무런 답을 찾지 못한 지금. 허나, 아실이라는 요즘 뜨거운 장소는 문을 여는 정확한 시간이 되는 순간 그대로 손님을 맞이하고 말았다.
바 테이블 위에는 여전히 전통주가 놓여 있고 앞에는 여전히 답을 내리지 못한 주용이 앉아 있을 뿐이다.
“안으로 들어오시죠. 이쪽으로 안내 도와드리겠습니다. 두 분이세요?”
“네. 두 명이요. 오늘은 저희가 1등은 아니네요?”
“아. 네. 그렇게 되었네요. 체이서는 어떻게 준비해드릴까요?”
“물로 주세요.”
“넵! 잠시만요!”
배경처럼 앉은 이의 심정이 무색하게 새로 들어온 이들은 밝은 기운을 내뿜는다.
생각보다 젊은 연령대의 손님들. 저런 이들에게 과연 전통주로 만든 칵테일이 통할까.
주용은 점점 불안하면서도 알 수 없는 무언가가 가슴에서 함께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사람이라면 언제나 품고 있는 작은 한 가지 의문. ‘만약’이라는 가설이 그의 가슴에서 꿈틀거리며 묘하게 그의 고민을 깊게 만들어 갔다.
만약에 통한다면? 만약에 내가 잘못 생각한 거라면? 만약, 그 사이에 모든 게 바뀌었다면?
같은 수없이 펼쳐지는 가설들.
단호하게 안 될 거라 말을 하면서도 그가 이토록 오래 침전하는 이유 역시, 저 ‘만약’이라는 중독성이 심한 하나의 약 때문일지도 모른다.
“여기 수건이랑 물입니다.”
“감사합니다!”
“오늘은 뭐 마시지?”
“여기는 추천 받아서 마시는 게 제일 나아. 사장님께 추천 부탁드리자. 사장님!”
주용의 머리가 약에 절어가고 있을 때, 손님은 활기차게 목소리를 높이며 정환을 부른다.
그리고 이어지는 평범한 주문.
“저희 추천 좀 해주시겠어요? 전 한 번 와봤고, 여기 이 친구는 처음이에요!”
손님은 어느 바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으로 바텐더에게 잔을 추천해줄 걸 물어왔다.
정환은 그 주문을 조용히 듣고는 주문이 나온 곳이 아닌 옆에서 침전하는 다른 손님에게 시선을 옮겼다.
무언가, 허락을 구하는 모습이다.
조용한 압박이 주용을 뒤덮었다. 꼭 해달라. 기회를 달라. 증명해 보이겠노라. 간절함이 묻은 부탁은 아니다.
그렇기에 더욱 힘겨워 보이는 선택권자.
꾸욱.
잠시 입술을 깨물고 눈을 질끔 감았던 그는.
결국 눈을 천천히 뜨며, 고개를 끄덕이고 만다.
‘감사합니다.’
슬쩍 그에게 눈으로 인사하는 바텐더의 눈이 마치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주용은 홀로 앞에 놓인 불바디에로 입을 적시며 캄파리의 쌉싸름한 맛으로 기분을 달랠 뿐이다.
“추천이요? 네. 혹시, 식사는 하고 오셨나요?”
주용의 허락이 떨어지자, 정환은 언제나처럼 전문스러운 모습으로 변해 손님을 상대한다.
얼굴에는 조금 전까지 보여주던 진중한 모습을 지우고는 미소가 가득한 바텐더의 표정만이 가득했다.
“네! 저녁은 먹었고, 조금 기름진 음식으로 먹고 왔어요. 고기 구워 먹었거든요!”
“맛있는 걸 드셨네요. 종로에서요?”
“여기 바로 맞은 편에 먹거리 골목에서요!”
“거기 좋죠. 저도 자주 갑니다.”
“헐, 대박이다. 진짜요?”
“그럼요. 기름진 고기를 드셨으니 당장은 속이 조금 편해질 그런 칵테일이 좋겠네요. 무겁지 않고, 적당히 입안을 풀어줄 칵테일로 시작해 보시죠.”
“좋아요!”
“쿨러 스타일이라는 칵테일 스타일이 있습니다. 베이스가 되는 술에 상큼한 과일을 넣고 탄산수로 채워주는 스타일이죠. 쿨러로 추천을 드리고 싶은데, 어떠세요?”
“쿨러요? 전 괜찮을 거 같아요!”
“저도요! 입안이 기름진 느낌이 있어서 탄산수도 좋을 거 같네요!”
여기까지는 평범한 모습이다. 나올 칵테일의 종류를 설명하고 그에 대해 허락을 받는 바텐더의 모습.
이제 그 베이스가 될 술이 어떤 술인지를 밝힌다면 반응이 달라지겠지.
주용은 그런 눈빛으로 조용히 옆에 앉은 손님과 바텐더를 흘긋거렸다.
그리고.
“대신, 오늘은 조금 특별한 술을 베이스로 칵테일을 만들어 볼까 합니다.”
나오는 바텐더의 본론.
바텐더는 술에 재료가 되는 걸 속이고는 손님께 잔을 내밀어서는 안 되는 법이다.
이건 오래된 그들의 전통이자 절대 바뀌지 않을 하나의 원칙.
정환은 당연하다는 듯 주용의 앞에 두었던 전통주를 하나 가져와 손님의 앞으로 내밀었다.
윗부분이 조금 비어 있어 바에 어울리는 병이 손님의 앞으로 나왔다.
“이건 뭔가요? 이게 그 특별하다는 술이에요?”
“이건 문배술이라는 술입니다. 오늘은 이거로 쿨러를 만들어 드리려고 합니다.”
“문배술? 이름이…엄청, 친근하네요?”
“그렇죠? 우리나라 전통주라서요.”
- 씨익.
정환은 문배술이 담긴 술병을 흔들며 밝게 웃어 보인다. 마치, 지금 상황이 아무렇지 않은 평범한 상황이라는 것처럼.
다른 이들이라면 제법 힘을 줘서 말했을 순간이 아무 일 아니란 것처럼 넘어가는 와중이었다.
흘긋거리는 시선으로 옆자리를 보던 주용은 이내 눈을 감고 만다. 여기서 부정적인 반응이 나온다면. 이는 입으로 들어간 후 나오는 반응보다 더 절망적일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으로.
하지만.
“전통주요? 우와. 바에도 이런 술이 있네요? 한식집에서나 보는 건줄 알았는데!”
생각보다는 괜찮은 반응이 손님의 입에서 나왔다.
‘……?’
주용은 잠시 고개를 빤하게 돌려 옆에 앉은 손님의 얼굴을 살폈다. 나이는 이십 대 후반에서 삼십 대 초반 사이. 그리고 여성. 평범한 차림에 적당해 보이는 직장인으로 보이는 모습.
그런 손님이, 또 ‘바’라는 고상한 곳에 제법 다닌다는 사람이 하는 말이라고는 그가 그대로 믿지 못한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저 말속에는, 전통주에 대한 막연한 적대감이나 내려 보는 시선은 깔려있지 않은 게 분명했다.
그저 깔린 거라곤 처음 보는 것에 대한 호기심. 그게 전부로 보였다.
“네. 이번에 새로 준비해 보려고 도전 중인 술입니다. 제가 만든 레시피는 아닙니다. 이건…”
정환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주용을 향했다.
휙! 휙!
연신 고개를 저으며 얼른 안 된다는 말을 전하는 주용. 자신의 눈앞에서, 원작자가 있다는 말을 들으면 손님은 솔직한 평을 들려주지 못할 것이다.
“…예. 다른 분이 만든 칵테일이지만, 제가 이렇게 하루 빌려왔습니다.”
“신기하네요! 바에서 전통주는 처음인 거 같아요!”
“그럼, 괜찮으실까요? 이렇게 전통주로 한 잔 만들어 드려도요.”
“그럼요! 우리가 처음인 거죠? 오늘 일찍 오길 잘했네요!”
“그러게. 대박이다.”
생각보다 괜찮은 평이 나온다. 가게가 요즘 유행을 타고 뜨는 곳이라서일까.
이들은 이곳의 주인인 정환의 말에 별다른 반감이 없어 보였다.
정환은 그에 맞춰 문배술과 유자청을 넣고는 이를 셰이킹해 주용의 문배쿨러를 완성해 냈다.
스윽.
“여기, 문배쿨러. 나왔습니다.”
“와! 그냥 칵테일 같아요!”
“그러게? 이건 전통주를 썼다는 말을 안 해주셨으면 몰랐겠는데요?”
“그럴 순 없죠. 재료는 꼭 미리 말씀을 드려야 해서요. 드셔보세요. 맛도 괜찮을 겁니다.”
잔이 나오자 제법 멋들어진 모습에 손님들은 예상외라는 반응을 보여준다.
재료가 들어가는 비율까지는 주용이 정한 그대로. 다만, 정환은 여기에 가니쉬와 잔 등을 조금 더 신경 쓰며 나름의 잔을 완성해 냈다.
조금 비어 보이던 술병의 윗부분을 연습을 위해 쓴 거로 보였다.
은은한 조명과 바라는 공간, 그리고 바텐더의 손길이 묻은 장식과 잔이 더해지자, 지금 같은 모습의 문배쿨러가 나온 것이다.
크게 변한 건 없다. 그저, 주는 거라곤 약간의 뉘앙스뿐. 그래도 한잔으로 제법 괜찮은 완성도 있는 잔임은 분명해 보였다.
손님은 처음 만난 전통주 칵테일을 조심히 손으로 잡고 입으로 가져간다.
눈에는 기대감과 호기심, 그리고 약간의 불안감도 함께 맺혀 있었다.
호르르륵.
잔은 코를 거치지 않고 바로 입으로 향했다. 술에 조예가 깊지 않은 일반적인 손님이라면 이게 평범한 모습.
잔이 입술에 닿을 때 느껴지는 잔잔한 향이면 그들에게는 그만이다. 유자 향이 은근히 올라와 전통주 특유의 고소함을 애써 눌러줘 딱 맞는 밸런스였다.
야생 배의 시큼함을 담은 술이 유자와 어우러져 손님의 입안을 한껏 풍성하게 만드는 맛이 감돌았다.
앞서 기름진 입 안을 씻어준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그런 잔이었다.
“맛있어요!”
“와. 유자는 또 레몬이나 라임이랑 또 다른 느낌이네요! 훨씬 좋은데요? 과하게 상큼하지도 않구요!”
“속이 편-안-해지는 그런 느낌도 있어요. 과하지 않네요.”
“그러니까. 아실이라서 그런가?”
“문배술이 특히나 깔끔한 맛으로 유명한 술이라서요. 입안에 묻은 음식을 씻어내기에는 최고였을 겁니다.”
“유자도 어울려서 좋았어요!”
“그렇죠? 전 전혀 생각지도 못했는데, 만드신 분이 기발하시더라구요.”
정환은 전해지는 공치사를 슬쩍 옆으로 돌려 다른 이에게 넘긴다. 이를 받는 이는 눈앞에서 이어지는 찬사에 얼굴이 조금 붉어진 모습이다.
그래도, 뭐. 다행이 아닌가. 첫 시식 후 들려오는 평이 이리 좋다니.
옆에서 얼굴을 붉히던 주용은 예상외의 반응에 조금 놀란 모습도 함께 가져가고 있다.
딸랑.
첫 손님들이 잔을 즐기는 동안, 아실은 명성에 걸맞게 쉬지 않고 손님들이 들어오며 자리를 채운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씩 잔을 권해가는 정환의 모습.
거절하는 이도 분명 있었다. 그런 이들은 아실에 무언가를 기대하며 온 이들.
정환이 외부 활동을 하며 보여준 잔들이 있었기에 모두가 전통주를 권한다고 해서 이를 받아들인 건 아니었다.
다만,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비율.
전체적으로 권하는 횟수에 비해, 잔을 받아드는 이들의 비율이 결코 적진 않다는 것은 이를 지켜보는 이라면 누구나 확신할 수 있는 것이었다.
‘왜…?’
자신의 예상도, 또 경험도. 모두가 빗나간다. 그런 와중에도 옆에서 이어지는 건.
“이건, 두견주라는 꽃잎을 넣은 술로 만든 칵테일입니다. 곡식도 들어갔지만, 꽃 향이 나쁘지 않습니다.”
“좋네요! 향수를 마시는 느낌인데 구수함도 묻어 있네요?”
“감홍로를 베네딕틴과 조화시켜 봤습니다.”
“흠. 감홍로? 들어 본 것도 같은데…?”
“여주에서 만든 고구마 소주를 활용한 칵테일입니다.”
“여주요? 전 이천 출신인데! 바로 옆이네요!”
자신이 직접 만든 레시피들에 대한 권주와 칭찬들.
주용은 2년 전 자신이 마주했던 현실과는 조금 다른 반응에 입을 다물지 못한다.
‘이게…’
다 무슨 일이란 말인가. 2년이라는 사이에 사람들의 인식이라는 게 이토록 바뀐 걸까.
그가 머리를 쥐어짜며 스스로 목격한 광경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있을 때.
“한옥이라서 그런가? 아주 잘 어울리는 느낌인걸?”
“그러게 말이야. 대들보 아래에서 전통주로 만든 칵테일이라니.”
“종로에서 별일을 다 겪는군.”
“아무렴. 허허. 한식보다야 낫지.”
옆에서는 그의 이해를 도울 말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파팟!
분명 그런 소리를 내며 무언가 머리에 스친 것만 같은 주용. 주용은 그제야 찬찬히 아실 안을 둘러보며 무언가를 살피기 시작했다.
밖에는 살아있는 서까래와 담장이 주변을 두르고 있고 마당은 좁지만 있던 그대로의 멋을 살리고 있다.
안에는 살아있는 대들보다 원목으로 마감한 백바, 그리고 바 테이블까지.
이런 모든 요소를 떠나서 그의 머리를 스치는 마지막 한 단어.
‘종로….’
종로.
마지막으로 그 단어가 그의 머리를 스치고 가자.
그제야 주용은 눈앞에 보이는 것들이 조금은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