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술은 특별합니다-88화 (88/175)

88잔. 아픈 손가락.

1.

탓. 탁. 탓!

가벼운 손짓 몇 번에 셰이커가 하늘에서 춤을 춘다. 과하진 않지만, 정적인 클래식 바텐더보다는 조금 경쾌한 모습.

플레어보다는 절제를, 또 클래식보다는 활발함을 갖춘 손동작이 한 바텐더의 손에서 이뤄졌다.

푸어러는 이제 보이지 않는다. 익숙한 듯 검지와 중지 사이에 지거를 끼운 바텐더는 술을 계량해 차분히 셰이커를 채워갔다.

탁. 탁. 탕.

여전히 들려오는 같은 리듬. 자세와 셰이커의 모양이 조금 바뀌었지만 이를 올려 드는 리듬과 루틴은 여전한 한 바텐더의 모습이었다.

살각! 살각! 살각!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가 들려온다. 지금 셰이커를 흔드는 바텐더의 옆에 선 다른 바텐더의 손에서 들려오던 소리.

그 소리에 앞에 앉은 이들은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를 기분 좋게 바라봤다.

촤아아악.

잘 섞인 술이 잔으로 따라진다. 그리고 멋들어진 손으로 이를 받아 손님 앞에 내미는 바텐더.

“주문하신, 김렛. 나왔습니다.”

그는 아실의 새로운 바텐더, 윤수였다.

“…이게 한 달 만에 바뀐 자세란 거죠?”

“보고도 믿기 힘드네. 확실히.”

“하. 말해 뭐하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구만.”

어느덧 윤수가 아실에 온 지도 한 달이 지난 무렵. 그의 앞에서 잔을 받는 세 사람의 표정이 다채롭다.

그들은 한 달 전 이 바텐더를 처음 봤을 때 모습이, 이제는 머릿속에 그려지지도 않을 정도였다.

“이제 괜찮죠? 연습 많이 했어요, 우리 윤수 씨.”

입을 쩍 벌린 정우와 기준, 그리고 재훈 앞으로 정환이 나선다. 정환은 마치 어린아이의 성적표를 자랑하듯 잔뜩 어깨가 올라간 모습이다.

“뭘 한 거냐? 도대체?”

“그냥 자세만 조금 고쳤죠. 원래 실력이야 좋은 사람이니까요.”

“루틴은 그대로 둔 것 같은데, 확실히 간략해졌더군요. 정환 씨가 고친 건가요?”

“네. 너무 화려한 동작은 아무래도 부담스러워 하실 분들이 있으니까요. 평소 루틴은 그대로 두고, 동작을 절제하는 쪽으로 같이 연습했어요.”

“그걸 한 달 만에?”

“윤수 씨가 열심히 해줬죠.”

“…말을 말자. 그래, 차정환이 또 차정환 한 거지.”

“그런 거라면 이해는 또 가네요.”

“저도 납득했습니다.”

한 달 만에 사람의 몸에 익은 기술을 제 색깔대로 바꾸는 건 절대 쉽지 않은 일이다.

원래 있던 동작을 절제한다는 말이 쉽게는 보이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이겠나.

짧은 시간도 아니고 3년을 익힌 것을.

허나, 그 어려운 걸 정환과 윤수는.

기어코 해내고 말았다.

“맛부터 봐주세요. 오늘 통과하면, 내일부터 바로 프론트에 설 예정이에요.”

정환은 아실로 찾아온 다른 바텐더들에게 윤수가 만든 잔을 권한다.

지금은 폐점한 이후의 시간. 이들은 오늘도 시간을 내 아실에 들렀다.

이주에 한 번씩. 이들이 늘 모이는 시간이었다.

처음 장윤수라는 바텐더의 실력을 볼 때만 해도 일회성으로 끝날 모임이었다.

그저 실력에 자신 없어 하는 바텐더가 있으니 이를 객관적으로 좀 평가해 달라는 말만 듣고 왔던 이들.

허나, 이들은 이후.

이전 가게에서 사장님이…

로 시작하는 윤수의 사정을 듣고는.

이렇게 시간을 내 교류하며 지내고 있다.

정환이 느꼈던 그 ‘책임감’이라는 걸, 이들도 느꼈기 때문이다.

이런 개X 같은 놈을 봤나. 어디냐? 어디서 이 씨X놈이 물을 흐리고 있어? 그 씨XX끼 이름은? 교육비? 지랄하네. 아주 인성 교육을 확 돈 받고 시켜 버릴라. 아 개X 같은 새끼. 듣기만 해도 열 뻗치네. 아우!

화나네요. 어딥니까? 거기는. 혼내줍시다.

…아직 그런 곳이 있다니, 믿을 수가 없네요. 저도 정말 화가 납니다. 윤수 씨. 잘 나왔어요. 고생이 심했겠네요.

윤수는 처음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을 때 들었던 이들의 반응을 아직 잊지 못하고 있다.

누군가 자신의 옆에서 이렇게 함께 화내고 공감해 준다는 게 어색하지만 싫지 않은 그였다.

호르르륵.

세 명의 바텐더가 동시에 윤수의 김렛을 맞본다. 그리고 펴지는 이들의 얼굴.

지지난 주 맛을 봤을 때는 아직 바뀐 자세에 익숙하지 않아 맛이 잡혀있진 않았다.

플레어 방식으로 할 때와는 또 달랐던 그의 실력.

허나, 2주가 더 지날 동안 그의 실력은.

“와.”

“허.”

“이게….”

또 다르게 변해 있었다.

“괜찮죠?”

“맛…있네.”

“맛있네요.”

“아. 열 받아. 왜 우리 호텔 신입은 이런 애들이 안 오냐고!?”

“감사합니다! 다들 도와주신 덕분입니다!”

바뀐 건 자세와 실력만이 아니다. 이제는 자연스레 나오는 맛있다는 말에 대한 감사하다는 인사. 더는 벅찬 감정도, 또 어색한 모습도 없이 맛있다는 말을 그대로 받을 수 있게 된 윤수였다.

“괜찮겠죠?”

“응. 과할 정도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손님들도 좋아하실 겁니다.”

밝게 웃으며 묻는 정환의 말에 다른 바텐더들이 모두 동의한다. 이는 곧 최종 테스트를 통과했다는 말.

“그, 그럼…?”

윤수는 저 말들의 의미를 아는 듯 잔뜩 기쁜 표정으로 정환을 바라봤다.

정환은.

씨익.

한 번 밝게 웃고는.

“내일부터 프론트에 섭시다! 윤수 씨.”

윤수에게 또 다른 변화를 고했다.

2.

“화이트 레이디, 그리고 마가리타. 나왔습니다.”

북적한 분위기가 가득한 주말의 아실.

SNS와 잡지 인터뷰 덕에 인기가 오른 아실은 주말이면 언제나 넘치는 손님으로 매번 호황을 맞이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복잡한 주말을 위해 고용한 사람이 바로 장윤수라는 바텐더.

그는 아실에 오고 한 달 만에 제 역할을 해내고 있다.

“감사합니다! 잘 마실게요!”

“와. 사장님 칵테일도 맛있지만, 여기 이분 칵테일도 맛있어요!”

“흠. 다른 맛이 있군. 차 사장의 맛과는 또 다른 맛이야.”

“실력이 좋은데요? 어디서 스카웃 해오신 거예요?”

“다른 칵테일을 마시니, 저번 주랑은 또 다른 느낌이네요! 좋아요!”

다행히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정환이 다듬었고 또 다른 바텐더들에게 인정받은 실력이 아닌가.

손님들은 새 바텐더를 만나, 아실에서 또 다른 추억을 쌓아 간다.

“어때요? 오랜만에 손님께 잔을 내죠? 힘들진 않아요?”

“아뇨! 사장님, 너무 재밌어요! 역시 이 맛에 바텐더 하나 봐요!”

“다행이네요. 계속 열심히 해주세요. 데뷔전을 못 열어 준 게 죄송스러워서 어쩌죠?”

“괜찮아요. 주말에 당장 손이 급하셨잖아요. 앞에 경력도 있고 이미 지인들도 다들 제 칵테일은 마셔본 걸요!”

데뷔전을 열어주지 못한 건 못내 마음에 걸린다. 사정이 급한 만큼 서둘러 프론트에 세웠지만, 이건 계속 마음에 남을 것만 같다.

딸랑!

“안녕하세요! 3명, 자리 있어요?”

당장 손이 모자랐다는 말을 증명하듯 정환이 잠시 숨을 돌릴 틈도 없이 손님이 몰아쳤다.

3명의 손님이 더 들어온 아실 안은, 이미 자리가 만석이었다.

“사장님. 자리가 없는데, 어떡하죠?”

“어…, 잠시만요. 제가 한 번 볼게요.”

사람이 몰아치긴 했어도 자리가 모자랐던 적은 없었다. 정환은 아실이 문을 열고 처음으로.

손님을 자리에 앉히지 못한다.

“죄송해서 어쩌죠? 지금 바 테이블도 별채도 만석이어서요. 정말 죄송합니다. 어렵게 걸음 해 주셨는데….”

허리를 크게 접으며 손님께 사과하는 정환. 하지만, 손님은.

“기다리면 안 될까요? 저희 시간 많아요.”

“네?”

“아, 여기 이 친구가 여기 꼭 와보고 싶다고 해서요! 기다리죠, 뭐. 괜찮죠?”

“아…. 네. 저희야 감사하죠. 그럼, 자리가 나면 바로 안내 도와드리겠습니다!”

“네. 마당에 있을게요.”

먼저 대기하기를 자청한다.

‘대기 손님까지…?’

줄을 서서 들르는 바는 아직 많지 않다. 이건 한참 후 바씬이 조금 더 커진 후의 이야기일 터.

2010년대 후반이나 가야 생길 일이 벌써 일어나자, 정환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이거 어쩌면…’

아실 하나만으로는 모여드는 손님을 수용하기에 부족할 수 있다는.

정환은 당황스럽고도 기쁜, 그런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정환이 늘 꿈꾸던 건 상권의 확장이었다. 어쩌면, 그 기초가 서서히 완성되어 가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투욱.

“하, 하얗게 불태웠습니다!”

몰려드는 손님에 밖에는 줄을 선 대기 손님까지. 처음으로 프론트에 선 날치고는 과하게 바쁜 하루를 보낸 윤수.

영업이 겨우 끝난 폐점 시간이 되어서야, 그가 의자에 몸을 던지며 잔뜩 진이 빠진 모습을 보여준다.

“고생했어요. 오늘은 정말 윤수 씨 덕분에 겨우 넘기네요.”

“사장님이 더 고생하셨죠. 어휴. 바에 줄 서서 술 드시는 분들, 전 처음 봤어요.”

아직 줄을 서서 술을 마신다는 게 생소한 시대였다. 특히 바는 상권을 형성하고 있기에 언제든 대체가 가능한 곳.

아마, 종로라는 동떨어진 곳에 문을 연 아실이기에, 대체할 가게가 없어 조금 일찍 벌어진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게요. 이게 좋은 일일지 아닐지. 참.”

“장사가 잘되면 좋은 일이죠! 아닌가요?”

“그렇긴 해도…. 손님이 혹시라도 시간에 쫓기는 느낌을 받을 수 있으니까요.”

“아. 그렇게 볼 수도 있긴 하네요. 확실히 밖에서 누가 기다리고 있으면 조금 그렇긴 하죠.”

“기다리는 사람도, 안에 앉은 사람도. 둘 모두 조금이라도 불편하면 안 되죠. 여긴 칵테일 가게가 아니라, 바니까요.”

“오오. 역시, 사장님!”

윤수는 정환의 진중한 고민에도 그저 감탄하며 수첩을 꺼내 든다.

정환만이 턱을 잡고는 이를 어찌 해결할지, 고민할 뿐이다.

“일단 정리하고 오늘은 들어갑시다. 한동안 상황을 좀 봐야겠어요.”

당장 머리를 쥐어짜도 나오는 건 없다. 이게 오늘만 벌어진 기이한 현상일 수도 있고.

정환은 우선 상황을 조금 더 지켜보기로 하며 그렇게 하루를 마무리했다.

윤수에게는 조금 바쁘고 특별했던, 그리고 정환에게는 당황스럽지만 새로운 가능성이 보인, 그런 하루였다.

3.

“…….”

처음으로 아실에 대기 손님이 생기고 일주일 후. 다시 찾은 주말을 맞은 정환은 이제 확신할 수 있었다.

지난주의 일은, 그날만 잠시 일어났던 우연한 일은 아니었다는 걸 말이다.

“사장님…? 괜찮으신 거죠?”

윤수는 주말 영업을 마치고 홀로 침전하는 정환에게 다가와 눈치를 본다.

오늘 역시 대기 손님이 있었다. 저번 주 일요일도 그러했고.

이제는 주말이면 어김없이 생겨나는 게 대기 손님.

다른 자영업자라면 기뻐해야 할 일에도, 정환의 표정은 마냥 밝지만은 않았다.

“대기하신 분들 말고 돌아간 팀은 몇 팀이나 있었죠?”

“다섯 팀 정도…였죠. 기다리다 가신 분들은 세 팀 정도였고요.”

“다섯 팀에 세 팀….”

누구나 호황을 맞이하면 들어왔던 손님의 수를 계산하기 마련이다.

허나, 바텐더는 그래서는 안 되는 법.

정환은 오늘 바 안에 들어왔던 손님의 수보다는, 들어오지 못한 손님의 수가 더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어쩔 수 없는 거니까요.”

“그렇긴 하죠. 그렇긴 한 데….”

그래도 마음이 쓰이는 건 사실이다. 정환은 좀처럼 불편함을 감추지 못했다.

제아무리 경력이 많고 실력이 좋아도 감당하지 못하는 건 있기 마련이다.

지금이 딱 그런 상황.

한정적인 공간에 모든 손님을 받는 건, 정환의 손에서 해결이 가능한 문제처럼 보이진 않았다.

‘누구나 와서 쉴 수 있는 공간….’

수익이 늘어나는 건 좋은 일이다. 다만, 그 수익 외에도 사장이 추구하는 게 있다면 이는 별개의 문제.

정환은 항상 마음속으로 그려왔던 ‘누구나’라는 단어가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윤수 씨. 오늘은 먼저 퇴근하실래요? 전 조금 더 있다가 들어갈게요.”

정환은 윤수를 먼저 집에 보내고는 아실에 홀로 남는다. 손님 자리에 앉은 그의 앞에는 휴대폰이 한 대 놓여 있다.

‘해볼까? 말까?’

갈림길에 선 사람처럼 휴대폰을 보며 고민에 빠지는 그. 정환은 입술까지 깨물고는 한동안 두 가지 선택지 사이에서 선택을 내리지 못했다.

‘…….’

잠시 허공을 보던 그가 손을 테이블 위로 가져간다. 휴대폰을 가져와 거침없이 번호를 누르는 그.

결심은 이미 선 것처럼 보였다.

뚜루루루루.

유난히 길게만 느껴지는 수신음이 들리더니 이내.

여보세요? 정환 씨?

라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훈 씨.”

라며 통화 상대를 불러본 정환은.

“일전에 이야기했던 독립…. 혹시, 아직 고민 중이신가요?”

오래도록 그리던 그림을.

조금 더 선명하게 그려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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