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잔. 그때도 틀렸고, 지금도 틀렸다.
4.
“그건…. 왜 물으시는 거죠?”
정환은 진심을 담은 윤수의 질문에 조금 걱정이 섞인 투로 반문했다.
그리 좋은 질문은 아니다. 솔직히 답하자면, ‘진짜’라는 답이 나오겠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다르게 답할 수도 있는 상황.
거기에, 물어오는 이의 태도가 그리 밝지 않아 무언가 자신감이 부족한 듯 보이는 모습이다.
실력에 대해 겸손한 건 어디까지나 좋은 일이다. 비단 바텐더가 아니라 어느 직군이라도 이는 미덕이니까.
허나, 이건 어디까지나 대외적인 이야기.
본인 스스로는. 또 속으로는.
바텐더라면 당연히 자신이 갈고 닦은 기술과 실력에 자신감이 있어야만 했다.
바텐더가 자기 실력에 자신감을 잃으면 이는 손님에게 불신이 되고 만다.
술을 잡는 손, 술을 따르는 손, 그리고 술을 흔들고 젓는 손, 최종적으로 손님에게 잔을 내미는 손까지.
그런 손에 자신감 없다면 어느 손님이 이를 맛있는 잔이라 믿으며 들이키겠나.
정환은 저 물음이 가볍게 여겨지지 않아, 더욱 걱정 가득한 시선으로 윤수를 바라봤다.
그의 입이 떨리며 열렸다.
“한 번도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어서요….”
“한 번도요…?”
이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일까.
면접 당일 직접 윤수의 칵테일을 마셔본 정환은 장담할 수 있었다. 그건 자신이 마셔본 준벅 중 손에 꼽힐 정도로 맛있는 준벅이었다고.
그런 칵테일을 만들어낸 바텐더가 저런 말을 하다니. 정환은 잠시 넋이 나가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손님께 칭찬을 들은 적이 없다는 거죠?”
“아뇨. 손님들은 언제나 맛있다고 해주셨어요. 하지만…”
처음에는 플레어 바라서. 손님과 대화보다는 보여주는 쇼가 더 많은 곳이라서.
그래서.
그런 말을 듣지 못한 걸 수도 있다. 그런 의심을 했던 정환. 허나, 이어지는 신입의 말이 정환의 얼굴을 무참히 일그러트리고 만다.
“이전 사장님께서 그건 그냥 해주는 립서비스라고…. 진짜 맛있어서 해주는 말이라고 착각하지 말라고 하셔서….”
!
“처, 처음이었거든요! 같이 일하는 분이 맛있다고 해주신 게…! 그래서, 진짜였으면 해서요….”
스윽. 탁.
정환은 윤수의 말이 끝나자 몸을 슬쩍 돌리고는 손을 들어 자신의 눈가를 꾸욱 눌렀다.
일그러지는 표정을 조금이나마 펴보려는 정환의 모습.
다른 의도는 아니다. 어떻게든 새 사람 앞에서, 화난 표정을 감추려는 그런 모습일 뿐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예상가는 게 있어 보이는 그.
정환은 무척이나.
화가 나 보였다.
“…이전에 일했던 곳, 전부 그랬다는 말이죠?”
“…네. 같은 사장님이셨거든요. 무, 물론! 다 제가 잘되라고 해주신 말이고, 또 제 실력이 모자라기도 했지만, 그, 그랬습니다!”
“윤수 씨.”
“네. 사장님.”
“내 말 오해하지 말고 들어요. 그냥 묻는 거니까. 바뀌는 건 없을 거예요. 이전에 일했던 직장. 급여가 어떻게 되었었죠?”
“네? 여, 여기보다는 많이 적었습니다. 110 정도?”
“세후?”
“세전요….”
“…그건 전부 받았구요?”
“물론입니다! 매달 50만 원씩 교육비만 따로 내고 나머지는 그래도 전부 받았어요! 여, 여기서도 당연히 교육비는 낼 겁니다! 그렇지 않아도 제가 먼저 말씀드리려고 했었어요! 저, 정말입니다!”
빠직.
분명.
분명 정환의 얼굴에서는 그런 소리가 들려왔던 것 같다. 어금니를 아주 세게 깨물었을 때 나는 그런 소리가.
들려오는 모든 말에, 정환은 감출 수 없는 혐오감을 나타내고 있다.
들은 적은 있다.
어쭙잖게 들어온 일본의 도제식 문화. 그리고 그런 문화를 바탕으로 자신들이 일을 가르친다는 인식.
거기에 비슷한 업계인 요리계에서 넘어온 험한 말과 상명하복의 군기까지.
소규모 업장이 전부이기에 쉬쉬하며 이어질 수 있었던 그런 병폐가 불과 몇 년 전까지 바씬에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었다.
몇 년 후에야 일본에서 바텐더를 시작한 정환에게는 그저 옛날이야기처럼 들렸던 게 바로 이 이야기.
허나, 그 이야기는.
정환의 생각보다 더 가까이서, 더 가까운 시기에 벌어지고 있었던 일일지도 모른다.
이건 저 청년이 일했던 곳이 플레어 바이기에 겪은 일은 아니다. 클래식 바에서도, 또 평범한 펍에서도.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일들.
정환 역시 회귀하기 전의 경험이 없었다면. 또 아르센이라는 곳을 만나지 못했다면.
한 번쯤은 겪었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운 좋게 자신을 피해간 화살이 꽂힌 곳. 그곳을 목격한 정환의 표정이 그리 좋지 못했다.
“윤수 씨. 혹시, 일하면서 맞은…적도 있나요?”
“네? 아, 아뇨….”
“편하게 말씀해도 됩니다. 맞은 적. 있어요? 욕을 들은 적은요?”
“뺨 정도는 가끔….”
“…….”
이제야 알 것도 같다. 바텐더라는 직업에 저 실력 좋은 사람이 회의감을 가진 이유를.
아마, 주야장천으로 들었을 거다.
넌 실력이 좋은 게 아니야. 더 배워야 해. 맛있다고? 착각하지마. 그냥 분위기에 취해서 하는 말이야.
기왕 마신 게 맛이 없으면 돈 아깝잖아? 그래서 하는 말이라고. 진짜가 아니라.
립서비스에 어깨 올라가서는. 야. 이 바닥 거만해지면 끝이야. 그런 것도 모르는 놈이.
야, 내가 너 일 가르쳐 줘, 돈도 줘. 너 나한테 잘해야 해.
네가 여기 아니면 이런 기술을 배울 수 있을 줄 알아? 고마운 줄 알아야지.
스승을 모시는 거야. 스승. 단순히 사장과 직원의 관계가 아니라고. 스승은 부모와 같다. 알지? 우린 가족이야.
그만두겠다고? 너, 지금 날 배신하는 거야? 거둬 키워서 가르치고 먹여놨더니, 이 배은망덕한 새끼가.
같은 전형적인 말들을.
어찌 회의감이 생기지 않고 버티겠나.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사람에게 저런 말을 해댔을 텐데.
직업에 회의감이 들었다는 말은 했으면서도 전 사장을 욕하지 않는 모습에 정환은 완전히 혀를 내둘렀다.
‘아무리 시절이 시절이었어도…!’
이건 너무한 거 아닌가. 정환은 옆구리에 손을 올리고는 잔뜩 올라오는 감정을 겨우 삭이고 있다.
“우선…. 교육비. 안 받습니다. 윤수 씨. 그런 거 받는 곳이 이상한 겁니다. 더 좋은 실력이 필요했다면, 제가 돈을 더 주고 그런 사람을 고용했겠죠. 지금은 윤수 씨 정도로 충분하고, 더 가르칠 게 있다면 제가 필요해서 쓰려고 가르쳐 드리는 것뿐이에요. 이건, 제가 돈을 주고 가르쳐야 하는 거지, 돈을 받아야 할 일은 절대 아닙니다.”
“네? 그래도 교육비는 당연히 드려야…”
“그리고.”
정환은 잔뜩 감정을 억누른 어조로 강하게 윤수의 말을 잘라 버렸다.
물론 그에게 화를 내는 건 아니다. 그저 그의 모습에서 보이는 다른 이들의 못된 흔적 때문에, 정환은 화를 참지 못하고 있다.
“처음 물으셨던 말에 대해서도 답을 드릴게요. 맛있어요. 정말입니다. 이건, 바텐더로서 제 모든 걸 걸고 장담하죠. 동작만 간단하게 고치면 당장 여기서 프론트에 서도 될 수준이에요.”
“저, 정말인가요?”
“본인을 믿으세요. 아니, 못 믿겠다면, 저를 믿으셔도 좋습니다.”
“못 믿는 게 아니라, 어색해서….”
윤수는 처음 듣는 상사의 칭찬에 어색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순수함을 넘어 멍청함이라 불러도 좋을 순박함이 묻어나오는 그의 모습.
사람은 어디든 처음 발을 딛는 곳에서 자신의 세상을 시작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첫발을 내디뎠던 첫 직장. 그리고 거기서 형성된 그의 세상.
그 세상 밖으로 나오니.
그는 어색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고맙다고 해야지!’
칭찬을 받으면 고맙다는 말이 나오는 게 당연한 사람으로서는 안타까움과 답답함, 그리고 연민이 몰려오는 반응이었다.
“이건 나중에 따로 이야기해 봐야겠네요. 일단, 일…합시다.”
“넵!”
답을 들려준 정환은 가볍게 윤수의 어깨를 툭툭 건드리고는 바 안으로 들어섰다.
겉으로야 한 살 차이일 뿐이다. 허나, 속에 든 정환과는 15년의 터울이 있기도 할 터.
정환은 사회에 나와 쉽지 않은 세월을 보낸 이 청년에게 무어라 위로를 전해야 할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무언가…’
해야만 할 것 같다. 단지 그런 생각이 있을 뿐.
바텐더에게 좋지 못한 경험을 한 손님을 마주할 때면 언제나 같은 바텐더로서 고개 숙여 사과하고 이를 만회하려 애써왔다.
이는 바텐더로서 언제나 가지고 있던 책임감.
정환은 바텐더로서 가지고 있던 그 책임감이.
이번에는 손님이 아닌, 다른 곳을 향해야 할 것만 같았다.
5.
“사장님. 제일 끝자리 손님께서 러스티 네일, 그리고 그 옆자리 분은 블랙 러시안 주문하셨습니다.”
“네. 확인했어요.”
아실에 새 바텐더가 출근하고 일주일이 지나던 날.
장윤수라는 신입은 아직 어색하지만, 경력이 있는 만큼 아실에 잘 적응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전 직장보다야 훨씬 편한 곳이 아닌가. 일은 친절히 가르쳐주고 또 급여도 많은 곳.
거기에 사장조차 자신이 원하던 사람이니, 그로서는 적응에 어려움을 겪을 일이 전혀 없어 보였다.
“체이서 새로 가져다드릴까요? 얼음물, 맞으시죠?”
“아. 네. 어느새 다 떨어졌네? 나도 몰랐는데. 허허.”
“여기 있습니다. 언제든 필요한 게 있으면 불러주세요.”
“친절하시네요. 윤수 씨, 맞죠? 고마워요.”
사람과 부대끼며 이렇게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는 건 참 좋은 일이다.
플레어 쇼를 할 때도 언제나 관객이 호응해줄 때면 힘든 일이 모두 잊히던 그.
그는 아실에서 시작한 새로운 커리어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윤수 씨. 백사이드에서 과일 좀 꺼내 줄래요? 준비한 과일이 다 떨어져 가네요. 미리 좀 잘라다 주세요.”
“넵! 다녀오겠습니다!”
같이 일하는 이가 마음에 드는 건 정환도 마찬가지였다. 학습된 열정인 줄 알았던 그의 성실함은 본래 타고난 것처럼 보였고, 재능이라는 것 역시 그에게는 있어 보였다.
이제는 자신감만 갖춘다면 이른 시일에 프론트로 투입도 가능할 터.
‘한 달. 딱 한 달이면.’
플레어에 익숙했던 자세도 자신이 모두 고칠 수 있을 것 같다.
정환은 그런 밝은 미래까지 그려보고 있었다.
“과일 가져왔습니다!”
“잘 잘랐네요. 고마워요. 이제 숨 좀 돌리면서 바 안을 견학하고 있어요. 한동안은 이렇게 지켜보는 게 큰 도움이 될 거예요. 손님께 가볍게 말을 걸어도 좋고, 그냥 보기만 하셔도 좋아요.”
“넵!”
“아. 그리고 끝나고 잠시 시간 괜찮죠?”
“끝나고도 연습인가요? 전 좋습니다!”
그래도 아직은 더 고치고 익혀야 할 건 있었다. 정환은 이른 시간 아실에 나와 매일 그의 연습을 봐주고 있었다.
윤수가 가장 좋아하고, 기다리는 시간이 바로 그 시간이다. 욕설도 폭력도 없이 격려와 조언만이 가득한 연습 시간.
예전에는 회의감 가득했던 그 시간이, 요즘에는 기다려지기만 하는 그였다.
언제나처럼 아실은 평범한 하루를 보내고 무사히 영업을 끝마쳤다.
바 안에 손님은 없고 이제 두 명의 바텐더만이 남아 있다.
“간단하게 정리만 먼저 해둘까요?”
“넵!”
“천천히 해도 되겠어요. 아직, 시간이 좀 더 걸릴 모양이네요.”
“네? 시간이라면 뭐가 말씀이죠?”
“아니에요. 별일 아니니까, 일단 기다려 봐요.”
씨익.
영업이 끝나고 정리에 들어가는 두 사람. 정환은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 밝게 웃고는 내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속을 알 수 없는 사장 앞에서, 신입은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다.
아실이 크지 않은 만큼 정리 역시 오래 걸리지 않았다. 둘이었기에 더 빨리 끝난 정리.
윤수는 잔뜩 들뜬 마음으로 얼른 정리를 끝내고 바 안에 자리 잡았다.
“뭐부터 만들어 볼까요?”
정리가 끝났으니 연습이 시작 되어야 한다. 들은 말에 따르면 그게 당연한 수순.
헌데, 사장인 정환은 시선을 잠시 아실 밖으로 던진다.
유리창 너머 아실의 마당에는 몇 개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어? 영업은 끝났는데…?’
이를 이상하게 바라보는 윤수.
이윽고.
딸랑.
시간과 어울리지 않는 소리가 한 번 들리더니.
“미안. 늦었지?”
“막내야. 바쁜 사람 자꾸 부를래?”
“마감이 늦어져서요. 기다리셨죠?”
세 명의 바텐더가 아실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