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잔. 안녕, 아르센.
5.
“흠. 확실히 정환이는 개업이 나을지도 모르죠.”
“저도 동의합니다.”
개업이라는 정환의 경력과는 어울리지 않은 말에도 다른 바텐더들에게서 시기나 질투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그런 이들이 아니기도 했고.
이들은 명진의 제안을 곰곰이 곱씹더니, 최선의 제안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긴자란 이름을 들었을 때는 그 이상 가는 최선이 없어 보였는데, 역시 마스터의 생각은 이들 이상이다.
“쓰러지기 전에는 그저 일본행을 권하려 했습니다. 하나의 가게를 운영한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니까요.”
“칵테일 만드는 실력만으로 되는 건 확실히 아니더라구요.”
정우는 이번 일을 겪으며 자신의 부족함을 알게 되었고, 그 부족함을 정환이 채워줬다는 것도 알고 있다.
지금 하는 말은, 자신이 모두 겪은 걸 바탕으로 하는 말이다.
“쓰러진 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장부 역시 확인했고요. 완벽하더군요. 이 정도면 충분히 하나의 가게를 운영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명진은 정신을 차리고 난 후 현선에게 지난 시간 있었던 일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제자들이 어떤 고생을 했고 어디서 어려움을 겪었는지, 또 그걸 어떻게 극복했는지까지.
그 모든 설명을 들은 명진은 새로운 제안을 떠올릴 수 있었다.
방금 정환에게 들려준 그 제안을.
“흠. 다 좋은데, 이제 정환이한테 개업 자금이 있냐는 문제겠죠.”
“대출도 아직은 쉽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그것도 고려해서 결정해야지.”
“자금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옆에 앉은 자신의 아내를 보며 든든한 말을 들려주는 명진. 자세한 답은 그의 아내, 현선이 들려준다.
“이이도 자금 부분을 많이 걱정했어요. 정환 군은 이제 막 업계에 들어온 사람이니까요. 반면 우리는 돈이 많죠. 헌데, 이번 일을 겪으니, 우리에게 이 정도의 돈이 필요한가, 그런 생각도 들더군요. 정환 군이 이이를 살려주지 않았으면 전부 부질없는 돈이 되었을 테니까요.”
“사모님, 그건 아닙니다! 제가 살린 게 아니에요…!”
“그런 말씀 말아요. 저기 계신 의사 선생님도 매번 정환 군 덕에 살았다고 하셨으니.”
“자금은 제가 투자하겠습니다. 생명의 은인에게 그 정도도 못 할까요. 물론, 전적으로 증여하는 건 아닙니다. 원금 정도는 상환받을 생각입니다. 저도…, 나중에는 따로 투자하고 싶은 사람이 있으니까요.”
명진은 현선의 말을 받아 자신이 완결시킨다. 자금을 투자하겠다는 말. 그리고 회수하겠다는 말에 이어 정우를 바라보는 그의 눈.
자식이 없는 그는, 어쩌면 정우에게 무언가를 물려줄 생각일지도 모른다.
차후야 어찌 되었든 이제 고작 1년 경력의 바텐더에게는 과분해 보일 수 있는 제안이다. 허나, 또 생명의 은인에게는 적절해 보이기도 하는 제안.
“정환 씨는 선택만 하면 됩니다. 일본으로 가도. 그 비용 역시 제가 부담할 생각이었으니까요. 물론, 정환 씨를 돕겠다는 다른 사람들 역시 있었습니다. 혼자 하는 투자가 아니니, 부담 없이 받으세요. 당연히, 앞선 제안을 받아도 좋습니다.”
이제 선택은 온전히 정환의 몫으로 나왔다. 두 개의 제안 모두 나쁘지 않은 상태에서 정환은 어떤 선택을 할까.
솔직하게 말하자면, 답은 나와 있는 상황이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제안도 전부 감사드리고요. 만약 제가 전적으로 택할 수 있다면…”
눈을 빛내며 감사를 전하고 자신의 선택을 들려주는 정환.
그의 선택은.
“전 개업을 택하겠습니다.”
명쾌했다.
6.
아르센이 문을 닫는다.
이는 이제 정해진 사실.
허나, 하나의 바라는 게 문을 닫는 건 그리 쉽게 끝나는 일은 아니었다.
그저 바에서 일하는 이들이 모여 ‘우리 닫자!’, ‘응!’ 하면 끝날 것처럼 간단해 보이는 일이지만, ‘바’라는 공간은 온전히 그들만의 공간이 아니다.
바에는 공간과 바텐더 말고도, 손님이라는 다른 요소가 있지 않나.
‘그동안 보내주신 성원에 감사합니다. 아르센은 앞으로 7일 후 문을 닫습니다. 부디, 걸음 해주셔 마지막을 함께할 수 있길 바랍니다. 기나긴 세월 끝에 아르센이 여러분의 잠시에 함께할 수 있었던 건 큰 영광입니다. 얼굴 뵙고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 아르센의 마스터 이명진 올림.’
명진은 제법 멋들어진 고별사를 프린트해 아르센의 문 앞에 걸어두었다.
이미 직원들과는 모두 이야기가 된 일.
아르센은 7일이라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손님들과 인사할 시간을 갖기로 했다.
이 역시 명진의 오래된, 그리고 낡은 생각이었다.
명진이 직접 손님에게 술을 만들어 주는 자리는 아니다. 이는 제자들과 주치의, 그리고 아내까지 모두가 반대했던 일.
명진은 짧은 시간 얼굴만 비추고는 손님들의 추억을 마무리 지을 수 있게 도울 뿐이었다.
“첫 월급을 타 기분 내려 들른 곳이 여기였습니다. 감사했습니다.”
이제는 40줄에 가까운 한 단골의 인사부터,
“여기서 첫 데이트를 하고 결혼했죠. 이제 애가 초등학교 들어가요.”
같은 웃음 짓게 만드는 사연과
“그래도 아들놈이랑 여기서 한 잔 마셔본 게 내 자랑이오. 단골 바에 아들놈 데려오기가 어디 쉽나. 허허.”
라는 이제는 나이 지긋한 노신사의 인사까지.
떠났던 이들이 전부 돌아온 건 아니지만, 아르센이 문을 닫는 소문이 들리자 제법 많은 이들이 이곳에 걸음 하여 아르센과 명진의 마지막을 축복했다.
누구나 소리 내어 떠벌리고 다니진 않았지만, 이들의 삶 속에 아르센이라는 곳이 작게나마 언제나 자리하고 있었다.
힘들고 아쉬운 순간이지만 그 일주일간 명진은 세상에서 누구보다 행복한 표정으로 손님을 맞았던 것 같다.
그리고.
명진이 이런 시간을 가진 건 단지 마지막 인사만을 위한 자리는 아니었다.
이런 시간 역시.
“그래서, 정우 군은 이제 어디로 간다고?”
제자들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레인 호텔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조금 쉬고, 다음 달부터 출근할 예정입니다.”
“그레인 호텔이라. 음. 다행히 집이랑 가깝군. 자주 들리겠네.”
“감사합니다.”
바가 사라진 후 그곳의 바텐더를 찾는 이는 없다. 다만, 그곳이 사라지기 전이라면 다른 이야기.
명진은 그나마 남은 아르센의 손님들을 제자들에게 물려주고 싶었다.
“한남동의 마리너스? 기준 씨, 자주 보겠는데요? 나, 안 그래도 한남동 자주 가잖아. 좋네.”
“거기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손님들은 저마다 자신과 죽이 잘 맞던 바텐더를 잡고는 어디로 옮기는지를 물어본다.
일반적인 바라면 무례가 될 수도 있다. 오너의 눈치도 봐야 하니까.
허나, 오늘의 아르센은 이런 걸 물어도 누구도 불쾌해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 막내. 정환 군은 어디로 가나? 선배가 하나 달고 가야 하는 거 아닌가?”
하나씩 바텐더들의 행적을 묻던 물음이 정환에게 닿는다. 당연히 누군가 선배 하나에 묻혀 갈 거라 생각하는 손님들.
아직 경력이 짧은 바텐더라면, 그렇게 선배와 함께 이적하는 게 일반적인 경우다.
이들이 그레인 호텔이나 한남동의 마리너스 정도를 생각하고 있던 그때.
“정환 씨는 가게를 열 겁니다.”
!!
바 밖을 돌아다니며 손님을 맞던 명진이 조금 충격적인 정환의 행보를 알려준다.
“개…업?”
“저, 마스터. 정우 씨 물은 게 아니라 정환 씨…”
“아, 그거구나! 정환 씨, 집이 음식점 하구나! 거기, 새로 가게 열려는 건가?”
“허허허! 마스터가 잠시 쓰러지셨더니, 아주 유머 감각이 발전해 오셨네! 농담! 맞죠?”
쉽게 믿지 못하는 손님들의 모습.
당연한 모습이다.
정환은 고작 1년 정도 경력이 아닌가.
이들 역시 바씬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도는 알기에, 정환이 ‘바’를 개업할 거란 말은 쉽게 믿지 못하는 눈치다.
하지만.
“정환 씨라면 가능할 거라고 봅니다.”
명진의 이어지는 말이 쐐기를 박는다. 그리고 이들에게 전해지는 한 잔의 술들.
정환이 직접 만든 칵테일이 이들의 앞에 놓인다.
한 가게를 이 정도 다니다 보면 알게 되는 것이 있다.
마스터, 그러니까 자신이 단골로 있는 저 바텐더의 표정이 무얼 뜻하는지, 또 어떤 의도인지가 눈에 보인다는 말이다.
명진은 앞에 놓인 잔을 마시고, 직접 평가해보라. 그런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정환의 실력이라. 오고 가며 좋다는 말은 들었다. 맛을 봤을 때도 나쁘지 않았고.
하지만, 아르센에서 마시는 술이 맛이 좋아야 하는 건 당연한 일.
이들은 객관적으로 차정환이라는 바텐더의 실력을 가늠해본 적은 아직 없는 이들이다.
동시에 잔이 올라간다. 그리고 천천히 이를 음미하는 단골들.
그들의 얼굴에는 동시에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정확한 일정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지만, 정환 씨가 열게 될 곳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명진은 단골들의 그런 미소를 보고는 마지막 말을 마무리했다.
덧붙일 말은 없다. 저들의 표정 역시, 명진의 말을 이해하는 표정이었으니까.
그렇게, 아르센은 장장 7일이라는 시간을 손님과 더 부대끼고는 장사를 끝낼 수 있었다.
새해까지는 아직 조금 더 남은, 춥지 않은 12월의 이야기였다.
7.
후후.
숨을 내쉬며 하이얀 입김이 퍼지는 계절이 찾아왔다.
새로 맞이한 신년에 너나 할 것 없이 분위기가 들뜨는 그런 시기.
연이은 연휴를 맞아 아직은 반짝이는 장식도 거리 곳곳에 가득한 그런 1월에, 강남의 골목은 여전한 모습을 자랑하고 있다.
이제는 낮에 걷는 강남 거리도 조금은 익숙해져 간다. 정환은 그런 생각을 하며 주머니 속에 손을 넣고 한 작은 골목으로 들어섰다.
“왔어?”
익숙한 목소리가 정환을 맞이한다. 얼마 전까지 함께 일하던 아르센의 매니저, 신정우였다.
“안 늦게 잘 왔네. 춥지?”
그런 정우의 옆에는 기준 역시 함께하고 있다. 두꺼워진 옷에 편안한 차림.
이들이 이렇게 모인 것도 아르센이 문을 닫았던 저번 주 이후로는 처음이다.
이렇게 서로 떨어져 지낸 건 오랜만이다. 정환은 형들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진한 미소가 나왔다.
“다들 일찍 오셨네요. 마스터는요?”
“곧 오실 거야. 별일 아니지만, 알잖아.”
“네. 이런 거에 의미를 두시는 분이죠.”
“그래서 우리가 좋아하는 거고.”
“맞아요.”
“그렇죠.”
아르센의 앞에는 명진이 붙여둔 마지막 인사가 여전히 지나는 사람들을 맞이한다.
‘2012년 12월부로, 아르센은 여러분과 기나긴 이별에 들어갑니다. 여러분의 잠시에 머물렀던 걸 영광으로 생각하겠습니다. 감사했습니다. - 아르센의 마스터, 이명진 올림.’
마지막 날까지는 다른 내용이었는데, 언제 또 바꿔둔 걸까. 이명진이라는 이는, 여간 건실한 사람이 아니다.
끼이익.
차가 들어선다. 새로 뽑은 차답게 멋들어짐을 자랑하는 삼각별이 달린 차.
운전석에는 중년의 여인인 현선이, 그리고 조수석에는 명진이 자리하고 있다.
조수석이 열리고는 명진이 어렵사리 몸을 꺼낸다. 서둘러 달려가 명진을 잡아주는 정우의 모습.
“오실 줄 알았어요.”
“당연히 와야죠. 여러분도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만.”
“당연히 와야죠.”
정우는 명진이 들려준 것과 같은 말을 하고는 밝게 웃었다.
“다들 있으니까, 내가 안심이네요. 여보. 정우 군들이랑 있어요. 주차하고 올 테니.”
현선은 정우에게 명진을 맡기고는 골목을 빠져나간다. 이미, 아르센의 앞은 이들이 차를 세울 수 있는 곳이 아니다.
현선의 차가 사라진 골목 반대편에서 다른 차가 들어선다. 조금은 묵직한 소리를 내는 커다란 소음의 차.
일반적인 차가 아닌, 작은 리프트가 달린 차다.
“여기, 리프트 부르신 분들 맞죠? 아르센.”
“네. 맞습니다. 저기, 건물 외벽에 작은 나무판자로 된 간판이에요.”
“이야, 애매하긴 하네요. 리프트 안 불렀으면.”
“잘 좀 부탁할게요. 저거 가져갔으면 해서요.”
“걱정하지 마십쇼! 안전-히. 내려드릴 테니까요.”
젊은 기사는 정우와 너스레가 섞인 대화를 나누고는 아르센이 속한 건물 앞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올라가는 작은 리프트.
오늘은, 아르센이 간판을 내리는 날이다.
“끝이네요.”
“응.”
“이제야 실감이 나요.”
“다들 후련하게 보내주자. 우리가 씁쓸해도 마스터만 하겠냐.”
“그렇죠.”
자그마한 간판의 해체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마치, 아르센의 마지막이 길지 않았던 것처럼.
허나, 이를 지켜보는 이들의 가슴을 짓누르는 건 오래 가는 법.
처음 저 나무판자를 올렸을 때처럼, 명진은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그래도 다행이다.
명진은 곁에선 제자들을 바라보고는 그런 생각을 했다. 처음 간판을 올릴 때는 혼자 바라보던 저 풍경을.
이제는 혼자가 아닌, 여럿이서 바라보고 있으니까.
그의 얼굴에는 후련함이 가득 걸린다.
“우리, 웃으면서 보내줘요.”
정환이 명진의 곁에 다가서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해본다. 막내는 이렇게 하는 거겠지, 하면서.
“웃으면서 보내야, 다시 만나죠.”
기준 역시 마찬가지.
“웃어요. 제가 다시 ‘아르센2’ 만들 거니까요.”
양팔로 셋을 동시에 안으려 무리하는 정우도 끼어들었다.
“그래요, 웃읍시다.”
정우가 달려들어 휘청거렸던 명진 역시 동참.
이제는 네 명의 바텐더가 모두 한 자리에서 웃으며 아르센의 간판이 내려오는 걸 감상한다.
1월의 강남에 눈이 내려온다. 어색하지 않은 평범한 풍경이 마지막을 더욱 깔끔하게 장식해준다.
정환은 함께 웃고 있는 바텐더들을 바라봤다. 슬프지 않은 마지막 모습.
이전 생에서 이들의 마지막이 어땠는지, 정환은 알 수 없다.
다만, 문득 드는 생각으로는 지금 같은 풍경은 아니었을 것만 같은 기분.
혹여나 이런 풍경을 위해 자신이 회귀한 건 아닐까. 정환은 그런 말도 안 되는 상상까지 해본다.
기분 나쁘지 않은 상상이다. 설령 그렇다면 어떤가. 그런 덤으로 자신 역시 새로운 삶을 얻었고 새로운 걸 배우지 않았나.
정환은 슬쩍 입을 열어 아르센에게 인사를 전해본다.
“안녕, 아르센.”
그런 정환의 말을 따라 해보는 정우와 기준..
“안녕, 아르센.”
명진은 조용히 제자들이 같은 말을 하는 걸 바라봤다. 조금은 놀람이 가득한 표정으로.
언젠가 마지막이 온다면, 또 그 마지막이 그렇게 나쁘지 않고 후련하다면.
꼭 이런 말을 남겨보리라. 명진 역시 다짐했던 적이 있었다.
제자들에 이어 명진은 그때 결심했던 말을 뱉어 봤다.
“안녕-, 아르센-.”
이라고.
나쁘지 않은 마지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