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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의 술은 특별합니다-36화 (36/175)

36잔. 인연.

4.

“반갑습니다, 교수님.”

정환은 상체를 숙여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그의 정수리가 향한 곳에는, 볼품없는 차림의 중년인이 한 손에 무언가를 들고 서 있다.

차림만 떼고 보자면, 사실 그렇게 볼품없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

적어도 아래위로 맞춰 입은 저 모양새는 정장의 그것으로 보였다.

색은 조금 변하고 물도 빠졌지만.

“오랜만···이군.”

무뚝뚝하게 한마디를 건네며 우뚝 선 손님. 그는 마치 곧 바텐더가 자리를 안내할 걸 아는 듯 조용히 이를 기다리는 모습이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정환은 서둘러, 바 밖으로 나가 자리를 안내한다. 그제야 움직이는 손님.

이런 바를 잘 아는 사람처럼, 바텐더의 환대가 부담스럽지 않다.

“음, 고맙네.”

“수건을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체이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탄산수로 부탁하네. 얼음은 물 없이 따로 주면 고맙고.”

“네,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능숙한 주문을 받은 정환이 바 안으로 들어섰다.

이내 수건과 탄산수, 얼음이 손님의 앞에 놓였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교수님.”

“와야지. 약속하지 않았나. 기억하겠다고.”

정환의 앞에 앉은 이는 지동철 교수.

정환이 아직은 적을 올려둔 대학의 교수이자, 이전 생에서는 제법 친한 관계를 맺은 이였다.

“그나저나, 좋은 곳이군. 요즘은 과한 곳이 너무 많아. 이 정도면 충분한데 말이야.”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분께 추천을 받아서요.”

“흠, 안목이 있는 분이군. 제대로 추천을 받았어.”

“업계에 종사하셨던 분입니다.”

“그런가? 자네, 생각보다 인맥도 넓군.”

지동철은 체이서로 나온 탄산수를 들이켜며 아르센의 내부를 훑었다.

확실히 좋은 곳이다.

과하지 않고 절제된 세련미가 묻어 나온다.

그리고 일하는 바텐더들 역시 제법 본격적인 모양새.

좋은 바라는 그의 말이 겉치레는 아니었다.

“오늘은···, 이벤트성인가? 아니면 벌써 메이킹을 허락받은 건가?”

“사정이 있어 급하게 데뷔하게 되었습니다. 원래라면 데뷔전을 따로 열지만···, 내부적인 사정이 있어서요.”

“흠, 데뷔전이라. 오랜만에 듣는 단어군. 그것도 한국에서. 그래, 그것도 신기하지만···. 빠르군. 넉 달? 그 정도로 기억하네만.”

“정확하십니다.”

“설렁설렁 넘어가는 곳으로는 보이지 않는데···.”

“운이 좋았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운보다는 실력 덕분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서 그렇게 자신을 내보이진 않는 정환이다.

“그럼, 주문하시겠습니까?”

“그전에. 이것부터 받아주게. 오늘은 계산을 안 받는다고 들었네. 초면에···, 또 제자의 가겐데. 빈손으로 오기는 그렇지 않나. 작은 선물이네.”

지동철은 한 손에 꼭 품고 있던 작은 종이 가방을 건넸다.

교수라는 자리에 있는 만큼, 체면을 중시하는 그였다.

“시가(Cigar)군요. 감사합니다, 교수님. 직원들과 나눠도 될까요?”

“물론이네. 개업도 아니니 꽃은 그렇고···, 또 바에 술을 가져올 순 없지 않나. 다른 선물은 딱히 떠오르지 않아서.”

“감사합니다. 바와 잘 어울리는 시가네요. 마침 이곳은 시가를 피울 수 있는 바이기도 합니다.”

“흐음. 그런가?”

깊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전하는 바텐더를 보며 지동철은 시선을 피했다.

흥미가 있어 이곳까지 자리는 했지만. 여전히 제자를 대하기는 어려운 그였다.

“주문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편히 드시면 됩니다.”

“우선···. 오유와리를 먼저 부탁하네. 위스키는···조니워커 레드로 하지.”

지동철의 주문이 나오자, 정환의 얼굴에 기쁜 표정이 걸린다.

지금 저 손님이 주문한 저 술은.

일전에 정환이 그의 연구실에서 선보였던 그 술이다.

조니워커 레드는 저렴한 술이다.

베이스로 잘 쓰이지 않는 것도 당연한 일.

위스키 고유의 맛이 중요한 오유와리에도 이는 마찬가지였다.

그런 술을 애써 찾는 걸 보니, 이전에 맛본 오유와리가 여간 마음에 든 게 아닌 모양이다.

“조니워커 레드 오유와리, 알겠습니다.”

주문을 받은 정환은 돌아서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준비되는 온더락 잔과 조니워커 레드라벨.

이전처럼 정환은 높은 위치에서 술을 부어 오로지 낙하하는 힘만을 이용해 물과 술을 섞어갔다.

높은 곳에서 떨어트리는 술 줄기에도, 여전히 물방울은 잔 밖으로 전혀 튀지 않았다.

‘다시 봐도···’

굉장하다.

지동철은 다시금 펼쳐지는 신기에 눈을 크게 뜨고 집중했다.

자신이 바라던 광경을 목격한 이의 눈빛이 그의 눈에 선명했다.

일전에 저 학생이 다녀간 후 홀로 수없이 많은 시도를 해봤다.

자신에게 차정환이라는 학생이 대접했던 그 술과 같은 맛을 내기 위해.

허나, 결과는 매번 실패.

한 번도 그는 그때와 같은 맛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 탁.

“주문하신 위스키 오유와리, 나왔습니다.”

김이 모락 피어나는 잔이 지동철 교수의 앞으로 놓인다. 매번 얼음을 품을 것만 같던 술잔에는 온기가 가득했다.

“으음. 향이 좋군. 저번과 달리 무언가 더 들어간 거 같은데?”

“이전에는 재료가 적어 어쩔 수 없었습니다. 오늘은 기왕 바에 오셨으니 제대로 즐기셨으면 하는 마음에 기교를 조금 섞어 봤습니다.”

“계피로군.”

“불로 살짝 그을려 향을 더했습니다.”

매콤한 계피에 불 내음이 묻어있다.

위스키에 가장 잘 어울리는 향이, 어쩌면 이 향일지도 모른다.

“좋군.”

다른 이라면 생각보다는 무뚝뚝한 반응이라 여길수도 있다.

허나, 지동철이라는 사람을 잘 아는 정환은 지금 나오는 반응이 저 사람치고는 제법 역동적인 반응임을 모르지 않았다.

- 호륵.

천천히. 그리고 차가운 칵테일보다는 더 적은 양으로 지동철 교수가 음료를 삼켰다.

따스한 기운이 입술을 적신 후 혀에 묵직하게 닿는다.

그리고 이내 그의 머리를 스치는.

‘이거다!’

라는 넉 달 전의 아련한 기억.

그는 드디어 그때의 그 맛을.

다시금 마주했다.

몸이 녹아들며 의자에 붙어가는 기분이 든다.

이곳이 바라는 곳만 아니었다면, 당장에 몸을 눕히고 싶은 충동이 들 정도였다.

기다린 넉 달이라는 시간이 조금도 아쉽지 않은 순간이다.

만족스러운 술을 마신 그의 표정이, 평소보다 훨씬 온화하게 퍼졌다.

“괜찮으십니까?”

“괜찮네···. 아니, 맛있다는 뜻일세.”

“감사합니다. 다음 잔은 다른 칵테일도 드셔보시는 게 어떨지요?”

“흠. 생각해보겠네. 우선 지금 잔을 즐기지.”

“네, 그럼.”

언제고 홀로 사색하며 잔을 즐기던 손님이 지동철 교수였다.

정환은 꼭 필요한 대화만 나눈 후 자리를 비켜줘 그에게 시간을 준다.

지동철 교수는 그런 정환의 행동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딱, 자신이 술 마시는 취향을 아는 이의 행동처럼 보였다.

천천히 잔을 음미하며 지동철은 다시금 아르센을 한 번 더 훑었다.

돌아가는 풍경과 이곳을 방문하는 손님들, 그리고 바텐더의 손끝까지.

주로 일본을 위주로 바를 다녔던 그에게 한국에도 이런 곳이 있다는 건 신선한 경험이다.

‘강남을 너무 무시했군···. 이런 곳이 있을 줄이야.’

어쩌면 이제는.

강남에도 단골이 될만한 가게를 찾은 걸지도 모르겠다.

물론, 가게뿐만이 아니라 제법 괜찮은 바텐더도 함께 찾았고.

- 호르륵.

잔잔한 분위기 속에 홀로 잔을 들어 올린다. 온기와 함께 전해지는 취기에 잔뜩 감상을 맡겨 갈 때.

- 띠리이잉.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아르센의 복도 끝에서는 또 한 명의 손님이 안으로 들어섰다.

“오셨군요. 교수님.”

이번에도 비슷한 대사로 손님을 맞이하는 정환.

앞서 맞았던 손님에 비해서는 조금 더 격식을 뺀 태도다.

“이럴 줄 알았지. 내, 이럴 줄 알았어! 자네라면 이 짧은 시간에 아르센에 적응할 줄 알았다는 말이네!”

들어선 손님은 무언가가 기쁜지, 잔뜩 느낌표가 섞인 어투를 뿜어댔다.

정갈한 정장 차림이 잘 어울리는 세련된 겉모습의 중년인.

그는 차정환이라는 바텐더와 악수를 한 번 나누더니, 이내 아르센에 있는 모든 바텐더와 인사를 나누기 시작한다.

“마스터, 오랜만입니다. 그간 격조했습니다.”

“아···! 김태현 교수님! 오랜만입니다. 다시 찾아주셨군요.”

“김 교수님? 이야, 이거 얼마 만이죠?”

“오랜만에 뵙습니다, 교수님.”

익숙한 단골처럼 바텐더들은 그에게 한마디씩 건네며 반가이 맞이하고 있다.

바를 찾은 중년인은 정환에게 아르센을 소개했던 그레인 호텔 출신의 한국 관광대학교 김태현 교수였다.

“사실 정환 군에게 이곳을 소개한 사람이 바로 접니다! 하하하! 괜히 소개해놓고 자주 찾으면···, 서로 부담이지 않겠습니까? 해서 한동안 발길을 끊었지요. 적어도 이 친구가 프론트에 서기 전까지는. 이렇게 빨리 다시 올 줄은 몰랐습니다, 그려. 허허허.”

“그런 일이 있었군요. 아르센이 큰 선물을 받았습니다. 정환 씨는 잘 해주고 있습니다. 실력도 아주 좋구요.”

정환은 김태현 교수에게 아르센을 추천받았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이런 사정을 오늘에야 모두 알게 된 명진은 이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가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적한 아르센에 정환이라는 신입이 올 수 있었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은 그였다.

김태현 교수 역시 고개를 끄덕이긴 마찬가지.

“역시나 정환 군이 말하지 않은 모양이군요. 허허. 사람하고는. 괜히 발걸음을 끊은 것도 같고.”

“아르센을 알려주신 것만도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 이상 신세를 질 순 없죠.”

“내가 사람 하나는 제대로 본 것 같군. 잘했네! 그리고 마스터! 이 정도면 오늘 공짜 술은 실컷 마셔도 되겠지요?”

“물론입니다, 교수님. 편히 드시죠.”

서로가 서로를 배려했던 상황이, 김태현 교수는 썩 마음에 들었다.

바텐더를 양성하는 학교의 교수인 그의 이름이 나왔다면, 아르센은 알게 모르게 정환에게 신경을 더 썼을지도 모른다.

그게 좋은 방향일지, 나쁜 방향일지는 모르지만.

오히려 둘 모두가 처신을 잘했기에, 이제는 웃으며 이를 말할 수 있는 이들이다.

“앉으시죠, 교수님. 안내하겠습니다.”

정환은 김태현 교수를 자신이 담당하는 쪽 좌석으로 안내했다. 지동철 교수가 앉은 자리 조금 옆으로 그를 안내한 정환.

지동철 교수는 옆자리에서 무슨 일이 있건, 오로지 자신의 잔에 집중하고 있다.

“아, 잠깐.”

의자를 빼주고 돌아가는 정환에게 김태현 교수는 손에 든 무언가를 건넨다.

조금 전, 또 다른 교수와 같은 행동이다.

“이건···?”

“빈손으로 올 수야 있나. 사람을 보낸 입장인데. 그냥 하나 가져와 봤네.”

“감사합니다.”

정환은 고개를 한 번 숙이고 안을 들여다봤다. 그리고 올라가는 그의 입꼬리.

이는 무언가 재미난 걸 본 이의 웃음이다.

김태현 교수의 선물은.

“시가군요.”

이전의 선물과 같은 시가였다.

“바에 뭐가 좋을까 했지. 여긴 시가 흡연은 되는 거로 아네만.”

“맞습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다들 나눠 가지시게나.”

재밌는 상황이다. 서로 모르는 두 손님이 같은 선물을 가져오다니.

이를 아는 유일한 사람인 정환은 홀로 웃음 지으며 수건과 체이서를 준비했다.

“날씨가 무더워지는 거 같네. 수건이 적당해 딱 좋군.”

얼굴을 닦으며 주변을 정리하는 김태현 교수.

손까지 닦고 옷을 가다듬은 그의 시선이, 자연스레 옆에 앉은 남루한 복장의 손님에 향한다.

그리고.

“······?”

무언가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갸웃거리며 한 번 더 옆자리의 손님을 살피는 그.

무언가 알 수 없는 불안한 눈빛이 옆자리 손님을 훑었다.

“···자네, 설마···?”

이내 옆자리 손님을 알아보고 말을 거는 김태현 교수.

지동철 교수는 한 번도 옆으로 던진 적 없던 시선을 자신을 향한 말이 들려오고 나서야 옆으로 돌려본다.

“···자네는···?”

지동철 역시.

김태현을 알아보는 눈치다.

두 중년인의 눈빛이 가운데서 교차했다.

서로가 왜 여기에 있는지 모르겠다는 눈빛의 둘.

둘은 고개를 한 번 갸웃거리더니 이내.

동시에 표정이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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