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잔. 지인.
3.
“여기···정말 우리가 가도 되는 거지?”
“그러게···. 혹시 몰라서 그러는데, 너 돈 있냐?”
“일단 몰라서 최대한 챙겨는 왔어. 근데, 오늘은 계산 안 해도 된다며?”
“···그렇게 듣긴 했는데, 나도 혹시 몰라서···.”
강남의 한 골목에서 두 대학생이 어깨를 움츠리고 대화를 나눈다.
이들은 정환의 대학 동기인 상호와 석훈이다.
“옷은? 나 지금 안 이상하지?”
“응. 좀 촌스럽긴 해도 봐줄 만은 해. 새로 샀냐?”
“형 옷. 비싼 거라길래.”
“난 괜찮냐?”
“사람 같게는 보인다.”
“그럼 됐네.”
오늘은 정환이 이들을 아르센에 초대한 날. 꼭 한 번 바에 가보고 싶어 했던 친구들은 아르센의 앞에 서서 벌써 20분이 넘는 시간 동안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다.
무언가 알 수 없는 겁이, 이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
“야야. 가보자. 뭐 있냐? 쫄 거 없어.”
“그래, 쫄지마. 그냥 술집이야.”
다짐하듯 당찬 포부를 내뱉는 둘.
바라는 곳이 원래 그렇다. 제일 처음 그 육중한 문을 열고 들어서기가 어려운 곳.
숨겨진, 그리고 또 너무나 묵직한 바의 문은. 마치 함부로 들어오지 말라는 듯 이방인을 거부하는 모습처럼 보였다.
석훈과 상호 역시 오늘 친구의 초대가 아니었다면 강남까지 와서 이런 분위기의 바에 들어갈 용기를 쉽게 내진 못했을 것이다.
가슴에 잔뜩 바람을 넣어 어깨를 넓게 벌린 두 대학생이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둔탁한 문 열리는 소리와 청아한 종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문이 열리자 이들이 기대했던 풍경이 다가온다.
고풍스럽고, 또 비싸 보이는 그런 풍경이.
특별한 게 있는 건 아니다. 멋들어진 중세풍의 소품도 없고 누구나 들으면 알만한 브랜드의 가구 역시 없다.
그저 깔끔하게, 그리고 조금은 어둡게 꾸며진 내부의 풍경.
허나, 저 깔끔한 인테리어와 어두운 조명이 내뿜는 분위기만으로도 젊은 대학생을 압박하기에는 충분했다.
“어, 왔구나. 여기야. 여기!”
짧은 복도를 지나자 이들을 맞이하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안에는 손님 몇 명과 바텐더로 보이는 이들이 자연스레 어울리고 있다.
“어···, 정환아.”
“오, 오랜만이네.”
“오랜만은 무슨. 아까까지 같이 있었잖아? 들어와. 헛소리하지 말고.”
어색한 장소에서 쭈뼛거리는 친구들을 보며 정환은 아무렇지 않게 이들을 대했다.
최대한 이들을 편하게 해주려는 정환.
딱 봐도 낯설어하는 게 보이는 친구들의 모습이다.
이해는 한다.
모든 게 낯선 환경이 아닌가.
강남이라는 이름이 주는 위압감도 있고 또 친구의 직장이라는 불편함까지.
거기에 ‘바’라는 상징성까지 더해지니, 이들은 전혀 편할 수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가장 낯설어하는 건 따로 있었다.
가장 친구들이 낯설게 느끼고 있는 건.
평소와 다른 정환의 복장이다.
“옷이···잘 어울리네.”
“그, 그러게. 이야. 진짜 바텐더 같다야.”
옷에 한마디씩 던져보는 친구들.
정환은 잘 다려진 셔츠에 넥타이, 그리고 그 위에는 하얀 정장 재킷을 걸치고 있다.
저 재킷이 메이킹을 허락받은 바텐더의 상징이란 걸 모르고 보더라도 충분히 멋들어진 차림새였다.
“바텐더 같은 건 또 뭐냐? 너희도 잔뜩 꾸미고 왔네. 야, 석훈이 쟤 넥타이는 좀 어떻게 해라. 유행이냐? 푸흡.”
정환은 쭈뼛거리는 친구들이 재밌다는 듯 크게 웃었다. 머리를 긁적이는 친구들은 정환의 여유가 부럽다.
“여기 앉을까?”
“잠시만.”
어색하게 서 있는 친구들 쪽으로 정환이 걸어 나온다.
그리고, 손수. 친구들을 위해 의자를 잡아주는 그.
“내가 할게. 뭘 굳이···”
“야, 하지 마. 부담스럽다.”
친구들은 아연실색하며 손을 내저었다.
이들은 아직 누가 잡아주는 의자에 익숙하지 않다.
“원래 다른 바에 가도 다 하는 거야. 친구로 왔어도 손님은 손님이니까. 대접은 제대로 받고 가야지.”
환대가 어색한 친구들에게 차분히 바의 시스템을 설명해준다.
초대 손님으로 왔어도, 바의 서비스는 손님을 차별하지 않아야 한다.
누구든 저 육중한 문을 열고 들어왔다면 당연히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것.
정환은 이를 친구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이들이 혹시 다른 바에 가더라도 자신이 받아야 할 대접은 꼭 챙겨 받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친구들은 어색하게 밀려오는 의자에 몸을 앉혔다. 처음으로 누려보는 호사다.
“친구분들이 오셨나 보군요, 정환 씨.”
그렇게 자리에 앉고 겨우 숨을 돌리자, 이내 다른 바텐더가 다가온다.
중년에 나이가 제법 있어 보이는 바텐더였다.
“네, 마스터. 이쪽은 강석훈, 이쪽은 오상호입니다. 대학 동기들이에요. 상호는 같이 살고 있고요. 얘들아, 인사드려. 우리 마스터···그러니까, 사장님.”
“아, 안녕하세요! 강석훈입니다.”
“오상호입니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리에서 일어서 인사하려는 친구들. 명진은 손으로 괜찮다는 표시를 한 후 이들을 향해 짙게 웃었다.
특유의 인자함이 가득 담긴 미소다.
“반갑습니다, 아르센의 마스터 이명진입니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 정환 씨와 좋은 시간을 보내도록 해요. 오늘 드시는 건 전부 제가 사겠습니다. 마음껏 즐기세요.”
간단한 인사만 남기고 명진은 재빨리 자리를 떠났다.
젊은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사장이 붙어 이것저것 말을 시키는 게 더 불편한 법이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명진이 남긴 인상은 진했다.
꼬박꼬박 존댓말을 쓰며 정환을 대하는 태도와 또 이들을 향해 깊게 숙였던 고개까지.
상호와 석훈은 이런 어른의 모습이 어색하다.
“정환이 친구라고?”
“네, 대학 동기들이에요.”
“아, 반가워요. 난 신정우라고 해요. 여기 매니저에요. 정환이 형이고.”
명진이 떠나자, 연이어 정우와 기준이 다가온다.
정우는 깁스를 한 채 뒤뚱거리며 바 안쪽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명진보다는 가볍게 인사하는 정우의 모습이다.
“한기준입니다.”
꾸벅하고 짧은 인사를 하는 기준의 모습까지 펼쳐진다.
그저 막내의 친구가 온 것치고는, 과한 대접이다.
“좋은 시간들 보내요. 아참. 얘가 만든 게 특별히 맛있는 거니까, 다른 바에 가서 이런 맛을 기대하시진 마시고요. 재밌게 노세요.”
정우의 마지막 말을 끝으로 두 바텐더 역시 돌아섰다.
친구들에게야 장난스럽게 들린 말이지만, 정우는 진심으로 전한 말이다.
“다들···정환이를 잘 대해주는 거 같네.”
“그러게. 내가 알바 하는 곳 사장은 맨날 소리만 지르는데.”
“야, 거기 사장은 그래. 좀 그렇더라.”
“저놈, 일자리 하나는 잘 구했네.”
이유 없는 배려는 없다. 정환을 잘 대해주는 것도, 또 정환을 배려하는 것도.
전부 정환이 그만큼 자신의 몫을 해나가고 있기 때문임을 아직 대학생인 이들은 알지 못한다.
“자, 이제 시작하자. 뭐부터 마셔볼래?”
자리를 정리한 정환이 친구들에게 다가섰다.
바 너머에서 멋들어지게 차려입고 서니, 이들은 마치 모르는 바텐더와 마주한 기분이다.
“뭐, 그렇게 물어도 아는 게 있어야지.”
“그래. 그냥 너가 알아서 해주라. 적당히. 쉬운 거로.”
“그럴 줄은 알았다만···. 상당히 어려운 주문이야, 그거.”
바에 오는 이들 중 가장 어려운 손님은 누굴까.
여러 바를 다녀본 경험이 있어 입맛이 까다로운 손님?
아마 그건 아닐 것이다.
적어도 정환이 생각하기에는, 그랬다.
입맛이 까다롭다는 말은 결국 자신의 취향이 있다는 말이다.
취향은 어디까지나 맞춰가면 되는 것.
바텐더는 대화를 통해 그의 취향을 알아보고 칵테일을 만들며 이를 조절할 수 있다.
반대로, 취향이 없는 손님은 어떨까.
바에 오는 이들 중 가장 어려운 손님은 바로, 이들이다.
이들이 어려운 이유는 다른 곳에 있지 않았다. 그저 취향이나 선호하는 걸 본인들도 모른다는 것.
이는 바텐더에게 전달될 정보의 단절을 의미했다.
바텐더는 이런 손님이 앞에 앉는다면. 아무런 정보도 없이 이들을 만족시켜야만 한다.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후우. 천천히 해보자. 일단 어느 바에 가도 마실 수 있는 칵테일들을 준비해 볼게. 마시다가 입에 안 맞는 게 있으면 바로 말하고.”
그래도 오늘은 괜찮은 편이다.
이들은 손님이자 친구들이고, 오히려 이들은 맛을 표현함에 다른 이들보다 솔직할지도 모른다.
정환은 이들의 취향을 찾아주기로 한다.
“그래. 우리야 이렇게 배우는 거지.”
“난 이미 충분하다. 여기 와본 거만 해도 어디냐. 물만 줘도 된다, 정환아.”
시시한 석훈의 농담을 뒤로 정환은 적당한 술을 떠올려 본다.
바에 처음 오는 이에게 대접하기 좋은 술은 뭐가 있을까.
‘그래, 우선은···’
몇 개의 이름이 스치자 정환의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장 대중적이고 누구나 마실 수 있는 그런 술들을 향해.
몇 개의 재료와 셰이커가 정환의 앞에 놓였다.
“오오.”
“시작한다. 야. 폰, 폰.”
정환이 무언가를 하려고 하자 친구들은 스마트 폰 카메라까지 꺼내며 흥분하기 시작했다.
바에 대해 잘 모르는 이들은, 불쇼라도 기대하고 있는 모양이다.
“불···은 안 나온다?”
“응?”
“안 나와?”
“춤도 안 춰.”
“어···, 진짜?”
“꺼.”
“아, 응.”
이들의 기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정환이다.
기대에는 조금 못 미치겠지만, 정환의 바텐딩이 시작되었다. 재료 몇 개를 계량해 셰이커에 넣은 정환은 이를 위로 올려들었다.
불도 춤도 없지만, 충분히 멋들어진 모습이다.
- 샤카! 샤카! 샤카!
셰이킹이 시작되자 살짝 실망했던 친구들의 눈에 다시 이채가 돌아왔다.
홀린 듯 시선을 주며 감탄하는 소리를 내는 이들.
멋들어진 옷과 은은하게 비추는 조명, 그리고 뒤로 펼쳐지는 고상한 술병의 모습이 정환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몇 시간 전까지 자신들과 농담이나 하던 친구의 모습은 간데없는 지금이다.
- 촤르르륵! 촤악!
셰이킹이 끝나고 멋들어지게 부어지는 칵테일.
각 잡힌 얼음 위로 쏟아진 칵테일의 향이 조금씩 이들의 자리까지 풍기고 있었다.
처음 맡는 향임에도, 싫지 않은 향이다.
부어진 술 위로 몇 개의 재료가 더 올라간다. 탄산수와 레몬 껍질 등 몇 개의 재료를 더 해 이를 앞으로 밀어내는 정환.
여전히, 조금의 떨림도 없는 완벽한 서빙이다.
“진 피즈. 나왔습니다.”
“오오!”
“이야!”
멀리서 풍기던 향이 가까이 다가온다. 이전에 느끼던 향에 비해 훨씬 기세가 강한 향.
친구들은 자신들의 앞에 놓인 첫 칵테일에 시선을 빼앗겨 버렸다.
“마셔봐. 괜찮을 거야.”
“이거···, 마시는 방법은 따로 없고?”
“그냥 코로 향 한 번 맡고 그대로 마시면 돼. 그냥 쭉 들이켜도 상관없고. 편하게 마시면 그만이지, 뭐.”
“그, 그래. 아. 잘 마실게.”
“잘 마실게.”
석훈과 상호는 그대로 잔을 들어 코로 가져갔다.
편하게 마시란 말에도 정환이 알려준 방법을 한 번 해보는 이들.
바에서 할 수 있는 것, 또 해야 하는 건.
전부 해보고 싶은 이들이다.
진한 술 내음 사이로 정환이 더한 레몬 껍질의 향이 은은하게 올라온다. 그리고 천천히 더해지는 레몬 속살의 향.
보글거리며 터지는 탄산의 청량함 역시, 마치 향기로 전해지는 것 같다.
적당히 향을 맡은 둘은 그대로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꼴깍하는 소리를 내며 한 모금을 마신 둘의 눈이 커진다. 넘어가는 술의 양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그···, 원샷은 아니다?”
정환의 만류에도 여전히 입에서 떨어지지 않는 잔. 둘은 반이 조금 안 되는 양을 한 번에 삼키고 나서야.
“캬하!”
“캬아-!”
하는 소리를 내며 입에서 잔을 떼어냈다.
술이 아닌, 청량음료를 맛본 이들의 반응이다.
“어때? 입에 맞아?”
“응! 완전! 이거 완전 내 스타일인데?”
“이게 칵테일이라고? 나 칵테일 좋아했네···?”
“천천히들 마셔. 술술 마시다가 훅 간다. 몇 잔 더 만들어 줄 테니까, 여러 개 마셔보고.”
자신의 술을 맛있게 마시는 이들을 보면 언제고 어깨가 올라간다.
이건 바텐더만의 직업병.
거기에 오늘 처음 바를 찾은 이들의 입맛까지 만족시켰다면, 그 직업병은 더욱 심해지고 만다.
진피즈로 시작해 친구들은 연달아 몇 잔의 술을 더 들이켰다.
위스키 사워, 김렛, 마가리타를 걸쳐 네그로니와 블랙 러시안까지.
정환은 어느 바에 가도 마실 수 있는 메뉴를 위주로 친구들에게 대접했다.
이들이 다른 바에 가더라도, 편히 주문할 수 있기를 바라며.
만들어 준 칵테일의 구성 역시 친구들을 위한 배려가 묻어 있다.
달고 청량하기만 한 칵테일이 아닌, 네그로니와 블랙 러시안처럼 조금은 진한 칵테일도 맛보이며 친구들의 경험치를 늘려준 정환이다.
여섯 잔이면 제법 많은 잔수다. 특히나 두 시간 정도 만에 이를 마셨다면 이제는 취기가 제법 오를 터.
얼굴이 붉게 타오른 두 대학생은 이제 자리를 뜨려한다.
“어, 우린 이제 슬슬 일어나야겠다.”
“응. 더 마시면 큰일 나지 싶다. 바에서 그러면 안 된다며?”
“그럴래? 충분히 마시긴···했네. 어. 그래. 가도 되겠다, 너네.”
“충분해. 대신 나중에 문자로 오늘 마신 거 이름이나 알려주라. 이름이 복잡해서 기억이 안 나네.”
“나도, 나도.”
취기가 잔뜩 오른 친구들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여섯 잔이나 대접했으니 친구들을 이쯤에서 보내도, 정환은 아쉽지 않을 거 같았다.
반응이 좋은 걸 보니, 이제는 편히 오라며 권할 수도 있을 거 같고.
‘뭐, 시간도 이렇게 됐고···, 곧 ‘그분’도 오실 거니까···’
시간은 어느덧 오후 10시.
오늘 정환이 초대한 사람이 이들이 전부는 아니기에, 오히려 적절한 시간일지도 모른다.
잠시 후 이곳을 방문할 다른 초대 손님은.
이들과 같은 공간에 있는 걸 불편해할 게 분명했다.
“우리 갈게. 마스터, 오늘 감사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다음에는 손님으로 오겠습니다!”
모든 바텐더에게 고개를 숙인 후에야 친구들은 아르센을 빠져나왔다.
짧은 복도를 다시 지나, 이들이 육중한 문을 밀어내려 할 때.
“실례합니다.”
쾌쾌한 음성의 한 중년인이 먼저 문을 당기며 이들의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어···?’
그런 중년인을 한 번 뒤돌아보는 상호.
상호는 빠르게 지나가는 중년인의 뒷모습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아는 분이야?”
“···아닌가?”
“누군데?”
“아니, 아닌 거 같다. 에이, 아니겠지. 뭐, 이런 데 다니실 분도 아니고.”
“치. 술 취했냐? 이상한 소리는. 가자.”
상호는 한 이름이 머리를 스쳤지만 이내 이를 부정했다.
평소 알던 그 이름을 떠올리니, 이런 곳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술이 올라 잘못 본 거라. 그렇게 생각하고는 석훈과 함께 상호는 아르센을 떠났다.
이들의 뒤에서는.
“오랜만에 뵙습니다. 교수님.”
이라는 정환의 정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