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잔. 조율.
5.
“알렉산더랑 코스모폴리탄이요.”
“앞에 마셨던 거로 한 잔씩 더 부탁드려요.”
“세 명인데, 바 쪽에 자리 있나요?”
“아니, 그래서 말이야, 응? 내가 딱 대만에서 카발란을 구매했는데···”
역시는 역시다.
기준은 그런 생각을 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이 예상했던 것처럼 네 팀에서 다섯 팀 정도. 딱 거기까지는 기준 역시 감당이 가능했던 핸들링이었다.
허나, 이를 넘어서는 순간이 찾아오자 어느덧 바 안은 복잡해지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분주함만이 가득한 공간이 되어버렸다.
기준은 무엇을 해야 할지, 또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릿속이 하얘짐을 느끼고 있었다.
그저 바라는 곳이 앞에 앉은 이들을 상대하며 하나씩 일을 처리해가는 곳이라 생각하는 이들도 적지는 않다.
이는 크나큰 착각. 바는 하나의 흐름이 있는 곳이자 일정한 체계와 시스템이 있는 곳이다.
치프와 헤드, 매니저라 불리는 관리자가 바에 늘 상주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
몰리는 주문 사이에서 적절히 주문을 분배하고 순서를 나누는 것, 그리고 좌석을 핸들링하고 또 적절히 손님을 상대하는 것 등 누군가는 나서서 바 안의 이들을 지휘해야 한다는 뜻이다.
주로 시니어라 불리는 직급의 이들이 해내는 이 일을 아직 주니어 직급의 기준이 맡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어 보였다.
네 팀에서 다섯 팀. 딱 거기까지는 아무렇지 않던 기준은 어느새 고장이 난 기계처럼 할 일을 잊어버리고 만다.
‘이전에 마셨던 잔이···, 아니지 잠깐 우선 바 쪽에 자리가···, 대답도···, 알렉산더면 꼬냑이랑···’
쏟아지는 주문 외에도 앞서 받아둔 주문과 또 다른 손님들의 말이 귓가를 울린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상황 속에서 아직은 원숙하지 못한 바텐더가 겪게 될 당황은 작지 않았다.
- 덜덜.
기준은 떨리는 손으로 바 테이블 안을 연신 훑는다. 갈 곳을 잃은 손이 무얼 해야 할지 모르는 눈치였다.
그렇게 한참을 그가 방황하려 하고 있을 때.
- 턱.
“기준 형.”
무언가 따스한 손길이 하나 그의 어깨를 잡더니 이내 기준이 기댈 곳을 만들어 준다.
제법 넓은 누군가의 손길에 기준은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
“우선 들어오신 분들부터 제가 안쪽 자리로 모셨어요.”
“으, 응? 정환 씨···”
“그리고 2번 자리에 알렉산더랑 코스모폴리탄. 그거 두 개 먼저 만들고 계시면 될 거예요. 앞에 마신 잔 재주문하신 분들은 아직 잔에 여유가 있거든요. 방금 앉으신 분들 주문받고 돌아와서 제가 만들게요.”
“그, 전작이···”
“러스티 네일이랑 네그로니요.”
어느덧 뒤에서 나타난 기준의 후배 차정환은 마치 모든 걸 보고 있었다는 듯 차분히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뒤쪽으로 잠시 빠져서 숨 좀 돌려요. 차분히 하나씩 하면 되니까요.”
“앞쪽 분 말씀도 듣고 있고···”
“장단만 맞추면 될 거예요. 옆에 분이랑 대화가 한창이거든요. 이미 신경도 안 쓰실 거예요. 저랑 바꿔요.”
정환은 가볍게 기준의 어깨를 쓸고 가며 눈을 찡긋거렸다. 별일 아니라는 듯 가볍게 말하는 정환의 모습.
마치 긴장하지 말라는 듯 자신을 다독이는 모습에 기준은 슬쩍 어깨 위에 있던 무거운 무언가를 내려두려 한다.
뒤로 살짝 물러나는 기준과 그에 맞춰 앞으로 나서는 정환.
정환은.
“와, 대만에서 직접 구매한 카발란이라니. 엄청 의미 있는 보틀인데요?”
“그렇지? 아, 그래서 내가···”
한 번 앞의 손님의 말에 장단을 맞추고 그의 고개가 돌아가는 순간 옆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빠르게 종종걸음으로 바 끝 쪽으로 돌아가 방금 앉은 손님들의 주문을 받아오는 정환.
자연스럽게 동선을 짜고 그에 맞춰 움직이는 모습에 손님들은 이상함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어쩌면, 이런 동선도. 하나의 계산 속에 포함된 것들인지 모른다.
바 전체를 살펴야 한다는 부담감이 사라지자 기준 역시 원래의 모습을 찾기 시작했다.
뒤로 슬쩍 물러선 그의 앞에 놓인 건 단 두 개의 칵테일.
차라리 아직은 경험이 없는 그에게는 전체를 지휘하는 것보다 이렇게 주어지는 과업이 더욱 편한 것만 같다.
기준은 잠시 전체를 봐야 한다는 부담감을 내려두고는 편안히 셰이커를 잡았다.
‘···잠시 집중을···’
다른 이들이라면 무신경하고 또 무책임한 모습이라 말할지도 모른다.
이제야 프론트에 나선 바텐더를 하나 두고는 뒤로 물러서 자신의 메이킹에 집중하는 선배라니.
허나, 그런 고민을 하기에는 기준의 앞에서 바 안을 누비는 후배 바텐더의 모습이.
너무도 현란해, 기준은 그런 고민 따위 하지 않는 모습이다.
기준은 차분히 잡은 셰이커를 흔들며 알렉산더와 코스모폴리탄을 만들어갔다.
그에 맞춰 조금씩 차분함이 돌아오기 시작하는 아르센의 분위기.
손님들은 아마 모를 것이다. 조금 전까지는 아르센이라는 곳 안에서 폭풍이 한바탕 몰아쳤다는 것도, 한기준이라는 한 명의 바텐더가 잠시 넋을 놓았다는 것도.
일이 복잡하고, 또 바에 사정이 있고. 이런 건 어디까지나 바텐더와 바의 사정이다.
누가 못 나왔고 누구에게 무슨 일이 있고. 또 그래서 여기 남은 이들은 누구고.
바텐더와 바는 손님에게 이런 것들에 대해 이해를 바라서는 안 되는 법이다.
바깥의 고요함과 차분함, 그리고 그들의 편안함을 위해서 안쪽은 한바탕의 전투가 벌어진다.
어쩌면, 이 역시.
평범한 오센틱 바의 하루일지도 모른다.
“알렉산더와 코스모폴리탄, 나왔습니다.”
“러스티 네일, 네그로니 나왔습니다.”
주문은 별 탈이 없이 그대로 내어진다.
“감사합니다.”
“전 이게 맛있더라구요.”
“와, 벌써 나왔네?”
무미건조하게 이어지는 반응들. 각자의 사정과 각자의 삶을 가지고 바를 찾은 이들에게 바텐더의 고군분투는 관심 밖의 일이다.
아무렇지 않게 잔을 받은 이들이 섭섭하게 느껴질 법도 할 무렵.
“후우.”
기준은 그제야 한숨을 한 번 내어 쉬며 숨을 고른다. 한바탕 몰아친 폭풍을 누가 알아줘야 하는 건 아니다.
다만, 그저 이를 잘 넘겼노라. 자신만은 이를 기념하고픈 그런 한숨이 따스하게 뿜어졌다.
그리고 그렇게 한 번 숨을 내쉰 기준의 시선이 옆에 선 정환에게 닿는다.
어느새 주문받았던 전작을 만들어내고 새로이 앉은 손님들의 잔까지 만들려 하는 정환의 모습.
기준이 하나의 일을 마무리하는 동안 정환은 전체적인 흐름을 조율했다.
마치 정우나 명진과 함께하는 듯한 기분을 느끼는 기준.
그의 시선이 이제야 셰이커를 들어 올리는 정환의 자세에 닿고 만다.
‘그러고 보니 직접 만드는 걸 보는 건 처음인가···’
너무 바빠서, 또 기회가 없어서.
잘하리라, 모자라지 않으리라. 그런 믿음은 있었지만, 정환이 직접 칵테일을 메이킹하는 건 처음 보는 기준이다.
스터디에서야 본 적이 있지만, 바텐더의 진정한 실력은 바 테이블 앞에서 펼쳐지는 법.
잠시간 찾아온 여유에 기준의 시선은 손님이 아닌 옆에 선 동료 바텐더에게 향했다.
- 샤카! 샤카! 샤카!
그리고 그런 시선에 개의치 않고 경쾌하게 흔들리기 시작하는 정환의 셰이커.
기준은 거침없이 뻗어 나가는 정환의 팔 끝을 보고는 그만 입을 쩍 벌려버린다.
“······!”
- 샤카! 샤카! 샤카! 처억!
경쾌하게 울리는 얼음과 쇠의 부딪힘 소리, 그리고 그 사이로 들려오는 와이셔츠의 접히는 소리까지.
거기에 더해져 정확히 앞을 향해 찌르는 스트로크와 끝에서 꺾이는 손목의 스냅까지.
교과서적이란 말이 어울리는 셰이킹 자세에 기준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스터디에서 봤던 특이한 자세의 셰이킹과는 결이 다른, 말 그대로 정석에 가까운 자세였다.
- 촤르르르르륵, 촤아아악!
연달아 잔에 부어지는 액체를 다루는 솜씨까지 일품. 손끝을 살려 보는 이들까지 만족시키려는 일류의 자세에 기준은 그만 아쉬움마저 느끼고 만다.
차라리.
정말 차라리 오늘이 평일이고 단골 위주의 장사를 하는 시간대였다면.
오히려 정환의 저런 자세와 실력을 알아보는 이가 더 많지는 않았을까 그런 생각까지 해보는 기준.
주말이라는 특성상 단골보다는 일회성 손님이 많은 지금은 저런 자세에 대해 주목해주는 이가 적어 그는 아쉽기만 하다.
‘역시···’
역시는 역시란 말이 다시금 떠오른다. 조금은 다른 상황에 떠오르는 처음과 같은 생각.
그래, 차라리 이게 맥락에는 맞다. 이제까지 보여준 모습들이 있지 않나.
처음부터 비범함을 보이던 정환의 모습이라면. 메이킹에서도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맥락에 더욱 어울렸다.
“자, 주문하신 다이키리 나왔습니다.”
- 스윽.
정환은 옆에 선 바텐더가 자신을 어떻게 보든 상관없이 앞에 놓인 잔에 집중한다.
아무런 떨림 없이 밀려오는 잔에 손님은 고개를 한 번 까딱이고는 옆 사람과 대화를 계속 나눈다.
이 역시, 평범한 바의 풍경이다. 기다란 대화도, 칵테일에 대한 설명도 꼭 필요한 건 아니다.
바를 즐기는 방법이야 각양각색이니까.
“정환 씨. 고생했어. 일단 한숨 돌리겠네. 고마워.”
“아뇨, 뭘요. 형이 고생하셨죠.”
“그래도 아쉽다. 칵테일 메이킹 하는 거···, 다른 사람들이 봐줬으면 좋았을 텐데.”
“이럴 때도 있는 거죠. 괜찮아요.”
“시간이 좀 늦으면 단골분들도 오실 거야. 그때라도 데뷔전 분위기 만들어보자.”
“에이, 괜찮아요. 차라리 부담인걸요.”
조금 전 정환의 멋들어진 자세와 실력을 본 덕일까. 기준은 그런 정환의 모습이 남들에게 주목받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워 보였다.
데뷔전이라는 게 따로 단골과 지인을 불러 성사되는 이유 역시 이곳에 있다.
온전히 손님에게 집중해야 할 바텐더가 하루 정도 손님과 공존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것. 데뷔전은 그런 의미 역시 함께 담고 있었다.
“그래도 무탈해서 다행이에요. 다시 몰려도 방금처럼 차분히 하나씩 하면 될 거고요. 그렇죠?”
“응. 내가 또 멈추면 도와줘.”
“돕긴요. 같이 하는 거죠.”
늘 칵테일을 만들어내고 또 그에 대한 평가를 받고, 칭찬을 듣는다. 그런 풍경만이 펼쳐지는 것이 바의 전부는 아닌 법이다.
가끔은 이렇게 붐비는 시간대에 한 발짝 물러서 온전히 손님에게 시간을 주기도 하는 곳이 바라는 공간.
한차례 파도를 넘긴 이들은 이제 다음 파도가 두렵지 않았다.
“여기 계산이요.”
“잘 마시고 가요. 역시 강남의 바는 다르네요.”
“저번에 뵈었던 분이 안 보이셔서 걱정이었는데, 오늘도 좋았어요.”
“아까 마신 칵테일, 누가 만드신 거예요? 엄청 맛있었는데.”
하나둘 손님이 자리를 떠나고 그 자리를 새로운 사람이 채운다.
늘상과 같은 풍경 속에서 또 전해지는 말은 주목받지 못했던 바텐더의 마음을 풀어준다.
옆에 누군가 있어서. 다른 대화에 집중하느라 바텐더와의 시간을 놓쳤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런 자리에도 언제나 남는 건 바텐더가 만들어낸 결과물들.
바텐더가 무슨 고난을 겪었고 또 어떤 과정을 통해 이런 결과를 만들어 냈는 지는 모를 수 있다.
아니, 알아야 할 필요도 없고.
그럼에도 이곳을 찾았던 손님들에게는 하나의 완성된 칵테일이라는 기억만큼은 반드시 남고 만다.
일행과 나눴던 대화 속에서, 홀로 보내는 시간 속에서 함께 했던 그 칵테일의 맛과 향.
그걸 품고 떠나는 이들이 남기는 만족스러운 말이면 족하리라. 그게 오늘 이렇게 문을 연 이유이리라.
정환과 기준은 내심 문을 열기 잘했다는 생각에 미소를 지으며 영업을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어느덧 시간은 조금 깊은 밤을 찾아 9시를 넘어가려 하고 있을 때.
- 띠리리리리링.
마치 그런 바텐더들의 감상에 더해지듯 가게의 전화가 울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 덜컥.
“아르센입니다.”
기다리는 전화가 있다는 듯 서둘러 수화기를 들어 올리는 기준의 모습.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를 한 번 들은 그의 표정이 이내 기다리던 이를 만난 이의 얼굴로 바뀌었다.
“정우 형···!”
전화 속의 목소리가 아련하게 반가운 기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