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잔. 빈 집.
1.
“그러니까··· 이번 주 토요일이요?”
주니어 바텐더들이 아르센을 한바탕 몰아친 후, 평화롭던 아르센에는 주말 일정에 관한 대화가 한창이다.
“응. 그렇게 늦지는 않을 거야. 오픈만 둘이서 조금 하고 있어.”
“네, 뭐. 오픈이야 이제는 도가 텄는걸요.”
“방심하지 말고. 기준이가 시키는 일 제대로 하고.”
“넵! 알겠습니다!”
늘 오픈은 정우가 맡아온 일이었다. 못해도 가게에 신정우와 이명진 둘 중 한 명은 늘 상주하는 게 원칙이었던 아르센이기에, 둘 모두가 오픈부터 자리를 비우는 건 특이한 일이다.
그것도, 바에서 가장 바쁘다는 토요일에.
“···양조장에 가시는 겁니까?”
오픈을 전적으로 맡기는 중대한 일임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던 기준은 그저 잔을 닦으며 일정을 물었다.
“응. 요즘 준비하시는 전통주 있잖아? 인삼 향이 너무 거슬린다고 하시네. 그래서 인삼 빼고 만든 게 있나 살펴보러 가신데.”
“왜 평소처럼 평일에 가시지 않고요?”
“양조장에서 바쁘다잖냐. 어쩌겠냐.”
양조장이야 주 수입이 따로 있고 이렇게 제품을 개발하거나 바에 따로 공급하는 건 부차적인 일이다.
그들의 생업이 따로 있는 만큼, 바텐더의 일정을 내세우며 평일에만 찾기에는 무리도 있었다.
“운전 조심하세요.”
“그래야지. 마스터도 타고 계시니까.”
이명진은 건강이 안 좋아진 후로 운전을 멀리하고 있다. 그럴 때마다 그를 태워주는 일은 신정우의 몫.
가끔은 귀찮게도 느껴질 법한 일을 정우는 아무런 군말 없이 잘 수행하고 있다.
따로 자식이 없는 이명진에게는 신정우가 정말 아들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매번 민폐를 끼치는군요, 정우 씨.”
“그런 말씀 마세요. 저도 가서 배우는 게 있는걸요.”
“다른 분들 역시 오픈을 맡겨서 미안합니다.”
“괜찮습니다, 마스터.”
“걱정하지 마세요!”
훈훈한 아르센의 분위기. 바라는 곳이 주방과 비슷한 특성상 거친 말이 오가는 가게도 많다고는 한다.
실제로 정환이 일을 배웠던 곳 중에는 그런 분위기를 가진 곳도 있었고.
하지만, 아르센만큼은.
전혀 그런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는 곳이다.
“늦어도 6시 전에는 올 거니까, 너무 걱정하진 말고.”
“기준 형도 있는걸요, 뭐.”
“···어느 정도는···”
어느 정도는 가능하다. 자신의 실력을 애써 올려치지 않는 기준은 최대한 객관적으로 생각해 말을 뱉었다.
아직 프론트에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모든 영업을 그가 총괄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지금도 주문이 밀릴 때면 정환이 알아서 메이킹을 정우나 명진에게 넘기고 있는 게 현실.
기준은 슬쩍 불안한 표정을 지었으나, 정우가 다시 여섯 시 전에는 여유롭게 도착한다는 말을 하니 이내 안심하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아르센은 평온함을 앉고 주말을 맞이했다.
2.
90년대식 BMW E 시리즈. 그리고 우핸들.
운전하기 그리 좋은 환경은 아니라고.
지금 운전대를 잡은 신정우 바텐더는 그런 생각을 하는 중이다.
테이프로 돌아가는 구식 음향 장비에서는 오래된 팝송만이 흘러나오고 있다. 돌리 파튼인가 뭣인가.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 여자의 목소리가 제법 청아했다.
이제는 익숙해졌다. 늘 타던 차가 아니면 편하지 않다는 누군가의 말에 억지로 이 차에 올랐던 게 처음이었지만, 이제는 이 차가 아니면 자신도 어색할 정도로 익숙해진 게 그였다.
나오는 오래된 음악도 익숙해졌고.
“요즘도 차 정비 직접 하세요?”
오른쪽에 앉아 익숙하게 차를 모는 정우가 왼쪽 조수석에 앉은 중년인을 돌아봤다.
지금 타고 있는 올드카의 주인, 바텐더 이명진이다.
“유일한 취미니까요.”
“참, 이 차 파시고 적당한 새 차로 바꾸시래도요. 돈도 많으시면서.”
“팔면···, 얼마나 받겠다고요.”
“저한테 파십쇼, 저한테. 제가 싸게 잘 사드릴게요.”
“보통은 비싸게 잘 쳐준다는 말을 하지 않나요?”
“에이, 마스터. 우리 사이에 섭섭하게.”
시답잖은 농담들. 아무런 의미가 담겨있지 않은 말속에서 의미를 가득 담은 웃음들이 피어난다.
차는 그렇게 달리고 달려, 어느덧 경기도 포천과 가평 사이에 있는 작은 시골 마을로 들어섰다.
“여기 맞죠?”
“산길을 따라 쭈욱 올라가서 마지막에 틀면 그만입니다.”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에서 술을 만든다라···. 나쁘진 않네요.”
애초에 술맛을 결정하는 요소 중 최초로 쓰이는 물이 그 맛을 최종적으로 좌우함을 모르는 바텐더들이 아니다.
한국에서 빗는 한국의 술이라도. 결국에는 이렇게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을 찾아 산속으로 숨을 수밖에 없다.
“다 왔습니다, 마스터.”
- 끼익.
합판으로 지어진 공장 건물 앞에서 올드카는 거친 소리를 내며 브레이크를 잠궜다.
그리고 내리는 두 명의 바텐더.
전통주 양조장이라기에 멋들어진 한옥을 상상했기에 실망도 했던 첫 방문.
몇 번 와본 덕일까. 정우는 그런 실망감도 또, 기대감도. 이제는 전혀 들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잘들 지내셨습니까?”
명진이 먼저 열린 문 사이로 몸을 넣으며 인사를 전했다. 이들을 맞이하러 나오는 주조장이들.
“서울서 바텐더 하는 분이구먼. 또 왔수? 왜?”
“저번에 보여주신 술에 인삼 향이 너무 강해서요. 혹시 인삼이 안 들어간 술이 있나 해서 다시 왔습니다, 어르신.”
“인삼이 들어가면 그저 좋은 기지, 또 인삼 향이 강하단 건 무슨 핑계랴? 흐이구. 일단 들어오슈.”
거칠기만 한 입심에 비해 또 자비로워 보이는 손짓. 시골의 인심이라 애써 포장해보는 태도로 이들은 명진과 함께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화들. 명진은 술맛에 대해 여러 설명을 이었고 이들은 샘플로 보이는 작은 술잔을 연달아 명진에게 권했다.
바텐더는 분명 술에 있어서는 전문가다. 칵테일을 만드는 것 외에도 여러 술의 증류나 양조 과정에서 있을 법한 작용과 작업을 모두 익히는 건 물론, 지역별 특색까지 전부 공부해야 한다.
허나, 이론으로 공부하는 것과 실제로 와서 경험하는 건 다른 법.
아마 경력을 제법 쌓았다는 바텐더 중, 실제 양조장이나 증류소를 방문해 실무자와 자연스레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자신 눈앞에서 주조장이들과 너무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명진을 보며, 정우는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는 걸 새삼 느끼고 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처음 도착했던 1시에서 두어 시간이 흐르도록 양조장을 돌아다닌 둘.
명진은 그렇게 3시, 그리고 4시에 가까운 시간이 되어서야. 양조장의 사람들과 인사를 하며 겨우 차에 몸을 실었다.
“더 둘러보셔도 괜찮을 텐데요.”
“주말이니 길이 막힐 겁니다. 미리 출발해야죠.”
정우는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짓는 명진에게 시간을 더 주려 했다. 평일이라면 한 시간. 조금 더 밟는다면 그보다 이른 시간에 강남에 닿을 수 있는 거리였기에, 정우는 시간에는 여유를 한층 가진 상태였다.
“주말이니···, 네. 지금쯤 출발하면 되겠죠, 뭐.”
“얼른 가서 도울 수 있다면 도와야죠.”
“보신 일은 잘되셨어요? 마음에 드는 술이 있으시려나···”
“괜찮은 술 몇 개를 샘플 삼아 구매했습니다. 가서 같이 드셔보시죠.”
“흠, 좋죠. 연구도 해보고.”
- 위이이잉.
오래된 차는 거친 소리를 내며 흙길을 가로질렀다. 아직은 시골 마을. 차라 부를 것보다는 경운기며 다른 이동 수단이 더 많은 좁은 곳을 벗어나자, 명진이 말한 것처럼.
주말이라는 이름에 어울리게 붐비는 도로가 이들을 맞았다.
“음···, 쪼오금 밀리네요. 요 앞에 분기점만 통과하면 빠질 것도 같은데.”
“미리 나오길 잘했네요.”
“그러게요. 하마터면 늦을 뻔했어요.”
잠시 막히는 구간을 만났지만 크게 걱정할 건 없어 보였다. 늘 밀리는 구간이고 주말이라 병목이 일어난 걸 테니까.
정우도 명진도.
그런 판단에 평화롭게 멈춘 차 속에서 밖을 바라봤다.
천천히 차가 움직인다. 그리고 다시 멈추고. 다시 움직이고.
생각보다 느린 진행. 차에 달린 시계가 전자시계임에 째깍 소리를 낼 리가 없음에도, 이런 시간이 길어지자 명진과 정우의 귀에는 그런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조금 늦을지도 모르겠네요.”
“적당히만 가면 괜찮을 겁니다. 오픈 시간에는 사람도 적으니까요. 우선은 조심해서 갑시다.”
“네, 마스터. 걱정마세요.”
얼마나 흘렀을까. 분기점이 지나가고 이제는 앞선 차들이 달리기 시작하는 무렵.
정우는 조심히 차선을 바꾸고는 뚫린 도로를 향해 달리려 했다.
살짝 꺾은 핸들을 바로 잡고 그대로 액셀을 조금 더 밟으려던 그때.
- 콰아아아앙!
커다란 굉음이 들리며 도로에는 조금 오래된 차 부품의 파편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3.
“늦으시네요.”
잔을 닦는 것부터 오늘은 병을 닦는 일까지. 주말을 맞아 많은 손님이 오가는 만큼 준비도 철저히 해 둔 아르센.
과일과 얼음, 그리고 청소까지 전부 끝낸 정환과 기준은 아직 이른 시간에 오픈 전 여유를 맞이했다.
“응. 여섯 시가··· 넘었네?”
아르센의 오픈은 7시.
바로 찾는 손님이야 많지는 않다지만, 괜스레 찾아오는 걱정감에 기준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곧 오시겠죠.”
“그래야···할 텐데.”
여유로운 정환과 달리 불안한 표정을 잔뜩 보이는 기준. 경험의 차이도 있지만, 기준은 성격상 이렇게 정해진 시간에 맞지 않게 흘러가는 걸 참지 못한다.
“전화는 없으셨지?”
“확인해볼게요. 보자아. 없네요.”
“이런 일이 잘 없는데···”
늦으면 늦는다고. 못 오면 못 온다고.
못해도 한두 시간 전에는 늘 알려주는 이들이 정우와 명진이다.
평소와 다른 상황에 기준은 입으로 손을 가져가 딱딱한 걸 물어뜯으며 초조함을 표한다.
“늦으시면 천천히 영업하고 있어요, 형. 오픈 시간에 오시는 분은 많아야 두 팀? 그 정도잖아요.”
“응···.”
두 팀 정도야 기준이 상대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는 숫자.
최근 실력이 물오른 정환까지 옆에 있으니, 많게는 세 팀, 네 팀까지도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이상이라면.
기준에게도 무리는 오겠지만.
“더 준비할 건 없지?”
“과일, 청소, 얼음에 잔까지. 그리고 다른 부재료도 전부 준비됐어요. 영업은 지장 없습니다.”
오픈 때야 늘 명진과 정우가 있었다지만 자잘한 일들은 기준과 정환이 도맡아 해왔다.
손님이 들어선 후에는 몰라도 그전까지는. 충분히 이 둘이 해낼 수 있는 일이다.
- 째깍, 째깍.
바에는 시계가 없다. 술집이라면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인 상술이지만, 어느 손님이 시간에 쫓겨가며 술을 마시고 싶겠나.
그저 손목에 걸린 시계에서 나는 소리가. 아직 손님이 차지 않은 아르센을 너무 크게 울리는 것 같아 기준은 슬쩍 짜증이 나려 했다.
“후우.”
불안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서는 기준. 시계의 침들은 어느덧 오픈을 10분 남긴 6시 50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나 바람 좀 쐬고 올 게.”
“네, 형. 다녀와요.”
오픈 30분 전부터는 자리를 지키던 기준이지만 평소 같지 않은 상황에 기분이 숭숭해 참을 수가 없다.
기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 딸랑.
잠시 후 밖으로 나갔던 기준이 들어서고도 막막한 적막감만이 아르센을 채웠다.
- 째깍. 째깍. 따악!
어느덧 시계는, 그렇게 정각 7시를 가리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