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잔. 뭐가 부족해서.
1.
아르센에서 연락은 생각보다 빨리 왔다.
면접을 본 바로 다음 날.
자신을 아르센의 매니저라 소개한 사내는 정환에게 합격을 축하한다며 일정을 조정하자는 말을 전했다.
이미 모든 일정을 다 조율해 놓았던 정환은 바로 출근이 가능하다는 답을 들려줬다.
언제든 일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지금 정환에게 바텐더로 일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없었으니까.
“정환아, 축하한다! 한참은 걸릴 줄 알았더니!”
합격 소식을 들은 상호는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준비과정을 같은 방에서 지켜봤던 상호인 만큼, 기분이 남다른 모양이었다.
“이야, 그럼 이제 바텐더가 되는 건가? 차텐더!”
석훈 역시 함께 자리하며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그간 시험이니 면접이니 하며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지 못했기에 오늘은 정환이 특별히 시간을 마련했다.
“아직 바텐더는 아냐. 그냥 바에서 일하는 거지.”
“그게 그거지, 인마! 심지어 경력직만 뽑는 자리였다며? 대단하다, 진짜. 하여튼 차정환!”
바에서 일하는 이가 모두 바텐더인 건 아니다. 아직 그걸 모르는 친구들은 정환이 바텐더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럼 이제 계속 그쪽으로 나가는 거지? 바텐더 쪽.”
“응. 난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그래, 잘 정했다. 일문과 나와봤자 재미없어.”
“그러니까. 뭐 번역을 할래, 뭘 할래?”
“상호랑 나만 이제 죽어나는 거지.”
한창 진로에 대한 고민이 많던 친구들은 먼저 진로를 결정한 정환의 상황을 부러워했다.
마냥 노는 거 좋아하던 석훈 역시, 이런 걱정을 늘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진지한 친구들에겐 미안하지만, 정환은 이들의 미래에 대해 아무런 걱정이 없다.
다들 고민도 많고 중간에 탈도 많았지만, 결국 둘은 제법 괜찮은 직장을 구해 사회인으로 자리를 잡는다.
2027년까지 이 둘과 계속해서 연락을 주고받았던 정환은 둘의 미래를 이미 알고 있다.
‘상호는 공기업이었고 석훈이는 일본계 영업직이었지.’
중간에 고생이야 하겠지만, 둘 다 벌이도 괜찮고 상황도 점점 나아진다.
이를 알고 있는 정환은 둘의 한풀이를 그저 귀엽게 바라봤다.
“그럼, 너 학교는 어쩌는 거냐?”
“일단 휴학하려고.”
“하기야, 전공이랑 크게 관련 있는 거도 아니고.”
“응, 그래서 일단 휴학해놓고 나중에 상황 보고 정해야지.”
“자퇴도 생각 중인 거야?”
“아마도···?”
대화를 나누던 중 자퇴란 말이 나오자 친구들은 슬쩍 무거운 분위기를 연출하며 턱을 끄덕였다.
처음부터 학교로 묶였던 관계인 만큼. 자퇴란 말이 무겁게 들리는 친구들이었다.
친구들에겐 미안하지만, 학교에 쓰기에는 시간이 너무 아깝다.
이전 삶에서야 일본에서 커리어를 시작했고 또 일본어로 일을 해야했다.
그렇기에 도움이 되었던 전공이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일본에서 배울 건 전부 배워왔고 일본어 역시 현지인처럼 완벽하다.
더는 학교에 미련을 둘 이유가. 정환에게는 없었다.
“자퇴해도 자주 보자. 일단 휴학 상태로 계속 둘 예정이야. 남은 학기도 열심히 다닐 거고. 일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니까.”
“그래, 뭐. 졸업이 대수냐? 졸업 안 해도 동기로 계속 보면 되는 거지!”
“정환아, 이사만 가지 마라. 방세 버겁다.”
“안가, 인마.”
이미 수많은 동기들이 사라지고 그 사이에서 겨우 남은 셋이었다.
더는 잃을 친구도 없는 이들은, 자퇴나 휴학으로 멀어지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집에도 말씀드려야겠네? 휴학하려면.”
“응?”
“취직했다고 말씀도 드려야지. 아직 연락 안 했어?”
“아니···, 이제 해야지···. 휴학도 조금 남았고.”
“빨리 말씀드려. 좋은 소식이잖냐. 너 요즘 뜸하더라.”
“응? 그래야지···.”
방을 같이 쓰는 상호는 정환의 행동 일거수일투족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런 상호의 눈에 최근 집에 연락을 잘 하지 않고 있는 정환의 모습이 이상하게 보였다.
부모님이라.
당연히 일자리를 얻었고 또 휴학할 거라면 부모님께 말하는 게 맞다.
성인이고 이제는 내 한몫 충분히 해나갈 수 있는 어른임이 분명했지만, 그래도 대학까지 보내주신 부모님의 은덕이 있지 않나.
다른 일이었다면.
휴학도 바텐더도 아니었다면.
정환은 정말 기쁘게, 자신의 가족들에게 먼저 연락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조금 달랐다.
바텐더로 일하게 된 것도, 또 휴학과 자퇴까지 준비하고 있다는 말도.
가족에게 전하기 쉽지 않은 정환이다.
이유는 단순했다.
어떤 반응이 나올지 이미 알고 있으니까.
일본에서는 그래도 2년을 숨겼다.
유학 중이던 상황이었기에 그저 아르바이트란 말로 덮었고, 그마저 바텐더란 설명조차 하지 않은 채였다.
그렇게 2년이 지나고 원래라면 한국으로 돌아갈 때가 되어서야. 정환은 부모님께 바텐더로 일하고 있음을 고했고, 반응은 그리 좋지 않았다.
제일 불같이 화를 낸 사람은 정환의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당장 한국으로 돌아오라며 크게 소리를 치셨고 돌아오지 않으면 의절이라는 말까지 했다.
흔히들 옛날 사람이라 부르는 세대에 속한 아버지였기에 바텐더에 대한 인식이 어땠는지는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을 정도였다.
- 니가 뭐가 부족해서! 왜 술을 따라! 왜!
술을 따른다.
그저 그게 전부인 인식이 아버지의 머리에 가득했다.
이해할 수는 있었다.
사회에서, 특히나 아버지 대의 대한민국이라는 곳의 사회에서. 바텐더라는 직업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는 정환 역시 잘 알고 있었으니까.
아버지는 화를 내셨고 어머니는 묵묵히 눈물을 흘렸다. 여동생은 일단 한국으로 돌아와 가족 문제를 먼저 해결하라고 말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맘때 처음으로 칵테일 메이킹을 허락받았던 정환에게. 잠시도 자리를 비울 수 있는 여유라곤 있지 않았다.
불효자였다.
못난 자식이었고.
외면했다.
그저 시간이 치료해주겠지. 그런 생각으로 일본에서 버텼다.
학교는 교환 연차라는 제도로 겨우 졸업했지만, 학위뿐인 졸업장.
한동안 아버지는 아들의 전화를 받지 않으셨고 어머니를 통해 소식을 주고받는 게 전부였다.
아버지의 화가 풀린 건. 정환이 일본에서 한 번 이직 해 다른 바의 메인 바텐더로 적을 옮기고 난 다음이었다.
벌이가 여유로워지고 시간마저 조정할 권한이 생기자 한국으로 향했다. 짧았던 휴가를 써 겨우 마주할 수 있었던 가족들.
시간이 제법 흘러서였을까, 불같았던 아버지의 성격은 누그러져 있었고 아버지는 어머니의 설득 끝에 겨우 정환의 얼굴을 마주했다.
한참을 들여 아버지께 자신의 비전을 설명했고, 정말 지금 하는 일이 좋다는 말을 늘어놓았다.
여전히 고지식한 말만 하시는 아버지셨지만, 한국을 떠나는 마지막 날에서야 깊은 대화를 나누고 바텐더란 직업을 인정해주셨었다.
설득을 당하신 건 아니었다. 이해하는 것도 아니었고. 그저 아들이니까. 시간이 지났으니까. 몇 년 만에 만난 거니까. 아버지는 가슴으로 품었던 것뿐이었다.
그래서 정환은.
지금 망설이고 있다.
이미 감정이 풀린 아버지가 아닌, 여전히 그때와 같은 인식을 가지고 계신 아버지라면.
이번에 전할 아들의 소식에.
어떤 반응을 할지는 불 보듯 뻔했다.
‘엄청 화내시겠지···’
졸업장이라도 땄던 지난 삶이었다.
거기에 일하는 곳도 일본이었고.
아마 그런 것들도 아버지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기에는 충분했으리라. 정환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이번에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
학교는 2학년을 전부 채우지 못했고, 일하는 곳 역시 서울이다.
아버지께서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실지, 막막기만 했다.
‘일단은···’
숨기자. 하나둘 상황을 정리하고 조금 여유가 돌아왔을 때. 그때 가서 아버지를 차분히 설득한다는 생각으로 우선 아버지 문제는 일단 뒤로 미루기로 했다.
꿈을 이루는 것도 좋지만. 이번에는 부디 아버지와 큰 충돌 없이. 응원을 받으며 꿈을 향해 달리고 싶었다.
‘그때와는 다르니까.’
당시에는 주장도 강했고 반항심 역시 강했다.
그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위해 설득보다는 연락을 끊는 걸 택할 정도로 무모했던 게 당시의 정환.
허나, 지금은 다르다. 나이도 이제는 제법 들었고 업계에 대한 지식과 이해도 역시 다르다.
아버지의 마음도 이해하고 있고, 깊게 나눴던 대화 역시 기억하고 있다.
정환이 중간에서 잘만 처신한다면.
아버지와는 별다른 충돌 없이, 일을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자자, 마시자. 마셔. 일단 다른 건 나중에들 생각하고!”
머리가 복잡해지니 술이 생각났다. 우선은 눈앞에 닥친 일들부터 하나씩 해결하고. 그다음에 다른 일을 생각하기로 했다.
오늘 해야 할 일은.
친구들과 원 없이, 노는 일이다.
“그래, 먹자! 오늘 아니면 또 언제 이렇게 놀겠냐? 정환이도 이제 바쁜데.”
“야야, 나중에는 쟤 일하는 곳 가서 마시면 되지.”
“바? 가도 되는 거냐?”
“뭐, 어때. 우리라고 바 가지 말란 법 있냐?”
석훈은 자신 있는 말투로 말했지만, 슬쩍 눈치를 보듯 정환의 얼굴을 바라봤다.
자기들도 바를 가도 되냐는. 확신이 없는 물음이었다.
“와도 되지. 뭐 어때. 나중에 내가 한 번 초대할게.”
“정말이지? 가도 되는 거지?”
“꼭 내가 일하는 곳 아니어도 다른 바에 가도 상관없고. 같이 바에 한 번 가자.”
“나 한 번도 안 가봤어.”
“나도. 왜인지 가면 막 돈 엄청 뜯기고 그럴 거 같은···”
“쓰읍!”
같이 가자는 말에 신이 나서일까.
석훈은 흥분해서 말을 다다다 쏟던 와중 상호에게 표정으로 혼이 났다.
정환의 앞에서는 바에 대해 어떻게든 안 좋은 말을 하지 말라고. 상호가 미리 언질을 해둔 모양이다.
“괜찮아. 실제로 그런 곳도 많고. 다음에 괜찮은 바에 같이 가보자. 내가 괜찮은 곳 알아볼게. 가서 보면 또 다를 거야.”
“진짜지? 너만 믿는다?”
“속고만 살았냐. 나만 믿어, 인마.”
“바텐더 친구 덕에 바를 다 가보네. 좋다. 기대할게.”
석훈과 상호는 잔뜩 상기된 얼굴로 술을 들이켰다. 바라는 곳에 대한 기대감이 친구들의 얼굴에 그대로 묻어 나왔다.
뭐, 바에 대한 환상이야 누구나 가지고 있다.
그게 깨질지, 아니면 더 견고해질지는 모르지만.
친구들을 바에 한 번은 데려가야만 할 것 같다.
2.
아르센에 출근하기 전 처리해야 할 일은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만이 아니었다.
연락을 모두 남긴 정환은 뻐드러져 자는 친구들을 뒤로 자취방을 나섰다.
가방을 하나 두르고 제법 학생다운 복장을 한 채 학교로 향했다.
수업은 한참 뒤에나 있다. 아직 친구들이 잠에서 깨지 않은 이유도 그러했고.
오늘 정환이 학교로 향하는 이유는 평소와 달랐다.
누군가, 학교에서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게 정환이 남들보다 빨리 하루를 시작한 이유였다.
일어일문과의 공간이 몰려있는 건물에 도착했다.
적색 벽돌로 쌓아 올린 오래된 대학 건물.
강의실이 쭉 자리한 A동을 지나쳐 교수실이 모여있는 B동으로 한참을 걸었다.
그리고 정환의 발길은.
- 일본 문학 담당 교수 지동철.
이라 적힌 한 교수의 연구실 앞에서, 멈춰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