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Guest.Prologue: 개점. (2/49)

Guest.Prologue: 개점.

아우레스력 1875년, 안스란력 435년 4월 1일.

렌디너스 왕국의 대도시 중 하나인 힐텐펜스는 거대한 상업도시이기도 하며, 435년 전에 태어난 여신 안스란을 기리는 안스란의 도시이다.

“진실함의 여신 안스란 메이”의 신전은 아우레스력 1435년 12월 15일에 벌어졌던 “성녀의 날”에 갑작스럽게 힐텐펜스 중앙에 등장한 거대한 나무를 둘러싸고 지어졌다. 렌디너스 왕국이 종교자유제(宗敎自由制)만 아니었더라면 국교를 안스란교로 정하고 싶을 정도로 렌디너스 왕국, 특히 그 신성함이 머무는 힐텐펜스 시민들의 안스란에 대한 신앙심은 그 어디보다도 높았다.

그렇기에 항상 힐텐펜스는 순례자(巡禮者)로 붐빈다. 대륙 각지에서 순례자들이 기적의 현장이자 여신의 증거를 직접 보기 위해 구름같이 몰려들었고, 그에 따라 유동인구의 발생과 비례하여 현금이 풀려 점점 부유해진 힐텐펜스는 지금에 오게 되었다. 렌디너스 왕국의 신 수도인 데린너스보다도 더 부강하다고 일컬어질 정도다.

그런 도시에서 여관업이나 요식업이 성행하는 것은 평범한 일이었다. 하루에도 십 수 개의 여관들이 문을 열고, 또 다른 십 수 개의 여관이 문을 닫는 등의 일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원래 여관이 문을 열 때는 화려하게 광고를 하거나 눈에 띄도록 치장하기 마련이지만 힐텐펜스는 정말 필사적으로 광고와 치장을 한다. 특수한 계열의 손님들만 모시는 특화 여관이 있는가 하면, 서비스의 품질을 극대화시킴과 동시에 가격 역시 극대화시켜 고위층을 모시는 대명사가 되는 여관도 있다.

한 번만 둘러보면 저급이든 고급이든 순례자나 관광객, 여행자, 상인들의 주머니 기호에 맞는 여관을 고를 수 있을 정도로 광고 및 호객 행위는 다른 나라의 여관들이 벤치마킹 대상을 삼을 정도로 발달해 있었다.

그런 힐텐펜스의 1블록 12가에는 한창 공사가 마무리되어서 외부 칠과 내부 정리를 시작하는 여관이 있었다. 아직 간판은 달리지 않았지만 5층 높이의 여관이라는 점만 상기하더라도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만큼 큰 여관이었다. 어째서 이 건물이 여관이냐고 속단할 수 있는가 하면 인부들이 지나드는 곳 옆에 “여관 건립 공사구역”이라고 써 있는 팻말이 박혀 있기 때문이다.

아직 외벽을 천으로 가려두어 외부로 보이는 여관의 모습을 정확하게는 알 수 없었지만 언뜻 겉벽에 푸르고 푸른 넝쿨이 그려져 있다는 것이 보였다. 아직도 페인트 통을 들고서 가게 안을 들락거리는 칠장이가 많아서 가게의 오픈까지는 아직 멀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런 여관의 앞에 두 여성이 서 있었다. 아래 위를 온통 새 하얀 옷으로 입은 하얀 피부의 하얀 머리카락을 가진 여성은 하얀색에 푸른 리본이 달린 챙 넓은 모자를 쓰고 있었고, 그녀 옆으로는 이제 막 여행을 끝낸 듯한 갈색 가죽옷을 차려입은 붉은 머리의 여성이 서 있었다. 붉은 머리의 여성은 허리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을 곱게 땋아서 묶고 있었는데, 오랜 여행을 했는지 빛깔이 많이 죽어 있었다.

두 여성은 조금 전 이 앞에서 만나서는 아무 말 없이 여관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서로 입은 옷의 분위기는 달랐지만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보며 생긋 웃는 것을 봐서는 확실히 아는 사이였다. 그렇게 한참을 있던 두 여성 중 하얀 머리의 여성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미아 님, 사전 공작은 잘 하시고 오셨어요”?

“응. 여기저기 소문 잘 퍼뜨리고 왔어. ”특별 손님??이 오려면 꽤 걸리겠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잖아?”

??하긴. 저희가 일반 손님을 만나려고 여관을 만든 것은 아니니까요.”

??어쨌든 오디, 수고했어.”

나미아라 불린 붉은 머리의 여인이 오디라 불린 하얀 머리 여인의 어깨를 툭툭 쳤고 그녀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생긋 웃었다. 오디의 머리는 땅에 닿을 듯 아슬아슬하게 뻗어 있어서 그녀가 머리를 조금만 움직여도 마치 우유(牛乳)의 폭포수처럼 물결쳤다.

외벽의 칠과 내부의 도배를 끝내면 남은 일은 물건의 반입이었다. 그야말로 개점을 코앞에 두고 있는 것이다. 종업원 같은 문제는 금방 해결할 수 있는 일이다. 그녀들의 소유로 되어 있는 이켈라인상회의 인력 알선소에 편지 한 통만 보내면 힐텐펜스 지부에서는 대지급(大至急)으로 그녀들의 명을 처리할 것이다.

??그런데 오디는 지금 어디서 머물고 있어? 페네디하고 샹그렐, 아이덴과 델리스는?”

??저와 그 넷은 지금 힐텐펜스 지부에 있어요. 그 네 사람 밑으로 꽤나 많은 부하가 생기기 때문에 사람을 다루는 방법에 대해서 제가 가르치고 있어요.”

??그래? 그럼 나도 거기 가서 좀 쉬어야겠어. 오랜만에 평범한 여행을 했더니…… 내 꼬락서니 좀 봐.”

??뭘요. 오히려 전 옛날 생각이 나는걸요? 괜찮아요. 나미아 님은 어떤 모습을 해도 어울려요.”

??뉘앙스가 좀 이상하긴 하지만…… 뭐, 괜찮다면 괜찮겠지. 하지만 난 뜨거운 물에 몸을 좀 푹 담그고 싶은 심정이야.”

나미아는 가죽 장갑을 벗어서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가죽 재킷은 꽤나 낡은 듯 보여 초라함을 몇 배로 늘려주고 있는 것 같았다. 나미아는 그 모습을 보면서 도시에 막 들어온 황야의 여행자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녀는 몇 백 년 간 다져온 자제력으로 그것은 내색하지 않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예, 그럼 가시죠.”

오디가 그 길고 긴 하얀 머리를 휘날리며 사박사박 앞장섰고, 나미아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서 터벅터벅 뒤쫓았다.

아우레스력 1875년, 안스란력 435년 4월 5일.

어떤 업종이라도 가게를 여는 이상은 내부 물품의 정리가 필요하다.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 필수품과 소모품의 한계를 명확히 하고 가게의 인테리어에도 상당한 공을 들여야 한다. 그리고 업종이 숙박업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여관은 같은 크기의 방을 다수로 가지고 있는 주택과도 같다. 일반적인 주택의 물질적 규모를 확장시키고 제공할 수 있는 편의사항 목록 중에서 통합할 수 있는 것을 통합하고 할 수 없는 것은 최적의 장소로 분배한다. 이런 의미에서 할 수 있는 종류의 통합은 보편적으로 식사와 세면이다.

대개 손님의 편의사항에 대해 그것을 통제 받는 것은 점포 측이지만 여관업을 비롯한 숙식시설은 이것을 점포 내에서 통제한다는 점이 다르다. 식사가 제공되는 시간, 공동 세면장의 유무, 점포 내의 전체 소등시간 등의 스케줄이 있고, 그것에 손님이 따르게 하는 것이다.

이런 것으로 손님의 관리와 통제를 그들의 자율권을 침해받지 않게 하는 한도 내에서 어느 정도 할 수 있게 된다. 손님은 자연스럽게 여관이 정한 규칙에 따라주고, 여관은 그것으로 손님의 통제를 하여 운영 자체를 쉽게 만드는 것도 여관의 능력에 따라 그 수준이 달라진다.

??……그런 이유로, 손님들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움직일 수 있게 여러분들이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공되는 서비스의 질에 따라서 손님들이 자발적으로 움직이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끔 해야 한다는 점을 언제나 잊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총 65개의 객실, 최대 수용 인원 250명, 총 직원 50명의 규모로 여관은 문을 열기 직전에 돌입했다.

나미아는 여관에 사용될 물품의 발주와 인수 및 운반 때문에 잠시 힐텐펜스 지부의 창고로 가느라 자리를 비웠다. 그리고 오디는 여관의 뒤뜰에서 모든 직원을 모아두고 기본적인 마음가짐에 대해서 짤막한 연설을 하는 중이었다.

“여러분은 경험자이기 때문에 다들 아실 겁니다. 사람에게 보이는 미소가 중요하다는 것을요. 여관을 만드신 나미아 님이나 건축 과정을 관리한 제가 바라는 것은 여관을 나갈 때 손님이 직원들 때문에 얼굴을 찡그리지 않는 것입니다. 아주 기초적인 일이지만 그것을 잊어먹는 경우가 많아서 큰일이에요. 물론 손님 대접을 해줘도 자꾸 난리를 피우는 사람은 여관의 바로 앞에 있는 펜스텐 호수에 던져버려도 상관없습니다.”

풋. 피식. 키득키득.

농담이 재미있다기보다도 오디가 농담을 하는 것이 워낙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저기서 작은 웃음소리들이 튀어나왔다. 오디는 이유야 어찌되었든 분위기가 완화된 것을 느끼고 직원들에게 유인물(油印物)을 나눠주었다.

??이 유인물은 여관 내 기물들의 기본 배치도입니다. 본 여관은 2인, 4인, 8인, 12인 실의 크기로 나눠지며, 유인물에 보시면 그곳에 들어갈 물건과 배치도가 있습니다. 나미아님께서 물건을 받아오는 대로 플로어 팀은 플로어 매니저 페네디 슈마허의 지시에 따라 각자 맡은 방으로 물건을 옮겨주시고 객실 세팅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홀 서비스 팀은 홀 매니저 샹그렐 에리안스의 지시에 따라 홀의 세팅을, 주방은 요리장 델리스 서커바인의 지시에 따라 알맞게 세팅을 해주세요.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의 감독은 지배인 아이덴 자파인에게 일임합니다.”

이켈라인상회의 본사에 있던 나미아의 사저에서 일하던 네 명의 사람은 모두 나미아와 함께 직장을 옮기기로 했다. 각자의 이유는 인상된 월급이나 편한 상관이 있다는 등 각자 달랐지만 다들 용케 나미아를 따를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현재 그 네 사람은 나미아의 말대로 “승진”을 하게 되어 중임(重任)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상 그들이 하는 일은 지금까지 자신들이 했던 일의 확장형이어서 그다지 어렵지는 않을 것이라는 평가가 그들 사이에서 내려졌고, 무엇보다도 노련한 경험을 갖춘 부하들까지 생겨서 어찌 보면 일하기는 훨씬 쉬울 것이다.

오디는 이 정도면 대충 이야기는 끝났다 싶어서 모두에게 쉬라는 말을 하고서는 완전히 드러난 여관의 외장(外裝)을 보았다.

초록색의 덩굴은 장미덩굴이었다. 베이지 색의 벽을 타고 오르는 덩굴에는 점점이 장미꽃이 피어나 있었고, 그 명암이나 모양은 마치 진짜 장미 같은 느낌이 들 지경이었다. 나미아가 기왕 하는 거면 겉모습부터 제대로 하자는 뜻에서 유명 벽화가(壁畵家)를 부른 것인데, 비싼 요금을 주로 고용한 보람이 있었다.

아직 간판은 달지 않았다. 개업식(開業式)을 치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간판을 공개하는 것은 먼저 나미아와 오디의 가족과 지인들을 부르고서 할 생각이었다. 그녀들이 이 여관을 운영하면서 “특별손님”을 받기 위해서는 그들의 힘이 필수 불가결했기 때문이다.

여관의 직원들이 될 사람들은 오늘부터 임시로 출근을 시작해 여관의 내부를 꾸미는 일부터 하게 된다. 이런 일은 다른 인부를 시키면 될 것 같지만 나미아가 말하길 “자신의 손으로 만든 여관엔 애착이 생긴다.”라고 하여 그녀의 의견에 따르는 것이다.

나미아가 하는 말은 대개 엉뚱하게 들리기 마련이지만 그 이면에는 사물의 진실을 날카롭게 꿰뚫는 직관력(直觀力)이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나미아가 아무 뜻 없이 말하는 경우가 없다는 건 아니다. 오히려 더 많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미아는 일 할 때와 하지 않을 때를 잘 구분하고 있고, 그것에 대처하기 때문에 업무 형태에 들어가 있던 나미아의 말을 존중하고 있는 것이다.

“저, 총무님.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예. 무슨 말이죠? 아이덴 집사? 아니죠, 아이덴 지배인?”

아이덴 자파인은 갈색 머리를 뒤로 넘기고 보통의 체격에 서글서글한 인상을 하고 있는 맑은 눈의 청년이었다. 그는 오디만큼이나 익숙해지지 않은 지배인이란 말에 조금 머쓱해하며 그녀가 배포한 유인물을 들고서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가구들을 먼저 들이는 겁니까? 소모품들의 배치가 아직이고, 지하 창고의 배치도 조금 어정쩡한걸요?”

??에…… 그러고 보니 그렇군요. 소모품은 오픈 전까지만 비치하면 되는 것이니 일단 그 문제는 접어두고, 문제는 창고네요. 일단 주방에서 가까운 쪽에 식료품을 배치하고…… 아니, 이건 주방과 상의할 문제로군요. 일단 창고가 여럿 비어 있으니까 그것을 효과적으로 조율해보세요. 지배인이잖아요?”

??아, 그렇군요. 하하. 알겠습니다.”

아이덴은 유인물의 지하실 배치도를 보면서 창고의 쓰임새를 결정하기 위해 각 부서의 책임자들을 만나러 다니기 시작했다. 그래봤자 이전에 일하던 동료였지만 그는 그들 중에서도 집사라는 위치에 있었기에 다른 이들보다는 약간 높은 위치라고 할 수 있었다. 현재 여관에 배치된 지배인이라는 말도 그것을 대변한다.

아이덴과 주방을 맡았던 델리스 외에 나미아와 오디의 시중과 청소, 방 정리 등을 했던 샹그렐과 페네디는 아랫사람이 생겨본 적이 없어서 많이 당황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들은 다른 이들보다도 탁월한 경력이 있었기에 금방 위계질서가 잡힐 것이다.

여차하면 자기나 나미아가 나서서 질서를 잡으면 되는 일이니 오디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궁금한 것은 대체 왜 나미아는 지하창고를 이렇게 넓게 만들 것일까 하는 점이다.

창고가 많아진 점과 지하 욕탕에 세탁장까지 갖출 수 있게 된 점은 좋지만 1층 넓이의 두 배 가까이 되는 지하실은 필요 없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거의 여관 뒤뜰과 맞먹는 면적이 지하실인 것이다.

??힐텐펜스 지하에 던젼(Dungeon)이라도 만드실 생각이신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나중에 오면 물어보는 수밖에 없다.

여관은 1층에 주방과 식당, 홀을 겸한 술집으로 나눠져 있다. 애초에 여관의 규모를 크게 잡았기에 1층에 남는 공간은 창고나 객실로 쓰이게 되려니 생각했지만 나미아는 그런 예상을 뒤엎고 1층의 남는 공간을 술집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결정력으로 따지자면 매우 파격적인 일이다.

원래 1층에 식당이나 술집을 차리는 경우는 많다. 그러나 대개 그것은 작은 규모의 여관에서나 그렇지, 지금 지어진 큰 규모의 여관에서 그런 일을 했다가는 자칫 여관의 질이 떨어져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밤늦게까지 열어야 하는 술집은 손님들의 수면을 방해할 수도 있다.

오디는 그런 점을 들어 나미아의 계획에 반대를 했다. 그러나 나미아는 또 여기서 파격적인 결정을 내린다. 오후 12시부터 술집 손님을 받지 않는다는 말을 꺼낸 것이다. 보통의 술집을 겸한 여관은 소란스러움을 감안하고 오후 15시까지는 물론이고 날짜가 넘어가 새벽영업을 하는 경우가 있지만 나미아는 그 술집의 영업시간을 줄이겠다고 말한 것이다.

그렇게 될 경우 아무도 오지 않을 것이라는 지적이 있었지만 나미아는 막무가내였다. 여관의 본분을 잊지 않으면서 충분히 돈을 벌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었기에 오디는 더 이상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때때로, 이따금씩, 간혹 가다가도 나미아가 대체 하루 30시간 동안, 1년 16달 480일 동안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궁금해질 때가 생기는데, 지금이 그때라고 오디는 새삼 떠올렸다.

여관의 5층은 특별층이다. 그곳은 나미아와 오디가 생활하는 공간이고, 아직 직원들에게는 이야기하지 않은 “특별손님”을 접대하는 공간이었다. 그래서 그곳만은 오디가 손수 단장해서 5층에는 아무것도 손댈 것이 없는 상태였다.

1층에서 4층까지의 가구 정돈과 청소, 단장을 하면 오늘의 일은 거기서 끝인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라도 창고에 물건을 발주하러 간 나미아가 빨리 돌아와야 할 것이다. 워낙에 많은 물건이 쓰이기 때문에 그만큼 많은 인원이 운송 인력에 쓰일 것이라 보고서에 기재되어 있었다. 약 150명 정도.

이런 농담 같은 보고서를 오디는 진심으로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그녀에게 올라오는 보고서만큼은 진실된 보고서라고 자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관 앞의 폭 12야드의 도로와 여관의 뒷골목으로 물건을 산처럼 쌓아서 가져온 짐마차 40대가 도착했을 때는 놀라지도 않았다.

??오셨네요.”

??응. 좀 오래 걸렸지? 물건 싣는 데만도 꽤 걸리더라고. 직원 숙소의 물건들 먼저 들여놓길 잘했지? 매트리스 150장이 장난 아니더라고. 처음에 창고에 갔을 때는 무슨 공장 창고 같았다니까. 게다가 가구들하고 여러 가지 가져오긴 했어. 이제 반 정도.”

마지막 말에는 오디마저 놀라 뒤로 넘어갈 뻔했다. 마차 40대 분량의 물자가 이제 반. 그것도 가구만 따져서 그렇다는 소리였다. 소모품과 각종 용품까지 합치면 거의 마차 100대는 될 듯한 분량이라는 말이다. 문득 정말 여관을 크게도 짓는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그녀들이 상회를 하고 있지 않으면 아마도 여관을 열기도 전에 파산했을 것이다.

??이걸로 한 번 더 실어 와야 해. 다들 길 알았으니까 알아서 할 수 있겠지. 일단 물건부터 풀어놓고서 시작할까?”

??저기…… 인력이 좀 부족하지 않아요?”

??아, 그럴 것 같아서 다음에 올 때 50명 더 데려오라고 했어. 그 사람들하고 힘을 합쳐서 해결하면 될 거야. 오늘 안으로는 배치가 끝날 수 있겠지?”

나미아는 커다란 천을 뒤뜰 전체에 깔아놓고서 그 위로 물건을 올려놓는 운송업자들을 보며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람들과 이후에 올 50명을 합치면 여관의 정리는 꽤나 빠른 시간 안에 끝날 수 있을 것이다. 정확하게 오늘 안으로는 끝낼 수 있다.

오디는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힘없는 웃음을 흘렸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을 움직이는 데에는 돈이 많이 든다. 특히 이런 육체노동은 그만큼의 대가를 제공해야 하고 중간중간 먹을 것도 줘야 한다.

??아하하, 중간에 참도 먹여야 할 것 아니에요?”

??그것도 해결했어. 음식점들 여러 개 수배해서 오후 3시하고 8시에 도시락 가져다주기로 했어.”

??아, 네…….”

차마 말할 기운도 나지 않아서 오디는 그냥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미아는 차곡차곡 쌓이는 집들을 보다가 여관 건물을 쭉 올려다보았다. 아래에서 보기에도 5층만큼은 정리가 되어 있는 모습이었다. 나미아는 오디를 돌아보며 말했다.

??오디, 내 방 어디야?”

??아, 따라오세요.”

오디와 나미아는 여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의 작은 발자국 소리가 계단을 울리고 있었다. 계단은 나무로 되어 있었지만 삐걱거리는 현상은 아예 찾아볼 수 없이 발자국 소리만 났다.

오디는 올라가면서 여관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2층에서 4층까지는 원하시는 대로 객실이고요, 욕실은 방에도 있지만 대욕탕이 지하에 있어요. 물은 저장고하고 뒤뜰에 만든 우물로 충당하면 되고요, 여차하면 만들 수도 있으니까 그리 큰 걱정은 없겠네요. 에 또, 원하시는 짐은 전부 옮겨 놓았어요. 구조는 예전 나미아 님이 쓰시던 방 그대로 했고요.”

??고마워, 오디! 역시 너밖에 없어.”

??뭘요. 여기가 나미아 님 방이에요.”

오디가 5층의 오른쪽 중간의 방을 열자 천장에 달아놓은 원형의 구슬에서 빛이 나오기 시작하며 방 내부를 비췄다.

방의 크기는 매우 컸는데, 건너편에는 커다란 창문이 있고, 창문 앞에는 화분이 있는 작은 테이블이 있다. 창문의 왼쪽으로는 꽤 큰 침대가 놓여 있고, 새하얀 천으로 정갈하게 정돈되어 있다.

창문의 오른편에는 낮은 사각 테이블과 소파가 놓여져 있었고, 그 뒤로는 5단의 책장 3개가 벽을 차지하고 있었다. 문이 있는 벽 오른쪽에는 개폐식 옥상과 서랍장이 있었고, 반대편으로는 화장실로 통하는 문이 있었다.

나미아는 너무나도 익숙한 이 풍경을 보고는 환호했다.

??와아! 세상에! 아빠의 레어(Lair)에 있던 내 방하고 구조까지 똑같잖아?! 아하핫! 역시 오디뿐이야!”

나미아는 오디를 왈칵 끌어안고는 폴짝폴짝 뛰면서 기뻐했고, 오디는 생긋 웃었다. 나미아는 원체 자기가 살던 곳을 좋아하기 때문에 이렇게 따로 독립을 한다고 쳐도 예전 자신의 방과 똑같은 방을 원했다. 그래서 이켈라인상회의 본사에 있는 사저에도 예전과 같은 방을 만들었고, 이번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디에게 있어서는 다소 까다로운 주문이었겠지만 가구 일체가 준비된 이상 이사만 하면 되는 일이었기에 배치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오디는 방을 보면서 기뻐하는 나미아의 팔을 잡아끌어 안쪽으로 조금 더 들어갔다. 4층에서 올라오는 계단의 바로 앞에, 다시 말해 5층의 입구에 거실처럼 꾸며둔 장소였다.

??응접실은 이쪽이에요.”

??응접실? 그런 것도 만들었어?”

??나미아 님 방에서 손님과 상담하실 건 아니잖아요.”

??아, 그건 그렇지.”

여관에 있어서 상담할 거라곤 숙박비와 음식값 정도였고, 기껏해야 서비스의 질과 대비되는 가격에 대해 손님과 신경전이 오가는 것 외에는 없을 테지만 이 여관은 원래 설립 목적부터가 그런 용도가 아니었다. 5층이라는 공간에 존재하는 “응접실”이라는 특이함은 “특별손님”을 맞이하기 위한 장소였다.

응접실의 모습은 딱 티타임(Tea Time)을 갖기에 좋은 공간이었다. 편안한 소파와 적당한 높이의 탁자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조건을 충분히 제공하고 있었다. 응접실의 인테리어나 카펫의 선택 역시 오디가 심혈을 기울인 것이기 때문에 나미아는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럼 집무실로 안내해드릴게요.”

??집무실? 그런 것도 있어?”

오디는 나미아의 의문에 바로 답하지 않고 그녀를 안내하여 5층의 복도 끝으로 갔다. 그곳에는 다른 문과는 다른 검은색의 무거워 보이는 나무문이 있었고, 황색의 동판이 “회장실”이라는 문구를 새긴 채 문에 붙어 있었다. 나미아는 설마 하는 표정을 지었고, 오디는 조용한 웃음을 얼굴에 띤 채로 문을 열었다.

바로 앞에 보인 것은 커다랗고 매끈한 흑단으로 만들어진 나무 책상에 푹신해 보이는 회전의자의 등이었다. 그 앞에는 양옆에 검은 커튼이 달린 커다란 격자 틀의 창문이 있었다. 창문으로 보이는 하늘은 붉게 물들고 있었다. 양쪽 벽으로는 책장이 나열되어 있었고, 그곳에는 각종 책이 정갈하게 꽂혀져 있었다.

“우와…… 이거 상회의 집무실이랑 똑같잖아.”

나미아는 다소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일하던 환경과 너무나 같았던 것이다. 이럴 때는 오디의 신경이 새삼 부담스럽다. 오디는 나미아의 반응을 보고서도 그것을 살짝 무시하면서 오른손 검지를 척 들고 말했다.

“일은 일. 공사구분 정도는 하세요. 이곳으로는 상회의 중요사항도 같이 날아올 거예요.”

“자, 잠깐! 어째서 그렇게 되는데?”

나미아는 뜨악한 표정을 지었고, 오디는 왜 그러냐는 듯 눈을 두어 번 깜빡거리면서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어머? 이켈라인상회의 회장은 아직도 나미아님이세요. 대리는 그 한계가 있잖아요?”

??총무는 너잖아!”

??회장의 결재를 어떻게 총무가 건드려요? 괜찮아요. 대리로 둔 유레인도 그런 사안 정도는 분리할 줄 아니까 한달에 서너 건 정도만 처리하시면 될 거예요.”

오디는 못을 박듯 생긋 웃었고, 나미아는 그 미소와 말에 눌려 볼만 잔뜩 부풀렸다. 기껏 상회의 일에서 벗어났다 싶었는데 아직도 일이 남아 있었다니. 오디는 그런 나미아를 추슬러서 집무실을 나왔고, 나미아는 허리에 손을 척 얹고서 말했다.

??오디, 너무해.”

“당연한 일을 한 것뿐인데요. 일단 오늘 이내로 객실 가구 배치를 끝내고서 내일부터는 소모품 정리를 할까 해요. 그리고 정식 개점을 하기 전에 아버님하고 어머님, 그리고 동생들 부르고, 또 아는 사람들도 불러 모아서 개점을 함과 동시에 간판 공개를 할까 하는데요”?

??그래, 마음대로 해.”

??무슨 말이 그래요? 여관의 마스터는 나미아님이라고요.”

오디는 허리에 손을 얹으면서 나미아를 직시했다. 여관의 주인이 된 이상 여관의 스케줄에 대한 불가여부를 말하는 것은 바로 나미아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미아가 뭔가 알고 있는 것은 없었다. 일차적으로 건설 책임자와 여관의 관리인은 오디였고, 나미아는 명의등록만 되어 있을 뿐이었다. 오디가 여러 가지를 준비하고 건설 감독을 하는 사이 나미아는 여관에 대한 소문을 퍼뜨리기 위해서 대륙 곳곳을 여행하고 다녔기 때문이다.

그녀는 머리만 긁적거리면서 오디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그녀의 성격상 뭔가 운영한다는 일은 맞지 않는 것 같았다.

??알았어. 그러지 뭐.”

나미아는 한숨을 내쉬었고, 오디는 다시금 생긋 웃었다.

아우레스력 1875년, 안스란력 435년 4월 6일.

여관의 광고는 개점 직후에만 하는 것이 아닌 터를 잡으면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이 힐텐펜스 시장경제의 논리이자 원칙과도 같았다.

여관이라면 응당 준비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내부 직원에 대한 선전 역시 신경 써야 한다. 여관의 광고는 건설 때부터 한다고 말할 정도로 정리하는 모습이나 거기서 보이는 주인의 모습이 톡톡히 광고효과를 내기 때문이다.

덧붙여서 가십거리가 될 수 있는 것, 예를 들자면 어느 집의 주인이 예쁘다네, 어느 집은 제복을 입은 여성들만 있다네, 정말로 용모단정을 기준 삼아 뽑는다는 등의 요소는 여관이 열린 후에 행해지는 품평, 다시 말해 무슨 요리가 맛있다네, 어떤 술이 있다네, 그 집에는 이러한 그림이 있다네, 어떤 종류의 사람들이 많이 들어온다네 등의 요소보다도 중요하게 취급된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나미아와 오디의 존재는 여관의 광고를 하는데 있어서 부족함이 없는 훌륭한 간판이었다.

??야야, 저기 좀 봐…….”

??우와아! 세상에 저런 미녀가…….”

“저기 옆에 있는 여자는 어떻고”?

나미아와 오디는 현재 여관의 소모품을 옮기기 위해 팔을 걷어 부치고 머릿수건을 한 채 마차에서 열심히 물건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그리고 슬슬 개업을 준비하고 있는 여관에 호기심을 느껴서 온 사람들에게 그녀들의 모습을 선보이는 것으로 훌륭한 광고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디.”

??예?”

??꼭 이렇게 해야 해? 난 구경거리 되는 거 질색이야.”

나미아는 식기가 든 상자를 들어 옮기면서 그릇이 든 상자를 옮기는 오디의 옆에 가서는 불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인건비가 들더라도 사람을 시켜 나르게 하는 편이 더 낫지 않느냐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오디는 나미아를 살짝 째려보고서는 단호하게 말했다.

??안 돼요. 옮기세요.”

??치잇,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정말…….”

나미아의 구시렁거림은 오디의 태도가 도저히 이해가지 않는다는 식이었다. 그리고 오디로서는 그런 나미아의 태도야말로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었다.

단 하루 만에 여관의 가구를 모두 배치한다는 쾌거를 이룸과 동시에 생각지 않았던 막대한 지출을 힐텐펜스 상회에 떠넘긴 나미아는 곧장 오디에게 심한 교육을 받고서 최대한으로 인건비를 줄이는 방침에 자신의 몸을 던져 넣어야 했다.

아무리 그녀들이 상회의 주인이라고 할지라도 그 모든 인건비를 상회에게 떠넘긴다는 것은 상도의 원칙에 어긋나도 한참 어긋난 것이다. 오디의 말을 빌리자면 아이리펜 대륙의 동쪽 끝과 서쪽 끝보다도 멀고, 아스트랄 플레인과 머터리얼 플레인 만큼이나 어긋나 있는 셈이었다.

물론 나미아의 반항이 뒤를 이었고, 덕분에 그녀는 파란 눈과 빨간 눈 양쪽에 전부 분노를 담은 오디의 모습을 간만에 볼 수 있었다. 돈에 대해서 겉으로는 장난스럽게 대하지만 사실 그 문제에 대해 누구보다 진지한 나미아의 사상은 물심양면으로 진지한 오디의 사상 앞에서 짓밟힌 토마토의 모습이 되어야 했다.

그래서 지금 광고와 동시에 인건비 절약의 일거양득을 노리고서 나미아가 직접 소모품의 운반을 맡고 있는 것이었다. 애초에 그녀의 헤픈―자신이 헤프다는 것도 자각하지 못하는― 씀씀이 때문에 일어난 일이고, 오디가 화나면 나미아로서는 얌전히 따르는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구시렁거리면서도 착실하게 일하고 있었다.

본인은 구경거리가 되는 것이 싫다고 말하고 있지만, 오디를 비롯한 다른 여관 직원들이 볼 때는 나미아는 무대체질이었다. 여관에 들어왔을 때는 얼굴에 불만을 가득 담고 있는 표정이었지만 밖으로 나갈 때는 화사한 미소에 단정한 걸음걸이로 마차를 향해 걸어간다.

간혹 허리를 숙이느라 쏟아진 머리를 뒤로 넘길 때마다 들려오는 탄성이나 멍한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면서 은근히 즐기고 있는 모습이 뻔히 보이고 있었다. 저것을 가리켜서 완강히 거부하는 태도로 받아들이는 것이구나 싶은 직원들은 인생에서 중요한 경험을 체험하는 중이었다. 겉 다르고 속 다른 사람에게 주의하여야 할지니…….

주변에 몰려든 사람들은 나미아와 오디가 들락거릴 때마다 한숨을 내쉬거나 몽롱한 표정을 짓는 등 구경꾼으로서의 자세를 다하고 있었다. 끝내주는 미녀들이 등장했다는 소문은 금세 거리고 퍼져나가 그녀들을 구경하기 위한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그중에는 꼭 자신의 존재를 과도하게 피력하려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이봐, 아가씨! 누구 마음에 불을 지르려고 그렇게 예쁜 거야?!”

??마음대로 불 빌려가지 말아요. 불 지핀 적은 한 번도 없으니까.”

약간 험상궂게 생긴 사람―아마도 펜스텐 호수에서 어업에 종사하는 것 같은 사람―의 말에 나미아는 매우 능숙하게 답했다. 그는 피식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했고, 나미아는 마차에서 나무상자를 들어 올리고는 척척 걸어가고 있었다. 그 안에는 철제 식기들이 가득한데, 모르는 사람이 보면 아마 가벼운 물건이 가득 차 있는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사람들의 시선 사이를 걸어가면 나미아는 문득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었다.

??여기에 뭐가 생기려는 거야?”

??글쎄, 그냥 봐서는 여관 같기도 한데…….”

??하지만 1층은 술집이잖아?”

나미아는 그렇게 의견을 나누는 사람들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춘 뒤 살짝 고개를 돌리고는 말했다.

??여관이에요.”

??여관이요?”

“예, 1층은 술집을 하고 나머지는 보통 여관과 같아요.”

??저, 언제가 개점이죠?”

??3일 뒤예요. 오시면 서비스 잘해드릴게요.”

나미아는 매우 가냘픈 목소리로 살짝 눈웃음까지 치면서 말했고, 그녀의 말과 표정에 주목하던 모든 이들이 얼굴을 화악 붉혔다. 나미아는 그렇게 그들의 얼굴과 마음에 불씨를 지피고는 여관 안으로 들어왔다. 바깥의 태양 빛이 여관의 차양에 가려서 그림자가 지자 생긋 웃던 그녀의 표정도 한순간에 싸악 뒤바뀌었다.

??후훗, 간단하지.”

입 꼬리를 비틀어 올리는 사악한 웃음에 테이블을 정리하던 남자 직원이 움찔하면서 황급히 길을 비켜주었다. 나미아가 그의 앞을 아무렇지 않게 걸어갔지만 그 남자 직원이 훗날 회상하기를 싸늘한 얼음덩어리가 지나가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표리부동(表裏不同)한 나미아의 모습이야 어쨌든 물품의 정리는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어제에 이어서 무거운 물체를 나르느라 남자들은 거의 녹초가 되었지만 나미아가 가져온 특제(特製) 마법 드링크는 그들에게 쉴 틈을 주지 않았다. 어제는 인력이 너무 많아서 중간 중간 쉬게 했지만 인원도 적은 오늘은 그야말로 하루 30시간 전부를 활용해 부려먹겠다는 식이었다.

??나미아님, 조금 쉬게 하는 건 어때요?”

??안 돼. 당장 내일이 간판을 공개하는 날이잖아? 우리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오는 만큼 더 신중해야 해.”

??그렇지만 힘들어할 틈도 없이 부려먹는 건 좀…….”

??어차피 그럴 사람들이잖아? 그리고 내가 약을 안 주는 것도 아니고. 저 정도면 일 쉽게 하는 거야.”

나미아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고,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니 오디는 그냥 순순히 물러서는 수밖에 없었다. 나미아는 일단 오전 중으로 상자들을 모두 안으로 들여놓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서 오디와 같이 다시 마차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매우 낯익은 사람이 눈에 띄었다.

나미아와 같은 붉은 장발을 했지만 키는 더 컸고, 성별도 틀렸다. 마치 산책이라도 하듯 검은색 면직 바지에 흰색 셔츠를 입은 남성이 머리를 아무렇게나 휘날리면서 당당하게 서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나미아와 상당히 닮은 듯한 인상을 주고 있었다. 그는 나미아와 오디를 한 번씩 보고는 각종 물품들을 보면서 씨익 웃고는 말했다.

??나미아! 오디! 바쁘냐?”

??아빠!”

??아버님!”

나미아는 회색만면하며 그를 반겼고, 오디도 반가움의 표정을 얼굴 전체에 띄우고서는 그를 맞이했다.

그녀들의 아버지긴 하지만 별 나이 차이가 없어 보이는 남자는 생긋 웃었다. 젊은 시절이 꽤 오랫동안 지속되는 인간들의 특성인지, 아니면 다른 종족인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나미아와 오디를 보는 남자의 눈은 확실한 아버지의 눈이었다. 그는 말했다.

??뭔가 또 다른 일을 시작한다고 하니까 놀러와 봤지. 개점 준비하는구나?”

??네, 아직 정리중이에요.”

??이제 막 시작했어요. 아빠, 좀 도와주세요. 네?”

그는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젓고는 팔짱을 끼었다.

??너희들 여관이잖아. 하나부터 열까지 너희들이 준비해야지. 그래, 간판 공개를 내일 한다고? 개점은 언젠데?”

??정식 개점은 글피쯤 할 예정이에요. 그런데 어머님들은요?”

오디의 질문에 그 남자는 자신의 붉은 머리를 매만지면서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난처하다는 기색을 띠면서 말했다.

??아, 애들 돌보고 있어. 내일 애들하고 올게다. 오늘도 따라 오겠다는 걸 겨우 때놓고 왔단다. 아직 어린애들이라서 외출은 무리인데 워낙 고집을 부려야지. 너희들 상회를 열 때도 안 데려갔다고 어찌나 화를 내던지 이번에 또 안 데려오면 내가 목을 매달아야 할 거다. 에휴.”

??풋! 조금 피곤해 보여요, 아빠.”

나미아는 자신의 두 어머니와 여섯 명의 동생들을 생각하고는 피식 웃었다. 얼마나 그녀의 아버지를 들볶았을지 눈에 선했다. 자기편도 없이 두 명의 부인과 여섯 명의 아이들이 일제히 졸라대면 버틸 수 있는 가장이 있을까? 그녀의 아버지도 결국은 가족들에게 약한 가장이었다.

??그래, 그럼 더 고생해라. 내일 사람들 데리고 올게. 아마도 웬만한 사람들은 거의 다 올 거다.”

??에에! 아빠! 좀 도와줘요오!”

??혼자서 해라. 힘도 좋으면서.”

어깨를 으쓱하는 아버지를 보며 나미아는 또다시 볼을 부풀리고는 볼멘 목소리로 말했다.

??딸한테 한다는 말이 힘 좋다는 말이에요?!”

??장점이잖아. 그럼 수고.”

그는 미련 없이 돌아섰고, 오디는 그의 등에 대고 절도 있게 고개 숙이며 인사했지만 나미아는 고함을 빼액 질렀다.

??안녕히 가세요. 개점 때 봬요.”

??에에?! 아빠! 미워할 거예요!”

거리에 모인 사람들은 등을 돌린 채 걸어가며 손을 흔드는 남자와 나미아를 보고는 피식 웃었다. 아버지도 그렇고 그 딸도 그렇고 상당히 어울리는 부녀지간이었다. 성격이 판에 박은 듯 보였다.

그렇게 그가 거리의 인파 속으로 사라지자 나미아는 그쪽을 바라보면서 구시렁거리기 시작했다.

??히잉, 아빠 미워…. 잉. 너무해….”

그리고 오디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그냥 내버려둘 성격은 아니었다. 충분히 자신들과 직원들의 힘으로 해낼 수 있는 일을 도와주지 않았다고 구시렁거리는 것은 단순한 투정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녀는 마차에서 상자 하나를 들어 올리며 나미아에게 말했다.

??나미아님, 일하세요. 아버님의 말이 옳잖아요.”

??오디도 너무해!”

??그런가보죠. 빨리 안 하시면 밥 안 드릴 거예요.”

농담 같지만 무시무시한 뜻을 담은 오디의 말은 나미아를 더욱 더 절망에 빠트렸다. 여관의 운영권이 오디에게 있으니, 그녀가 정말로 밥을 주지 않겠다면 나미아에겐 그 어떤 식량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나미아는 뜨악한 표정으로 오디를 보며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 오디… 너 마저…!”

??일하세요, 일. 일을 해야 밥을 먹죠.”

??너무해에….”

절망의 늪에 빠진 나미아가 도로 탈출하기까지는 30분간의 좌절시간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소모품의 정리는 오후 10시쯤이 돼서야 끝낼 수 있었다. 오디는 여관의 문을 닫고는 “Close”라고 써진 팻말을 걸어두었고, 그 뒤에는 모두 모여서 일이 끝난 것을 자축하며 저녁식사를 했다. 그 뒤 직원들은 직원숙소로 돌아갔고, 나미아와 오디는 5층에 만들어둔 응접실에서 티타임을 즐기는 중이었다.

??그런데 나미아님.”

??응?”

??저희가 하는 일이 과연 잘된 일일까요?”

??헤에? 그런 무슨 말이야?”

오디는 잠시 찻잔을 내려놓고서 곰곰이 생각했다. 할 말을 대충 정리한 그녀는 나미아를 똑바로 보며 말문을 열었다.

??헤르디스 베올딘이라는 성족 분의 말대로, 저희는 모든 준비를 끝냈어요. 그리고 그들이 안배한 카르마에 따라 손님을 받아야 하죠. 그렇게 되면 저희는 결국 성족의 골칫거리 해결사밖에는 안 되잖아요?”

오디의 말에 나미아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심각하게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30초쯤 흐른 뒤에 나미아는 진지한 표정으로 오디에게 물었다.

??흐음, 우리 여관의 목적이 뭐지?”

오디는 성족의 뒤치다꺼리를 하기 위해서라는 답을 생각했지만 그것은 자신의 생각일 뿐이었다. 일단 표면적으로 드러난 여관의 설립목적은 훨씬 의롭고 훨씬 좋은 것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말했다.

??정말로 절실하게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서요.”

나미아는 왼손으로 연기가 모락모락 나오는 찻잔 위의 허공에서 열기를 만지듯 손을 움직이며 말했다.

??그래, 하지만 그 절실함은 어떻게 구분하지? 사실, 세상은 우리 같은 존재가 끼어들어서 휘젓고 다녀도 괜찮을 만큼 만만한 곳이 아니야. 뭐, 예전에 아빠나 엄마가 그러긴 했지만, 그것은 세상의 묵인이야.”

나미아는 왼손을 찻잔에서 떼고는 손을 뒤집어 손바닥이 천장을 가게끔 했다. 그녀의 손이 잠시 미약하게 떨린다 싶더니 그 위로 새파란 불꽃이 피어올라 파르륵거리기 시작했다.

지옥의 불꽃이라 불리는 인페르노 프레임(Inferno Flame)이 한낱 인간의 손 위에서 노닐고 있었다. 나미아는 그것을 심드렁하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세상엔 하나의 법칙이 있어. 시작과 끝, 원인과 결과가 있다는 거야. 어려운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우리가 함부로 손을 뻗칠 수도 없잖아? 그래서 상회를 열었었지. 돈은 사람들을 행복하게도 만들어주니까. 하지만 상회를 운영하다가 돈의 모순을 여실히 느껴버렸어.”

??그렇게 말해도 정작 상회로 발돋움하고, 초창기 15년 동안만 전면에서 일하셨잖아요. 그 후엔 상회의 자본을 까먹으며 돌아다니셨죠. 뭐, 이래저래 인맥확장과 구호활동을 해서 꽤 의미 있는 일이기는 했지만요.”

??그래, 하지만 그건 우리가 찾아가는 거잖아? 콰이헤른 아저씨가 그러는데, 그렇게 인간의 기대심리를 충족시켜주면 언젠가는 하늘에서 떨어질 도움만 바라게 된대. 아무리 그들이 정말로 착하다고 해도, 내가 함부로 나서서 행운의 천사일을 하는 것은 오히려 화를 부를 수도 있다고 말이야.”

??옳으신 말씀이죠. 그래서요?”

오디는 재촉하는 듯하면서도 차분하게 나미아의 말을 기다렸다. 나미아는 손 위에서 아른거리던 여러 형상의 인페르노 프레임을 거두고는 왼손을 꼬옥 쥐었다.

??그래서 난 헤르디스 베올딘의 말을 듣고는 다시 생각했어. 그의 말대로 아웃사이더인 우리가 마음대로 헤집고 다닌 그 결과를. 오디 너도 알고 있을 텐데?”

오디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켈라인상회의 재력으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며 다니긴 했지만, 그것이 정말 필요한 사람에게 가는 것인지 의구심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들이 정말로 고마워하는 모습을 보며 길을 떠났지만, 그 뒤에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는 소식도 여러 번 들은 적이 있었다. 오디는 그것이 세상의 반작용이라고 생각했었다.

정말로 정해진 천명(天命)이 있다면 그들은 그녀들의 손이 아닌 다른 요인에게 구제될 수도 있었을 것이며, 그전에 끼어든 그녀들은 단순한 방해일 것이다. 혹은 그 이상으로 여겨지는 독일 수도 있었다.

세상은 좀 더 그에게 고난을 줘야한다고 여기고 있는데, 갑자기 등장한 나미아와 오디는 그들이 미처 삶의 깨달음을 얻기도 전에 그들을 구제하고 가버린다. 그리고 그들에게 와야 될 순풍은 순식간에 역풍이 된다.

오디는 50년 남짓한 세월 동안 그녀들이 겪었던 일들을 생각했다. 정말로 도움을 받아 잘 된 사람도 있었지만, 그렇게 되지 않은 사람도 많았다. 그들이 만약 세상이 안배한 존재들이었다면 그 일 자체도 좋게 끝마무리되어야 했겠지만 아쉽게도 그녀들은 우연과 빗겨난 인연의 산물이었다.

오디는 푸념하듯 한숨을 내쉬고는 조용히 말했다.

“저는 어차피 본래가 이 세계의 구성원이었지만 어찌 보면 아닐 수도 있네요. 원래 오드 아이(Odd Eye) 동물들은 ”죽은 신의 파편??이고, 저는 그중에서도 아버님에 의해 인화(人化)의 과정까지 거쳤으니까요. 완전히 법칙에서 어긋나 있네요. 그리고 나미아님도 원래는 전멸했어야 할 제3문명기의 생존자이시고, 세계를 만든 신의 의지에 거역할 줄 아는 드래곤의 피를 담은 블러드 스폰(Blood Spawn)으로 계시잖아요. 정말 세계의 입장에서 보자면 저희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시계톱니 사이를 멋대로 오가는 작은 톱니바퀴일지도 모르겠네요.”

나미아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으로 오디의 말에 긍정을 표했다.

오디는 애초에 원신(原身)인 오드 아이를 가진 고양이였고, 나미아는 레드 드래곤과 블랙 드래곤의 블러드 스폰임과 동시에 오디의 말대로 제3문명기의 생존자이다. 이미 제4문명기가 시작된 지 수천 년의 세월이 흘러 전멸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존재가 버젓이 돌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그런 그들의 행동은 세상의 업(業)을 마구잡이로 뒤섞게 할 가능성도 높았다. 다른 사람들의 가능성을 누르고, 세상을 이상하게 뒤틀어버릴 수도 있는 존재들인 것이다. 그러니 헤르디스가 지적한 대로 “세상”이 싫어할 만도 하다.

나미아는 말했다.

??그러니까, 이곳을 찾아올 정도의 사람은 우리같이 벗어난 존재들의 조력을 받을 인연이 있다는 거야. 이 세계의 구성원들에게 전해지는 인연은 이 세상의 법칙으로 그들에게 필요하다고 내려지는 것이고, 그 끝이 우리와 닿아 있다면 그건 세상이 허락한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아니, 허락했으니까 이곳으로 올 수 있는 거잖아? 이 세상이 미처 처리하지 못한 미해결 사건을 해결하는 것으로 쌓여 있던 업도 해결하고, 우리도 마음을 놓고 행동할 수 있게 되는 거야. 좋게, 좋게 생각하면 되잖아?”

??결국에는 행동 반경을 제한하고, 필요한 일만 하겠다는 것이네요.”

??그런 거야. 어차피 우리는 이 세상의 유용부품이니까. 어디에 사용하는지는 그건 이 세상 마음대로겠지.”

어찌 보면 나미아의 말은 아웃사이더의 서글픈 애환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세상의 구성원이 아니지만 지금을 살아가야 하기에 그녀들이 취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일은 역시나 세상이 허락한 일을 하는 것이었다.

나미아의 푸념은 언뜻 보면 신세한탄처럼 들렸지만, 오디는 그녀의 심중을 읽을 수 있었다. 단순히 그녀가 정신의 정령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랫동안 함께 있어서 생긴 통찰력 때문이었다.

??그래서 슬퍼요?”

??아니, 이것도 재미있겠다고 생각하는 중이야. 나를 해결사로 쓰겠다는 요량이니까 한번 무슨 일을 맡길까 궁금하기도 하고.”

나미아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여유 있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애시 당초 이런 일을 시작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매우는 아니더라도 그럭저럭 긍정적인 반응―충분히 예상했던 것―이기에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다고 생각한 오디는 대화의 주제를 바꾸기로 했다.

??그러면, 영업방침을 정해봐요.”

??영업방침?”

??예, 아직 간판을 공개하지 않은 여관의 주인에게 묻겠는데요, 이 여관은 어떤 취지로 운영을 할 생각이시죠?”

??으음… 한번 받은 손님은 끝까지 책임진다!”

??와아! 멋져요!”

그야말로 하늘이 정해준 인연에 이끌려 찾아오는 손님이니만큼 끝까지 맡은 바 소임을 다하겠다는 뜻이 담긴 말이었다. 오디는 아직 공개되지 않은 여관의 이름을 머릿속에 떠올리고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공개가 되는 내일, 나미아와 오디는 지금의 대화를 떠올리면서 매우 당당하게 여관의 간판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운 상상이었다.

아우레스력 1875년, 안스란력 435년 4월 7일.

여관의 뒤뜰에는 여관 건물의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있었다. 대개 뒷문이라고 하면 정문에 비해 초라한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나미아는 뒷문도 제대로 만들어서 앞문 정도는 아니지만 출입구라는 모습을 확실하게 갖춰두었다.

??개점―! 입니다!”

??어서 오세요!”

그런 여관의 뒤뜰 입구에서 오디와 나미아가 정원에 서 있는 인파를 향해 큰 목소리로 인사했고, 그 말이 끝나자마자 세 명의 소년과 세 명의 소녀들이 우르르 달려와서는 제일 먼저 여관 안으로 들어갔다.

??와아! 내가 일등!”

??내가 일등이야!”

??니예라! 시크린! 너희들 또?!”

한바탕 난리가 지나가고서 나미아는 웃고 있는 표정 그대로 눈 꼬리를 치켜 올리면서 주먹을 불끈 쥐고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이것들이…! 축하한다는 인사도 없냐!”

??참아요, 참아. 아직 애들이잖아요?”

오디는 눈 꼬리를 내린 채 나미아를 토닥였고, 그녀들의 앞으로 그들의 부모가 인자한 웃음과 함께 걸어와 섰다. 바로 어제 왔었던 그녀들의 아버지였다. 그는 두 명의 엘프,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미아와 오디의 어머니들과 함께 왔다. 제일 먼저 아버지가 대표로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었다.

??개점 축하한다.”

??정말로 축하해. 드디어 나미아 너도 기반을 잡고 뭔가 할 생각이 들었구나. 응원할 테니 열심히 하려무나. 그리고 동생들은 한 번만 좀 봐주렴. 아직 철이 덜 들어서 말이야….”

??축하한다. 나미아, 오디.”

그녀들의 부모가 축하인사를 하고 들어간 후, 갈색 로브(Robe)를 입은 남자와 평범한 일상복을 입은 여성이 다가왔다.

??아저씨, 아주머니. 와주셔서 감사해요.”

??하하하, 처음엔 상회를 만들더니 이젠 여관이니? 아무튼 축하한다.”

??축하해. 먼저 들어갈게.”

??네.”

그리고 그 뒤로는 약간 앳되어 보이는 청년과 갈색머리를 한 엘프 여성이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그들을 본 나미아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정확하게는 엘프 여성이 안고 있는 아기를 보고 그런 것이다.

??어머나! 레이사, 언제 애를 낳았어? 베르힌츠 녀석도 할 일은 다하는구나?”

??누나! 대체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로의 뜻.”

??베르힌츠, 그렇게 발끈하지 마. 애가 깨잖아?”

레이사라고 불린 엘프 여성은 남편인 베르힌츠를 잘 다독였고, 베르힌츠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조금 전에 들어간 그의 아버지인 콰이헤른이 며느리인 레이사의 임신소식을 듣고 말하길 애가 애를 가졌으니 조금은 어른이 된 것 같다 했었기에 꽤나 자신의 행동에 신경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들? 딸? 이름은 뭐야?”

??카르티나. 딸이야.”

??세상에… 너무 귀엽다!”

나미아는 흰 보자기에 싸여 있는 채로 새근새근 자고 있는 아이의 얼굴을 보면서 못 참겠다는 표정을 지었고, 오디 역시 그와 비슷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덕분에 완전히 소외된 베르힌츠는 뒤에 아직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이들에게 상기시켜주기로 했다.

??저기, 나미아 누나? 뒤에 사람들 있어.”

??아, 그렇지. 미안! 그럼 들어가. 이따가 좀 더 이야기하자. 응?”

??그래, 그럼 들어갈게. 아, 맞아. 개점 축하해.”

??고마워.”

매우 단란한 느낌의 세 사람이 들어가고서, 그녀들의 앞에 선 사람은 힐텐펜스를 뒤집어 놓을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생긋 웃으면서 굳어있는 두 여성에게 말했다.

“안녕? 오랜만이네. 개점 축하해.”

“…….”

나미아와 오디는 인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입을 반쯤 벌린 채 놀라는 중이었다. 너무나도 놀란 나머지 제대로 말을 꺼내지도 못하는 것이다. 그나마 나미아보다 조금 일찍 경악에서 깨어난 오디가 서둘러 인사했다.

??어, 어서 오세요. 여행 중이실텐데 번거롭게 해드린 건 아닐까 모르겠네요.”

??응? 아니야. 마침 신전에 볼일도 있고 해서. 그건 그렇고, 너희들도 참 여러 가지 일을 하고 다니던 걸?”

??하인츠 오라버니가 하시는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진실의 여신” 안스란을 모시는 안스란교의 최고사제인 하인츠 실베언은 힐텐펜스에 있는 총본산(總本山) 그랜드 트리(Grand Tree)에서 전해져 오는 전설처럼 아직도 늙지 않은 채 스무 살의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었다.

하인츠가 왔다는 것이 알려지면 아마도 힐텐펜스는 공황에 빠질 정도의 혼란이 시작될 것이었다. 살아 있는 전설이었으며, 아직도 그의 은자행(隱者行)은 새로운 전설로 추가되고 있는 중이며, 안스란 다음으로 신관들과 신도들의 지지를 받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나미아는 거의 2세기 만에 만난 사람을, 그 영향력을 생각하면서 까마득하게 멀어졌던 정신을 되돌리고는 간신히 인사를 할 수 있었다.

??어, 어서 오세요! 힘드시진 않아요?”

??내가 아니더라도 사람들이 잘하니까. 덕분에 조금 한가하지. 그럼 나중에 또 이야기하자. 먼저 들어갈게.”

??아, 네.”

그가 가자 나미아는 그제야 놀란 가슴을 진정할 수 있었고, 그 다음에 찾아온 사람 역시나 같은 거물급 인사라고 할지라도 놀라지 않을 평정심을 갖출 수 있었다.

그녀들의 앞에 선 사람은 긴 검은머리를 한 건장한 체격의 남성과 같은 색 머리를 한 건강해 보이는 한 여성이었다. 나미아는 방긋 웃으며 그들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라스킨 아저씨, 바쁘신 와중에 이렇게 들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제이나 아주머니도 오랜만이네요.”

라스킨이라 불린 현 툰드라공화국(共和國)의 대통령과 그의 영부인은 자신보다 나이도 훨씬 어린 나미아에게 깍듯하게 인사했다.

??개점을 축하드립니다, 아가씨.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주 느낌이 좋은 여관이네요. 축하드려요.”

나미아는 마주 인사하고는 그들을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리고서 자신들도 뒤를 따라 들어갔고, 오디는 나미아의 뒤를 따라 들어가며 문을 닫았다. 안쪽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문을 닫자마자 완벽하게 차단되었고, 여관은 마치 안에 아무도 없는 것 같아 보였다.

여관의 내부는 상당히 따스한 느낌을 주도록 장식되어 있었다. 기본적으로 은은한 베이지 색으로 시작해서 식당 전체는 아늑함을 강조하는 구조로 만들어져 있었다. 홀은 마치 고급 여관의 그것과 비슷하게 꾸몄는데, 무엇보다도 편안함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마음이 드러나도록 푹신한 소파와 낮은 테이블을 사용하였다.

벽면에 걸린 그림은 깨끗한 자연의 모습을 그려놓은 풍경화를 주로 삼았고, 깔끔한 벽지를 붙여 아늑한 느낌도 들게끔 했다. 장식으로 쓰인 꽃과 나무화분들도 실내에 싱그러움을 한껏 더해주고 있었기에 나미아와 오디가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알 수 있을 만한 모습이었다. 홀과 식당에 들어선 가구들 역시 꽤나 신경을 쓴 기색이 역력했다.

??이거 정말 대단한걸! 둘이서 이만큼이나 설계를 했단 말이야?”

??네, 그동안 여기저기 많은 여관도 돌아다녀봐서 내부 장식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거든요.”

오디는 생긋 웃으면서 아버지의 칭찬에 답했다. 사실을 이야기하자면 나미아와의 트러블로 하루도 쉴 새 없이 논쟁을 한 장소지만, 나름대로 나미아의 의견과 그녀의 의견이 잘 조합해서 만들어졌다.

나미아와 오디의 여섯 동생들은 1층과 2층을 오가며 우르르 몰려다니고 있었고, 까르륵거리는 소리와 말소리, 그리고 발소리가 섞인 소음을 유발시키고 있었다. 그들의 제일 큰누나이자 큰언니의 여관이라서 신기하기도 하고, 신나기도 하나보다. 그러나 천생 예의범절을 잘 익혀온 그들의 두 어머니는 우려가 앞섰다.

??라이니시스, 애들 좀 조용히 하라고 해봐요.”

??응? 왜?”

??왜라뇨. 시끄럽잖아요. 나미아도 화낼 텐데….”

??당신들이 하면 안 되나?”

라이니시스의 말에 두 아내는 서로를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조기교육의 무서움 때문인지 그녀들이 한번 혼을 낼라치면 활발하게 돌아다니던 애들이 마치 꽁꽁 얼어붙은 생선처럼 굳는 모습을 여러 번 봤기 때문이다.

그는 그런 모습을 떠올리고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녀들이 정말로 혼을 내는 것은 그야말로 혼이 빠져나가는 느낌이라는 걸 매우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이들이 쉽게 굳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착하고 예쁜 부인들을 도와주기로 했다.

??얘들아! 그만 앉아라. 나미아가 화낸다!”

??에엑?! 알았어요!”

??누나, 미안해!”

??언니, 용서해줘!”

아이들은 제각기 주방에서 음식준비를 하고 있는 나미아에게 앞 다투어 사과하고는 우르르 몰려와 아버지와 어머니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가서는 똑바른 자세로 앉은 채 긴장했고, 주방에서는 갑작스런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아빠악! 왜 사람 화를 돋우려고 해요옷!”

??에실루나. …쟤가 왜 저래?”

??글쎄요. 미리안은 아나요?”

??…정말 모르는 건 아니겠죠?”

라이니시스와 에실루나는 서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미리안을 보았고, 미리안은 자신의 남편과 또 다른 아내가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설명할 기운도 생기지 않던 미리안은 테이블에 착석한 여섯 명을 보면서 잘 타이르는 것으로 원만한 끝을 보자고 생각했다.

??아무리 나미아네 집이라고 해도, 다른 집에 온 이상 예의바르게 굴어야지? 특히 니에라와 시크린. 너희는 좀 체리랑스의 반만 닮아라. 어떻게 언니 오빠가 되어서도 그렇게 철이 없니?”

??엄마! 너무해요!”

??내가 뭘 어쨌다고…….”

??…….”

니에라라는 소녀와 시크린이라는 소년이 볼을 잔뜩 부풀리며 미리안에게 항의했고, 본보기로 내세워진 체리랑스라는 소녀는 고개를 숙이면서 얼굴을 붉혔다. 자기 이름이 거론되자 많이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다른 쪽에서는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끼리의 안부가 오가고 있었다.

??라스킨, 그쪽은 어떤가? 공화국 출범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어서 이래저래 힘들 거라고 생각하네만.”

??역시 대족장 시절보다는 좀 더 복잡하지. 나한테는 그게 잘 안 맞는데 말이야. 그냥 툰드라학원의 교장이 더 나았어.”

??그래도 새로운 출발은 의외로 괜찮다고 하지 않나?”

??가봐야 알지. 한 가지 다행인 것은 툰드라에서는 내 입지가 많이 강하다보니 생각하는 대로 움직여주는 부분이 많아서 다른 통치자들보다는 쉬운 편이야. 나이도 있으니 외교에서도 일단 우위를 점할 수도 있더군.”

이전까지는 어떤 세력의 침입도 불사하면서 특정한 경계 없이 그들만의 생활을 하였고, 툰드라에 지어진 다국민(多國民)학교로 하여금 인재 배출과 함께 여러 나라의 외교채널로 이용되던 툰드라 지대가 15년 전에 공화국으로 출범하게 되었다. 그리고 대통령은 살아 있는 전설이나 다름없는 늑대들의 영원한 황제인 라스킨이 맡게 되었다.

과거, 대륙에는 알 수 없는 마물들의 출현으로 인구가 반수 가까이 격감한 적이 있었다. 그 마물들은 갑작스럽게 나타나서는 살육을 일삼았고, 아무것도 방비하지 못한 사람들을 죽이고 겁간(劫姦)해 제4문명기의 종말론을 불러일으켰었지만 인간들의 조직적인 반격과 그때 당시의 툰드라 대족장이었던 라스킨의 과감한 결단으로 많은 수의 늑대들이 남하하여 어떤 나라, 어떤 지역에서든 조건 없이 마물들을 퇴치하는 선행을 베풀어 사태는 더 이상 악화되지 않고 끝나게 되었다.

그때 이후로 인간들은 늑대들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그 후 툰드라에서 마물들에게 부모를 잃은 고아들을 모아 학교를 세우는데, 그것이 현재 툰드라 학원이라 불리는 교육의 장의 시초였다. 모든 비용을 툰드라에서 대고 고아들을 수용하자 사회문제에 시달리던 인간들에게서 늑대들의 인기는 급상승하여 400년 전에는 툰드라 출신 늑대인간에게 최초로 시민권이 부여되는 등의 일이 생겼다. 그리고 더욱 번창하여 그들은 대륙 전반으로 퍼졌다.

그들의 고향인 툰드라의 지배자 라스킨은 당연히 그들에겐 신과 같은 존재였다. 툰드라의 인구가 과포화 상태가 되어 더 이상 부족사회를 구성할 수 없게 되자 왕국으로의 길을 모색하려다 라스킨의 반대로 공화국으로의 출범을 하게 되었고, 현재 라스킨은 나라의 기틀이 잡힐 때까지 장기집권을 하기로 하여 현재까지 이른 것이다. 만약 힐텐펜스의 고위 인사들이 라스킨의 방문을 알았더라면 당장에 환영 퍼레이드라도 열었을 것이다.

??쿠데타가 일어나더라도 자네 혼자서 제압할 수 있을 테니 시키는 대로 말은 잘 들어야지.”

??하핫! 그만큼 못미더운 짓은 아직 안 했다고. 그건 그렇고, 자네는 요즘 뭐 하나? 여전히 마법 실험을 하고 있나?”

??본데스였던 시절의 습관이 몸에 배여서 말이야. 그래도 여기저기 여행 다니는 일도 많아. 조만간 툰드라에도 방문할 계획이야.”

??오오, 그래? 그렇다면 우리 집으로 놀러오게. 후하게 대접하지.”

과거에는 목숨을 걸고 싸웠던 두 사람이지만 이제는 시간이 흘러 친한 친구가 되어 있었다.

콰이헤른은 과거에 리치(Lich)였었고, 라스킨과 제이나를 가지고서 여러 가지 실험을 했었다. 그것은 지금은 해체되고 없는 어떤 조직의 수장의 명을 받고서 했던 일이었다. 그때 그는 실컷 이용당한 다음 버려질 위기에 처해있었으며 상황의 악화로 인해 자신의 실험실과 그의 존재를 포기하려고도 했었다. 그렇지만 직전에 라이니시스의 도움을 받아 인간으로 돌아왔다. 그때의 일 때문에 섣불리 라스킨에게 말을 하지 못해서 겨우 200년 전에야 진실을 털어놓았고, 라스킨은 그의 속사정을 모두 듣고는 순순히 받아들여주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스스럼없이 우정을 쌓을 수 있었다.

콰이헤른은 리치였던 600년간의 시절 동안 인간이라면 불가능한 시간을 마법연구를 하며 보낸 덕택에 인간으로서는 따라올 수 없는 마법실력을 가지게 되었다. 원래는 사람들이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곳에서 조용히 마법을 갈고 닦으려고 했지만, 라이니시스의 권유로 300년 전 소규모의 마법사들을 모아 마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토론하는 공간을 만든 것이 현재는 대륙의 모든 마법사학회를 관장하는 길드가 되었고, 콰이헤른은 그 길드의 마스터가 되었다.

어떤 마법실험의 여파로 콰이헤른의 일가는 엘프와 비슷한 생명력을 가지게 되었으니, 그가 몇 백 년이 지나도록 마법사 길드를 관장하는 것과 그의 아들인 베르힌츠가 엘프인 레이사과 결혼한 것도 아무런 하자가 없는 일이었다. 콰이헤른의 아내인 리이나는 자신의 며느리를 보며 다정하게 말했다.

??그런데, 새아가. 지금 이렇게 돌아다녀도 되니?”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어머님.”

레이사는 카르티나를 안고 생긋 웃었다. 베르힌츠는 아내의 출산 이후로 새근새근 자는 자신의 딸을 보면서 멍한 표정을 짓는 시간이 더 많아져서 본업을 뒷전에 팽개쳐두는 중이었다. 현재 그는 첫 아이를 기르는 초보 아버지의 기쁨으로 그의 나애와 함께 열심히 육아활동을 벌이는 중이었다.

레이사는 여러 가지로 아이를 키우는 데 선배이자 그녀의 시어머니인 리이나와, 리이나의 친구이자 엘프 사회에서는 쳐다볼 수도 없을 만큼의 권위를 가진 에실루나와 미리안을 상대로 여러 가지 배워 가는 중이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엘프 사회를 이끌어가는 엘브스 퀸인 에실루나와 그녀보다 한발 앞서서 라이니시스와 결혼식을 올린 미리안은 부담스러운 상대였다. 그래도 다행인 점이 있다면 엘프의 종족 내에서 사회적 지위가 없는 미리안 쪽이 좀 더 대하기가 편했다는 점이다. 예전부터 미리안과 레이사는 같은 마을에 사는 언니 동생의 관계였으니까.

??그건 그렇고, 베르힌츠. 이제 너도 돌아가면 다시 일을 시작해야 하지 않겠니? 아이도 생겼으니 가장의 책임을 다해야지.”

??그럴 생각이에요. 곧 있으면 사냥철이니까 슬슬 일해야죠.”

세인들에게 “속사의 대명사”라고 불리는 베르힌츠는 현재 그 위명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팔불출 노릇을 자의로 하는 중이었다. 레이사가 산후조리를 하는 한 달 동안 열심히 밥하고, 청소하고, 빨래하는 등 모든 굳은 일을 하느라 자신의 본분을 잊고 있었지만, 그는 대륙의 모든 사냥꾼들의 목표이자 태양과도 다름없었다.

인간들에게 절대 금역(禁逆)으로 통하는 “엘 타칸리스의 산맥”은 그 비옥한 토지와 풍부한 자원으로 유명하지만, 몇 천 년 간 아무도 들어간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곳은 블랙 드래곤 “엘 타칸리스”의 영토였기 때문이다.

엘 타칸리스는 타계했지만 현재 그곳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레드 드래곤이 주인으로 앉아 있고, 블랙 드래곤보다도 흉포한 레드 드래곤의 일반적인 악명 때문에 더더욱 접근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땅에서 유일하게 자유로이 사냥을 하고 다니는 자가 있으니, 그 이름도 위대한 베르힌츠 투플레인이었다.

처음에는 단지 그곳에 사는 엘프들의 허락을 받고서 사냥을 하는 사냥꾼이라는 구설수 때문에 유명세를 탔지만, 400년이 지난 지금은 최고의 경력과 최고의 관록을 가진 사냥꾼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덕분에 원하지도 않은 아이리펜 대륙 헌터 길드 총 연합의 마스터로 모셔지고(!) 있다.

지금까지 들어온 사람들 대부분이 이래저래 상당히 유명한 인사였지만, 라이니시스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 하인츠만큼 유명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요즘은 뭐 하고 살아?”

??그냥 여기저기 돌아다니죠. 옛날과 다름없이.”

??힘들지 않아? 아무도 모르는 곳에 정착하지 그래?”

??아저씨도 잘 아시잖아요.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는 걸.”

라이니시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 신들의 술수에 휘말려서 평범했던 소년이 이렇게 변했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라이니시스가 아무리 레드 드래곤이라고 할지라도 신들의 술수를 파헤칠 능력은 되지 않아서 하인츠의 행동을 보며 애만 태우고 있었다.

??안스란은 어떻게 지내?”

??다를 것 없어요. 신자들이 늘어나는 추세도 아니라서 예전보다는 덜 힘든 것 같아요.”

??그래? 하긴. 그 아이도 좀 힘들겠구나.”

힐텐펜스와 렌디너스왕국에서는 독보적인 입지를 가지고 있으며, 전 대륙에서 다른 교단에게 지지 않을 영향력을 가진 교단이 믿는 여신의 이름을 함부로 거론하고 있는 이들을 다른 이들이 보았다면 매우 어이없어 하든가, 매우 분노할 것이지만 이들에게 안스란은 소꿉친구였고, 한때 돌봐주었던 어린 소녀였었다.

지금은 여신이 된 가녀린 소녀가 인간이었을 때 이미 알고 지냈으니 라이니시스에겐 경외감조차 생기지 않았다. 몇 년 안 되는 시간 동안 인간세상을 돌아다녔던 라이니시스에게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사건이 있다면 역시나 안스란의 사건이었기에 가슴에 남는 씁쓸함은 더 컸다.

좋지 않은 기억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짓고 있을 때, 부엌에서 음식 준비를 마친 나미아가 웨건(Wagon)에 음식들을 가득 담고서 나왔다.

??자아! 제가 자신 있는 요리인 아몬드 풍 크림수프와 닭고기 파이, 호밀빵, 통오리구이입니다! 어라? 아빠 표정이 왜 그래요?”

??응? 아니. 아냐. 그건 그렇고, 이걸 전부 나미아가 만든 거니?”

??네! 제가 만들었어요! 저 이래봬도 연습 많이 했다고요. 에헤헷.”

왜건을 밀고 온 나미아는 테이블 위에 음식들을 차려놓았고, 그녀의 여섯 동생들은 눈을 번뜩이면서 음식을 쳐다보았다. 눈을 반짝거리는 모습을 보자면 음식찌꺼기도 남지 않을 것 같았다. 평소에 애들을 굶기나 싶을 정도로 음식에 귀추를 주목하는 동생들을 보며 나미아는 남은 양이 넉넉할지가 걱정이었다. 그러나 곧 어떻게든 되겠지 싶은 심정으로 애써 무시한 나미아는 밝은 표정으로 왜건 밑에서 술병 하나를 꺼내며 말했다.

??그리고 어른들은 이것. 이켈라인 상점이 상회로 발돋움 했을 때 사두었던 적포도주입니다!”

나미아가 꺼낸 술병에 이번엔 라이니시스와 라스킨, 콰이헤른, 베르힌츠의 눈에서 빛이 번뜩거렸다. 다른 음식은 몰라도 술만큼은 보관상태가 좋다면 몇 천 년이 지나도 자연산화가 되지 않기 때문에 오래 묵을수록 가격이 천정부지로 오른다. 이켈라인 상점에서 상회로 한 단계 승격되었을 때가 아우레스력 1508년, 안스란력으로 68년이니 거의 370년 가까이 묵은 술이라는 소리다. 그 맛과 향이 오죽 할까. 홀에 모여있는 남자들의 표정에는 기대감이 만연했다.

나미아는 와인 잔과 포도주 병을 각 테이블에 하나씩 올려두고서는 개점을 위해 모인 가족과 지인들을 보았다. 다들 굵직함이 바늘 같은 기준으로 통할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었지만 그녀에게 있어서는 가족이며, 마음씨 좋은 아저씨와 아주머니이며 동생과 오빠, 친구였다. 그들을 모두 둘러보면서 나미아는 흡족한 미소를 띤 다음 오디와 함께 그들의 앞에 섰다.

??그럼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오늘 모임의 호스트이자 본 여관의 주인인 나미아 이켈라인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새삼스럽지만, 여관의 관리인인 오디 미아 싸이 이켈라인입니다.”

새삼스러운 인사였지만 다들 박수를 아끼지는 않았다.

짝짝짝짝짝.

??으흠! 저희가 이렇게 본 여관을 개점하게 돼서 인사라도 드리고자 이렇게 여러분을 부르게 된 겁니다. 부족하지만 열심히 꾸려가겠습니다!”

??저희 여관은 저희와 인연이 닿은 이들의 고민을 해결하는 곳입니다. 아웃사이더인 저희들이지만, 저희와 인연이 닿았다는 것은 그만큼 절실하고도 어려운 일이 있기 때문이겠죠. 그렇기에 저희들은 그 인연을 소중히 가꾸고, 또한 사람들을 절망에서 꺼내주고 싶습니다.”

??저희와 인연이 닿은 사람의 고민을 해결하는 것이 이 세상이 아웃사이더인 저희들에게 허락한 일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지금까지 여러모로 많은 시간 동안 세상을 떠돌았습니다. 장사도 했고, 정치도 해봤어요. 사람들을 돕기도 했지만 꼭 좋은 결말만 본 건 아니라서 그것이 이 세상의 업을 망치는 것 같았거든요.”

약간은 어려운 이야기라서 여섯 명의 소년, 소녀들은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하고 있었다. 모두가 그녀들이 해온 일이나 처한 상황 같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다들 이해해주시는 것 같아서 기뻐요. 어쨌든 그런 이유로 저희가 여관을 열었으니, 여관의 이름을 공개합니다! 여관의 이름은 오디가 지었어요!”

??조금 단순할지도 모르지만, 웃지 말아주세요.”

오디가 약간 부끄러운 듯 웃으며 식당 입구에 보자기에 싸여진 채 기대어 있던 커다란 판을 들어 올렸고, 나미아가 옆에서 그것을 같이 거들어주었다. 모든 이들의 시선 속에 보자기의 끄트머리를 잡은 나미아가 그것을 벗겨냈다. 그러자 황갈색 목판에 멋진 필기체로 새겨진 이름이 사람들 앞에 드러났다.

「WISH」

“단순하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이곳을 찾는 저희의 ”특별손님??들에겐 이곳은 여관의 이름 그대로 소원을 성취하기 위한 곳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이곳은 보통 여관은 아니겠죠?”

??예, 그렇습니다. 이 이름 앞에는 보이지 않는 이름이 더 있습니다. [환상여관]이라는 이름이에요. 저희와 인연이 닿은 그런 이들은 이 글자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환상여관 「WISH」]라는 이름을 말이죠!”

나미아와 오디는 서로를 바라보며 살포시 미소 지었다. 마법으로 처리를 한 그 간판은 “특별손님”들에게만 보이는 글자가 있을 것이다. 커다랗게 새겨진 「WISH」의 머리글자 위에 있는 [환상여관]이라는 글자가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저희가 문을 여는 여관의 이름은! 소원을 들어주는 [환상여관 WISH]입니다!”

??지금부터 개점하겠습니다!”

두 여성의 목소리가 세상에 둘도 없을 여관의 개점을 알렸다.

Guest. Prologue: 개점―종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