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Guest. Behind: 개점 준비. (1/49)

환상여관 WISH 1권

Guest. Behind: 개점 준비.

아우레스력 1874년, 안스란력 434년 15월 20일.

엘 타칸리스 산맥 경회선 서부 진입로에 있는 상업도시 “프레빌”은 대륙의 상권 절반 가까이를 장악한 “이켈라인상회(商會)”의 본사(本社)가 있는 도시다. 이켈라인상회가 없었다면 오늘의 프레빌도 없었을 거라는 이야기는 이미 겉치레나 농담이 아닌 사실로 분류되고 있었다.

마치 대도시의 시청과도 같은 구조를 하고 있는 이켈라인상회는 7개의 건물이 들어서 있는 가로 변 1마일(약 1,609km), 세로 변 1마일의 터를 잡고 있다. 모르는 사람들은 이곳이 프레빌의 시청인 줄 알고 찾아오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고, 때문에 본사의 모든 건물들은 바깥쪽에서 보이는 벽면에 “이켈라인상회”라는 커다란 간판을 달고 있었다.

그 본사 안에서 남쪽 중심에 위치한 건물은 다른 건물들에 비해 매우 아담한 크기를 하고 있다. 다른 건물들이 5층에서 6층의 규모를 자랑하는데 반해 이 건물은 기껏해야 지붕의 다락을 합쳐 3층 높이였다. 딱 절반 크기였다. 그러나 크기만 보고 속단해선 안 된다. 이 건물은 이켈라인상회의 총수인 나미아 이켈라인과 상회의 모든 결재를 담당하는 총무 오디 이켈라인, 본명은 오디 미아 싸이 이켈라인이 기거하는 건물인 것이다.

그 건물 2층 중앙에는 집무실과 이어진 커다란 침실이 있다. 하얀 망사 위로 힘차게 타오르는 느낌의 불꽃이 수놓아진 베드 커튼(Bed Curtain)의 아래에서 탐스러운 붉은 머리를 늘어뜨리고 잠든 미녀가 있었으니, 그녀가 바로 나미아 이켈라인이었다.

이켈라인상회가 번창함에 따라 얼굴을 내보이는 회장의 미모는 이미 대륙에 알려질 대로 알려져 있는 빼어난 미모였다. 갸름한 얼굴선에 지적인 이목구비를 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표정은 언제나 방긋방긋 웃고 있는 소녀 같았다.

그렇지만 그녀의 겉모습만 보고 그녀를 속단하기는 이르다. 소녀 같은 풋풋함에 성숙한 여인의 요염함이 녹아들어 있는 것이 그녀의 매력이라고 흔히 이야기되곤 하니까. 그러나 세간의 그런 평가와는 상관없이 지금 잠들어 있는 그녀의 얼굴은 세상의 모든 불행과는 관련이 없는 듯한 아기 같은 모습이었다.

뽀얀 피부와 새하얀 시트 위로 제멋대로 퍼져 있는 붉은 머리는 마치 불꽃이 타오르는 듯한 강렬한 붉은빛이었다. 그녀의 미모를 칭송함에 있어 빼놓아선 안 될 것이 바로 이 붉은 머리이다.

찌르륵! 짹! 찌륵!

창가에서 이름 모를 새가 밝아오는 아침을 반기며 재잘대고 있었다. 나미아가 그 소리 때문인지, 아니면 그녀의 생활이 정한 수면시간 덕분인지 서서히 눈을 떴다.

“으음…….”

몇 번 뒤척이던 그녀는 이내 엎드린 자세에서 팔로 몸을 받치고 일어섰고, 상체를 한껏 젖혀서 침대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졸린 듯한 눈을 비비면서 그녀는 온몸을 풀듯 기지개를 폈다.

매끈한 광택을 발하는 실크 란제리는 그녀의 몸에 살짝 달라붙어서 농염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보기 좋게 솟은 가슴, 잘록하게 들어간 허리, 그 밑으로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그녀의 몸을 받친 엉덩이의 조화는 가히 아름답다는 찬사가 아깝지 않을 정도였다.

나미아는 기지개를 쭈욱 펴면서 크게 하품을 했다. 그래도 여전히 잠에 취한 얼굴의 나미아는 작게 하품을 하면서 졸린 목소리로 말했다.

“후아아, 오늘인가?”

한결 밝아진 눈을 반짝이면서 그녀는 미끈하게 뻗은 다리를 움직여 침대 아래로 내려갔다. 다갈색 슬리퍼에 아담한 발을 끼워 넣은 그녀는 머리를 매만지면서 샤워를 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오전 7시. 그녀의 기상시간이다.

샤워를 하고서 그녀가 바스 타월(Bath Towel)로 몸을 가린 채 걸어 나왔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붉은 머리는 반짝이는 물기를 내비치며 위로 틀어 올라가 있었고, 그녀의 새하얀 허벅지는 그녀가 걸을 때마다 나긋나긋하게 움직였다.

화장대 앞에 걸터앉은 그녀는 머릿수건을 풀러 머리를 전부 내려오게 했다. 순간 마치 불로 만들어진 물이 출렁이듯 물기를 머금은 붉은 머리가 아래로 출렁이며 물결쳤고, 나미아는 거울을 통해 그런 머리카락을 보면서 살짝 미소 지었다. 그리고는 짧은 기합을 질렀다.

“야압!”

파르르르륵!

그녀의 몸에서부터 갑자기 새파란 불꽃이 일어나서 그녀의 머리를 감싸기 시작했다. 새파란 불길과 새빨간 머리는 서로가 최적의 파트너인 듯 익숙하게 서로와 어울려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불길이 가시자 그녀의 머리는 어느새 보송보송하게 말라 있었다.

머리를 말리는 방법에 있어서 고금부터 많은 방법이 있어왔지만 그녀와 같은 특이한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머리를 매만지며 잘 말랐다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여자의 화장대 치고는 상당히 가짓수가 적은 병 중에서 하얀 크림이 담긴 병을 들었다.

“아침의 시작은 기초화장으로―! 흐흥!”

나미아가 콧노래를 부르며 얼굴에 꼼꼼하게 로션을 바르는 사이 화장대 앞에 있던 세 개의 빗이 손도 대지 않았건만 움찔거리며 공중으로 치솟더니 그녀의 머리를 빗기 시작했다. 누가 본다면 보이지 않는 시종이 그녀의 머리를 빗고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나미아가 로션을 꼼꼼하게 펴 바르고, 눈썹 정돈과 옅은 색의 립스틱을 바르는 사이 세 개의 빗은 머리 정돈을 끝내고 어느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제자리로 돌아가 있었다.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꼼꼼하게 확인한 그녀는 화장대에서 오른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옷장으로 눈길을 보냈다. 그러자 옷장 문이 저절로 열리면서 하얀 블라우스와 붉은 치마, 그리고 붉은 바탕에 체크무늬가 들어간 조끼가 옷걸이 채로 날아와 침대 위에 놓였다. 곧 옷장 서랍에서도 순백색의 속옷들이 날아와 곱게 접혀진 채로 옷 위에 가지런하게 준비되었다.

그 뒤에 그녀의 침대 오른편에 있던 사이드 테이블 위에 있던 여러 개의 장신구가 옷의 위로 가지런히 놓이게 되었다. 목걸이와 귀걸이 한 쌍, 반지 두 개, 팔찌 두 개와 지름이 약간 굵은 듯한 고리 두 개였다.

그렇게 모든 것을 손대지 않고 준비한 나미아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옷이 얹혀진 침대로 걸어갔다. 옷을 입는 것은 그녀의 손으로 직접 할 일인 것이다.

샤워와 화장, 그리고 옷을 갈아입는 시간은 한 시간 정도였다. 여성이 몸단장을 하고 방문을 나서는 데 걸리는 시간 치고는 짧은 시간이지만 나미아는 쓸데없는 고민으로 시간을 버리는 일은 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8시에 노크소리를 듣게 되었다.

“나미아님, 들어가도 될까요?”

“응! 들어와!”

나미아는 조끼의 단추를 꿰면서 문밖에서 들려온 조용한 목소리에 힘차게 답했다. 약간은 커다란 나미아의 방문이 열리면서 연두색 원피스를 입고 있는 하얀 머리의 여성이 걸어 들어왔고, 그녀의 뒤로 두 명의 메이드(Maid)가 고개를 숙이고 걸어 들어왔다.

“좋은 아침, 오디! 페네디와 샹그렐도!”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페네디와 샹그렐이란 이름은 가진 두 명의 메이드는 커튼을 걷어 햇빛을 맞이하고, 침대를 정돈하는 등 그녀들의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각자 흩어졌고, 나미아는 오디에게로 걸어갔다.

오디는 그녀와 비슷한 키였지만 외모는 훨씬 어른스러운 느낌이었다. 나미아가 소녀 같은 느낌이라면 오디는 좀 더 성숙한 여인의 느낌이었다. 약간은 차갑기도 한 그녀의 외모는 다가가기 힘든 무언가가 존재하는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미아가 다가가자 약간은 고풍스럽기까지 한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어렸다. 오디가 말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응, 잘 잤어. 오디는? 좋은 꿈 꿨나봐?”

“예에, 그냥 예전에 있었던 일을 보았어요. 즐거운 나날이었죠.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요.”

“헤에, 옛날이라. 나도 즐거웠지. 자, 이제 아침 먹으러 가자. 그럼 두 사람은 수고해줘.”

나미아는 오디의 팔을 잡아끌었고, 두 명의 메이드는 일하던 손을 잠시 멈추고서는 깍듯하게 인사했다.

“예, 즐거운 하루 되세요.”

“즐거운 하루 되세요.”

나미아는 그런 그녀들에게 손을 흔들어주고는 오디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나미아의 모습이 사라지자 두 사람은 다시금 손길을 놀리기 시작했다.

창밖에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정원을 하얗게 덮은 눈이 반짝인다. 매우 아름다운 아침이었다.

아침식사는 가볍게 하는 것이 평소 그녀들의 생활이었다. 정확하게는 오디가 나미아에게 맞춘 것이지만 불만은 없었다. 어차피 그녀에겐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따스하고 부드러운 맛의 수프로 위장을 깨운 다음, 갓 구운 빵과 30분 전에 만든 버터, 제철 오렌지로 만든 마멀레이드에 야채샐러드를 먹는다. 그리고 과일 주스 한 컵으로 입가심하는 것이 짧은 아침식사의 끝이었다.

식사 뒤에는 편한 장소로 옮겨 티타임을 즐긴다. 이켈라인상회의 회장과 총무로서의 업무가 시작되는 때가 바로 오전 8시 40분쯤이다. 커다란 괘종시계가 특유의 여유로움으로 추를 움직이고 있었고, 벽난로에서는 가끔 탁탁 튀어 오르는 소리와 함께 장작이 타고 있었다. 창밖의 나뭇가지에선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한 눈이 푸드득 떨어져 내렸고, 하얗게 빛나는 정원의 눈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하아, 아름답네.”

“예에. 어젯밤, 눈이 그렇게 많이 오더니 이렇게 쌓였네요.”

“눈 오는 소리도 조용했어. 마치 자장가같이 잘 잘 수 있었어.”

“저도요. 소록소록 쌓이는 눈 소리가 어찌나 귀엽던지…….”

상회의 업무라기보다도 한담(閑談)에 가까운 말들이었다. 나미아는 진한 복숭아향이 나는 홍차가 맑게 일렁이는 찻잔을 들어 입가로 가져갔다. 오디는 잔을 내려두고서 창밖의 설경(雪景)을 감상하다가 나미아에게 말했다.

“오늘이죠?”

“응, 통보된 날짜는 오늘이야. 아마 우리가 문을 열고 나가면 그때 시작할걸?”

“대체 “그”가 무슨 말을 해올까요? 저희가 했던 일이 분명 그들의 일에는 방해가 된 것 같긴 하지만……. 설마 처벌을 하려는 건 아니겠죠?”

“으응, 아닐 거야. 우린 처벌의 대상자가 될 수 없다는 걸 오디도 잘 알고 있잖아? 아마도 몇 가지 요구사항을 전달하려는 걸 거야.”

“결국은 가봐야 안다는 말이네요? 그곳으로.”

“응, 이거 다 마시면 가자. 오늘 차는 특별히 맛있네?”

나미아의 말에 오디가 살포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움직임에 새하얀 우윳빛의 긴 머리가 살짝 물결쳤다. 발끝까지 내려오는 그녀의 머리는 그녀가 앉아 있는 자리에서 양옆으로 퍼져 베이지색 소파 위에 하얗고 우아한 곡선을 그려내고 있었다.

그녀들이 말한 것은 대체 무엇에 관한 것인가? 그리고 그녀들의 말에 숨은 뜻은 무엇일까? 그녀들이 곧 움직이기 시작하면 그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성지(聖地)라 불리는 장소가 있다.

물질계에서 살지 않는 종족인 성족(聖族)들이 물질계의 존재와 만나기 위하여 특별히 안배한 장소를 일컫는 말이다. 신을 섬기되 인간처럼 신앙을 가지고 섬기는 것이 아니라 직접 신과 접견하고 업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존재들이다.

성족은 낮의 일곱 신을 따르는 종족으로, 그와 반대되는 밤의 일곱 신을 따르는 존재를 사족(邪族)이라 부른다. 이들도 성족처럼 물질계의 존재와 만나기 위해 준비한 장소를 가지고 있는데, 이를 사지(邪地)라 부른다.

성지든 사지든 두 개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곳에 가면 신을 직접 보고 받드는 자들을 만나서 그들의 지혜와 신의 지식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갈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성지와 사지는 모든 마법사들과 현자들, 학자, 지식을 탐구하는 모든 사람들이 가기를 꿈꾸는 장소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가보았다는 사람이 너무나도 드물어 아예 없는 것으로 치부되곤 한다. 그야말로 전설의 장소인 것이다.

그런 “전설”에 따르면 성지든 사지든 그곳에 갈 수 있다는 자격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계시”가 내려온다고 한다. 모월 모일에 심신을 깨끗이 하고 같이 갈 믿음직한 인물 몇 명까지와 함께 문을 나서라는 것이 그 계시이다.

성지에 갈 자격이 생기는 사람들은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같이 갈 친구를 모아 문을 나서 성지에 오른다. 그리고 무한한 지혜와 세계의 이치를 엿보고 돌아와서는 죽기 전까지 위대한 업적을 달성하게 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위대한 업적을 이룬 이들 중에는 그들이 스스로 남긴 비화를 통해 성지에 갔었노라 고백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던 것으로 봐서는 성지의 운용은 단지 전설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게 현재 일반적인 인식이다.

나미아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다고 말하기보다도 그녀의 마법 스승이 성지에 갔었던 사람이었고, 그 사람은 아직도 살아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는 성족과 만난 적도 있었고, 그녀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에는 성족의 그릇이 되었던 하인츠도 있기 때문에 그녀는 성지의 존재를 누구보다도 확신하고 있었다.

“내가 성지에 오게 될 줄은 몰랐지.”

“예상외로 한산한 장소네요?”

“그러게 말이야.”

하얗게 흐르는 뿌연 연기 같은 물결 위로 직경 20야드의 지대가 떠 있었다. 주변은 하얗게 빛나다가 붉게 점멸(點滅)하고, 파랗게 전소(全燒)하는 갖가지 색상의 유희(遊戱)가 펼쳐지고 있었다. 그녀들이 서 있는 곳은 굵은 기둥으로 사방이 둘러싸여 있었고 그녀들 뒤에는 문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건너편에도 문이 있었는데, 아직 열리지 않은 채였다.

“저건 에테르(Ether)인가요?”

“대충 그런 것 같아. 눈으로 보기는 처음인걸! 조금 퍼갈 수 없을까?”

에테르라는 것은 영기(靈氣)를 일컫는 것이다. 존재 자체가 뚜렷하지 않은 물질-이라고 부를 수 있을 지도 의문이다―로 물질계에서는 자연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고 증명된 물질이다. 천사들과 다른 신적 존재들의 육체는 이른바 에테리얼(Etherial)의 상태이다. 그것을 이루는 것이 바로 에테르라는 것으로, 물질로 대표되는 메터리얼(Material)과는 상반되는 의미의 물질이고, 따라서 물질계에 존재할 수 없다.

대충 이런 것을 생각한 오디는 호기심으로 반짝거리는 눈동자를 한 나미아를 점잖게 말렸다.

“그만 하세요. 아마도 여긴 에테르 플레인(Ether Plane)이 아닐까 싶네요. 아스트랄 플레인(Astral Plane)이라고 보기엔 풍경이 너무 단조로워요.”

“에레트 플레인에 물질화(物質化)된 장소가 있단 말이야? 실버 라인(Silver Line)도 없는 걸 봐서는 우리 몸은 메터리얼 바디(Material Body) 같은데? 이거 차원 프로토콜(Protocol)에 위배되는 상황이잖아? 최소한 아스트랄 바디(Astral Body)는 돼야 하지 않겠어?”

“그건 알 수 없네요.”

그녀들은 자신들이 배워온 다차원학(多次元學)에 상당한 무리가 있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녀들은 누군가가 자신들을 부를 때까지 열심히 머리를 굴리면서 생각하고 있게 됐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좀 늦었군요.”

그녀들이 서 있는 반대편 문이 열리면서 훤칠한 키에 매우 서글서글한 인상을 지닌 남자가 허허 웃는 표정으로 걸어 나왔다. 생김새는 인간과 같았지만 그의 몸 주위로 피어나는 오오라(Aura)는 그가 보통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나미아는 생긋 웃으면서 말을 건넸다.

“헤르디스 베올딘. 만나서 반가워요.”

“안녕하세요. 초면이네요.”

“이거, 그 유명한 라이니시스 씨의 아웃사이더(Outsider) 수양따님 두 분을 한 자리에서 뵙게 될 줄이야……. 정말 영광이군요.”

아웃사이더라는 지적에 나미아는 어깨를 으쓱했고, 오디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아웃사이더는 원래 세계에 속하지 않으면서 세계에 머무는 존재를 일컫는 말로 아웃사이더의 경우 신의 뜻과 전혀 닿아 있지 않는 자들이었다. 때문에 이들의 움직임은 성족이나 사족에 의해 면밀히 감시되고, 이들이 일으키는 일은 카르마(Karma)에 속하지 않는 일들이다. 말하자면 세계의 법칙과 어긋나 있는 레니게이드(Renegade)라고 할 수도 있는 자들이 바로 아웃사이더인 것이다.

나미아는 그런 지적에도 불구하고 허리에 손을 올리면서 당당하게 말했다.

“아웃사이더인 우리들을 이렇게 성지까지 불러서 무슨 말씀을 나누실 것인지 참 궁금하네요. 저희가 납득할 만한 이야기를 들고 나오셨겠죠?”

“하하하! 이거, 제가 어지간히도 미움 받고 있는 모양이군요. 하긴 여러분께는 그리 좋은 인상은 아닐 것입니다. 특히 하인츠 씨와 알고 계시면 말이죠.”

“뭐, 안스란 언니하고 하인츠 오빠의 눈물겨운 사랑을 갈라놓은 숙적이니 그럴 수밖에요. 하지만 그건 지금 상관없는 이야기잖아요? 본론으로 들어가죠. 저희의 행동이 어디가 잘못됐다는 것이죠?”

나미아의 질문에 오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들이 이곳으로 불려오게 된 것은 상회가 안정화되고 난 이후 그녀들이 여행을 다니며 벌인 행적들 때문이었다.

그녀들은 전 대륙을 돌며 이켈라인상회의 일을 종종 돕고, 대부분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었다. 길가면 생기는 것이 인연이라고, 그녀들은 자신들의 눈에 보인 불행한 사람을 그냥 지나가지 않았고, 성의를 다해 도와주었다. 사람들은 감사했고, 그녀들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정확하게는 바로 일주일 전에 나미아와 오디의 꿈속에 저 헤르디스 베올딘이 나타나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을 당장 중단하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는 일주일 후에 “성지”에서 나누자며 그녀들을 부른 것이다.

오디는 그들의 결정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헤르디스 베올딘에게 말했다.

“저와 나미아님은 좋은 일을 하고 다녔다고 생각합니다. 생색을 내려는 것은 아니에요. 우린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구해주었고, 불행에 잠긴 사람을 건져냈어요. 배고픈 자에게 빵을 주고, 목마른 자에게 물을 준 것이 그렇게 나쁜 일인가요? 헤르디스 베올딘?”

“맞아. 그게 나쁜 거예요?”

헤르디스 베올딘은 난처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절대 그녀들이 흑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선의로 그런 일을 했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말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게 곤란하다는 겁니다.”

“예? 왜요?”

“그건 무슨 뜻인지 자세히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나미아와 오디는 아까부터 계속 이해할 수 없는 말만 나오는 상황이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대답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그래서 그녀들은 차분한 마음으로 머리를 긁적이는 헤르디스 베올딘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적당히 생각하면서 할 말을 고르고는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이 세계에 속해 있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사실 존재가 알려지자마자 “추방”을 당해도 할 말이 없는 사람들이에요. 하지만 두 분 다 지금의 세계가 아닌 과거의 세계에 속해 있는 분들이기 때문에 이 세계의 본질과는 맞닿아 있죠. 차라리 다른 차원에서 넘어온 사람이라면 강제송환이라도 시킬 텐데, 이건 좀 곤란하단 말입니다. 다른 건 몰라도 “본질”만 맞으니까요. 하지만 처음 존재를 알게 된 당시에는 여러분은 어린아이였거나 단순한 고양이였고, 이 세계에 아무런 영향력도 없었죠. 그래서 처음엔 그냥 내버려둔 것입니다.”

나미아와 오디는 고개를 끄덕였다. “추방” 명령을 내릴 거라면 훨씬 전에 내려졌어야 옳다. 아웃사이더라고는 해도 그들은 최소 한 개 문명기(文明其) 이전에 이 땅에 태어난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녀들이 이해한 것 같아 헤르디스는 말을 이었다.

“에…… 카르마라고 아시죠? 간단하게 말하자면 인연(因緣)으로 생기는 업보(業報)입니다. 저희 성족은 낮의 일곱 신 밑에서 이 카르마를 조정하는 역할을 하고 있어요. 이것을 조정해 한 사람의 운명과 숙명이 결정되죠. 그것은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여러분도 알고 계시지요? 여러분의 아버지인 라이니시스 루 이켈라인 씨의 영혼에 대한 이야기를요.”

“에, 뭐. 아빠가 다 이야기해줬으니까요.”

“다른 세계에서 온 영혼이라는 말은 좀 놀랍지만. 그런데 아버님은 아웃사이더가 아닌가요?”

“좋은 질문입니다. 사실 라이니시스 씨도 원래 카르마에 포함된 존재거든요. 그렇지만 영혼의 근간이 다르니 사실 반만 걸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나머지 반, 저희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여러분이 있는 것이고요. 아웃사이더끼리의 인연이 서로를 모이게 했다고 할까……. 아무튼, 이 카르마는 엄격하게 관리됩니다. 단 하나의 왜곡이라도 생기면 그 개인의 파멸과 동시에 세계에도 영향을 끼치니까요. 그것을 조정하고 카르마를 개인에 맞게 조정하는 것이 성족의 임무입니다.”

나미아와 오디는 처음 듣는 말에 짐짓 놀란 듯한 표정이었다. 헤르디스의 말에 따르면 사람들 사이의 인연이나 운명은 성족에게 있어선 중력 법칙과도 같은 물리 법칙의 하나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인연의 움직임은 물체가 충돌해 작용과 반작용에 의해서 서로 튕겨지게 되는 물리현상과도 같다는 소리다. 다시 말해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나, 또는 정처 없이 걷다가 우연히 운명적 사랑을 만나게 되는 것이 하나의 물리적 현상이라는 말이다.

그녀들의 표정을 흘깃 보던 헤르디스는 계속 말했다.

“그런데 말이죠, 이 카르마라는 게 워낙 섬세해서 말이죠, 아웃사이더가 인사이더(Insider)에게 접촉하기 시작하면 카르마의 흐름이 중단되거나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게 된단 말입니다. 때로는 제멋대로 폭주해서 역류하기도 하죠. 정해둔 법칙이 있는데 그것을 따를 수 없는 다른 요소의 개입이 있으면 한 개인의 카르마가 무너지고, 그것에서 연결된 다른 카르마들도 영향을 받아요. 다시 말해서, 좋을 것 하나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여러분이 상회를 만든다고 했을 때, 저희는 비상체제에 돌입해서 카르마를 수정하고 다녔어요. 몇 십 년 지나니 대부분의 인간들에게 업무를 맡기게 되어서 저희 일도 편해졌긴 했지만요.”

??으음, 이야기를 정리해보면, 저희가 함부로 끼어들고 있다는 건가요?”

??그런 겁니다. 원래는 나름대로의 인연이 생겨서 해결하게 될 일을 여러분이 냅다 처리하고, 또는 그 길이 제대로 된 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원하는 방향으로만 해결하니까 카르마가 멋대로 날뛰게 되거든요.”

??그럼…… 저희가 잘못하고 있었다는 건가요? 예?”

겁먹은 듯한 표정으로 울려고 하는 오디를 본 헤르디스는 급하게 손사래를 치면서 오디를 진정시키고 나섰다.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제 말 끝까지 들으시라니까요. 흠흠. 여러분은 그래도 다른 아웃사이더들에 비하면 훨씬 낫습니다. 왜냐면 악의 없이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난 선행이니까요. 사실 저희도 고민 많이 했습니다. 이대로 가면 여러분들을 추방해야 하는데, 그런 건 바라지 않거든요. 라이니시스 씨가 그것에 분노해서 쳐들어와도 그에게 속해 있던 반쪽짜리 카르마가 벌써 끝나버려서 막을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어차피 드래곤이란 종족이 신에 닿아 있지 않으니까 그렇게 되면 골치가 더 아파지죠. 그래서 저희는 여러분의 이 세계의 거주와 그 선행까지 충족시킬 방법을 생각했습니다.”

??어머, 그래요? 너무 수고하시네요. 폐를 끼쳐드린 것 같아요.”

??정말…이세요?”

헤르디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런 해결책도 없이 나온다는 것은 그야말로 무책임한 일이다. 사실 나미아나 오디의 존재도 그들이 제대로 관리를 못한 카르마의 틈새를 비집고 나온 것이기 때문에 그녀들의 존재에 대해 어느 정도의 책임도 있는 것이다.

??여러분께 하나의 권한을 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예전대로 다른 이들의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권한입니다.”

??그거야 선의의 마음만 가지고 있다면 아무나 다 할 수 있잖아요?”

나미아는 의아스럽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남을 돕는 다는 일은 먼저 선의의 마음과 도울 수 잇는 능력만 가지고 있다면 누구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헤르디스가 말하는 것은 그런 종류와는 다른 것이었다.

??그렇죠. 하지만 여러분이 도와드리게 될 사람들은 저희가 보내드리겠습니다.”

??예? 그게 무슨 소리예요?”

나미아가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저들이 자신에게 어려운 사람들을 보내겠다는 말은…… 그들이 가진 인연을, 카르마를 조작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카르마를 조작해서 정말 손을 댈 수 없거나 일괄처리 하기에는 변수가 많아 손이 많이 가는 사람, 아무튼 여러 가지 도움이 필요하지만 카르마적으로는, 다시 말해 성족의 손으로는 도저히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을 보내겠습니다. 사실 원래라면 이런 사람들에 대해선 신속하게 죽을 숙명을 앞당기는 것이 규칙입니다만, 저희는 이들의 가능성으로 다른 카르마들이 튼실해질 수 있다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여러분께 보내겠다는 것입니다. 카르마가 없는 여러분은 그들에게 전혀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을 테니까요.”

??아하! 그러니까 알기 쉽게 이야기하면 저희에게 손님을 보내겠다는 거군요? 머리 위로는 잔뜩 문제 거리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사람들을. 1년 16개월 480일 하루 30시간 내내.”

나미아는 다소 비꼬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고, 오디는 자중하라는 의미로 그녀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찔렀다. 나미아가 그런 오디에게 왜 그러냐고 묻기 전에 헤르디스는 그녀들의 행동을 점잖게 못 본 척 하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큰 어려움은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능력이라면 말이지요. 꼭 그렇게 어려운 사람만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쉬운 문제일 지라도 저희가 해결하기 곤란한 카르마도 종종 생기니까요. 그런 사람들을 여러분께 맡기는 것입니다. 가급적이면 그들의 고민을 해결하고,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주셨으면 싶습니다.”

헤르디스의 말은 상당한 매력이 있었다. 나미아는 안심하고 사람을 도울 수 있었고, 성족들로써는 그들의 일이 한결 수월해져 이 세계를 운영하는 일이 더 쉬워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궁극적으로는 이 세계에도 좋은 일일 것이다. 때문에 흔쾌히 받아드리려던 나미아는 문득 궁금해졌다. 이대로 이 제안을 거부한다면?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네요. 저희가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는 어떻게 되는 거지요?”

??에…… 가급적 받아들여주셨으면 하지만, 만약 거부하실 경우엔 여러분을 억지로 이 세계에 편입시키거나, 혹은 여러분의 능력을 상당부분 절제하거나, 세계의 밖으로 추방한다든지 하는 어려운 일들이 있습니다. 물론 본인의 의사를 묻지 않고 강제적으로 행하는 일입니다만.”

??헤에, 의외로 과격한 면이 있군요.”

나미아는 제안을 받아들이는 편이 좋겠다고 여겨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생활 기반이자 사랑하는 가족들이 있는 이 세계를 떠나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성족들의 생각대로 그녀의 행동이 제한된다는 점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녀로 인해서 곤경에 빠지다 못해 내린 결론임을 감안한다면 당연한 요구 사항이었다. 그리고 나미아는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바보 같은 사람들과는 달리 당연한 일에는 화를 내지 않았다.

그 제안을 받아들이려던 나미아는 문득 자신과 긴 세월을 함께 해온 사랑하는 가족이자 친구이자 애완동물의 의사도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오디에게 말했다.

??오디, 어떻게 생각해?”

??괜찮다고 생각해요. 카르마 조정이라는 고차원적인 이야기는 이해하기가 어렵지만 어쨌든 저희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으니 조금이라도 짐을 덜게 해줘야죠. 게다가 저희가 일을 받아들이면 계속 이 세계에 있어도 된다는 소리잖아요?”

??헤헤. 역시 오디야. 어쩜 그렇게 나하고 생각이 똑같니? 좋아요, 헤르디스 베올딘. 당신, 그리고 당신네들의 제안을 받아들이죠.”

나미아는 시원스러운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헤르디스의 표정이 한결 밝아지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야아, 다행이네요! 혹시 거절이라도 하셔서 정말 강제력을 동원해야 하는 것인가 싶었습니다. 저희들의 어려운 처지도 이해해주시니 정말 감사드립니다.”

??뭘요. 하지만 조건이 있어요.”

??예?”

안심하고 있다가 갑자기 뒤통수를 맞은 헤르디스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나미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오른손 집게손가락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한 가지만 들어주세요. 저희의 생존권을 보장한다고요. 성족 전체의 이름을 걸고요. 어려운 부탁은 아니죠?”

??아, 물론입니다. 헤르디스 베올딘을 대표하여 성족 전체는 나미아 씨와 오디 씨의 생존권을 보장합니다. 어떠한 경우라도 세계에서 몰아내지 않을 것을 맹세합니다. 이걸로 되었죠?”

??예, 감사합니다.”

나미아는 생긋 웃었다. 이것으로 그녀들이 아무런 이유 없이 이 세계에서 쫓겨나는 일만은 없을 것이다. 헤르디스는 협상이 원활하게 체결되자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말할 수 있었다.

??그럼 가급적이면 빠른 시일 내로, 준비가 되는대로 카르마를 조작해 여러분에게 인연이 닿게 될 사람들을 보내겠습니다. 여러분이 어디에 있든 그들은 필연적으로 여러분을 찾아가게 될 것입니다.”

??아, 그거 말인데요, 최소 3개월 정도만 기다려주실 수 있어요?”

??3개월이요? 무슨 일이시기에?”

나미아는 찰나의 순간, 지금 머리를 스쳐지나간 아이디어를 헤르디스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난 것인데, 여관을 하나 차려서 그곳의 손님으로 받으려고요. 게다가 아무리 카르마를 조작한다고 해도 소문이 퍼지는 게 좋지 않겠어요? 조금 큰 규모의 여관을 만들고, 그곳에 사람들이 오게 하는 거예요. 그리고 당신이 말한 그 손님들은 “특별손님”으로 취급하고요. 예전부터 꼭 숙박업을 하고 싶었거든요.”

??나미아 님, 그런 생각으로 괜찮으시겠어요?”

??뭐, 모자라는 생각은 네가 좀 보태면 되겠지. 아무튼, 괜찮은 생각이잖아?”

“저기, 그러시겠다는 말씀은…… 그 ”특별손님??들에게 비용을 받겠다는 뜻인가요?”

오디는 성족이 정한 카르마에 이끌려 찾아오는 사람들에게도 돈의 개념을 적용시키려는 게 아니가 싶어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경험에 기반하고 있는 그녀의 불길한 예감은 이런 때에는 항상 들어맞고 있었다. 나미아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던 것이다.

??물론이지! 손님이잖아? 손님에겐 돈을 받아야지! 게다가 우리가 술이나 음식에 잠자리를 제공하는 것도 아니고, 인생 설계를 다시 하게 도와주는데 당연히 수고비는 받아야 하잖아? 헤르디스 씨? 그 정도는 받아도 되죠?”

??아, 아하하하! 마, 마음대로 하시길……. 터무니없는 가격만 아니라면 괜찮을 지도 모르겠지요. 아하하하하.”

??에휴…….”

헤르디스는 힘없이 웃었고, 오디는 이마에 손을 얹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자리에서 웃는 사람은 나미아밖에 없었다. 오디의 생각에 신의 업무를 대상으로 돈을 받을 생각을 하는 나미아는 뼛속까지 상인의 피로 가득 차 있을 것만 같았다.

그야말로 천직이었다.

그녀들이 이야기를 끝내고서 “문”을 열고 나오자 그곳은 그녀들의 집이었다.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가 다시 들어온 셈이었다.

??나미아 님, 정말 하실 거예요?”

??여관 말이야? 물론 할 거야. 기왕 할 거면 편하게 하는 쪽이 좋잖아? 생각 같아서는 아빠하고 가까이 있게 “엘 타칸리스의 숲”에 차렸으면 좋겠지만 손님들이 찾아오기 힘들 것 같아. 적당한 도시 골라서 그곳에 여관을 짓고, 손님을 받아야지. 상회도 현재 일선에서 벗어나 있는 상태라서 할 일도 없는데 마침 잘 됐지 뭐.”

??그러시겠다면 준비가 좀 필요하겠군요. 토지에서부터 건축까지. 대부분은 상회에서 해결할 수 있으니까 조금 편해지겠군요.”

??그렇지. 일단 괜찮은 도시를 수배해줄래? 사람들 이동이 많고 치안도가 높은 쪽으로 말이야. 아, 사이에그롭은 너무 더우니까 그쪽은 제외. 대체적으로 유명한 도시를 위주로. 또, 어떤 나라든 그 나라의 수도는 너무 복잡하니까 그쪽도 빼고.”

??예. 후보지는 상당히 좁혀지겠네요.”

오디는 나미아의 말을 들으면서 몇 군데의 후보지를 이미 선정해두었다. 이제 그곳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면 될 것 같았다.

나미아는 오디가 이미 업무 체계로 들어갔다는 것을 느끼고는 자신도 뭔가 할 일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이내 행동의 노선을 바꿨다.

??오늘은 서재에 있을 테니까 일 있으면 불러.”

??예. 그럼 잠시 후에 뵙도록 해요.”

오디는 종종걸음으로 자신의 방―휴식뿐만 아니라 다분히 사무적 용도로 쓰이는 공간―으로 향했다. 나미아는 그것을 보면서 자신의 방도 사무적 기능을 합칠 수 있게끔 만들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가 괜히 변덕으로 사람들 괴롭힐 일이라는 생각에 그냥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다락까지 합쳐서 3층 크기의 약간 큰 사저(私邸)였지만 하인은 별로 많지 않았다. 아침에 나미아의 방을 정리하러 온 두 명이 이곳의 상주 하녀들로서 오디와 나미아의 시중을 드는 사람이다. 다른 하인이나 하녀들은 저택의 오른편에 있는 상회의 기숙사와 손님의 숙소를 겸한 건물에서 필요한 만큼 충당해 쓴다.

나미아나 오디나 둘 다 개인적인 사람을 주변에 두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들에게 귀속된 사람이라고 해야 하녀 두 명과 집사, 요리장뿐이었다. 필요한 인원은 언제든지 옆 건물에서 데려올 수 있으니 청소나 여러 문제도 크게 어려울 것이 없었다.

나미아는 어느새 깔끔하게 청소를 한 복도를 걸어 서재로 향하고 있었다. 나미아의 발 바로 건너편에 있는 서재는 마치 거대 도서관과도 같은 그녀의 아버지 서재에 비교하면 조막만 했지만 그래도 쓸 만한 책은 많이 있었다. 오랜 시간동안 살다보면 금방 지루해지는 일이 잦기 때문에 책을 읽으며 사색하는 것이 취미가 되기 일쑤였다.

그녀가 서재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때마침 페네디와 샹그렐이 서재의 청소를 하고 있었다. 검은 색의 머리가 등줄기의 중간까지 오는 페네디는 마른 걸레로 테이블을 닦고 있는 중이었고, 금발의 단발머리를 한 샹그렐은 사다리에 올라 먼지떨이로 책을 털고 있었다.

??어머, 다들 수고하고 있네.”

??아, 나미아 님. 어서 오세요.”

??어서 오세요.”

나미아는 손짓으로 하던 일 계속하라고 지시를 보냈고, 그녀들은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서는 그녀들의 일에 집중했다. 나미아는 그녀들이 청소하고 지나간 서가에서 숙박업소 경영에 관한 책을 하나 꺼내들었다.

[여행과 숙박의 경제효과를 최대한으로 이끌 수 있는 경영방법론]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 나미아는 그것을 읽기 위해 창가 근처에 마련되어 있는 테이블로 가서 착석했다. 그녀가 책을 펴기 직전, 페네디가 공손하게 물었다.

??마실 거라도 가져다드릴까요?”

??응. 코코아로. 조금 뜨거워도 좋으니까 좀 달게.”

??예, 알겠습니다.”

페네디는 10년이 넘게 모신 나미아의 입맛을 잘 알고 있었기에 나미아는 자세한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 페네디가 나미아의 독서를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사뿐사뿐 걸어서 문 앞까지 다가갔을 때, 나미아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딱!

??그래! 맞아. 페네디, 샹그렐. 너희들 승진해보지 않을래?”

??예?”

??승진……이오?”

샹그렐은 눈을 동그랗게 떴고 페네디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반문했다. 이 집에서 그녀들은 하녀였다. 하지만 그녀들이 다른 하녀들과 질을 달리하는 점이 있다면 나미아와 오디의 “개인용”이라는 점이다. 어찌 보면 두 사람은 이켈라인상회의 최고위의 가장 가까운 측근이 될 수도 있는 점이다.

의미상으로만 따지자면 그렇지만 아무튼 그녀들은 10년 넘게 같은 자리에서 근속했기 때문에 “승진”이라는 개념에 대해 모호할 수밖에 없다. 하인과 하녀가 많아 계급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나미아의 사저에 속한 하녀는 달랑 둘뿐이었기에 나미아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미아는 그런 둘을 쳐다보다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에…… 그러니까, 내가 조만간 개인 사업을 할 생각이야. 여관을 차릴 거거든. 근데 여관이 좀 커서 인력이 많이 쓰일 것 같거든? 그것을 관리할 사람이 필요해. 그리고 여관을 운영하게 되면 내가 여기서 나가게 되고, 그렇게 되면 너희들이 할 일이 없을 거 같아. 그래서 말인데, 너희들에게 플로어 매니저와 홀 매니저의 역할을 맡기고 싶어서 말이야. 경험자에다가, 내가 믿을 만한 사람들이고. 뭐, 어찌 보면 승진이지.”

나미아의 말에 두 사람은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분명히 그녀들이 나미아의 곁에서 오래 근무했고, 방 청소나 정리에 일가견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갑자기 그런 말을 해오면 그 누구든지 당황하기 마련이다.

나미아가 농담을 자주 하는 성격이긴 하지만, 농담치고는 너무나 구체적으로 말하자 그녀들은 도무지 나미아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아, 갑작스러운 거야? 뭐, 간단하게 말하자면 내가 사는 곳을 옮길 건데 너희들도 같이 가겠냐는 말이야. 그런데 그 장소가 어디가 될지 나도 갈피를 잡을 수가 없어서. 레리첸트 내에서 되면 좋겠지만 미하반 제국이나 렌디너스, 토타카 연합일 수도 있어.”

??아아, 그런 말씀이세요?”

??그렇군요. 옮기신다고요?”

??응. 너희들도 너희들의 생활이 있고, 가족도 있잖아? 곧 있으면 새해니까 재계약을 할 때도 됐고. 너희가 좋을 대로 한번 결정해봐. 퇴직한다고 해도 퇴직금은 넉넉하게 챙겨줄게. 걱정하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결정해. 아, 맞아. 아이덴 집사하고 델리스 요리장한테도 그렇게 전해줘.”

기왕이면 자신이 오랫동안 믿고 일을 맡길 수 있었던 사람들을 쓰면 좋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문제였다. 나미아와 그들 사이에 있는 것은 종속 계약이 아니라 근속 계약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싫다고 하면 계약을 끝낼 수밖에 없다. 아쉽기는 해도 각자 자신의 인생이 있으니 자신이 뭐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다만 그녀는 조금 더 자신에게 이로운 결정을 하도록 미끼를 뿌리는 일 만큼은 잊지 않았다.

??아차! 빼먹을 뻔했다. 나하고 같이 가면 일의 규모가 커지기 때문에 그만큼 봉급도 오를 거야. 상여금도 물론이고. 그것에 비례하여 퇴직금도 늘어나지. 일단 너희들끼리 이야기를 해보고서 오늘 저녁쯤에 말해줘. 시간이 부족하다면 더 늘릴 수 있으니까 부담 갖지 말고. 샹그렐은 청소 그만 하고 페네디는 코코아 좀 가져다준 다음에 쉬어도 좋아.”

??예에…….”

??예. 알겠습니다.”

샹그렐은 약간 머뭇거리면서 사다리에서 내려왔고, 페네디는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며 방밖으로 나갔다. 연이어 샹그렐도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한 뒤에 밖으로 나갔다.

나미아는 의자에 앉은 채로 기지개를 핀 다음에 손을 머리 뒤로 돌려 팔베개를 삼았다.

??여관을 하기로 작정한 이상, 지금부터 하는 모든 일이 개업 준비지, 뭐.”

그녀의 앞에 있는 책이 펼쳐진 부분의 챕터는 이런 제목이었다.

[시작부터 철저히! 개점 준비는 이렇게!]

Guest.Behind: 개점 준비 ―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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