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1044화>
휘이이잉-
천문석은 물기를 가득 품은 바람이 불어오는 강을 바라봤다.
20미터 간격마다 세워진 포대.
그 사이사이 위치한 기관총 진지.
하늘을 향해 포신을 고정한 대공 포좌.
날카로운 눈빛의 군인들이 자리한 높게 솟은 제방까지.
분명 처음 보지만 이 모든 것이 너무나 눈에 익었다.
당연했다! 교과서, 텔레비전, 인터넷에서 수없이 봤으니까!
낙동강 전선!
게이트 전쟁에서 대한민국을 지킨 저지선이 눈앞에 나타났다!
김해, 창원으로 전선이 확장됐지만, 낙동강 전선은 여전히 철통같은 경계 태세를 자랑했다!
이 낙동강 전선을 보는 순간, 누구라도 지금 이곳이 어디인지 알 수 있었다.
이제 진실을 알려야 할 순간이다!
천문석은 시선을 내렸다.
쌀 포대 사이에 아기처럼 웅크리고 쿨쿨 잠든, 머리가 깨진 마혁진에게!
“야, 야. 염동 대협 일어나라!”
“으으…… 다 왔냐?”
신음을 흘리며 일어나는 마혁진.
“어, 이제 강 건널 거다.”
“강? 무슨 강? 우리 항구 가는 거 아니었냐?”
마혁진은 자다 깬 멍한 얼굴로 주위를 돌아보다가 강을 보고 눈을 끔뻑였다.
“어, 왜 낙동강 전선이……? 아, 꿈꾸고 있구나. 더 자자…….”
다시 쌀 포대 사이에 웅크리려는 마혁진.
천문석은 진지한 얼굴과 목소리로 말했다.
“꿈 아니다. 놀라지 말고 들어. 여기 낙동강 전선이다.”
“뭔 헛소리를, 낙동강 전선에 군인이 배치된 건 20년 전인데…… 시바…… 그땐 내가 이태성 새끼보다 잘나갔는데…….”
마혁진은 좋은 시절을 꿈꾸는 사람처럼 웃으며 눈을 감았다.
마혁진은 1세대 헌터. 게이트 전쟁 때는 1세대 헌터들의 최전성기였다.
천문석은 좋은 시절을 꿈꾸며 잠들려는 마혁진을 툭툭 치며 외쳤다.
“야! 진짜야! 얼른 일어나!”
이때 트럭 운전석에서 외침이 들려왔다.
“바로 바지선 탈 건데 괜찮지?”
“뭐, 바지선?!”
번쩍 눈을 뜬 마혁진은 반사적으로 일어나 주위를 둘러봤다.
트럭, 자동차, 손수레, 자전거가 가득한 강변!
강변을 향해 다가오는 대형 바지선!
대형 바지선이 떠 있는 강 너머 높게 솟은 제방과 그 위에 줄줄이 이어지는 진지!
낙동강 전선!
“낙동강 전선! 저 진지, 저 바지선! 진짜 낙동강 전선이잖아! 야,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남일도였잖아?! 설마, 내가 잠든 사이에 낙동강 전선에 왔다고?!”
경악한 마혁진이 외치는 순간.
천문석과 조수석 창문으로 상체를 내민 노신부의 눈이 마주쳤다.
“자네 동료 괜찮아? 혹시……?”
손가락을 들어 머리 위에서 움직이는 노신부.
‘제정신이 아닌 거 같은데?!’
노신부의 마음의 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천문석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멀쩡합니다. 그냥 부산에 돌아온 게 반가워서 그래요. 바로 바지선으로 이동하면 될 것 같습니다.”
“알았어. 야, 선장 나다! 바짝 붙여! 트럭이랑 뒤에 오리배 악어도 실어야 한다!”
“와! 이게 뭐야? 악어?! 아니, 어디서 이런 걸 잡아 오셨어요? 신부님 대박 터지셨네요!”
깜짝 놀란 선장의 외침과 함께 트럭과 오리배 악어는 바지선에 실려 낙동강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트럭 위에선 마혁진의 경악한 외침이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저 포대, 진지, 유개호!”
“시바 군인들까지!”
“어, 어?! 저 섬! 을숙도?!”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진짜 낙동강 전선이라고?”
“꿈이 아니라고? 진짜라고?!”
마혁진은 미친놈처럼 자신의 뺨을 때리며 외쳤다.
이 기괴한 모습에 바지선에 탄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뭐야? 지방에서 내려온 건가?”
“얼굴이랑 몸에 개고생한 흔적이 보니 서울에서 왔네!”
“서울에 아직도 남은 헌터가 있어?”
“그 뭐야? 무슨 게임하는 애들이 거점 유지 중이잖아?”
“하, 촌놈. 부산 와서 깜짝 놀랐나 보네. 하하-.”
마혁진의 모습에 웃음을 터트리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
“야, 야! 진정해!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잖아!”
천문석은 마혁진의 옆구리를 찔렀다.
순간 빙글 몸을 돌려 말을 쏟아 내는 마혁진.
“야, 새꺄! 이게! 이게! 낙동강! 부산!! 게이트 전쟁!”
이제는 마혁진의 맥락 없는 외침을 바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래 맞아. 여기 게이트 전쟁 터진 낙동강 전선, 부산이다. 확인 끝냈어.”
천문석은 힐끗 주위를 돌아보고 목소리를 낮춰 말을 이었다.
“남일도 던전 기억나지? 우리 그 던전에 들어온 거다.”
“무슨 구라를! 과거 대한민국이 던전이일 리가 없…….”
마혁진이 반사적으로 외치는 순간.
천문석은 강 너머를 가리켰다.
“…….”
마혁진은 자신도 모르게 뒤를 돌아봤다가 얼어붙었다.
아무리 현실을 부정해도 소용없었다.
바로 눈앞에 철통같은 경계 태세를 유지 중인 낙동강 전선이 있었으니까!
천문석은 쐐기를 박았다.
“여기, 2004년 대한민국 부산이다.”
“으으윽- 의뢰를 받으면 안 됐는데! 그냥 보자마자 튀는 건데! 으아악! 이런 개 같은……!”
마혁진은 깨진 머리를 붙잡고 주저앉아 탄식을 쏟아 냈다.
“야, 걱정할 거 없어! 나한테 계획이 있다!”
“시바! 그놈의 계획을 따르다가 이 지랄이 터졌는데! 뭐 계획?!”
“내 계획 말고 다른 방법 있냐? 아, 그렇지. 더 쉬운 방법 있네! 16년 존버 하면 되겠다. 그렇지?”
“……!”
분노로 파르르 몸을 떨며 눈에서 섬광을 쏟아 내는 마혁진.
천문석은 씩 웃으며 그 시선을 받아 냈다.
한참 후 마혁진이 입을 열었다.
“……계획이 뭔데?”
“이게 바로 내 계획이다!”
천문석은 손을 내밀어 활짝 펼쳤다.
“회중시계?”
마혁진이 황당한 얼굴로 묻는 순간.
천문석은 바로 고개를 흔들었다.
“이건 보통 회중시계가 아니다. 요기 용두, 버튼 2개 보이지? 이거 누르면 남일도로 돌아갈 수 있다!”
“뭐?! 야, 미친놈아! 그걸 먼저 말했어야지! 당장 눌러!”
“야! 사정이 있어. 피치 못할 사정이……!”
천문석은 잽싸게 회중시계를 숨기고 아련한 눈빛, 고뇌 어린 표정으로 기절한 장철 헌터, 바지선, 낙동강 전선. 그리고 가까워지는 부산을 바라봤다.
‘먹혔나?’
힐끗 시선을 보내는 순간.
단숨에 돌아가는 상황을 깨달은 마혁진.
‘사기다! 이 새끼가 또 구라를 치고 있다!”
마혁진은 버럭 소리쳤다.
“야, 이 새꺄! 너 또 무슨 구라를 치려고!”
“아니라니까! 이번엔 진짜라고!”
“진짜면 그거 눌러! 당장 누르라고!”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다니까!”
“그러니까 그 사정이 뭔데?!”
“말할 수 없다니까!”
“그러니까 그 말할 수 없는 사정을 말해야 납득 할 거 아냐!”
“야! 말할 수 없는 사정을 말하면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아니게 되잖아!”
‘이 또라이 새끼!’
같은 말을 무한으로 반복하는 미친놈!
당장이라도 염동포탄을 날려 보내고 염동력장으로 쥐어패고 싶었다!
그러나 그 결과가 눈에 선했다.
신동대문 광장에서 처음 깃발을 꽂은 이후 수없이 당했다!
나무막대기로 쿡쿡 몸을 찔러 각성력을 봉인하고!
김태우 대령과 2대1로 싸웠다가 사막에 떨어져 개같이 구르고!
열사의 사막에서 재회했다가 페이크 섬광탄에 낚여 정신줄을 놨고!
몇 시간 전에도 염동력장을 뚫고 날아온 돌멩이에 뒤통수가 깨졌다!
어떻게 가능한지 짐작도 가지 않는 황당한 기술들!
이 녀석과 붙으면 언제나 결말은 하나였다.
그냥 패배도 아닌 처절한 패배!
그렇다. 어이없게도 눈앞의 의뢰인! 헬스장 강철봉을 등에 짊어진 반쯤 돌은 의뢰인은 자신보다 강했다!
‘시바시바! 왜 이런 미친놈이랑 엮여서는!’
너무나 후회됐지만, 한국으로 돌아갈 방법은 이 녀석의 계획뿐이다.
마혁진은 끓어오르는 울화를 삼키며 물었다.
“누르면 돌아가는 건 확실한 거냐?”
“아주 아주 높은 확률이다!”
“높다고?! 대략 몇 퍼센트인데?! 정확히 숫자로 말해. 한 80퍼센트?”
“……퍼센트.”
“……몇 퍼센트라고?”
“50퍼센트.”
“…….”
긴 침묵 후 마혁진은 다시 확인했다.
“……50퍼센트? 5할? 그러니까 돌아갈 가능성이 반반이라는 거야?”
“……어쩌면 51%일지도 몰라.”
“야, 이 미친! 개 같은! 결국, 될지 안 될지 모른다는 거잖아!”
“야, 긍정적 마인드! 긍정적 마인드를 유지해 우리는 할 수 있다!”
이 순간 마혁진은 폭발했다.
“미친 새끼! 또라이 새끼! 빌어먹을 긍정적 마인드! 여기서 끝장을 내자! 으아아악-.”
마혁진은 괴성을 터트리며 달려들었고.
천문석은 잽싸게 오리배 악어로 도망쳤다.
“멈춰! 새꺄! 멈추라고!”
“야! 합리적으로 생각해! 어쩌면 52% 확률일지도 몰라!”
“으아악-! 죽어! 죽으라고! 이 미친놈아!”
천문석과 마혁진이 오리배 악어 위에서 쫓고 쫓길 때.
운전석의 드라이버는 힐끗 사이드미러로 이 모습을 보며 말했다.
“할배. 쟤들 좀. 아니 아주 많이 이상한데? 진짜 보육원에 데려가려고?! 내 촉이 쟤들 되도록 멀리하라고 말하는데!”
“당연하지!”
조수석의 노신부는 번뜩이는 눈빛으로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마수 찢어발기는 거 봤잖아? 원래 헌터는 제정신이 아닐수록 강자다! 그리고 강한 헌터는 따라만 다녀도 콩고물이 우수수 쏟아진다. 이렇게 말이지.”
품 안으로 쓱 들어갔다 나온 손.
노신부의 손에는 하얀 돌멩이가 놓여 있었다.
“마석? 웬 마석이……?”
“아까 잡은 트롤 마석이다!”
“설마! 그 갈가리 찢긴 트롤 마석?! 미쳤어? 헌터 앞에서 마석을 슬쩍했다가 걸리면……!”
드라이버가 경악하는 순간.
노신부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흐흐흐- 이거 말하고 꺼내 온 거다! 저기 젊은 헌터 통이 장난 아니게 커! 물욕이 없다니까! 슬쩍 운만 뗐는데! 그냥 다 가지래! 금련산 애기 무당이 서쪽에서 귀인을 만난다더니 진짜였어! 저 헌터들, 하늘이 보내 주신 귀인이다!”
하하하하하-
노신부가 통쾌한 웃음을 터트릴 때.
“물욕이 없는 헌터? 이게 말이 되는 거야?!”
부산 전술 운전단 드라이버는 황당한 얼굴로 마석을 바라봤고.
“시바! 의뢰를 받으면 안 됐는데! 미친 재앙 덩어리! 이게 몇 번째야! 으아악-.”
마혁진은 아득한 절망감에 절규했으며.
“야, 긍정적 마인드! 따라 해라! 할 만하다! 우리는 할 수 있다!”
천문석은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듯이 같은 말을 외쳤다.
2004년 늦은 가을.
천문석과 마혁진, 장철 헌터는 낙동강 전선을 지나 부산으로 들어갔다.
* * *
구불구불 비탈길을 한참을 올라와 커다란 철문을 지나 도착한 공터.
트럭과 오리배 악어가 멈추고 노신부가 조수석에서 뛰어내려 흐뭇한 얼굴로 트럭 짐칸을 바라봤다.
시장을 거쳐 오며 트럭 짐칸에 가득 실린 쌀 포대 10개가 사라졌다.
대신 치약, 비누, 칫솔, 세제, 비누, 핫팩 같은 생필품과 겨울옷, 베개, 담요, 솜이불이 산처럼 쌓였다!
이번 호남행 한 번에 겨울나기 준비가 반쯤 끝났다!
트럭에 가득 쌓인 짐을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휘이-
이때 휘파람 소리와 탄성이 들려왔다.
“와! 교환 비율 뭐야? 평소 2배? 아니 3배는 더 받은 거 같은데?!”
운전석에서 내린 드라이버.
“봤냐? 내가 대박 터질 거라고 했잖아? 지금 정부에서 쌀을 안 풀어서 쌀값이 완전 미쳤어! 흐하하하-.”
노신부는 통쾌하게 웃으며 오리배를 향해 외쳤다.
“다 왔어! 여기 우리 성당 겸 보육원이야!”
순간 오리배를 사이에 두고 쫓고 쫓기던 천문석과 마혁진이 멈췄다.
“……휴전?”
“……휴전.”
쿵-
천문석과 마혁진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고 오리배에서 뛰어내렸다.
노신부는 성큼성큼 걸어와 산을 등지고 선 3층 벽돌 건물과 활짝 열린 정문을 가리켰다.
“환영하네. 여기가 우리 성당 겸 보육원이야. 어때 전망이 끝내주지?”
문득 고개를 들자 3층 벽돌 건물에 붙은 빛바랜 현수막이 보였다.
[서울대성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