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1027화>
남일도 남동쪽 고지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산 중턱에 건축 중인 건물 옥상.
오색으로 반짝이는 후드티를 입은 헌터가 난간에 앉아 한숨 쉬고 있었다.
“하- 심심하네.”
이 헌터가 태풍이 핵, 천문석을 남중국으로 불러들인 암살검 한경석이었다.
“아직도 던전 고정은 멀었나?”
지이익-
한경석은 후드를 끝까지 올리고 난간 너머로 몸을 내밀었다.
파스스슥-
공기 중에 스며들듯 전신이 흐릿해지고 몸이 거꾸로 떨어졌다.
떨어지는 몸이 뻥 뚫린 창문을 스쳐 지나가는 순간.
피피피피핏-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투명해진 한경석의 몸이 공간을 연속으로 뛰어넘어 이동했다.
뻥 뚫린 창문, 자재가 널린 공간을 단숨에 뛰어넘어 위장 벽 위에 서자 보였다.
물속에서 수면을 바라보듯 빛이 일렁이는 바위!
그리고 그 바위에 잔뜩 연결된 기계장치와 심각한 얼굴로 대화 중인 연구원들이!
“……여전히 고정이 안 되고 있습니다.”
“고정이 안 되는 걸 넘어 엉뚱한 장소랑 이어지려고 합니다.”
“이럴 리가 없는데 혹시 입력 좌표에 오류가 있는 건……?”
“몇 번이나 확인했습니다. 고산 마을과 일치합니다.”
“혹시 이 던전, 무림 던전이 아닌 거 아닐까요?!”
“고산 마을 무림 던전과 고유 파장 99.999% 일치해 그럴 리가 없잖아?”
“혹시 그 추적기 때문에 오류가 생긴 거 아닐까요?”
“대표님이 가져오신 그 추적기? 그건 유도 좌표로 결론 났잖아?”
“그것 말고는 다른 변수가 없으니 그 추적기로 유도해 보는 게 어떨까요?”
“팀장님! 그러다 고유 파장이 비틀리면 끝장입니다! 차라리 재금 연구소를 부르는 게…….”
……
장강 연구소의 연구원들은 빛이 일렁이는 바위를 둘러싼 채 열띤 논쟁을 이어 갔다.
그러나 이 열띤 논쟁은 어제와 판박이처럼 똑같았다.
분위기를 보니 바로 감이 왔다.
‘오늘도 텄다!’
한경석은 소리 없이 몸을 돌려 연속 점멸.
피피피핏-
창문 밖으로 나오는 즉시 외벽, 난간, 철골 구조물을 거쳐 옥상 전파탑 꼭대기에 섰다.
탁 트인 전파탑 꼭대기에 서자 지난 며칠의 기억이 떠올랐다.
후식이 삼촌의 레이드 아이템을 잠시 빌려 친구에게 줄 골드바를 제련하고.
장민 언니의 의뢰를 받아 도착한 남중국 푸젠성 푸저우시.
푸저우 창러 국제공항에 내리자마자 바로 민장 호텔로 이동해 숙박했다.
그리고 지시한 장소로 이동했을 때 자신을 기다리는 건 투어 가이드와 단체 관광객 무리였다.
‘분명 뭔가 잘못됐다!’
즉시 빠져나오려 했으나 이미 단체 관광객 아주머니들에게 붙잡혀 ‘어, 어?!’하다가 관광을 하게 됐다.
푸젠성 문화 탐방 코스!
먹자골목, 라텍스 전문점, 우롱차 상점, 한식 식당으로 이어지는 단체 관광 그 자체!
‘뭐지, 지금 내가 뭘 하는 거지?’
혼미해진 정신으로 가이드를 따라 하루 종일 푸저우 시가지를 관광한 결과.
자신의 손에는 라텍스 베개와 우롱차 같은 관광 상품이 하나 가득 남겨졌다.
그리고 장민 언니의 웃음기 가득한 전화가 걸려 왔다.
‘관광은 잘했니?’
황당함에 말을 잇지 못할 때 진실을 들었다.
‘여행사, 호텔 전부 동선을 가리기 위한 위장 사업체야. 목적지로 이동할 유람선으로 안내해 줄 사람을 보낼게.’
그리고 호텔 직원으로 위장한 장강 유통 직원의 안내를 받아 유람선을 타고 민장강, 남중국해 연안을 거쳐 도착한 곳이 이 섬이었다.
남중국 푸젠성 푸텐 앞바다의 섬, 남일도.
그리고 이곳 남일도에는 ‘무림 던전’. 아니, 보다 정확히는 무림 던전으로 고정 중인 던전이 있었다!
자신이 할 일은 던전을 고정할 때 발생할지도 모르는 위험을 대비하는 것!
즉, 던전 입구가 있는 이 건물에서 대기하는 것이었다!
남일도는 아직 마수와 몬스터가 정리되지 않은 섬!
처음에는 바짝 긴장했지만, 곧 깨달았다.
이곳에서 자신이 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문득 고개를 들어 탁 트인 전파탑 주위를 돌아보자 느껴졌다!
타타타탕-
몬스터를 사냥하는 대구경 마탄 총성!
우드드드득-
나무가 줄줄이 부러져 울창한 숲에 길이 뚫리고!
콰르르르르릉-
수십 대의 덤프트럭이 바위를 쏟아부어 항구를 만들고 있다!
이게 끝이 아니다.
마수와 몬스터를 정리한 요충지마다 W. S. 인더스트리의 앵커를 박아 넣어 안전지대를 만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앵커 작업이 끝나는 순간, 지금 자신이 서 있는 전파탑과 요충지에 박힌 앵커를 잇는 마력 회로가 작동한다.
광범위 은폐 마력장!
은폐 마력장이 펼쳐질 범위는 남일도 남동쪽 해안 일대!
직경 1km가 훌쩍 넘어가는 지역이 안전지대 된다!
대구경 마탄에 앵커, 은폐장을 만들 마력 회로. 그리고 은폐 마력장을 유지하기 위해 소모될 정제 마석까지.
장강 유통의 대표 장민 언니는 어지간한 대기업, 대형 길드에서도 엄두를 못 낼 엄청난 예산과 인력을 한국도 아닌 남중국의 섬에 쏟아붓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 뚫고 있는 던전은 그냥 던전이 아닌 인위적인 각성자를 만들어 내는 각성 스팟, 무림 던전이니까!
장민 언니의 추진력과 막대한 예산 덕분에 무림 던전이 사라진 지 1년도 지나지 않아, 새로운 무림 던전이 일사천리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모든 것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딱 하나!
아직도 던전 고정이 안 됐다는 사실만 제외하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자신은 이 건물에 발이 묶였다!
한경석은 전파탑 첨단을 한발로 디딘 채 안테나를 잡고 빙글빙글 돌았다.
나무, 헌터, 숲, 도로, 중장비, 언덕, 산, 앵커, 계곡, 바다, 항구, 컨테이너선…….
회전하는 몸을 따라 휙휙 지나가는 남일도의 풍경이 눈에 박혀 들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곳에 정신없이 일하는 헌터, 용역, 보안팀, 사람들이 있었다.
자신만 빼고 모두가 열심히 움직이고 있었다.
“심심하다.”
자신도 모르게 말하는 순간.
휘이이잉-
소금기 가득한 바람이 불어오고 빙글빙글 회전하던 몸이 북동쪽 바다를 향해서 뚝 멈췄다.
탁 트인 남중국해를 보는 순간 그 너머에 있는 것들이 떠올랐다.
동중국해, 남해, 제주도, 대전, 서울. 그리고 옥탑방.
그렇다. 저 바다를 지나 위로 쭉쭉- 올라가면 옥탑방이 나온다!
생각만으로도 머리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자전거 트랙이 그려진 옥상.
옥상 곳곳에 놓인 화분에서 자라난 울창한 나무.
울창한 나무에 붙어 있는 사슴벌레와 황금 풍뎅이.
황금 풍뎅이가 원을 그리는 나무 아래 놓인 커다란 평상.
평상 아래 시원한 그늘에 잠든 강아지.
평상 위 따뜻한 햇살에 잠든 고양이와 거북이.
불쑥 튀어나왔다가 불쑥 사라지는 하늘다람쥐.
그리고 이 옥상 한쪽에 집이 있었다.
언제나 씩씩한 한우를 좋아하는 특급 헌터.
흐흐흨- 음흉하게 웃으며 팔짱을 끼는 세연이.
피곤한 모습으로 ‘왔냐?’ 손을 흔드는 천문석.
친구들.
한경석은 어느새 후드를 걷고 웃는 얼굴로 바다 너머 친구들을 생각했다.
“친구는 골드바를 잘 받았을까?”
“선인장은 잘 자라고 있겠지?”
“후식이 삼촌은 빡쳤겠지?”
지금까지의 경험으로는 4주는 숨어 있다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무림 던전이 고정되고 그 안의 거점 확인까지 끝나면 의뢰비를 받기로 약속했다.
장민 언니에게 받을 의뢰비면 후식이 삼촌의 레이드 아이템을 모두 되찾을 수 있다!
당당히 서울로 돌아갈 수 있다!
문제는 연구원들은 여전히 헤매고 있다는 것!
하지만 장강 유통 대표 장민 언니의 인맥은 헌터 업계 전체에 뻗어 있다.
리미트는 오늘 자정까지!
그때까지 무림 던전 고정에 실패하면 재금 연구소와 W. S. 마력 공학 연구소의 지원을 받기로 이야기가 끝났다.
두 초거대 기업의 지원을 받으면 무림 던전 고정은 순식간이다!
“친구들 조금만 기다려! 선물 잔뜩 가지고 돌아갈 테니까!’
한경석은 서울이 있는 북동쪽 바다를 향해 크게 손을 흔들며 외쳤다.
그러나 한경석의 친구, 천문석은 북동쪽 바다 너머 서울에 있지 않았다.
천문석은 최고 속도로 민장강으로 지나 남중국해 해안선을 질주하고 있었다.
혼자가 아니라 강풍과 폭우를 동반한 태풍처럼, 남일도를 난장판으로 만들 무리를 줄줄이 끌고!
그리고 그중 세 그룹은 이미 남일도에 도착했다.
* * *
마혁진과 칠성파 조폭 헌터들은 타깃이 남일도를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항구를 감시하고 있었다.
감시는 어렵지 않았다.
남일도 유일의 항구는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작았고, 정박하는 배도 거의 없었으니까.
그러나 어느 순간 배가 줄줄이 모여들고 헌터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뭔가 일어나고 있구나!’
직감한 순간 마혁진은 바로 명령했다.
“항구 밖으로 빠져나가는 사람들은 철저히 감시한다! 타깃이 절대 밖으로 새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
타깃이 남일도를 빠져나가는 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마혁진과 칠성파 조폭 헌터들이 남일도 항구를 봉쇄하고 있을 때.
장철 헌터는 남일도 남동쪽 무림 던전 현장으로 느긋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후식이 조카, 한경석이 보안 책임자라고? 하- 그 녀석 아직도 오빠 이름을 쓰는 거야?”
장철 헌터는 귀에 익은 이름에 헛웃음이 터졌다.
갑작스럽게 퍼진 ‘무림 던전’ 소문에 깜짝 놀라 다급히 남일도로 움직였지만, 곧 깨달았다.
남일도에 새로운 무림 던전을 뚫고 있는 건 자신의 동생 장민이다.
평범한 학생이던 장민은 불과 20년 만에 장강 유통이랑 헌터 업계 수위의 재벌 그룹을 세웠다.
자신과 이태성 길드장, 재금 그룹 박혁 이사의 도움이 있었지만 처음 몇 년일 뿐.
장민은 그 자신의 능력으로 최고 등급 아이템과 마도구, 원자재 유통을 장악했다.
그 결단력과 추진력, 치밀함과 거미줄 같은 인맥은 헌터 업계의 괴물들과 정·재계의 능구렁이들을 압도했다.
그런 장민이 한국도 아닌, 푸젠성 남일도에 무림 던전을 뚫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남중국 최고위층과 연결됐다는 걸 의미한다.
그리고 장강 유통에서 남중국으로 보낸 엄청난 규모의 정품 마탄을 생각하면 연결된 최고위층이 누구인지 바로 감이 왔다.
곧 남중국 연방 총통이 될 천검 이세기!
무림 던전의 소문이 어디서 어떻게 시작됐는지 모르지만, 장민의 전화 한두 통이면 간단히 해결된다.
즉, 무림 던전 현장에 준비된 보안 회선으로 서울에 있을 장민에게 연락하는 즉시 무림 던전 소문은 남일도를 비껴가고 해프닝으로 끝난다.
“하- 괜히 정신없이 달려왔네.”
피식 헛웃음을 터트릴 때 산 위로 삐죽 솟은 전파탑과 이 전파탑 꼭대기에서 안테나를 잡고 빙글빙글 회전하는 헌터가 보였다.
아지랑이 지듯 일렁이는 형상.
그러나 얼핏 보는 순간 누구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최후식 조카, 보안 책임자 암살검 한경석이다.
“저 녀석 정말 많이 컸네? 지금 몇 살이더라. 스물셋? 스물넷? 쟤가 세린이 또래였으니까…….”
무심결에 말하는 순간 두근- 심장이 크게 한번 뛰고 발걸음이 멈췄다.
장철은 자신도 모르게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을 보고 있었다.
젊은 부부와 교복을 입은 학생 가운데 있는 아이.
커다란 곰 인형을 안고 환하게 웃는 장세린.
“…….”
수많은 던전을 헤맸지만, 결국 게이트 사건을 재현하는 한국으로 이어지는 던전은 찾을 수 없었고, 세린이를 다시 만나는 건 실패했다.
생각만으로도 심장이 무겁게 뛰었다.
그러나 장철은 이제는 엷게나마 미소 지을 수 있었다.
지금 자신의 손에는 증거가 있다.
곰곰이를 꼭 안은 세린이가 아빠, 엄마, 고모와 함께 환하게 웃고 있는 가족사진.
다시 볼 수 없는 것은 너무나 아쉽지만, 이 가족사진만으로 만족할 수 있었다.
이 가족사진은 세린이가 곰 인형 곰곰이에 담아 보낸 보물.
세린이가 엄마, 아빠, 고모와 함께 웃고 있다는 증거였으니까.
장철은 문득 하늘을 바라보며 진심을 담아 말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세린이 또래 경석이가 매달린 전파탑, 신 무림 던전이 있는 건물로 걸어가며 너무나 간절하여 차마 하지 못한 말을 삼켰다.
‘그래도 다시 한번 안아 줄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