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967화>
천문석이 좌석에 기대 편안히 잠들고.
파티마가 와인 잔을 기울이고 있을 때.
같은 비행기 일반석에선 커다란 외침이 울려 퍼졌다.
“지나갑니다! 잠시만요! 좀 지나갈게요!”
드르르륵-
160 남짓한 키에 배낭을 멘 20대 초반의 여성.
신분을 위장한 김태희 대령은 좁은 비행기 통로로 캐리어를 간신히 끌며 외쳤다.
비행기 곳곳에선 불만 어린 외침이 들려왔다.
“웬 헌터가 이렇게 바글바글해?!”
“요새 비행기는 입석도 받는 거야?!”
“수화물 제한 있지 않냐?”
“화물기도 아니고 뭔 짐이 이렇게 많아?!”
“창가 내 자리다! 썩 꺼져라!”
“어, 내 좌석이 맞는데?”
“맞아. 내가 창가 좋아하거든 비켜!”
“하, 이 또라이 새끼가!”
……
곳곳에서 고함이 터지고 멱살잡이를 하다가 돌연 머리를 맞대고 즉석에서 헌터 팀을 구성했다.
비행기가 아닌 사냥터로 출발하는 게이트 거점 도시 정기 버스 같은 분위기!
“앞에 다리 좀 치워! 주세요!”
“지나갑니다! 지나간다고요!”
드륵, 드르륵-
한 걸음 나아가기 위해 목이 터져라 세 번, 네 번 외쳐야 했다.
김태희 대령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평소 같으면 벌써 문화재를 꺼내 예의를 가르치고 쥐어박았을 멍청한 헌터 놈들!
하지만 지금 자신은 신분을 숨기고 가짜 최후식, 알바를 추적 중이었다!
여기서 소란을 일으켰다가 비행기에서 쫓겨나기라도 하면?!
상상만으로도 눈앞이 아찔해졌다.
이 헌터들과 자신은 처지가 다르다.
휴가를 핑계로 무단으로 부대를 이탈한 상황!
공항에 발이 묶였다가 뒤를 쫓아온 국가 헌병대에 걸리기라도 하면 끝장이다!
당장 냉기 지대 유적 발굴대에 처박혀, 6개월 동안 곰고기나 씹으며 얼어붙은 땅에 곡괭이질을 해야 할 거다.
지금 김태희 대령이 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참을 인(忍)! 인인인인인!’
김태희 대령은 마음으로 되뇌며 다시 외쳤다.
“짐 좀 치워 주세요!”
“지나갑니다!”
드륵, 드르륵-
외침 한 번에 한 걸음!
마치 고행하듯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는 김태희 대령,
그런 김태희 대령의 귀로 주위에 가득한 헌터들의 외침이 박혀 들었다.
“……푸젠성에서 대박이 터진다니까!”
“미리 자리 잡은 대형 길드랑 조직이 모조리 먹는 거 아냐?”
“답답하긴! 천검이 한번 쓸고 지나가면 최상급 몬스터, 재앙급 마수, 거대 괴수들이 줄줄이 갈려 나가! 마경에 도로가 생길 정도다!”
“맞아! 우리는 그냥 그 뒤를 따라가면서 주워 먹기만 하면 된다! 게다가 그게 끝이 아니지!”
“마경이 클리어되고 생겨날 광산, 던전, 사냥터 수십 개! 아니 수백 개!”
“그 사냥터 하나만 먹어도 초대박이 터지는 거다!”
“지금 남중국에서는 매일매일 ‘천검 로또’가 터지고 있다!”
“강서, 호남, 사천, 운남, 귀주! 천검이 지나가는 지방마다 대박 치는 헌터들이 쏟아지고 있어!”
“대형 길드 놈들이 다 해 먹는 한국과는 달라. 지금 남중국은 기회의 땅이다!”
“내 동생이 지금 선발대로 넘어갔는데! 마석과 부산물을 쓸어 담고 있어!”
“사냥터, 던전이 수십 수백 개씩 생겨나서 지금, 헌터 모은다고 난리다!”
“지금 남중국은 머릿수만 채워도 사냥터를 먹는 건 일도 아냐!”
순간 정신없이 말을 쏟아 내던 헌터들의 입이 멈추고 눈빛이 변했다.
김태희 대령은 헌터들의 생각을 들여다보듯이 짐작할 수 있었다.
헌터라면 누구나 사냥터를 소유한 길드에 소속되기를 바란다.
안정된 사냥터에서 쏟아지는 마석과 부산물도 매력적이지만, 이걸 기반으로 인적 자원을 늘리고 실력을 쌓으면 대형 길드도 꿈이 아니니까.
세계에서 헌터업 인프라가 가장 훌륭한 한국은 역으로 기존 대형 길드가 주도하는 판이 견고하게 짜인 상태. 새로운 대형 길드가 성장할 틈이 비좁았다.
당연히 수많은 헌터들이 옆 나라, 헌터업 인프라가 제대로 짜이지 않은 중국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지금까지 남북중국은 별 메리트가 없었다.
북중국은 헌터 전원이 강제로 군에 소속되어 사적 활동이 불가능했고.
남중국은 헌터 군벌이 수십 개로 쪼개져, 서로를 견제하는 상황이었다.
그 결과 도시를 둘러싼 마경에 안정화 권역은 침식당하고, 어이없게도 마수와 몬스터에 인간이 오히려 밀리고 있었다.
이대로 몇 년만 지났으면 파국이 찾아왔을 수도 있었다.
산둥반도는 인천에서 불과 450km 거리!
바다의 재앙 용용이가 만든 서해 대장벽이 없었으면 벌써 천만 단위의 피난민이 쏟아질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군과 정부 기관은 남북중국 상황을 유심히 살폈고.
국가 헌병대의 김태희 대령도 헌터들이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많은 정보를 알고 있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갑자기 나타나 남중국의 난장판을 해결한 천외천의 각성자.
천검.
그가 나타나며 모든 게 변했다.
서로를 견제하느라 낭비되던 자원이 마수와 몬스터에게 겨눠지고, 도시를 침식하던 마경이 지금 이 순간에도 정리되고 있다.
그 과정에서는 지금 헌터들이 말하는 대로 수백, 수천 개의 사냥터나 던전, 광산 같은 이권이 쏟아지고 있었다.
지금 남중국은 헌터들이 말하는 대로 기회의 땅!
그리고 이건 한국에도 나쁘지 않았다.
피난민에 대한 우려가 사라지고,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아 헌터들이 남중국으로 진출할 수 있었으니까.
문제는 타이밍!
자신이 비행기 표를 구하는 순간, ‘천검’이 남중국 푸젠성에 방문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천검 로또’를 노리는 헌터들이 모여들었다!
‘이 어이없는 우연이라니!’
이번 주 비행기 표는 모조리 매진된 상황!
간신히 구한 일반석도 헌터들로 시장 바닥이나 마찬가지!
게다가 푸젠성에 도착해서도 문제다!
한국에서 천검 로또를 노리고 남중국 푸젠성으로 넘어가는 헌터들만 이 정도다.
중국 현지에서 움직이는 헌터들의 수는 지금 보이는 헌터들의 수십, 수백 배는 될 거다!
비행기 좌석까지 가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그 엄청난 수의 헌터들 사이에서 가짜 최후식, 알바를 찾아야 한다고?!
절로 숨이 컥- 막히고 눈앞이 아득해졌다.
‘이거 찾을 수는 있는 건가?’
자신도 모르게 생각한 순간,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손님. 제 뒤로 따라오세요.”
불쑥 튀어나온 스튜어디스가 빠르게 정리를 시작했다.
“모두 착석하시고 지시에 따라 주세요!”
“짐, 통로에 놓으시면 안 됩니다. 무릎 위에 올려놓으세요.”
“마음대로 좌석 바꾸면 안 됩니다. 제자리로 가세요.”
“다리 통로에 뻗으면 안 됩니다. 다리 접으세요.”
스튜어디스의 움직임을 따라 통로가 열렸다.
‘기회다!’
드르르륵-
김태희 대령은 재빨리 캐리어를 끌고, 그 뒤로 따라붙어 마침내 좌석에 도착했다!
“이얍!”
한껏 발돋움해서 캐리어를 올리고 좌석에 앉는 순간 절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하아-
남중국에 도착해서도 문제지만, 닥치면 어떻게든 될 것이다.
지금은 잠시라도 눈을 붙이고 체력을 회복해야 한다!
바로 눈을 감고 잠들려는 순간, 술 냄새가 확 올라오고 양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드르렁-
왼쪽, 드럼통이 구르는 듯한 코 고는 소리가 들려오고.
“안녕하세요. 젊어 보이시는데 해외 헌터 일은 처음이신가요?”
오른쪽, 반드시 낚겠다는 의지가 얼굴에 쓰인 용역 헌터가 말을 걸었다.
“…….”
김태희 대령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코 고는 소리를 배경으로 목소리가 이어졌다.
드르렁-
“정말 운이 좋으시네요! 천검 아시죠?”
드르렁-
“천검! 바로 그 천검이 지금 푸젠성으로 오고 있어!”
드르렁-
“천검 로또! 사냥터, 던전 광산, 희귀 광물과 약초! 푸젠성에는 엄청난 대박 기회가 널려 있어!”
드르렁-
“하지만 이 기회를 잡기 위해서는 절대 혼자서는 안 돼!”
드르렁-
“지금 우리가 가는 곳은 남중국! 제대로 된 현지 정보와 인맥을 가진 동료가 반드시 필요하다!”
……
코 고는 소리, 훅하고 올라오는 술 냄새를 배경으로 은근슬쩍 말을 놓고 능숙하게 약을 파는 용역 헌터!
오감이 테러를 당하는 상황!
당장이라도 좌우 두 녀석을 두들겨 패고 싶었지만, 지금 자신은 위장 중이다!
‘참을 인, 인인인!’
김태희 대령은 마음으로 외치며 애써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하하- 잘 봐줘서 고마운데, 전 관광 가는 거예요. 천검 로또는 전혀 관심 없답니다.”
용역 헌터는 힐끗 헌터용 전자 태그가 부착된 가방을 보며 피식 웃었다.
“에이. 선수끼리 왜 그래? 이 전자 태그, 화기류에 붙이는 건데? 흐흐흐- 마탄 각성자 맞지?”
슬쩍 주위를 돌아보고 한껏 목소리를 낮춰 말을 잇는다.
“우리 헌터팀은 마탄을 공짜로 제공한다. 정품 마탄이랑 100% 똑같은 마탄을 제공해.”
그야말로 개소리!
라이선스 비용 아끼겠다고 불법으로 만든 불량 마탄이 불발탄이 돼서 훅 가는 헌터가 한두 명이 아니다.
위장 중만 아니면 당장 잡아다가 던전 노역장에 처넣을 개소리를 하고 있었다!
“안 한다니까요! 이 배낭 친구가 부탁해서 가져다주는 게예요! 저 진짜 관광객…….”
“친구? 친구 이름이 뭔데?”
툭 치고 들어오는 외침에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이름.
“알바.”
소스라치게 놀라는 순간.
“알바?”
용역 헌터는 알겠다는 듯 피식 웃으며 계속 약을 팔았다.
“야, 이거 약 파는 거 아냐! 진짜 엄청난 기회야! 아무한테나 이런 제안 안 한다니까? 천검 로또가 눈앞에 뚝 떨어져도 그걸 주우려면 머릿수가 필수야!”
오른쪽의 약 파는 소리는 끝없이 이어지고.
드르르르렁-
왼쪽의 코 고는 소리는 점점 커지고 있다.
그 가운데 김태희 대령이 멍하니 좌우를 바라볼 때 기내 방송이 울려 퍼졌다.
[손님 여러분, 우리 비행기는 이제 이륙하겠습니다. 여러분의 안전을 위해 좌석 벨트를 매셨는지 다시 한번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천문석과 파티마, 김태희 대령을 태운 남중국 푸저우 창러 국제공항행 비행기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일등석의 천문석이 간만에 꿀잠을 자고. 파티마가 와인과 치즈, 땅콩을 무한으로 흡입할 때.
일반석의 김태희 대령은 마음속으로 끝없이 외치고 있었다.
‘참을 인(忍), 인인인인!’
* * *
천문석과 파티마, 김태희 대령을 태운 비행기가 인천 공항에서 출발할 때, 남중국 푸젠성은 들썩이고 있었다.
‘천검이 푸젠성으로 온다!’
이 소식에 군벌 수장에서 헌터까지 모두 난리가 났다.
천검이 마경을 밀어 버리면 생겨날 수백 개의 던전, 균열, 광산, 사냥터!
이 막대한 이권을 노리는 헌터와 용역, 길드들이 푸젠성으로 모여들고.
곧 남중국 연방 총통 자리에 오를 천검에게 줄을 대려는 기업과 대형 길드, 군벌이 움직였다.
헌터와 용역, 자잘한 조직과 길드는 떨어질 떡고물에 정신이 팔렸지만.
대형 길드, 대기업, 다국적 기업, 군벌!
남중국 권력의 핵심은 천검의 호의를 사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수백 개의 사냥터나 광산 같은 이권은 남중국의 절대자가 될 천검의 호의에 비하면 티끌과도 같았기에!
천검이 원하는 건 단 하나, 대환단!
그리고 천문석의 예상대로 광화문 광장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던 남중국 헌터팀의 정보가 이들에게도 전해졌다.
NTM_CHS.
대환단의 소유주가 남중국 푸젠성에 왔다!
천검의 방문이 예정된 지금, 대환단의 소유주가 푸젠성에 올 이유는 하나뿐이다.
대환단을 팔기 위해서!
대형 길드, 대기업, 다국적 기업, 군벌들은 은밀하게 그러나 번개같이 움직이고 있었다.
목적은 하나!
돈과 권력, 무력, 어떤 방법을 사용해서라고 ‘NTM_CHS’를 찾아 대환단을 회수하는 것!
뒷골목 비각성 헌터에서 푸젠성 군벌까지, 푸젠성 전체가 서서히 끓어오를 때.
상해에서 푸젠성으로 내려오는 신흥 조직이 있었다.
상해 삼합회를 밀어 버린, 철검장.
철검장 장주, 단혈철검 주호가 부하들을 끌고 직접 움직이고 있었다.
주호의 목적도 다른 권력자들과 같았다.
‘대환단을 회수해 천검을 만나는 것!’
하지만 주호는 다른 권력자들과 다른 게 하나 있었다.
천검과 이미 안면이 있다는 것!
‘천검 이세기.’
이 이름을 떠올리는 순간, 결코 잊을 수 없는 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고 그와 처음 만난 장소가 떠올랐다.
퐁, 퐁, 퐁-
한겨울 설산에서 벌어진 비무.
그 춥고 배고프고 처절하며, 무엇보다 더러웠던 비무!
그 비무에서 싸운 상대, 금권 대협. 아니, 금권 또라이의 친구가 바로 천검 이세기였다!